캐롤라인 존스턴의 아빠 찾기
줄리아드 피아노 4중주단. 맨 오른쪽이 캐롤라인 존스턴.
1983년 겨울,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강보에 싼 갓난아기가 어느 집 앞에
서 발견됐다. 이 아기는 곧 보육원으로 보내졌고, 엉덩이에 붉은 반점이
있어 홍유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몇 달 뒤 아기는 미국 보스턴의 변호
사 가정으로 입양돼 한국을 떠났다. 한국 아기‘홍유진’은‘캐롤라인 존
스턴’이라는 새 이름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양부모의 사랑은 극진했다. 딸에게 한국을 알려주기 위해 정기적으
로 한국 음식을 먹이고, 한국문화 캠프에 보내기도 했다. 캐롤라인은 밝
고 재능이 많은 아이였다. 4세 때 바이올린을 시작한 캐롤라인은 비올라
로 전공을 바꿔 미국의 명문 줄리아드 음대에 진학했다.
캐롤라인은 2005년 9월, 줄리아드에서 함께 공부한 한국인 유학생
친구들-박정아(피아노), 노마리(바이올린), 옥지수(첼로)-과 함께‘줄리아드
피아노 4중주단’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들
의 공연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바로 캐롤라인의 친부모를 찾는 것.
나는 서울 공연을 며칠 앞두고 캐롤라인을 만났다. 캐롤라인이 입양되기
전 머물렀던 부산의 보육원 앞마당에서 작은 음악회를 끝낸 뒤였다.
“미국으로 입양되기 전에 제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혀 몰
라요. 마치 제 인생에서 커다란 조각이 빠진 듯한 느낌이죠. 가족을 찾으
면 제가 좀더 편안해지고 충만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캐롤라인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동안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에요. 왜 나는 그렇게 버려졌을
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음악이 고통을 이겨내는 데 도움
이 돼주었어요.”
캐롤라인은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나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고 싶다고 했다. 캐롤라인의 양어머니 줄리아 존스턴은 원망과
그리움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딸의 모습에 가슴 아팠던 기억을 털어놓
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인터뷰하는 나까지 콧등이 시큰했다.
“캐롤라인이 꼭 친부모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입양된 아이들은 상
실감과 고독을 느껴요. 이제는 상처가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후회스러워요.
한국에 더 빨리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친구들도 이번에는 캐롤라인이 꼭 부모님을 찾았으면 좋겠다면서
눈물을 보였다. 가장 깊이 고민한 사람은 캐롤라인이었을 테지만, 주변에
서 지켜보는 친구들도 그만큼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캐롤라인은 사실 2001년에도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부산의 보
육원을 찾았고, 자신이 버려졌던 집 주인 아주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그
러나 더 이상의 단서는 없었다. 당시 친부모를 찾지 못한 캐롤라인은 낙담
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캐롤라인이 이번에 다시‘뿌리 찾기 여정’을 시작한 데는 친구들의
힘이 컸다. 캐롤라인의 사연을 알게 된 친구들은 그의 여정에 기꺼이 동행
했다. 한국에서 함께 연주회를 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면, 친부모
를 찾을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나는 이 사연을 8시 뉴스에 소개하면서, 캐롤라인이 꼭 친부모를 만
나기를, 그리고 혹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또다시 절망하지 않기를 기원했
다.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인 입양아가 20만 명에 이르고, 한 해
평균 2천여 명이 해외로 입양된다는 현실, 그즈음 열렸던 입양인 대회에서
친부모를 찾은 사람이2명밖에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도 떠올렸다.
얼마 후, 나는 캐롤라인이 친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
아버지는 부산에 사는 53세의 김모 씨. 작은 회사를 경영하던 그와 여직
원 사이에서 캐롤라인이 태어났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고 회사에
불이 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결별했다고 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새벽,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난 딸을 강보에 싸서 남
의집앞에두고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김씨는 캐롤라인이 부산에서 열었던 부모찾기 음악회 사연을 접하
고, 보육원에 전화해서 자신의 친딸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마
딸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단 하루도 딸을 버린 아버지라는 죄책감에서
놓여난 날이 없었다. 며칠 만에 그는 보육원 측과 연락을 끊었다. 캐롤라
인은 간절한 편지를 보육원에 전달했고, 보육원 관계자는 연락이 안 되는
아버지의 휴대폰에 문자와 음성 메시지를 수십 차례 보내 설득했다.
“제발 만나주세요. 저는 이제 곧 한국을 떠납니다. 저를 만날 수가
없다면 아버지 얼굴을 알 수 있게 사진 한 장만이라도 전해주세요…….”
아버지는 캐롤라인의 이복언니와 함께 부산의 한 호텔에서 딸을 만
났다. 캐롤라인의 출국 이틀 전이었다. 캐롤라인의 양어머니와 보육원 관
계자도참석했다.“ Father !”를외치는캐롤라인앞에서아버지는하염없
이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 내가 죄가 많구나…….”
이들은 이날 밤늦게까지, 그리고 다음날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족의 정을 확인했다. 캐롤라인은 밝은 얼굴로 한국을 떠났다. ‘평생의
한이풀린것같다’면서,‘ 꼭다시오겠다’고아버지와약속했다고한다.
나는 캐롤라인이 출국한 뒤에야 이들의 만남을 전해 들었지만, 마
치 내가 현장에서 지켜본 것처럼 가슴이 아릿해졌다. 딸을 버리는‘선택’
을 하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아버지의 피눈물. 어째서 나를 낳은 부모
는 나를 버렸을까, 왜 나는 한국인이면서 미국인으로 자라야 할까 곱씹으
며 밤을 지새웠을 딸의 상처. 이런 딸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양
어머니의 안타까움. 이제 이들의 고통이 모두 치유되기를 소망했다.
캐롤라인과 친구들이 함께 연주하던 선율이 떠오른다. 캐롤라인이
고통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다는 음악, 부모님에게 바친 그 음악. 이들
의 연주에는 인간의 영혼을 다독이는 희망이, 간절한 그리움이,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끊어질 뻔했던 아버지와 딸의 인연을 다시 이
어주는 끈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연주를 다시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