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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羅蕙錫 (1896~1948)】 "불꽃같은 여인 나혜석 화가의 생애와 사상"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
시대적 배경
1909년 춘곡(春谷)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연구한 것으로 한국의 신미술은 그 막을 올린다. 언제 서양화가 들어왔는지 현재의 연구로서는 분명하지 않는 형편이나 조선왕조 말기(末期)의 회화에 유화의 흔적이 나타나있다.
특히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의 『맹견도(猛犬圖)』같은 서양화에 가까운 그림이 있는 상황으로 보아 19세기에는 이미 서양화풍이 도입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구한말부터 프랑스인 레미옹, 네덜란드인 보스 등에 의해 도입된 서양화가 새로운 조형방법으로 일부층에 자극을 주었으나, 그것은 서구의 기계 문명의 일부로서 신기한 것으로 느꼈을 뿐 화단의 주류에 스며들지는 못했다.
그것은 직관적이고 전반적인 방법 위에 서 있는 동양미술의 전통 속에 있는 미술가들에게는 논리적이고 구축적인 서구의 방법이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어난 신미술이 1919년의 3.1운동에 이르기까지 그 자세의 정립과 방향 설정을 한 기초 작업의 시기이다. 대상을 입체로서 처리하거나 명암법으로 취급하는 새로운 기술의 변혁을 가져왔다.
이는 1909년 춘곡(春谷고희동)의 서양화 연구였다고 본다. 이어서 김관호.나혜석. 김찬영. 이종우 등이 역시 동경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그러나 이들 선구자들의 마음 자세는 풍류적이고 다분히 취향적이었다. 그들은 조선조의 멸망이라는 비극에서 오는 생의 연장 방법으로 예술과 술로서 외국으로 도피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미술이란 생명을 바쳐 탐구하고 창조할 대상이 아니고, 국가의 멸망에서 받은 그들의 상처를 잊어버리고 그들에게 지속시켜 주는 데 의미가 있었다.
아울러 왜곡된 근대 속에서 신미술을 공부한 그들이 불모의 상식에 건조된 한국적 풍토에 새로운 조형의 씨를 이식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역사의 자세가 아직 익숙하지 못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모처럼의 기회를 허송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상파적인 자연을 보고 느낀대로 사생하던 그들의 사실정신과 그 수법은 오랜 한국 미술의 전통을 깨뜨리는 새로운 기풍을 조용하게 조성하였다.
서양화 화풍은 일본이라는 루트를 통해 수용되었기 때문에 일본 화단의 화풍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화단의 형성 또한 총독부가 주관한 선전이라는 관전을 통해 이루어 졌다. 회화사조에 있어서도 프랑스에서는 이미 50년 전에 발생하였던 인상주의가 그 의미조차 알지도 못한 채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서화협회가 창설된 것은 1918년 5월 19일이었다. 한국 최초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는 조석진. 안중식 등 동양화가 9명과 정대유. 김돈희 등 서예가 4명이 발기인이 되어 발족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 속에 있었건만 좀처럼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조선조 선상에 머뭇거렸다. 유독 고희동만이 서양화와 그 기법을 가미한 동양화를 그려 개혁의 의욕을 보였다.
1920년 초반의 서양화단의 또하나 두드러진 현상은 정규익, 강진구를 비롯한 독학파들이 서울화회라는 그룹을 만들고 동인전까지 개최하였다, 이러한 활기찬 분위기는 각종 미술단체들의 끊임없는 등장과 매스컴을 통한 비평활동 그리고 사설 미술교육기관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20년에 창간된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그리고 미술 전문 잡지인 『신미술』 등의 등장은 이 시기 미술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대중전달매체를 통해 발표했던 조형론과 비평활동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한편 동경을 중심한 일본에서 미술을 전공한 작가들이 비교적 넓은 시야에서 세계를 호흡하면서 한국의 근대 미술을 그들의 감각을 통해 이식하였다. 그들은 개인으로는 二科展. 신제작파. 자유미전. 독립전 등 일본의 소위 모던 아트 집단에 참여하였으나, 백우회(白牛會)같은 집단으로 뭉치기도 했다.
이종우. 나혜석. 백남순같은 몇몇 미술가가 구미 각국으로 미술수업에 나섰는데, 1925년 파리로 떠난 이종우가 1927년 살롱 도톤느展에 입선하여 외국 진출의 길을 터놓았다.
1930년 전후부터 받아들인 서구의 미술사조는 구본웅. 이중섭등 야수파적인 경향과 김환기. 주 경. 유영국.이규상등 추상파적인 경향의 2대 조류였는데, 1932년 주로 글로 소개된 초현실파와 입체파계의 작품은 정착되지 못하였다. 아울러 표현파적인 주관인 강렬한 미술사조가 산발적으로 시도되었다.
1936년 15회나 계속되었던 서화협회전이 일제관헌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1941년에는 목일회(牧日會)가 역시 강제 해산되고 성전(聖戰)미술 이니 하여 전시체제로 전환시켜 모든 자유로운 미술 활동은 중지되어 그들은 전쟁의 제물이 되었다.
그러기에 1938년 이후에는 정상적인 미술 운동은 중단되고 한국의 근대 미술은 무거운 암운에 뒤덮이고 만다. 1941년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만들어 한국인 미술가들을 동원시킨 단광회(丹光會)는 그러한 목적을 갖고 결성된 것이다.
이 무렵 1922년에 시작된 선전(鮮展)은 1944년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자 22회로 끝을 맺었다. 이 선전은 일제의 식민정책을 근간으로 日本化된 미술문화를 강요했으나, 그것은 국내에서 자라는 젊은 미술가들에게는 비약의 발판이었다.
1945년 이전 우리 서양화가들은 일반 사회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고독하고 사회적으로 겉돌 수밖에 없었지만 개개인의 의욕과 집단적 활동은 시일이 흐름에 따라 차차 활기를 띄고 있었다.
1920년대 전반에 이르는 기간에 있었던 서양화 개인전과 그룹전을 살펴보면 개인전에 나혜석전(1921), 정규익전(1924), 강신호전(1927, 유작), 이종우전(1928, 파리에서 귀국전), 두번째 나혜석전(1929, 구미여행에서의 귀국전), 임용련·백남순부부전(1930, 파리에서의 귀국전)이 있고, 그룹전으로 고려서화전과 서울 화회전, 녹향회전,동미회전,소월회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나혜석의 생애
한국 근대사의 여류화가로서 선각자이기에 십자가를 져야 했던, 나혜석의 생애는 불행했다. - 그녀는 “생활의 구속과 세속적 의무를 싫어하고 인생의 의미를 예술과 자유에서 느낀 자유자”라고 한다. 그녀의 생의 전반은 그 자신과 예술의 세계를 마음껏 누렸으나 이혼후의 생활은 운명에 지고 말았다.
그러기에 본장에서는 생애를 유년기에서는 출생과 성장 과정을, 청년기는 동경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왕성한 작품활동 및 결혼 생활을 그리고 장년기에는 해외여행과 이혼 그리고 생의 마감으로 구분지어 보았다.
1) 유년기(1896∼1913)
이 땅의 근대문화(개창기)의 다방면에 많은 재능을 지녔고 앞선 생각과 행동을 보인 탓으로 사회에서 외면했던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1896년 4월 28일 수원군의 명문가에서 출생한 그녀는, 진보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증조부가 조선시대에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아버지 나기정(羅基貞)도 한일합방이 있기 전 사법관을 거쳐 경기도 용인과 시흥군수를 역임했고, 시대사조에 적극 순응하여 4남매 모두 개화교육을 받았다. 나혜석은 여동생과 함께 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며 수원 삼일여학교를 마치고 9월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進明女子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한다.
그녀가 태어난 해인 1896년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교육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시기이다. 조선 총독부에서도 기독교를 받아들이자, 선교사에 의해서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바로 이 시기를 우리 나라 여성교육의 초창기라고 볼 수 있다.
1913년 나혜석은 우수한 성적으로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특히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림과의 직접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당시 일본 동경에 유학중이면서 새로운 역사의 시대를 인식하고, 서양문화의 수용에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던 그녀의 오빠 경석(景錫)의 배려이다.
그녀가 18세되던 1913년에 진명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한국인으로서는 네 번째, 여자로서는 최초로 서양화를 전공하게 된다. 이때의 매일신보를 보면 이렇다.
경기도 용인군 김양석, 나경석씨의 영향으로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의 양화과에서 규수로 어려서부터 기이한 필재가 당당한 자부를 엄수히 여기고 지금도 그 학교에서 학업성적이 또한 내지 여자보다도 더 빼어난 다하니 규수의 정도를 위하여 진실로 하례할 일이로다.
『매일신보』 1914. 4. 17
이것으로 유학 당시에도 그녀의 역량을 발휘되었다는 것이 엿보인다. 위의 매일신보 글내용에 나혜석의 부친이 나경석이라고 했는데, 그의 부친이 아니라 오빠이다. 같은 신문 4월 9일자에「여자유학생의 특색」이라고 하여 조선 유학생 30명 중 나혜석이 제일 뛰어나다고 적혀 있다.
2) 청년기(1914∼1920)
1913년 동경으로 건너간 그녀는 동경여자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1918년 졸업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가 된다. 나혜석은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 선구적 사고와 뚜렷한 개성을 표출하며, 최초의 사회적 발언으로 근대적 여권을 주장하는「이상적 부인(理想的 婦人)」을 기고한다.
1915년에는 동경에서 여성 유학생들의 모임으로 조선여자 친목회를 조직하여 주동하게 되며, 평탄치 않은 학창 생활이 시작된다. 1915년 그녀는 그 시대의 격류에 있었다. 이 시기에 나혜석은 폐쇄적 사회로부터 개방적 세계에로 또 사상적인 면에 많은 진보가 있게 된다.
그러나 나혜석이 퇴폐주의를 받아들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3·1운동에 참가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1917년 이후 『학지광』에 역시 근대적 여권론인 「잡감(雜感)」을 정월(晶月)이라는 아호로 기고하는 등, 여성의 지위 향상을 부르짖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렇듯 나혜석은 문학을 비롯한 글재주에도 비범함을 보여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이즈음 장차 결혼을 약속했던 애인 최승구(崔承九)가 1917년 폐결핵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
1918년 동경여자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함흥 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에서 교편생활을 하게 되었고, 국내에서도 많은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우리나라 여성교육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나혜석은 1919년 민족해방운동인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후 여성해방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의 예술적 의욕이 단순한 취미나 감상이 아닌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인 것이다.
정신여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나혜석은 교원, 화가, 문필가, 여성해방을 위한 사회생활, 거기에다 독립운동에까지 가담하게 되었다.
이듬해 3·1운동이 터지고 당시의 엘리트 신여성들이었던 신마실라(申麻實羅), 박인덕(朴仁德), 신준녀(申俊勵), 김활란(金活蘭), 황애시덕(黃愛施德), 김마리아(金瑪利亞) 등과 함께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학생봉기의 주동으로 거사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결국 군경에 체포되어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의 예술활동의 핵심은 곧 민족해방, 여성해방의 예술적 표현이었다. 나혜석은 최승구가 죽은 후 김우영의 열렬한 구애를 받는다. 그러나 김우영이 아내와 사별한 직후인 데다 나이도 10살이나 많고, 소생도 있어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1920년 4월 10일 서울 정동교회
그러나 나혜석이 1919년 23세 때 3·1운동으로 수개월 투옥되었을 때 변호사 김우영이 법정변호에 나선 것이 계기가 되어 1920년 4월 16일 정동교회에서 김우영과 결혼하게 되었고 그해 장녀 나열이 출생하였다.
결혼한 이래 그녀는 더욱 적극적인 문필활동과 작품 제작에 열중하였는데, 당시 『폐허(廢墟)』창립동인으로 문학활동과 일간지(日刊紙)를 통한 광범위한 계몽사상의 전개는 오늘날에도 근대문학 사상적인 면에서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3) 장년기(1921∼1948)
화실의 나혜석
1921년 3월 19일부터 2일간 첫 개인전은 평양에서의 김관호(金觀鎬) 개인전에 이은,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서양화전인 동시에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이었다. 당시의 신문들은 이 전시회를 ‘장안을 들끓게 했던 신진 여류(女流)의 기염’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시 기간이래야 불과 이틀 서울에서 있는 이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첫날에 몰린 관람객 수만 해도 천여 명에 달했으며 둘째 날에는 안내조차 포기할 정도로 사람의 물결을 이루었다.
한편, 「신 여자(新女子)」 4호에 김우영과의 사랑의 일기인 「4년 중의 일기 중에서」를 기고하고, 『동아일보』에 「회화(繪畵)와 조선여자(朝鮮女子)」, 「부인의복(婦人衣服) 개량문제(改良問題)-김원주(金元周)형의 의견에 대하여」등을 기고하는 등 진보적 사상의 연마도 멈추지 않았다.
그 무렵 일본은 3·1운동의 민족적 항거에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깨닫고 소위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바꾸는 정책의 일부로 1922년 조선미술전시회라는 것을 창설하였다. 나혜석은 연속 출품하였고 1922년 제1회 선전에서 3등상을 수상하였다.
1923년 나혜석은 일본 외무성관리인 남편 김우영을 따라 만주 안동에 거주하면서 봉천 시절 만주의 풍물을 주제로 한 많은 풍경화들을 국내의 선전에 출품하였다.
그 해 제2회 선전에 출품한 <봉황성(鳳凰成)의 남문>과 <봉황산>에는 만주의 전통적 중국 건물을 묘사한 것으로 새로운 조형감각을 가지고 터치기법과 구도상의 배려, 그리고 표현에 있어서 서양화다운 표현 기량을 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1924년 9월에 서양화가 그룹인 ‘고려미술회’ 동인이 되는데, 이때 동인으로 강진구, 김명화, 정규익, 이숙종 등이 있고, 선전 제6회(1927년)에 출품한 풍경은 김우영의 본가에 잠깐 다녀온 것으로 추측되는 풍경이며, 1926년에는 장남 진(辰)을 출산한다.
1927년 6월 일본 외무성의 특전으로 남편과 함께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모스크바를 경유 세계일주 여행을 하게 된다. 이때 나혜석은 파리에서 8개월간 머물면서 화가로서 다각적인 견문을 넓히는 동시에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새 바람을 일으킨 20세기 미술경향을 직접 접하게 된다.
그녀는 그곳에서 야수파 계열의 진보적 화가가 지도하는 연구소에 다니며 자신의 회화에 진취적인 전환을 시도하는 한편, 구미 각국을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작업을 위한 사생도 하게 된다. 이때 중추원 참의(慘議)의 외교상으로 파리에 와있었고, 국내에서는 친일파적인 인물로서 그 세력이 당당한 최린(崔麟)과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1929년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돌아 귀국 길에 오르는 도중에, 동경에서 이과전(二科展)에 <정원>(도26)을 출품해 입선을 하였다.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3월에 귀국, 수원 불교 포교당에서 여행중 작품으로 귀국 개인전을 개최했다.
1930년 한국에 먼저 와 있던 남편 김우영은 최린과의 염문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결정적인 파멸은 최린에게 써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친구의 입을 통해 남편의 귀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나혜석은 자녀들을 위해 이혼만은 하지 말자고 했지만 김우영의 태도는 단호했다.
1931년 봄 ‘이혼장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발하겠다’는 남편의 위협이 있은 후에 더이상의 이해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고모는 화가로서 그리고 사회 비판력과 지성을 갖춘 한 여성으로서 자신을 파멸로 몰아 넣으려는 남성 위주의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에 도전하고 저항하며 자유의 몸이 됐죠. 이혼 직전에 네 자녀와 함께 가족 사진을 찍었는데 이때 아이들이 고생할 것을 우려해 동반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퀸(Queen)』 나희균 대담기사 p.166 서울출판사, 1995. 3월호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기 전에 3남 1녀를 두었다. 이 중 아들 한 명은 일찍 죽고 나머지 자녀들이 살아 있으나 어머니의 ‘과거’ 때문에 일체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의 김우영과 나혜석
이 세계여행으로 그녀 자신의 내외적 성숙이 이루어졌으나, 최린과의 접촉 사실이 새삼 문제가 되어 1931년 봄, 35세의 나이로 김우영과 이혼을 하게 되며 나혜석은 사회 비판력과 지성을 갖춘 한 여성으로서 남성위주의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에 도전하고 저항하며 자유의 몸으로 독자적인 삶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생각이 앞서 있었고 자신의 판단력에 너무 자신을 갖고 세상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개방론자이었다. 이런 생각이 당시의 도덕 관념에서 용납되기는 어려웠다.
해외 체류 기간 중에 사생한 <스페인 국경>(도21), <스페인 해수욕장>(도22)등의 풍경화는 그 섬세한 필선(筆線),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 등으로 그가 새로운 예술적 기법에 눈떠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파리에서 귀국한 후에도 계속해서 선전에 작품을 보내어 1932년 11회까지 출품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대상을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파악하려는 변화가 다분히 엿보였다. 이혼 후 몇 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초라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참여하였고, 선각자적인 사상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사조에 관심을 가지고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혜석은 정신적 갈등과 참을 수 없는 고독, 그리고 갈수록 약해지는 마음을 독백하는 글들을 계속 발표했다.
1932년 선전 제1회 <금강산 만상정>(도31) 등을 출품하고 세계 일주기행문 「구미유기」를 『삼천리』지에 연재하기도 하고, 1933년 37세때는 미술연구소 ‘여자미술학사’를 개설 운영하고 『신동아』,『삼천리』등에 다수의 수상문, 기행문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4년에『삼천리』지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다음해 1935년 39세 때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소품전을 열었으나 그녀의 이혼사건을 아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관심 속에 실패했고 결국 그녀는 정신적으로 더욱 좌절하였다.
제10회 선전에서의 출품작이 특선상을 받게 되어 일말의 희망의 빛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1932년 11회까지 계속 작품을 출품하였다. 1933년까지 생활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예술에 인생을 걸고 자신의 운명을 딛고 일어서려는 고투의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사회의 냉소와 무관심 속에 그녀는 날이 갈수록 정신적 좌절을 경험해 간다.
1934년 남성위주의 사회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전 남편에게 보내는 「이혼고백서」를 발표하여 근대 여성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사회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 수덕사로 김일엽(金一葉)을 찾아가 자신도 스님이 되길 원했지만 그 뜻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덕사에 있으면서 스님들의 생활에 회의를 느껴 해인사에서 내려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시절의 스승 고바야시만꼬(小林萬吾)를 찾아 다시 사사받았다.
1933년 이후 나혜석의 작품은 선전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많은 스케치를 남기긴 하나 이미 재기의 빛은 퇴색하고 있었다. 1935년 서울 서린동에 있던 ‘조선관(朝鮮館)’ 전시장에서 생활비를 얻기 위해 근작 소품전을 열지만 그 전시회는 세인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나게 되고 나혜석의 사회활동과 작품활동도 사실상 종말을 맞게 된다.
말년에는 극도의 신경쇠약과 한계를 넘는 고독, 참을 수 없는 마음의 아픔으로 언어장애와 수족의 놀림마저 부자유스럽게 되었지만 끝내 그녀는 자기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정생활의 파탄과 사회에서의 고립이 그녀의 필연적인 내면적 갈등과 헤어날 수 없는 고독을 갖게 했는데, 그녀의 사회생활에 비해 회화작품에서는 잘 반영되지 않고 있다.
그 후 1937년 41세로 서울 종로구 청운 양로원에 거처를 잡게 되었다. 반신불수의 몸은 더욱 그녀의 말년을 비참하게 했다. 그러나 어디론가 또 떠났다. 그녀의 말년 10여 년간의 행적은 정밀하게 추적하기가 불가능하다.
나혜석의 임종에는 아무도 입회하지 않았다. 1949년 3월 14일 관보는 1948년 12월 10일 서울시립자제병원에서 ‘나혜석’이라는 이름의 53세 가량의 여자 행려병 환자가 소지품이 없는 상태에서 병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상적 배경
예술적으로 보면 일본의 근대적 최초의 예술운동은, 청일전쟁 직후인 명치(明治) 30년인 1897년에 시작된 명치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명치낭만주의는 유럽 근대화의 선구가 된 낭만주의와는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일본적인 봉건제에 대한 자아의식의 주장을 주로 남녀간의 연애감정의 표현에서 빌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었다.
명치시대 중반의 자아의식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변해 가는 데에 대한 고양감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국권의 강대화 혹은 제도화에 따라 개인이 억압되어 가는 데에 대한 저항감이 고조되지 않을 수 없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같은 모순이 어느 의미에서 정점에 달하고, 근대 일본 문화의 하나의 큰 전환기가 된 것이 명치(明治) 37∼38년(1904∼1905년)의 노일전쟁이었다.
그것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다소 우위의 상태로 이끌고,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근대국가로서의 대체적인 체제를 정비하는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변화에 호응하려 국내적으로는 점차 정서적인 자아의식에서 탈피하여 사상적인 기반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져 갔다.
19세기말의 일본은 명치 낭만주의의 대두를 예감케 하는 새로운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시대적인 추세인 자아에 대한 의식이 문학의 세계에서 연애 감정의 표현을 테마로 했다.
명치 말기부터 대정시대(大正時代, 1912∼1926) 전반을 통해서 일본은 근대 문명의 개화기였다. 이때에 매력적인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창조되어 갔다.
일본의 미술은 후지시마 다케지(勝鳥式二)와 같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의 조교수이면서 잡지 『명성』의 표지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문학과 밀접했다. 『명성』은 스스로를 ‘문학미술 전문잡지’라 하고 ‘백마회’를 중심으로 기사, 평론에도 적극적이었다.
19세기 후반에 파리는 인상파풍의 작품이 등장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던 당시의 예술 애호가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게 되고 유럽 역사와 풍토에 의해서 배양된 하나의 가치 개념으로 근대 회화의 원류로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은 인상파의 정신, 다시 말해 근대적 자아의 뒷받침으로 근대 회화사에 있어서 풍부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명치시대가 막 끝나려는 무렵, 1910년 한국 최초의 양화가인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외광파의 한계(限界)를 극복하고 일본 양화의 독자성을 흭득한 후지시마 다케지에게서 양화 수업을 받게 되고 프랑스에서부터 연결되는 일본 특유의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10년대에 일본에서 외광파 계열의 그림을 접한 한국 학생들은, 스승 후지시마 다케지의 화풍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들이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이다.
명치시대가 막 끝나는 때인 1913년에 나혜석이 일본에 도착한다. 나혜석의 어린 시절 한국은 남존여비 사상과 유교적인 사상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배적이었다. 나혜석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한국과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유럽의 산업혁명의 성공을 모방했고, 군국주의면서 개인적인 탐미주의가 만연하고 감각주의와 세기말적인 퇴폐적인 요소가 있었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화가의 기초를 닦던 나혜석은 장래 미술가로서의 토대를 굳건히 닦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유학사회에서 화제의 표적이었다.
1913년 4월 15일 서양화 선과(選科) 보통과에 입학했다. 학적부에 의하면 후견인이 오빠 경석으로 되어 있었으며, 거주지는(神田區)에 한 지기(知己)의 댁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주소지를 옮겼다고 되어 있다.
1914년에는 2학년으로 진학했고 당시 미술학교는 3학기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나혜석은 제 3학기의 수업일수 59일 가운데 59일이 결석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1914년은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이 일어난 때이다. 러일전쟁 직후 제국 러시아가 일본에 의해 무너졌고,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면서 그 여파가 일본사회에 크게 작용했다. 그때 동경의 지식인들은 러시아의 절대 왕조가 무너지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에서 유교적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총명한 나혜석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그 시기가 1914년 후반기인 것이다. 나혜석이 동경에서 돌아 올 때는 신문학사조가 불어 신학문을 했다는 사람은 누구나 문학과 관계를 맺고 낭만주의에 젖어있을 때이다.
나혜석은 『폐허』의 동인이 되었고 신문, 잡지 등에 글을 발표하였으며 화가로 활동하면서 동경에 머물러 있었고, 또 한국으로 돌아와 문인들과 교제를 넓혔다. 『폐허』가 1920년 창간될 때 동인이 되어 활동했다. 이들의 주장과 사상은 다음과 같다.
새 시대가 왔다. 새 사람의 부르짖음이 닐 간다. 들어라. 여기에 한 부르짖음과 새 사조와 새 감정에 살라고 하는 우리의 적은 부르짖음이나마 쓸쓸한 오랜 암흑의 긴 밤의 빛이 여명의 첫볏 아래에 냉량(冷凉)한 빈 들 우에 노았다. …중략… 우리의 것 높은 『폐허』에 새싹을 심어서 새 꽃을 피우게 하고 한결 가치 향을 맘껏 타보자 하는 것이다.
『폐허(廢墟)』제1권 p.122∼123, 1920. 7
옛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앞날을 내다보자는 의미의 『폐허』라는 제목은 독일 시인 실레르의 “옛 것은 멸하고 시대는 변하였다. 내 생명은 ‘폐허’로부터 온다.”라는 시구에서 취한 것으로 되어있다. 동인들은 각기 염상섭이 사실주의, 오상순이 허무주의적인데 비해서 나혜석은 낭만적인 성향이 뚜렷하였다.
혜석이『폐허』에 리얼리즘 및 자연주의 이론을 도입, 「냇물」과 「모래」를 형상화시킨 두 편의 시를 발표했다. 약 10년 후1935년도에 「앗겨 무엇하리 이 청춘을」에서도 같은 양상의 시를 발표한다.
제비와도 갓고/
앵무와도 갓고/
공작과도 갓다/
나이먹으면/
주름살이 잡히고/
빗갈이 검어지고/머리가 희어지고/ …중략…
청춘을 헛되이 보내였든들/
앗기지 아닐배 아니나/
빈틈없이 이용한 청춘을/
앗길 무엇이 잇스며
-「앗겨 무엇하리 이 청춘을」부분
당시 사조는 낭만·유머와 감상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났고, 그것은 문학뿐 아니라 공통적인 흐름이었다. 나혜석은 여성해방과 인간 존재를 내포하고 있는 시 「노라」(1924)를 썼는데 문인으로서 그녀의 시는 단순한 낭만만이 아니라, 여성과 민족의 해방을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때까지의 관념적인 시에서 벗어났다.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였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다고/
높은 장벽(障壁)을 열고/
깊은 규문(閨門)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나는 사람이로세/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천부(天賦)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小女)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 날의 광명이 비첬네.
-「노라」전문
여기서 인간적인 면에 충실하고 제도와 위선과 싸우려는 것이 엿보인다. 그의 혁명가적 기질은 낡은 윤리에 도전하고 봉건적인 사회제도에 대한 생활혁명은 그의 문학의 중심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작가의 기질은 대부분이 견실한 윤리가 아닐 수 없다.
노라가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개체로서 먼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깨우치게 하는 사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 때가 1924년이었다. 「노라」는 번역서의 서시(序詩)로서 나혜석의 개인 이미지에 의해 쓰여진 건 아니라 「노라」를 씀으로 동일(同一)한 자아적 「노라」가 그 내면에 살아 자신의 인생관의 예시적 방향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세인의 혹평에도 의지를 꺾지 않았던 나혜석의 당위성에 연유하며, 그 의지는 그의 인간적인 해방이며 곧 그것은 예술적 몰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24년에 『신여성』 7호에 「만주의 여름」이라는 글을 안동현에 있을 때의 느낌을 썼고, 11호에서 「시모(媤母)와 계모(繼母)」라는 글을 썼고, 「나를 잊지 않는 행복(幸福)」이라는 글 등을 썼다. 『개벽』 7월호(1924)에 「1년만에 본 경성의 잡감」을 썼고, 또 같은 호에 음악회를 듣고 나서의 느낌을 쓰기도 했다.
…김연환씨의 쏘나타는 인제 고만 했으면 좋겠다. 이따금 가는 내 귀에도 인제는 싫증이 난다. 그 같이 아무 생각도 없고 표정도 없이 눈만 보고 손만 놀리려면 우리 같은 사람도 할 것 같다. 좀 달리 공부할 만한 재료가 그다지도 없는지 앉아서 듣기에 하도 유명한 성악가 윤심덕씨이기에 마침 기회가 있어 들어간 것이다. 음량은 충분하나, 쏘프라노 음이 아니요 엘토 음이었다. 다른 때 독창한 것도 음악이란 것보다 창가이었다. …중략… 홍영후(洪永厚)씨의 빠이롱닝은 매년 듣든 때나 지금이나 기술의 진보가 별로 나을 것이 없이 들렸다.
미숙한 평같이 보일 지 모르나 이렇게 음악회나 전시회를 보고 듣고 그 평을 쓰기도 하는 다각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다. 음악, 미술, 문학 모든 분야에 박식하였다. 1933년 『신가정』1월호에 보면 그의 글을 살펴보자.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꾹꾹 참으며 형식에 얽매여 산 것이다. …중략… 나는 어린애가 되고 처녀가 되고 사람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저 한 것이다. 마음뿐 아니라, 환경이 그리 만들고 사실이 그리 만들었다. …중략… 환경의 지배를 받기 싫은 것이 내 고집이란 것을 말해두지, 그럴 때마다 인생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애. 나의 10년 생활 중에서 계급과 빈부와 귀천의 굴곡이 가로 버려질리고 세로 흘러 나는 웃기고 혹 울리고 즐겁게 또는 외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재제케 하는 것은 오직, 대개 깊이 뿌리 박힌 예술심과 재제심이다.
이 글은 이혼 후의 글이며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고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당시 사회 여러 가지 여건이 나혜석의 행동을 수용하지 못했으므로 작업 안에서 자유정신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유를 향하는 본성이 행동과 작품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무엇하나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내 가정의 기분이 일신(一新)하고 일변(一變)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 중심으로 가정을 이끌어 나갔고 인간은 오직 ‘나’라는 개인적인 사실주의(寫實主義)에서만이 가능하다고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무엇이 가장 소중하느냐는 앙케이트에서 ‘내몸이 제일 소중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의 아내, 어머니-그런 것이 나 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로 전해지는 그녀의 말에서도 또한 더 솔직한, 그녀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연애를 하는 순간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거야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사람같이 바보는 없을거야…
이렇게 명백한 자기 주장을 한 나혜석은 그 인생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이라고 부르짖었으나 인간적 고통을 극기하는 예술가적 진실은 그의 작품 속에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문학가로서의 나혜석은 미술가로서의 나혜석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해주었고 선각자 또는 사회개량가로서의 사고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 같다. 나혜석은 남편과 이혼한 후 장문의 「이혼 고백서」(1934년)를 공개한다.
나는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을 아니하렵니다. …중략…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 즉 최린을 사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죠. 본 남편이나 본처를 어찌하지 않는 범위내의 행동은 죄도 아니요. 실수도 아니며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혜석의 이 고백은 그녀의 연애론이다. 또다른 시기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남자는 기생방에 가도 되는데 여자는 왜 연애를 하면 안되냐’는 거였다. 이혼을 한 직후 나혜석은 분노의 심정을 이렇게 토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성은 평시 무사할 때는 여성이 바치는 애정을 향락하면서 한번 체면이라는 형식적 속박을 받으면 방자하고 향락하던 자가 몸을 돌이켜 군자가 되어 점잔 빼는 비겁자요, 횡포자가 아닌가…
이혼할 때도 ‘내 개성을 위하여, 일반 여성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이었다. 나혜석이 쓴 「이혼고백서」는 그녀를 파멸시킨 것이 김우영이라기보다는 남성위주의 사회제도, 그들에게만 유리한 법률, 그리고 여권 부재의 사회인습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나혜석은 1935년 『삼천리』2월호에 기고한 「신생활에 들면서」에서 아이들에게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
…4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그 이후로도 나혜석은 정신적 갈등과 참을 수 없는 고독, 그리고 갈수록 약해지는 마음을 독백하는 글들을 계속 발표했다. 그녀의 일련의 글은 38년을 마지막 연도로 볼 수 없었는데 나혜석의 연애는 인생의 최고 이상을 찾기 위한 목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그 목적은 영육이 합한 건전한 연애에 있다고 이상주의적인 사고(思考)에 귀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혜석의 삶은 강한 자아적 개인성으로 일관되어 왔다고 해야 하며 그러한 개인성이 그녀에게 고독한 말년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생활양식이 넘어 단조해져서 마치 길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닥친 모양(模樣)으로 가삼이 답소하여지고 압히 캄캄해질때면 고만 모든 것을 버리고 심산계곡으로 드러가 보고도 싶어요. …하략…
1927년 「예술가의 생활」에서 이렇게 밝힌 그녀는 그녀의 소망이 만년에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으나, 나혜석은 마침내 현실에서 완전한 자아를 구축하지 못한 채 자아를 허무하게 도피시키고만 셈이다. 염상섭(廉想涉)은 「추도(追悼)」에서 병중의 나혜석을 방문한 기자의 인상기를 보면, 이미 한 발을 못 쓰고 목젖에 경련이 일어나고 법당 근처에서 넘어져 기동도 못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나혜석의 이러한 비극성은 1920년대의 퇴폐적이고 쾌락주의적인 기풍의 소산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나 그의 인간적 패배가 결코 화가로서 시인으로서의 패배는 아니며 결국 그 생애의 불행은 자기 스스로 개척한 삶의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생활의 목표로 삼았던 여성 해방과 개인적 자유가 선각자적 위치에서 불행을 면치 못하게 했다. 이 인간적 패배가 과연 개인적인 모랄에 그 죄과를 두느냐, 아니면 그 시대의 남성들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상은 심리적·사회적 요구에 의해 이미 그 감정, 태도, 행동의 방향이 정해져 있어 이 감정, 태도, 행위 자체가 소위 불행의 원인이 되어졌는지도 모른다.
나혜석의 성장과정, 인간적인 결점, 시대의 외부적 환경, 문학을 관능의 철저한 개방 장소로 생각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그녀의 어두운 인생 행로에 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근대사와 선각자에게 따르는 희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혜석의 작품 연구
본고에서는 도판과 현존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초기작품은 동경에서의 인상주의 미술을 익히고 돌아와 한국여류최초의 첫 개인전까지를 초기작품으로 두었고, 중기작품은 선전 6회까지의 작품, 그리고 말기작품은 도불 이후의 작품을 3단계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살펴보고 그녀의 작품에서 보여진 양식인 한국 근대서양화에 미친 인상주의 미술사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1) 초기 작품(1920년 이전의 작품 세계)
나혜석의 선각자적인 성격이 아직 우리 나라의 미개척분야인 서양화에 많은 관심을 갖게 했다.
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개화정신과 넉넉한 경제적 뒷받침, 그리고 오빠 경석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926년 5월에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혜석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어디 있냐고요? 그것은 실로 간단합니다. 어려서부터 무엇을 보면 연필로 곧 그리고 싶었고 학교에서도 반 중에서 내가 제일 도화(圖畵)를 잘 그린다는 선생(先生)의 칭찬을 받았으며, 학교 뒤뜰에 있는 꽃을 그려다가 선생을 주면 선생이 퍽 칭찬을 하고 잘 그렸다고 그래요. 이러한 것이 동기(動機)가 되었다고 할까요? 그러나 그림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조차 몰랐는데 내 둘째 오라버니가 여학교를 마쳤을 때에 그것을 배우라고 미술학교에 입학을 시켜주었어요.
-이구열 著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p.32
나혜석은 미술학교에서 인상파(印象派) 아류작가(亞流作家)인 소림만오(小林萬吾)등의 교수들로부터의 회화수업과 근대적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이 그녀를 인상주의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었다.
1918년 6월 고희동에 의해 우리 나라 최초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가 청설되는데 김창섭(金昌燮), 나혜석(羅惠析), 이종우(李鐘禹), 윤희순(尹喜淳), 김중현(金重鉉), 박광진(朴廣鎭), 장발(張勃), 이동훈(李東勳), 오지호(吳之湖) 등이 서화협회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양화단(洋畵壇)이 형성되었다.
나혜석은 귀국 후에도 3∼4년간 작품활동을 표면화하지 않았으나 개인화실에서 창작에 열중하였으며, 회화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1921년 2월에는 ‘조선여자는 그림 그릴만한 재주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발언과 더불어 그녀의 개인전 계획을 피력하였으며 조선여성(朝鮮女性)들에게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회화(繪畵)와 조선여자(朝鮮女子)」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1921년 3월 19일부터 이틀간 서울 경성일보(京城日報) ‘내청각(來靑閣)’ (현 대한공론사 자리) 에서 풍경화 중심의 70여점 작품을 가지고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이고, 한국여류 최초의 유화 개인전을 갖는다. 이것은 한국근대미술사에 기록될 하나의 이정표(里程標)와 같은 사건이다.
이때의 개인전에 대해서는 각 신문사들이 연일 대서특필하였으며 급우생(及愚生)이라는 익명(匿名)이 「나정월 여사(羅晶月女史)의 작품전람회(作品展覽會)를 관(觀)하고」라는 제목의 한국 최초의 전람회 평을 동아일보 지상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의 성격과 경향에 대한 요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필단(筆端)의 정미(精美)한 세(勢)를 생(生)케 함이니 다시 말하면 사생(寫生) 당시(當時)의 기분을 실(失)치 말라 함이오, 또 색채를 좀더 잘 조화하라 함이니, 즉 명암과 농담을 정확히 함이로다…
-『동아일보』 1921. 3. 23
위 글을 통해서 볼 때 터치 분할에 의한 방향(方向)없는 필치(筆致), 색채분할, 그 결과 이루어지는 격렬한 명암 대조의 소멸(消滅), 색상과 색조에 의한 원근법 표현 등 화법을 특성으로 하는 인상주의적인 그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러 신문의 평을 종합해 보면 당시 전람회 자체만을 주로 논했을 뿐 색, 구도를 비롯 그림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었다. 물론 일반인들의 시각은 작품 자체보다는 서양화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주시했던 것이다.
그녀의 개인전은 종래의 전통적인 서화(書畵)가 으뜸이었던 풍토 위에 양화(洋畵)의 기법을 도입한 계기가 되고, 일반인들의 사고에 서구적인 화풍을 받아들이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대에 찍은 판화 작품으로 친구인 <김일엽의 하루>는 4개의 판으로 나누어 하루의 일과를 표현한 것으로, 세련된 판화의 기법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회화를 판화로 찍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첫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현재 도판만으로 전하는 <풍경>은 당시 그녀의 뛰어난 회화적 기량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오솔길이 비스듬히 나 있는 야산을 그린 이 작품에는 수목의 형태를 충실히 묘사하려는 사실적인 태도가 역력하지만, 빠르고도 격렬한 터치로 그려진 중경(中景)의 나무와 대담한 접사구도 수법 등에서는 그녀의 인상주의적 시각성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같은 개인전에서 볼 수 있는 <정물>은 실내의 약한 빛속에 있는 국화의 모습에서 은근한 흰 빛의 진동을 포착하여 화폭에 옮긴 것으로 색채의 대비를 보다 강하게 시도하고 있으며 짧게 찍어 바른 터치와 밝은 화면이 인상적이다.
개인전이 끝난 4월에는 민족 사회의 첫 ‘서화협회전람회(약칭 협전)’가 열렸는데 서양화로는 고희동이 2점, 나혜석이 2점 도합 4점뿐이었으나 양화(洋畵)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좋은 기회였다.
2) 중기 작품(1920∼30년(선전6회까지)의 작품 세계)
1921년 봄 한국인 서양화가의 서울 최초 정식 개인전이 나혜석에 의해 열리고, 신문들은 전람회 광경을 대대적으로 일반인에게 알리고 계몽하는 시사성 있는 기획물로 만들었다. 개인전에 이어 그녀는 협전과 선전에서 서양화부의 홍일점으로 최대의 각광을 받고 사회 계몽을 위한 문필활동에서도 놀라운 재치와 지성을 발휘하였다.
제 1회 개인전 당시 한국은 3.1운동 이후 내면적인 사상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일본은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깨닫고, 소위 무단정치(武斷政治)를 문화정치(文化政治)로 바꾸는 정책의 일환으로서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약칭 선전)’라는 것을 창설하게 되며, 여기에 나혜석은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이 선전과 민간주도의 협전은 화가들의 작품 발표 및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잇는 등용문이 되었다. 이때 한국에는 여성 유일의 ‘조선여자 미술학교’가 있었고 나혜석은 주로 선전과 일본의 이과전(二科展)을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그때의 작품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한국 미술협회(韓國美術協會)’가 1962년 개최한 한국 근대 미술가 유작전(遺作展) 때 <나부(裸婦)>3점이 나왔는데, 나혜석이 활동할 당시 「나부」같은 그림은 몰지각한 사람들 손에서 없어진 것 같고 6.25사변 전에 약 10여점의 유화작품이 나경석씨 집에 있었지만 동란 후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선전도록』에 나와 있는 흑백으로 된 작품 도판을 보면 1922년 5월 제 1회 선전에 <봄>(도6), <농가>(도4) 2점을 출품했는데 한국 사람으로는 양화에 고희동 1점, 정규익 1점 등 모두 4점뿐이었다. 출품 자격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하며, 일본인이 다수 출품하였다.
<봄>은 큰 나무 한 그루가 화면의 중앙 부분을 차지하고 초가담을 한 기와집에 농촌 풍경으로 부인과 처녀가 앉아서 무엇인가 하고 있으며, 앞의 화면은 약간 강하게 처리했다. 윗부분으로 갈수록 밝아지는,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조용한 분위기로, 즉 인상파적인 시도를 예고하고 있다.
<농가>(도4)는 한 농가의 마당을 그린 풍경으로 초가 지붕이 화면의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마당은 전경이 분주한 가을 추수를 암시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모퉁이의 수레는 광선을 받은 오전 같고 바퀴가 인상적이며, 초가 지붕은 바람이 많은 전형적인 부산 지붕이며, 동래 본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마당의 광선 처리나 붓 터치는 인상파적인 외광 효과를 의도한 작품이다.
같은 해에 그려진 듯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나혜석의 <농촌풍경>(도5)은 당시의 기법적인 실상과 색채감각을 확인시켜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게다가 작품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유화실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적인 표현이지만 붓놀림이 매우 활달하고, 따뜻한 이른 봄의 햇볕과 맑은 날씨를 느끼게 하는 밝고 따뜻한 색채구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른쪽 초가집과 구도상 균형을 이루는 왼편의 나목 사이로 물동이를 인 여인이 화면의 중심적인 시점이 되어 있고, 뒤에 있는 볏가리가 농촌의 서정적 현실감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그녀의 화풍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기 시작한 것은 1923년 만주(滿洲) 안동현(安東懸) 부영사(副嶺使)로 부임한 김우영과 함께 그곳 생활을 하면서부터이다. 회화의 주제는 안동의 풍경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주제의식과 기법은 그후에도 계속된다.
1923년 제2회 선전에서 <봉황성의 남문>(도8)과 <봉황산>(도7)등 2점을 출품하여 전자가 4등이 되었다. 이 시기는 부군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으로 가게 됨으로 그의 작품의 주제도 안동현의 풍경이 주가 되었다.
<봉황성의 남문>은 앞문을 종앙에서 약간 우측으로 강한 터치를 주었고, 마띠에르와 짜임새 있는 화면의 중량감을 느끼게 하며, 중간 톤의 밝기가 보여진다.
<봉황산>은 만주 산골짜기의 이미지를 강력한 빛의 진동과 색채에 녹는 듯한 터치로 화면을 구성하였고, 산 위의 밝은 부분은 골짜기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고 산만 우뚝 솟아 있는 구도를 이등분하여 위는 산, 아래는 평야로 만들고 있다.
이 무렵 그의 작품은 서양화의 기법을 충분히 체득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작업상 기술 습득의 차원에서 맴돌 때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조형 어법의 탄탄한 바탕을 굳히고 있었다.
이들 작품은 모두 광선의 순간적인 변화를 포착하기 위한 즉필적(卽筆的)인 터치기법과 구도상의 치밀한 배려 등에 있어서 인상파적인 시각을 노출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만주봉천 풍경>(도9)한 점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만주의 전통적 중국 건물을 그린 것으로 그 구도나 색채의 표현에 있어서 서양화다운 조형어법의 견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1923년 ‘고려미술원’의 제1회 서양화전이 9월 27일부터 10월 1일까지 개최되었으며, 동인 및 공모작품 60여점이 선보였고 가정과 사회적인 측면의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나혜석은 계속 작품활동에 열중하였다. 여기에 출품한 사람으로 강진구(姜振九), 김석영(金奭永), 김명화(金明嬅), 정규익(丁圭益), 나혜석(羅蕙錫), 이재순(李載淳), 박영래(朴榮來), 백남순(白南舜) 등이 있다.
1924년 제 3회 선전에는 <가을뜰>(도10)과 <초하(初夏)의 오전(午前)>(도11)을 출품하여 <가을뜰>이 4등을 차지하고 <초하의 오전>은 입선을 하였다. <가을뜰>은 그녀의 시각세계와 터치분할의 인상파적 기법을 한눈에 보여준다.
나무에 얹혀진 분할된 색채의 마티에르는 강렬한 태양 빛의 작용 아래서 세세한 음영을 드리우며 반짝이고 있다. 세세한 색채의 뉘앙스가 이제는 거친 터치를 타고 보다 발랄하고 신선한 자연에로 향하는데, 광선에서 색채의 교향악적인 운율과 조화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며, 근대적 조형어법으로 구사된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초하(初夏)의 오전(午前)>은 <봉황성의 남문>보다 한결 구축된 조형성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는 거의 수평적인 구도의 언덕과 중경(中景)의 서양식 건물이 한층 안정되고 구축화된 건축적 괴량감을 획득하고 있고, 대기와 광선에 의해 변화하는 자연의 인상을 그리고자 실외에서 그린 것으로 빛을 받아 황홀하게 반짝이는 밝은 건물을 포착한 외광파적인 인상파의 화면 이념이 잘 나타나 있으며, 경쾌한 붓 놀림에서도 인상파의 경향을 찾을 수 있다. 당시의 평을 보면, 『동아일보』 지상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재주 있는 필법은 마침내 여러 남자 화가를 압도하고 입상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동아일보』 1921. 3. 20
선전에서의 4등은 동양화, 서양화, 조각, 사군자, 서예를 합한 것으로(총 555점) 전체에서 4등을 의미한다. 1924년 『개벽』 7월호에 <조선미술전시회를 구경하고>라는 제목의 전시회 평을 썼고 수필, 음악평, 연극평, 미술평을 쓰기도 했다.
1924년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개벽』7월호에 「조선미술전시회를 구경하고」라는 제목으로 전시회 평을 썼으며, 수필을 비롯 음악, 연극, 미술평을 쓰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토월 미술회(土月 美術會)’, ‘서화학원(書畵學院)’, ‘Y·M·C·A’ 미술 등이 연이어 개설되고 나혜석은 고려 미술원의 교수로 후진을 지도하였다.
1925년 제 4회 선전에는 <낭낭묘(娘娘廟)>(도12)를 출품하여 3등에 입선하였는데 3회 선전때 작품에 비해 터치가 부드러워지고 명암은 뚜렷이 구분되는 전체적으로 약간 복잡한 구성의 그림으로 화면 아래 중앙에서 오른편으로 상승하는 대각선은 우측의 향로를 거쳐 문으로 연결되는 역삼각형의 구도를 이룬다.
건물의 겹침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며 멸망한 왕조가 남긴 폐허화된 옛 궁전의 쓸쓸한 분위기는 작가의 서정적 문학성도 함께 느낄 수 있게 한다.
인상파 화가들이 단지 시각적(視覺的)인 광선의 흐름만을 집착함으로 포기해버린 사물고유의 형태 및 관념성, 그리고 고유색을 견지하고 있음에 주목되며 이같은 주제의식은 일본 외광파의 성격과도 연결된다.
사물의 형태와 관념성을 유지함으로 대상의 리얼리티를 살리던가 아니면 인상파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했어야 하는데, 그녀의 화면은 이 모두를 절충시키고 있으며 본격적인 인상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25년에 만주 봉천에서 두번째 개인전을 열었는데 오빠 나경석이 봉천에 거주하였으므로 이곳에서 전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1926년 제 5회 선전에서 <천후궁(千後宮)>(도13)과 <중국거리>(도14)를 출품하여 <천후궁>이 특선을, <중국거리>는 입선을 하였는데, <중국거리>는 내왕이 빈번하고 유동적인 어느 중심가인 듯하며, 밝은 배경 위에 검은 실루엣 형식으로 인물들이 점묘되어 있어 인상주의 화풍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후궁(千後宮)>은 전형적인 중국식 원형 문으로 문 밖에서 안을 보는 풍경으로 거친 터치는 없고 색상이나 색조에 의해 이루어진 윤곽선의 명확한 공간 감각은 인상주의적 요소를 잃지 않고 있다.
1927년 제6회 선전에는 <봄의 오후>(도15)를 출품했는데 농촌 풍경으로 좌측에 초가집과 맞은편에 큰 장독이 있고 나무와 산이 보이며 노인이 절구질하는 그림이다. 이때까지의 그림은 자연주의, 사실주의의 범주에 있었다.
국내에서는 전시 등 여러 활동이 두드러지고 여류화가들이 남성들과 같이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나혜석의 작품의 특징은 고전적인 엄격한 선과 명암이 뚜렷이 있었다.
3) 도불(渡佛) 이후 작품(1930년 이후 작품 세계)
1927년 시작된 세계 일주여행은 그의 미술에 결정적인 성숙을 가져다 주었다. 파리에 체류했던 그는 한 야수파 계열의 화가가 지도하고 있던 미술연구소에 다니며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이 때의 작품으로는 <불란서 마을 풍경>(도17)이 전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 낸 작품으로, 만주 시절에 보여준 탄탄한 조형어법에 이어 새로운 표현기법을 얻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일주여행 전의 그림과 그 후의 그림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은 그녀의 그림이 예술적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터치가 보다 자유로워지고 형태는 주관적인 재구성을 가하게 되어 활달한 필치 속에서 서로 뭉개지기도 하면서 보다 표현성이 강한 성격을 띄게 되고 초기 그림들에서 볼 수 없었던 대담한 생략기법과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보다 단순화시킨 화면의 구도를 구사하면서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터득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구라파의 풍경을 접하고 구미(歐美)에서 보낸 새로운 생활과 자극은 그녀 자신만의 체험이 아니라 한국 근대미술사에서도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과 약 2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녀로서는 본격적으로 서구 미술의 정수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였고, 한국 근대 미술사로 봐서는 일방적인 대일(對日) 종속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다.
당시 파리에서는 피카소와 마티스, 그리고 여류로는 마리 로랑생 등이 활동하였으며 야수파적인 화풍이 휩쓸 때였다.
야수파 화풍에 대한 그녀의 공명은 1928년 제작한 <자화상>(도18)으로 절정을 이루는데 대상을 조형적인 형태로 단순화시키며 순수한 표현성을 갖는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함으로써 화면에 예술적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기법은 작가의 감정 표출이 우선되는 야수파적인 수법으로 이루어지고 얼굴과 머리와 어깨를 비롯한 몸형태의 단순화 및 색채의 강한 표상 등은 어두운 표정문제와 달리 나혜석에게 가능했던 새로운 작품 역량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생각되는 <부군의 초상(夫君의 肖像)>(도19), <무희>(도20)등이 있는데, <무희(舞姬)>는 파리에서 본 화려한 쇼의 한 장면을 주제 삼아 그린 듯한 소품으로 국내에서의 종전 수법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시도된 서구적 표현감각과 신선한 기법의 지향을 엿보게 된다.
매력적인 표정과 단순화시킨 명쾌한 색상으로 그려져 있으나 배경은 어두운 색조로 처리되어 있다.
스페인 여행에서 <스페인 해수욕장>(도22),<스페인 국경>(도21)등을 제작하였는데 여기서의 공통점은 주제에 대한 문학성의 포기, 그리고 시각적 인상에의 충실이라는 본격적인 인상주의경향이다. <스페인 국경>은 여행중에 급히 그리려고 붓을 들었다가 미완성 상태로 손을 놓은 듯 하며 보관 상태도 좋지 못하여 채색이 많이 손상되어 있다.
붉은 지붕과 흰 벽의 건물들, 그리고 초목이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화면의 한 복판을 수평으로 횡단시켜 그리면서 그 뒤의 아늑한 평온도 감지하게 하였다. 화면 전체에서는 여행중의 낭만적인 시각과 유채 스케치의 흥취 및 현장감이 잘 드러나 있다.
<스페인 해수욕장>은 비교적 많은 시간을 가지고 착수한 듯한 작품으로 나혜석이 유럽에서 그린 현존하는 그림 중의 대표작이다.
화면을 크게 상하로 이등분하고 하반부에는 해안에서 보트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반부에는 이국적인 건물들과 하늘공간을 포착하였으며 세부적인 묘사가 거부된 형태감각과 수면 위에 반짝이는 태양광선, 그리고 대기의 흐름을 암시한 구름의 형태, 군데군데 보이는 붉은 색은 푸른 화면에 악센트가 되고 있으며 물의 묘사도 대담하게 포착된 것 등에서 그녀의 뛰어난 인상주의적 표현감각을 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누드>(도23)는 인상파적 기법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포즈는 화면에 움직임을 조성하고 머리, 동체 그리고 오른팔, 왼쪽 다리 등 커다란 주제만으로 세부적인 흥미를 없애고 조각을 보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도 명쾌한 미감을 표현하고 있다.
세계일주 여행중 스케치한 것을 이용하여 1929년 9월 23일에서 24일까지 양일간 수원의 ‘불교포교당’에서 동아일보 수원지국 주최로 제2회 개인전(귀국 전람회)를 가지게 되고, 제3회 개인전은 1930년에 일본 대판(大阪)에서 개최되었다. 1929년 미국을 돌아 귀국 도중 일본에 들러 이과전(二科展)에 파리에서 그린<정원>(도26)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파리 여행 중 선전 7.8회는 출품하지 못했으나, 1930년 5월의 9회 선전은 파리에서 스케치해온 풍경화 <화가촌(畵家村)>(도24)과 귀국 후 그린 <아이들>를 출품하게 된다. <아이들>은 이제까지의 작품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묘사보다는 생략을 많이 하였다.
팔 부분의 주름은 무시하고 외광을 강조하였으며, 원통 자체로 보고 그린 것은 야수파적인 기법이다. <화가촌>은 화면 한가운데 길을 내고 좌측으로 구부러지는 건물과 숲을 그린 작품으로, 이전의 관념적인 대상 처리와는 달리 형태의 과학적 분석, 공간, 평면 처리가 눈에 띤다.
1930년 『삼천리』5월호의 「끽연실」란에 의하면 그녀가 예전에 만주의 풍경을 그린 <천후궁>이래 가장 애쓴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입선에 그치자 실망한다. 제 10회 선전에 <정원(庭園)>(도26), <나부(裸婦)>(도27), <작약꽃>(도28) 등 3점을 출품하여 <정원>이 특선을 차지한다.
작품 <정원(庭園)>은 구라파식 중세 성당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아치형의 문과 문 뒤에 나무가 보이며, 문 중심으로 서양식 건축물의 화사한 분위기를 찾을 수 있다. <작약꽃>은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꽃을 강조시켜 표현했는데 이 두 작품은 아직도 인상파적인 경향 속에 안주하고 있음을 보여주나, <나부(裸婦)>는 다분히 입체파적 경향을 볼 수 있다.
<정원>의 특선은 이혼 후 실망과 실의에 빠졌던 그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게 되었으며 금강산 스케치 여행으로까지 이어지게 되고 거기서 그린 <금강산 삼선암(金剛山 三仙岩)>과 이미 선전에서 특선한 <정원>을 10월의 제 12회 제전(帝展)에 출품하여 <정원>이 입선을 차지하게 된다.
1932년 제11회 선전에서는 <소녀>(도29), <창가에서>(도30), <금강산 만상정>(도31)등 3점을 출품하였는데, 1회부터 10회까지의 5회의 특선으로 무심사 대우를 받기도 했다. <소녀>에서 무릎 처리와 <금강산 만상정>의 바위돌은 다이나믹 하면서도 재치있는 터치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입체적인 분할의 의도가 두드러진다.
<창가에서>는 당시 일본식 주택가의 풍경으로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로 독특한 맛은 없다. 이후로 그의 그림은 선전에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선전도 1922년에 시작하여 1944년 일본의 패망까지 23회까지 연속되었다. 일제의 식민정책을 근간으로 일본화된 미술문화를 강요했으나 이 미전을 통해 많은 미술인들이 배출되어 왔던 것이다.
1930년대의 세계 미술사로의 흐름은 추상의 시발이 활발한 시기였으며, 이때의 나혜석은 재불 기간이 너무 짧았던 이유인지 귀국 후 다시 과거 인상주의적인 화풍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색채를 단순하게 또는 평이하게 칠하는 법만은 전일보다 달라졌다. 이것은 작품에 별다른 진전이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왕성한 실험 의욕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를 전후한 가정적인 파탄은 그녀로 하여금 크나큰 좌절을 겪게 하였는데, 1933년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선죽교(善竹橋)>(도32)는 대담한 터치와 참신한 구도감각, 그리고 보색의 대비까지 계산한 풍부한 색채효과에도 불구하고 정제되지 못한 팔치와 파괴된 원근법, 난간의 배열에서 보이는 비합리적인 표현 등은 지난날 그녀가 보였던 조형적 완결성이 많이 상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제의 선택 등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그녀의 회화관념은 이제 자신의 아픔을 의탁하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따라서 화면에는 종래의 분석적인 시각과 기지가 넘치는 실험적인 조형성이 사라지고 관념적인 관조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즈음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인천풍경(仁川風景)>(도33) 역시 지난날의 뚜렷하던 기량과 저력은 상실되어 있고 표현 기술에서도 현저히 난조를 보이나. 건물 구조의 세부적인 묘사와 색조 표현은 그런대로 잘 발휘된 편이지만, 그 밖의 산과 숲과 하늘 부분에서는 유채 물감을 아껴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처지를 드러내고 있다.
<별장(別莊)>(도34)은 생활고와 사회적인 고립 및 정신력의 약화가 작품행위에서도 직접 작용되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급격히 정상성을 잃어가게 하였다. 화판에 그리다 만 이 작은 도시풍경은 유채 물감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생활고의 실정과 작품 기량의 현저한 퇴색이 너무나 역력히 드러나 있다.
그런데로 유채의 붓놀림이 이루어진 것은 붉은 벽돌의 중심적인 양관(洋館)과 그 앞의 건물 부분뿐이고, 배경의 하늘과 앞쪽의 도로는 약간의 색상 흔적만으로 그쳐 있어 구도의 설정만이 남은 저력을 엿보게 한다.
특히 <화령전 작약(華寧殿 芍藥)>의 여러 색채표현은 대상의 현실미에 매우 생동감 있게 육박되어 있으며 평필로 대충 툭툭 찍어 전개시킨 빨간 작약 꽃들과 그를 에워싼 초록색의 넓은 꽃밭 분위기, 그리고 원경의 나무와 숲의 표현은 현장에서 급히 붓을 움직이다가 대충 끝내 버린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하반부를 수평으로 횡단시킨 꽃밭의 평면적인 구성의 묘미는 그때만 해도 꽤 살아 있던 작가의 표현감각과 저력을 엿보게 한다. 게다가 꽃밭의 장식적인 표상미의 생생한 효과는 지난날 구미에서 체득한 야수파적인 표현주의 정신이 충동적으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원서호(水原西瑚)>(도35)는 수원 서호변에 정착했을 때 나혜석의 정신적 안정을 반영한 듯 느껴지는 그림이다. 정확하게 묘사된 왼편의 붉은 기둥을 한 옛 건축의 정자 일각이 화면구도를 무게 있게 해준 그림으로 색채에서 인상주의적 감각을 찾을 수 있으나 구도에서의 좀더 짜임새 있는 구성이 아쉽다.
1935년 가을 나혜석은 200여점의 근작 소품들을 가지고 ‘조선관(朝鮮館)’에서 네 번째 개인전을 가지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이전의 그것만 못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져 그녀로 하여금 더욱 더 좌절하고 실의에 빠지게 하였다.
산사와 자연을 찾아 방황하는 여행의 길을 재촉하면서도 많은 스케치를 남기나 이때의 그림엔 이미 지난날의 재기(才氣)와 예술 역량의 빛을 잃고 만다.
1958년 미술협회 수화 유작전 때 나온 <나부> 3점은 결혼후의 습작으로 보여지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유행된 인상주의에서 야수파로 넘어오는 과정의 작품으로, 당시 구미(歐美)화단을 보고 그린 <누드>습작은 마티스의 <빨간 의자에 앉은 나무(裸婦, 1925)>와도 상통하는데 이것은 인상파에서 야수파로 차츰 물체를 입체적으로 분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파리 화단을 체험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아직 그 아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머 <나부>에서는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뒤에 배경은 어둡고 손의 처리가 마티스의 나부와 비슷한 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당시 유행한 풍만한 육체의 다리에는 외곽선이 있고 어두운 뒷배경은 머리부분에 가서 약간 밝아지는데 전반적으로 야수파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부2>는 긴 소파에 누워있는 포즈로 터치가 거칠고 다리나 목이 미완성이며 몸 전체를 입체적으로 분할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나부3>은 파리 연구소에서의 습작으로 앞의 두 작품에 비해 완성도가 뛰어나며 팔등신 이상의 여인이 의자에 천을 깔고 몸을 약간 옆으로 하고 앉은 평범한 포즈로 뒷배경의 반은 밝게 하고 나머지 반은 어둡게 처리해 인물을 부각시키려 하였고 몸의 전체적인 시원한 선이나 볼륨에 비해 머리가 작고 배경이 단순하다.
당시 어둡고 무거운 색감이 우리 화단에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처럼 밝고 대담한 색감사용은 어느 화가보다도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이 나부 작품 3점은 프랑스의 야수파가 나혜석을 통해 우리나라에 수입된 첫 번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선전에서의 작품을 큰 테두리 안에서 보면 프랑스의 인상과 영향을 따랐지만 나혜석만의 회화적 성과가 어느 정도 성공하여 당시 어떤 화가보다도 가치 있는 작품을 창조했다고 볼 수 있으며 독자적이고 격조 높은 창작활동과 작품으로 그의 선각자(先覺者)다운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혜석 작품에 있어서 인상주의적 요소
나 혜석 작품을 살펴보면 화폭에 담았던 주제나 그 기법적인 면에서 인상주의적 경향이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한국 근대 서양화에 미친 인상주의의 영향과 나혜석의 양식적 특성인 인상주의적 성격을 살펴보았다.
1) 인상주의의 영향
인상주의는 외적 세계에 대한 어떠한 선입관도 배제하고 완전한 수용상태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엄밀하고도 정확하게 자연을 재현하려고 오직 시각적 진실만을 추구함으로서 인상주의 시각의 탄생은 바로 시민계급의 등장과 기술의 진보에 따라 변화된 생활의식을 반영한 예술에의 소산인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은 자연에 보다 충실하기 위하여 사물을 보는 방식과 표현방법상의 혁신을 꾀하는데 사물을 보는 방식은 시각적 지각을 의미하며 여기서 시각은 대상에 대한 모든 관념과 일절 지식의 배제를 전제로 한다. 이는 화가자신의 인상, 즉 외부대상이 감각적 기관에 작용으로서 생겨지는 다소의 두드러진 효과를 말한다.
인상주의의 회화에서 제일 큰 특징은 대상 그것이 일정한 거리에서 감상되어야 하고 얼마간의 생략이 불가피한 원경으로 사물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려지는 대상의 요소를 순전히 시각적인 것에 국한시키고 시각성이 없거나 시각의 카테고리로 옮겨질 수 없는 일체의 것을 배제함으로서 시작된다.
인상주의가 꾀한 기법은 새롭게 보는 방법에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시각은 광선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이것이 회화의 진정한 주제가 되었다. 모든 자연의 사물은 그 자체 고유의 형태와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고유색이 있다고 믿어져왔으나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러한 개념적인 생각을 깨뜨리고 모든 사물에 비쳐진 광선의 반영효과로 받아들였다.
즉 일상적인 경험에서 근접한 사실상을 대상에서 기억되어지는 색채가 광선과 그 반영 속에 용해되어 다시 거기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색조의 조화로 결국 모든 색채는 광선의 작용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화가와 다른 화가들과 구별되는 것이며 바로 색조의 진원이 광선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은 풍경이 죽어버린 흰 빛이 아니라 서로 엇갈리고 진동하는 수많은 빛과 프리즘의 분광들로 흘러넘치고 있음을 본다. 또한 기하학적인 형태가 아니라 좀 멀리서 보면 생생하게 살아나는 불규칙한 수많은 빛들의 반점들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진정한 선들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자그마한 색채의 반점들로 이루어진 원근법의 표현 이는 인상주의자들의 눈은 그 당시 가장 진보한 눈이며 가장 복잡 미묘한 뉘앙스들을 포괄하고 표현할 수 있었던 눈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오로지 찬란한 색의 진동으로 보고 묘사한다, 입체감의 묘사나 원근법, 명암법등은 구태한 구분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색의 진정한 감동으로 구분되며 오로지 색의 감동에 의해서 화폭위에 이룩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회화사상 비로서 자연은 그 본연의 모습을 되찿게 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근대의 화가들 중 나혜석, 오지호, 이인성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화폭에 담고 있던 주제나 그 기법들이 인상주의적 경향에 상당히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인상주의적인 성격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도입된 후 대부분의 작가들이 일본에 유학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인상주의 회화를 배웠고 그러한 기법을 익혔다. 그러나 이들의 인상주의는 일본화된 것을 재수용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양식을 익힘에 있어서도 필연적인 발전의 경로나 조형이념을 익히지 못한 채 모방에만 머문 듯 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혜석은 인상주의의 의식구조에 어느 정도 부응하였다.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의 사건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하나의 시각적 사건으로 엄격하게 규정지음으로서 회화문제를 보다 과학적으로 보충하려는 의도는 바로 꾸르베 다음에 오는 세대가 도맡을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세대에서 인상주의가 태어나는 것 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인상주의회화를 맨 처음으로 시도하고 도입 초기부터 조형의 탐색이 가장 왕성했던 작가는 바로 나혜석이다. 그녀가 즐겨 화폭에 담았던 주제를 보면 초기단계에는 <봄>(도6), <농가>(도4) 등 한국적인 시각에서 나아가 <중국거리>, <스페인 국경>, 혹은 <나부>, <화가촌>(도24) 그리고 <인물>등이 그 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도시적인 것은 다만 풍경으로서 도시를 발견하고 그림을 시골에서 옮겨왔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도시의 눈으로 보고 현대적 기술인의 극도로 긴장된 신경으로써 외계의 대상에 반응하기 때문이고 도시생활의 다양한 변화, 신경질적인 리듬, 갑작스럽고 날카롭지만 언제나 사라지게 마련인 인상을 묘사하기 때문에 그것은 도시적인 양식인 것이다.
그녀의 작품<농가>에서와 같이 그녀는 대기와 광선에 의해 미묘하게 변화하는 자연의 인상을 한국적인 풍광의 소재로 하여 밝고 풍부한 색채 그리고 자유로운 붓놀림으로 나타냈다.
그녀의 첫 개인전에 출품되었던 <정물>은 외광속에서 빛의 효과만 집착했던 그녀에게는 드물게 나타나는 작품으로 색채의 대비를 보다 강하게 시도하고 있으며 짧게 찍어바른 터치와 밝은 화면이 인상적으로 표현되었다.
나혜석은 여러 새로운 모색과 창작이라는 문제로 삶의 존재 가치로 끌어 올리는 작가정신의 확립에 큰 몫을 하였다. 그녀의 첫 개인전 작품을 볼 때 터치 분할에 의한 방향 없는 필치, 색채분할, 그 결과 이루어지는 격렬한 명암의 대조의 소멸, 색상과 색조에 의한 원근법 표현 등에 의한 화법을 특성으로 하는 인상주의적인 그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나정월여사의 작품전람회를 觀하고」, 『동아일보』 1921. 3. 23
그 시대에 있어서 선전에 출품된 작품의 경향을 보면 그 초기부터 인상주의적인 색채로서 강하게 지배되는데 1928년 제7회 선전에서는 29점의 서양화 가운데 25점이 인상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인상주의가 명확한 주장이나 집단적이거나 통일된 움직임은 형성하지 못했지만 이미 동시대적인 양식으로서 충분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인상파 회화가 사실주의의 근본적인 명제를 그 극한점까지 몰고 갔다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우리의 회화도 일단은 사실주의적 과정에서 그 명제와 진솔하게 대결해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회화에 있어서의 새로운 가능성이 추구되어야 한다.
한국의 인상주의는 한국 현대회화라는 대서사시의 발단부에서 분명 하나의 뚜렷한 초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상주의 회화를 맨 처음으로 시도하고 조형 탐색이 가장 왕성했던 작가 나혜석. 그녀의 작품이 명확하게 되새김하여 조명되어지지는 않지만 한국 근대미술화단을 꿋꿋이 지켜간 나혜석은 봉건주의의 기반에서 벗어나 인간의 각성을 뒷받침으로 한 새로운 사회의식이 태동되어 온갖 근대적 제반체제를 갖추려는 결의가 일어나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신미술의 세계에 뛰어들어 최초로 서양화를 익히는 춘곡 고희동과 함께 한국의 인상주의는 그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나혜석 작품 세계의 특징 및 의의
1) 여류 선각자로서의 나혜석
예리한 지성과 풍부한 감성이 그녀를 자유로운 지성인으로 만들었으나 바로 그의 자유정신 덕분에 그녀는 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했다. 자식들에게 보내는 글의 한 구절을 살펴보면 그녀에게 내재된 갈등뿐만 아니라 외재적 고통까지를 몃볼 수 있다.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p 216 ,『나혜석 이혼고백서』 오상출판사, 1987.
나혜석의 불행은 전통사회의 유교적 가치관과 신여성의 개화사상의 충돌이 빚어낸 시대적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 개화기의 운명적 여류, 나혜석의 역사적 의미는 개인적인 불행보다는 그녀가 소유했던 자유정신과 여성의식에서 찿아야 할 것이다.
가부장제의 전통가치관에서 벗어나 의식면에서 또한 실제 생활면에서 투철한 페미니스트 의지를 보였던 나혜석의 선구적인 역활이 오늘날 현대 여성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물론 그녀의 예술세계가 자신의 페미니스트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였다고는 볼 수 없으나, 여성으로서 전문적인 화가의 길을 택하였다는 점이 그 당시 상황에서는 기존사회에 대한 반항이요, 여성주의 선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혜석은 수필, 시, 소설을 통하여 신여성으로서의 자유평등사상과 여권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림에서는 그러한 메시지 전달보다는 조형적 탐구가 앞서있다. 그녀의 그림은 전통적인 초상화나 풍경화로만 그칠 뿐 여하한 여성주의적 내용을 담고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혜석은 여성의식의 소유자며 페미니스트 문필가였을 망정 페미니스트 미술가는 아니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녀 역시 그 시대의 고희동, 김관호 등 유학파 남성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즘과 인상주의 화파에 대한 이해를 갖고 외광묘사에 주력하였으며, 그러한 까닭에 내용과 형식, 주제와 양식 모두에서 남성들과 구별되지 않는 남성적인 또는 중성적인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나혜석의 그림은 여성주의적 내용과도 무관할 뿐만 아니라 주제 선택이나 감수성에서도 철저히 비여성적이다.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꽃, 정물과 같은 여성적 주제를 택하거나 작가의 성을 노출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색상, 섬세한 선묘를 추구하지 않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녀가 비여성성에서 여성주의적 가능성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비여성적 나혜석의 작품세계에서 인간평등이라는 인본주의 페미니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자기를 찿는 과정에서 겪은 고투와 혈전의 의미를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그의 용기와 열정과 성과를 정당히 평가받아야 하며 그의 실패는 그의 개인의 실패를 넘어 한 시대의 일그러진 거울로서 의미를 가져야한다.
부자유와 예속적인 여성성을 낳은 정신적 물질적 제약들에 대한 저항을 꾀하는 여성해방론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현상들에 자연스러운 지위를 부여하려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 인본주의적 의문을 제기함으로서 가능해진 저항의식의 한부분이었던 것이다.
한국 초유의 여성화가가 의식면에서 페미니스트였다는 점은 여성주의 미술의 시각에서 보면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가 작품상으로는 페미니스트 화가가 아니였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혜석의 작업은 여성적인 자의식은 있었으며 여성해방론자로서 작업을 통하여 여성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한국에서의 여성성을 작업 내용으로 하는 본질주의의 여성미술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나혜석이 여성주의 의식이 작업에 반영되고 이후에 나타난 한국 여성미술의 독보적 존재인 천경자의 그림에 정치성이 부여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여성미술을 거론할 것이다.
나혜석이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가 아니었다고 해서 그녀의 미술사적 공헌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녀는 여성의 근대적 자각을 자아의식으로 드러내보인 최초의 여성이다. 그 실천은 인습에 젖은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 나혜석의 피투성이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그 선각자의 패배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다시 보여준 것이다.
2) 인상주의 미술 수용과 미술사적 평가
당시 이 땅에 들어온 인상주의회화라는 것이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특수한 제약성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간접 도입되었고 그러한 양식을 익힘에 있어서도 인상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과 몰이해로 인한 모방에만 머물고 만듯한 인상은 어쩔 수 없으나 이질문화의 도입이라는 과정에서 볼 때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며, 어느 면에서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는 하나의 모색일 수 도 있는 것이며, 한국의 인상주의를 들춰내는 또 다른 한낱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상주의적 경향도 산발적으로 소개되오던 한국의 인상주의회화는 동경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와 그 초기부터 왕성한 조형활동을 보여온 나혜석에 의해 본격적인 시도가 이루어진다.
한국 근대의 여류미술 활동을 보면 서양식 근대교육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뜻 있는 여성의 외국유학, 그리고 국내 미술교육기관에서, 또는 개인 연구소에서 수학하여 남성들과 함께 사회적으로 활동하면서 근대 여류미술 활동이 시작되었다.
나혜석은 신여성들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나이 17세에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에 이어 4번째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미술학교에 유학한 후 당당히 직업적인 여류화가로 활동하다. 또한 같은 동경여자미술학교유학생으로 성신학원에 몸담고 있었던 이숙종과 자수의 장선희 동양화의 정찬영, 이옥순 등의 몇몇 작가가 선전에서 좋은 작품을 보여주었다.
서예는 김돈희가 지도하는 상서회에서 수학한 방무길, 김소성 등이 있으나 작가 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현실을 마비시키려는 비애의 발산으로서의 방법으로 그들은 모처럼 새로운 서양화를 연구하고 돌아온 이들의 작가의식의 결여로서 고희동은 아무런 씨앗도 이 땅에 이식하지 못하고 다시 동양화로 돌아가는 등 전혀 개척자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 뒤에 따른 김관호, 김찬영, 이종우, 김창섭 등에게도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이들에게 있어서 미술이란 생명을 바쳐 탐구하고 창조할 대상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도피로서 국가의 멸망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을 잊어버릴 수 있는 출구로서 필요한 것뿐이다.
이러한 망명객같은 이들의 태도는 우리나라 미술의 여명기에 필요한 정신과 개발 및 자각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선전과 협전은 근대 한국 미술가들의 작품 발표기관으로 가장 대중적이고 중요성을 뛰고 있었다. 그 당시 미술가들은 대부분이 이 전시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였다.
한편 1920년경 국내에서 여성 유일의 미술 수학기관으로 조선여자미술학교가 있었는데, 당시 교수로 김예식, 김의식 형제가 동양화, 서양화, 자수, 수예 등을 지도하였고, 개인 연구기관으로 장선희가 주관하던 조선여자 기예원 에서는 주로 자수, 조화, 수예 등을 지도하여 작가를 양성하였다. 이렇듯 여류화가들은 미술교육자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연구와 작품 생활을 해 왔었다.
여성 최초로 나혜석이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백남순과 임용련의 부부전이 동아일보 강당에서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미술계의 현황이 과거 여성미술계와는 큰 차이가 있고, 남성 미술가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는 여성의 문화 예술활동 참여와 근대적 성격에 합치되고 나아가 근대 미술의 새로운 창출의 자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류 미술계에 나타난 활동의 성과나 작가의 수를 볼 때 대다수의 여성 미술가는 자수 수예 중심이고, 그 다음이 서예와 동양화였으며, 서양화와 조각에서는 큰 성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대중의 몰이해라는 사회적 제약요인과 뿌리도 없이 스며든 일본 외광파 화풍의 수용이라는 우리 나라 근대 서양화단의 어려움을 초기 남성 서양 화가들 보다 더욱더 꿋꿋이 지켜나간 여류화가로 나혜석을 들 수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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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1933년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의 나부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강변, 유채, 23 X 32cm, 개인소장
나혜석 <농촌풍경>, 1928, 27.5 x 39cm 개인소장
나혜석 <만주 봉천 풍경>, 1924, 합판에 유채, 23.5 x 32.5cm 개인 소장
이화원, 캔퍼스에 유채, 44 X 51.5cm, 개인소장
나혜석 <파리 풍경>,1928, 채 23.5 x 33cm 개인 소장
프랑스 마을 풍경, 1928년, 유채, 30 X 45.5cm, 개인소장
나혜석 스페인 항구.1928년, 합판에 유채, 37 X 44cm, 개인소장
나혜석 <스페인 국경> 1928, 목판에 유채 23.5 x 33cm 개인 소장
나혜석 <스페인 해수욕장> 1928, 32.5 x 43cm
나혜석 <무희> 1927~28, 41 x 33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녹동 풍경
이 작품은 미국 여행을 마친 나혜석이 부산으로 돌아와 1929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왼편에 그려진 나무와 중앙의 집, 원경에 그려진 산의 배치와 적색과 녹색의 대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거친 붓 터치와 두터운 마티에르가 그 특징으로, 이로부터 인상파 화풍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혜석 <선죽교> 목판에 유채 23 x 33cm, 개인소장
나혜석 <수원 서호> 목판에 유채 30 x 39cm
화홍문 년대미상
나혜석 <인천 풍경>1933,유채 15.8 x 22.7cm
나혜석 <별장>, 1935,목판에 유채 22.5 x 33cm, 개인소장
나혜석 <화녕전 작약>, 1935,목판에 유채 34 x 24cm 용인 호암미술관
다솔사 1935년, 합판에 유채, 54 X 69cm, 개인소장
나혜석의 마차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1928년 무렵 그린 걸로 추정되는 풍경화(60×50㎝).
1919년 <초 하룻날> 매일신보 만평
'이상을 직시하는 계명자' <계명> 삽화
어느날 1933년
나부, 1927~1928,
봄의 오후, 1927,
해인사 석탑
1921년 3월 19~20일 첫 개인전에 선보인 정물화
1931년 제10회 선전 특선작 ‘정원’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특선작 ‘천후궁’
도쿄 2·8독립선언 활약…3·1운동 투옥
“우리는 자기에 의한 자기를 창조할 뿐이다.” 서양 철학자 베르그송은 인간, 그 자신이 인간의 형성자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파격적 주장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일반화된 논리. 인물의 활동에 있어 시공간적 배경은 시대에 순응하거나 경계의 틀을 넘어서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틀과 경계에 갇혀 있는 조국과 민족 그리고 여성의 현실은 단순한 생존 논리에 저항했다. 또는 붓을 들고 그림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을 달래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 나혜석, 그녀는 독립운동가였다.
나혜석(1896~1948)은 역사의 격변기에 태어났다. 1894년 갑오농민운동과 1895년 을미사변으로 촉발된 의병운동, 그리고 주권 수호를 위한 신교육 운동과 민권운동이 전개되는 시기에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했다. 이 시기에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에서 시흥과 용인 군수 등 지방 관료를 했던 부친 나기정과 모친 최시의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개화된 인물로 수원의 기독교 관련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여성 교육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고, 모친은 부인회를 조직하고 교육과 자선 활동을 하며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 오빠 나홍석과 나경석은 일본 유학 이후 애국 인재 양성에 뛰어드는데, 그들의 활동은 나혜석의 민족의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평양 송죽비밀결사대 정신 계승
1902년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회에서 파견된 스크랜턴(M.F Scranton) 여사가 경기도 수원에 종로감리교회를 마련하고 초가집 한쪽에 여학생 3명과 함께 삼일소학당을 시작했다. 4년 뒤에는 지역민의 지지와 의연 활동으로 삼일여학당과 삼일남학당이 분리 설립되면서 지역의 근대 교육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나혜석의 부친도 있었다.
1910년 6월 나혜석은 삼일여학당에 입학해 과정을 마친 뒤 상급학교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나혜석은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문화에 이해가 깊었던 오빠 나경석은 나혜석에게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일본 유학의 기회는 나혜석으로 하여금 여성의 주체의식과 자존감, 민족의 현실을 깨닫게 하고 유학생들과 시대 토론을 통해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에 대한 의지를 표출시켰다. 개화된 집안이었지만 시대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던 한계와 민족의 암울한 현실은 그녀에게 의식의 변화를 글로써 표현하게 했다.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였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주고 높은 장벽을 헐고 깊은 규문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입센의 희곡에서 영감을 받아 쓴 나혜석의 ‘노라’는 1921년 4월 3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글이다. 신여성, 신교육, 신문물, 여성해방과 불합리한 사회구조, 조국 현실에 자기 의지를 담았던 나혜석. 그 첫걸음은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토로했던 <학지광>과 <여자계>와의 인연에서였다.
<학지광>은 조선 유학생이 1914년 창간한 기관지로 1930년 4월 종간될 때까지 조선 유학생의 고민을 담았다. 남녀평등 시대의 여성 지위 변화에 대한 논의가 주요 주제로 다뤄졌다. 이광수·최소월·김억·김형원·이효석·최승구 등도 글을 게재했고, 나혜석도 <이상적 부인> <잡감> 등으로 자기표현을 했다.
< 여자계>는 평양 송죽비밀결사대의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었다. 창간 경위는 확인되지 않으나 시작은 숭의여자중학교 잡지부의 <여자계>에서 비롯됐으며 송죽결사대의 전국 지부 설립과 지역 대표로 구성된 이들이 일본 유학을 오면서 그 정신은 되살아날 수 있었다.
1917년 10월 17일 조선여자유학생 임시총회에서 발간이 결정됐는데 편집부장은 김덕성, 부원은 나혜석, 허영숙, 황에스더였다. 조선 여성의 사회적 담론을 다루는 취지로 <여자계>는 계속 발간됐다.
그리고 그들은 1919년 2·8독립선언 당시 일본 도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2·8독립선언 참여 이유로 도쿄 유학생은 감시 대상이 됐는데 나혜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항·문명·독립 논했던 여성 선각자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이 국내 입국한 뒤 5월 초에 나혜석은 경찰 심문을 받고 투옥됐다. 투옥 대상도 일본 유학생은 구분됐는데 나혜석과 김마리아가 주요 인물이었다. 나혜석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옥중 투쟁을 이어갔다.
같은 해 8월 5일,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 방면되기까지 나혜석은 저항했다. 1919년 6월 7일 <신한민보>에는 나혜석의 저항 의지를, 1922년 3월 22일 <동아일보>에는 여성 주체의식을 담고 있다.
“왜경 명고옥여자미술학교 졸업생 라혜석 씨와 여자학원 대학부 출신 김마리아 씨 등은 방금 감옥 중에서 무쌍한 수욕을 당하면서 왜넘 검사의 취조를 받되 겁나함이 없이 용감 활발한 태도로 정당한 도리를 들어 항변하매…” <신한민보>
“우리 조선 여자계를 위하여 열심 진력하는 나혜석 여사는 금번 당지 팔번통 태성의원 내에 여자 야학을 설립하고…” <동아일보>
이후 나혜석의 활동은 예술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활동 곳곳에 독립운동가와의 만남과 인연은 지속된다. 1923년 3월 황옥 경부 사건에 도움을 준 사례와 1927년 12월 9일 약소민족대회 참가, 12월 네덜란드 헤이그 방문 등에서 김마리아, 서재필, 조소앙, 장덕수 등과의 만남은 그녀의 활동이 단순한 해외 유람이 아님을 추측하게 한다.
나혜석의 결혼식,1920.4.10. 정동교회
최초의 서양화가, 이혼 고백서를 발표해 동시대를 산 이들에게 지탄을 받았던 여성. 주목받은 그녀의 삶만큼이나 나혜석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강렬했다. 제한된 시공간의 틀 속에서 저항, 문명, 독립을 논했던 여성 선각자, 나혜석을 발견한다.
[출처] :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도쿄 2·8독립선언 활약…3·1운동 투옥> / 공감,2019.7.22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고 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세상에 왜 良夫賢夫는 없는가?”
⊙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학창시절부터 1등 놓치지 않아
… 진명여고보 졸업 후 조선인으론 처음 도쿄여자미술학교로 유학 가
⊙ 일본 도쿄에서 연애 폭발… 오빠 친구 최승구, 변호사 김우영, 소설가 이광수와 불꽃 같은 ‘겹다리 연애’ 시작
⊙ 김우영과 결혼식 때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前 애인 최승구의 碑石을 세워줄 것 등 요구해 세간의 이목 집중
⊙ 남편과 함께 간 프랑스 여행에서 최린과 불륜 시작… 결국 이혼하면서 몰락
⊙ 이별 통보한 최린을 ‘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
…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주며 무마 시도
⊙ 1934년 쓴 〈이혼 고백서〉 장안의 화제 일으켜…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수원의 ‘나혜석 거리’에 살아 있다
나혜석의 좌상이다. 그 옆에는 조형물이 있다
현대사에서 생(生)을 추적해 보고 싶은 여성이 몇 있다. ‘사(死)의 찬미(讚美)’로 대중을 휘어잡은 뒤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1897~1926), 동양 춤을 세계에 알린 최승희(1911~1969), 이완용 뺨친 희대의 간신 배정자(1870~1952)와 간첩 김수임(1912~1950), 당대의 명사로 친일파로 몰린 모윤숙(1910~1990) 등이다.
자료를 종횡(縱橫)으로 섭렵 중인데 눈은 어둡고 체력은 쇠해 무간(無間)의 미궁(迷宮)에 빠진 느낌이다. 그래서 2015년 4월 22일 부음란의 기사를 계기로 취재했던 나혜석(羅蕙錫·1896~1948)부터 시작해 본다. 당시의 부음기사 리드는 “17일 김건(金建) 전 한국은행 총재가 별세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계속 부음기사를 인용해 본다. “향년 86세. 고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고 나혜석(羅蕙錫·1896~1948)씨의 셋째 아들이다….” 이제 나는 독자들과 함께 역사의 시계추를 71년 전으로 되돌려 볼 작정이다. 1948년 12월 10일 밤 8시30분, 신원 미상의 여성이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병원이 지금의 이태원으로 옮긴 용산구청이 아닌 옛 용산구청 근처 자제원(慈濟院)이다. 초라한 행려병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해 맏딸 김나열, 김선(12살 때 병사), 김진(서울법대 교수), 김건(한은 총재) 등 3남1녀를 낳았다.
나혜석 거리
나혜석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반드시 가 봐야 할 곳이 경기도 수원이다. 거기가 나혜석의 고향이다. 더 정확히 팔달구 수원행궁(行宮) 화령전(華寧殿) 앞 신풍초등학교 후문 근처로, 집터에 기념비가 서 있다. 나혜석의 부친 나기정은 용인군수를 지냈다. 고관 출신답게 집터가 왕궁 바로 옆의 좋은 위치였다.
내가 갔을 때 공교롭게도 부근의 동네 도서관에서 마침 ‘나, 나혜석’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었다. 수원에는 이 밖에도 나혜석과 관련된 장소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나혜석 거리’다. 길이가 약 400m쯤 되는 거리에는 나혜석 좌상(坐像)과 입상(立像)이 있고 그의 연보를 새긴 돌 조각이 놓여 있다.
주변은 온통 먹자골목이어서 대체 왜 이곳을 ‘나혜석 거리’로 정했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나혜석 거리에 좌상과 함께 입상(立像)도 있는데 얼굴 생김이 사뭇 다르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한 나혜석은 학창시절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진명여고보 졸업 후엔 조선인으론 처음 도쿄여자미술학교로 유학 갔다.
그가 서양화를 택한 건 오빠 나경석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이때부터 나혜석의 불같은 사랑이 시작되는데 첫 상대가 하필이면 오빠의 친구 최승구였다. 최승구는 1916년 폐결핵으로 고향 전남 고흥에서 요절했다. 나혜석이 문병을 다녀간 다음 날이었다고 한다. 둘의 사랑은 비극적이었다.
최승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 밑에서 자랐으며 집안에서 맺어 준 본처가 있었다. 최승구는 도쿄유학생 중에도 ‘천재’로 불리며 잡지 《학지광(學之光)》 편집에 간여했지만 나경석은 그의 불우한 환경을 꺼려 여동생과의 교제를 반대했다고 한다. 최승구가 숨을 거둘 때 나혜석은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최승구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나혜석은 한동안 신경쇠약 증세를 앓기도 했다. 소설가 염상섭은 훗날 “나혜석이 겪은 비운(悲運)이 다 최승구와의 슬픈 사랑 때문에 비롯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번 엇갈린 사랑은 두 번째에도 잘못되기가 십상인데 나혜석 역시 그런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원 화성 옆 건물들에는 나혜석을 기리는 벽화나 조각들이 많아 눈길을 끈다
두 번째 상대 김우영(金雨英· 1886~1958)은 부산 출신으로 교토(京都)제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 역시 1916년 첫 부인과 사별(死別)했다. 그가 나혜석을 만난 것은 1917년이다. 나중에 김우영은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되는데 김우영이 조선 땅으로 돌아온 것은 1918년이었다.
처음에는 반일(反日) 변호사처럼 3·1운동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맡았다. 3·1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붙잡혀 간 연인 나혜석을 변호하기 위해 달려올 정도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조선의 숱한 엘리트들이 빠져들어 몸을 망치고 만 자치론(自治論)에 경도(傾倒)되고 만다.
자치론이란 일본의 식민지이되 자치권을 가지면 만족한다는 일종의 타협 노선이다. 그와 비슷한 논리를 편 이들이 설산(雪山) 장덕수와 훗날 연적(戀敵)이 되는 최린이다. 김우영과 나혜석의 러브스토리를 본격적으로 말하기에 앞서 언급해야 할 이가 있다. 춘원 이광수(李光洙·1892~1950)다.
춘원은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오산학교 교감에서 물러난 뒤 1915년 와세다(早稻田)대로 유학을 갔다. 고등예과에 편입한 것이다. 1905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성사된 춘원의 일본 유학은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춘원은 그때 일본에서 만난 나혜석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꿈꾼다.
그런 그에게도 이미 애인이 있었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이다. 요즘 말로 ‘양다리 걸치기’인데 춘원의 사랑을 좌절시킨 것은 이번에도 오빠 나경석이었다. 춘원이 고향에 백혜순이라는 본처까지 둔 유부남인 걸 알았던 것이다. 남자들이 군침 흘리는 동생을 둔 나경석은 평생 골이 아팠을 것 같다.
문제는 춘원 못지않게 나혜석 역시 김우영과 춘원 사이를 오갔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新)지식인의 사랑은 요즘 시각으로 보아도 대단했다. 본처와 두 애인 사이를 방황하던 춘원이 대담하게 “인간에게는 부모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자유(自由) 연애론’을 편 것이다.
수원 화성 옆 나혜석 생가터는 지금 작은 정원으로 변해 있다
춘원은 백혜순과 이혼한 뒤 1918년 10월 허영숙과 제물포항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한 짓을 했다”는 세상의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훗날에는 변절자로 낙인 찍히고 그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니 딱한 팔자다.
다시 김우영·나혜석으로 방향을 돌려 본다. 1920년 두 사람은 결혼하는데 함흥 영생중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하던 나혜석은 4가지 결혼 조건을 제시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여자가 결혼에 조건을 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 조건이란,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둘째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셋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넷째 전(前) 애인 최승구의 비석(碑石)을 세워 줄 것이었다. 놀랍게도 김우영은 신혼여행차 최승구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 준다. 이런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화제를 몰고 왔다.
4가지 조건 외에 결혼청첩장을 신문광고로 대체한 것이다. 둘의 결혼은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남편 김우영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줬을까? 그렇지 않다는데 비극의 씨앗이 숨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접살림을 시어머니 집에서 차린 것이었다.
비석 세우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전처(前妻)와의 사이에 낳은 딸과 떨어져 지내게 했지만 신혼살림은 시어머니가 있는 서울 숭인동 집에서 차린 것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건 아니다. ‘평생 사랑한다’는 조건도 깨졌는데 이는 나혜석의 불륜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왜 파격적인 여성이 된 것일까.
첫째, 나혜석은 너무도 똑똑했다. 그는 삼일여학교·진명여고보에서 1등과 반장을 도맡았다. 진명여고보 졸업 때 《매일신보》에 최우등 수석 졸업생으로 얼굴 사진까지 실릴 정도였다.
둘째, 나혜석이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유학 간 것은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였으며 남자까지 포함해도 당시 서양화를 전공한 이는 다섯 명이 넘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어머니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보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그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게 나혜석이 유학 시절 《세이토》라는 페미니스트 잡지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고 감화를 받은 후 국내외 잡지에 썼다는 글이다. 나혜석은 그 글에서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고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세상에 왜 양부현부(良夫賢夫)는 없는가?”
수원의 한 레스토랑 밖에 걸린 나혜석 그림의 복제품이다. |
김우영과 결혼한 직후 나혜석은 짧은 전성기를 맞았다. 결혼 이듬해 만삭의 몸으로 개최한 개인전에 이틀간 5000여 인파가 몰렸으며 70여 개의 작품 모두가 고가(高價)에 팔린 것이다. 이 개인전은 서울서 열린 첫 유화전(油畵展)이었다. 이후 나혜석은 매년 조선미술전람회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그런 화려한 외양 속에서도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7년 남편을 따라 나선 유럽 여행이 파탄을 가져온 것이다. 두 사람의 여행루트는 지금 봐도 대단하다. 서울에서 기차로 평양~신의주~중국 봉천(奉天)~하얼빈까지 간 뒤 다시 시베리아 횡단열차 편으로 러시아 모스크바~프랑스 파리까지 간 것이다.
여행은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특별포상을 받아 이뤄진 것이었다. 나혜석은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과 함께 간 프랑스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독일로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자 파리에 홀로 남아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공부에 열중하게 된다.
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츌초] : 문감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3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 월간조선, 2019. 2월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33년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수덕여관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
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출처]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명작의 비밀> - 5.‘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동아, 2019년 9월호
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츌초] : 문감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3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 월간조선, 2019. 2월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33년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수덕여관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
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출처]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명작의 비밀> - 5.‘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동아, 2019년 9월호
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츌초] : 문감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3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 월간조선, 2019. 2월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33년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수덕여관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
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출처]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명작의 비밀> - 5.‘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동아, 2019년 9월호
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츌초] : 문감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3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 월간조선, 2019. 2월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33년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수덕여관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
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출처]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명작의 비밀> - 5.‘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동아, 2019년 9월호
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츌초] : 문감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3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 월간조선, 2019. 2월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33년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수덕여관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
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출처]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명작의 비밀> - 5.‘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동아, 2019년 9월호
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츌초] : 문감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3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 월간조선, 2019. 2월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33년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수덕여관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
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출처]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명작의 비밀> - 5.‘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동아, 2019년 9월호
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츌초] : 문감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3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 월간조선, 2019. 2월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33년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수덕여관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
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출처]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명작의 비밀> - 5.‘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동아, 2019년 9월호
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츌초] : 문감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3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 월간조선, 2019. 2월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33년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수덕여관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
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출처]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명작의 비밀> - 5.‘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동아, 2019년 9월호
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츌초] : 문감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3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우리의 ‘新여성시대’> / 월간조선, 2019. 2월호
‘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울한 저 눈빛. 불안하고 절망적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자화상은 보는 이를 망연(茫然)하게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이토록 서글픈 표정의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대체 저 지친 눈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33년
2015년 4월 어느 날, 한 통의 부고가 세상에 날아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한국은행 독립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 최초 여성화가 고 나혜석 씨의 막내아들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1951년 한은에 입행한 뒤 (중략)
1988년 17대 한은 총재로 임명돼 4년간 한은을 이끌었다. (중략)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한은 독립성 확보를 위해 애썼고(후략)”
부고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뭐? 나혜석의 아들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런데 김건 전 총재는 생전에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선구적이고 전위적이었기에 끝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인 예술가 나혜석.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가부장적으로 가두어 보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막내아들 김건은 어머니 나혜석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우영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김건 전 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흐른 2015년 11월. 김건 전 총재의 부인, 그러니까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가‘나혜석 자화상’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나혜석이 그린‘김우영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어머니의 자화상과 아버지 초상을 기증하라”는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평생 감추고 또 감췄던 막내아들이었기에, 기증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김건 전 총재는 왜 어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것일까.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그 이름은 여전히 문제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나혜석이란 이름은 한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나혜석은 1918년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서울의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유화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이틀 동안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였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가부장제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글을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에, 나혜석의 지명도는 가히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다. 나혜석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고 신문과 잡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앞다퉈 소개했다.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金雨英·1886~1958)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전처와 사별하고 딸이 하나 있는 10살 연상 변호사였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미술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1년 9개월에 걸쳐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당시 1녀 2남이던 자녀를 모두 부산 시가에 맡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 도중 파리에서 남편의 친구이자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던 최린(崔麟)을 만난 나혜석은 곧바로 깊은 연애에 빠졌다. 불륜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1930년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 이후 세상의 시선이 변해갔다. 나혜석의 근대의식과 예술혼을 찬양하던 언론과 사람들은 나혜석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이에 맞서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이 됐다.
자신의 약혼·결혼·이혼 과정,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한국 남성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됐다. 이혼 후 잠시 고향인 수원에서 심신을 치유하며 글과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세상 사람의 야유와 외면 속에 충남 예산 수덕사, 경남 합천 해인사 등지를 전전했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염노장>,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엽과의 만남
나혜석이 수덕사로 일엽(一葉)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37년 말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일엽 스님은 당시 신여성의 선두에서 나혜석과 함께 여성해방을 외쳤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933년 수덕사로 출가한 상태였다.
나혜석은 불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수덕사 초입 수덕여관에서 생활했다. 글을 쓰고 종종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수덕여관
하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은 점점 파탄에 이르렀다. 그래도 서울과 수원으로 종종 가족이나 지인들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종 냉대였다.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49세 되던 1944년 10월, 끝내 나혜석은 서울 인왕산 아래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다. 나혜석의 올케가 남편(나혜석의 오빠)의 반대로 그녀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최후 수단으로 양로원에 들여보낸 것이다.
자칫 객사(客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그러나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 1945년에는 한때 수덕사 인근 허름한 주막에서 주모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경기도 안양의 한 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던 나혜석은 1948년 말 서울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3세였다. 자제원은 훗날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7년 다시 서울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됐다.
자제원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의 마지막은 이렇게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음울한 눈빛
나혜석(왼쪽)이 일본인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오른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가 있다. [위키피디아]
‘나혜석 자화상’은 어둡고 무겁다. 눈빛과 표정은 처연하고 우울하며 고독과 좌절감이 가득하다. 보는 이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조차 두렵다. 인물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지 않는다.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깊은 고민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나혜석은 세계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인 1928년 이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그렸다.‘김우영 초상’을 두고 미완성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은 파리에서 왜 이렇게 우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이 시기는 그가 이혼의 파탄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파탄은커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과 위태로운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끝내 비극과 파탄의 도화선이 됐지만 자화상을 그릴 때는 아직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그린 작품치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하다. 눈빛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운명적인 예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화상 제작 연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사실 나혜석이 이 작품을 1928년에 그렸다는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에 제작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그린 것으로 전해올 따름이다. 어쨌든 자화상 속 나혜석의 망연한 눈빛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는 또 있다. ‘자화상’ 속 얼굴과 나혜석의 당시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 주인공 얼굴이 나혜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얼굴은 한국인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이를 두고 모딜리아니풍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8년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론일 뿐,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기록이나 증언도 없다.
자화상의 얼굴이 중성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말이다. 중성적이어서 더 슬퍼 보이는 걸까. 중성이라고 하면 피해자인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아니다. 성의 구분이나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나혜석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나혜석은 이 그림을 통해 남녀 구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네 에미였느니라”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서양과 일본, 남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나혜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다” “나혜석은 이중적 타자인 한국의 여성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 성과 민족성이 모호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문정, ‘한국 근대여성미술가의 작품에 나타는 여성성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4년)
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과 한국의 가부장제를 통째로 극복하고자 했던 나혜석의 철학을 이국적 중성적 마스크로 구현한 것이다. 실천적 예술가다운 탁월하고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의 최후는 매우 상징적이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망가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행려병자로 처절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행려병자로서의 죽음은 기존 가치관이나 일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하나의 상징이다.
나혜석은 1녀 3남을 두었다. 딸, 아들, 아들, 아들이다. 큰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김진은 서울대 법대 교수, 막내아들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나혜석은 1935년 이렇게 외쳤다. 이혼당한 지 5년 뒤,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이듬해로 막내아들 김건이 일곱 살이던 때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년 2월호)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성장하며 김건은 어머니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불륜과 이혼, 아버지의 어머니 학대, 어머니의 누추한 최후, 가족 친지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김건 전 총재가 어머니 나혜석의 존재를 외면하고 부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어서야 이뤄진 귀향
경기 수원 나혜석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이광표 제공]
나혜석은 1928년 이미 이런 상황을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이 저 망연한 눈빛의 정체다. 훗날 자신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컷의 눈빛과 표정으로 기록하다니. 예술가의 운명적인 직관이라고 생각하니 섬찟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저 눈빛이 더 슬프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다.
눈빛의 미스터리, 중성적 얼굴의 미스터리는 풀고 싶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풀리지 않기에 더 매력적이다. 1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을 만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혜석은 자화상에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제 내가 에미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밝혀도 되느니라. 비록 죽음은 누추했으나, 나의 삶은 당당했다”고.“나의 아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여기 있다”고.
막내아들과 막내며느리가 기증한‘나혜석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은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은 수원 화성(華城) 행궁이다. 수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 거기서 길 하나 건너면 행궁마을이 있다. 사방으로 골목이 예쁘게 펼쳐진 고즈넉한 마을이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그사이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았다. 요즘엔 이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나혜석에게 수원 시민들이 가진 관심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골목길 담장 곳곳에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 놓았다. 나혜석을 기억하려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혜석 생가터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 길을 오가며 평등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막내아들 김건은 생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 자화상을 세상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는 중대 발설이었다. 그건 어머니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혜석과 막내아들 김건의 화해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뤄졌다.
나혜석 가족사의 해원(解寃)이기도 했고,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고, 세상 사람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나혜석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나혜석 자화상’은 미술관 독립 공간에‘김우영 초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한때는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나, 이혼 이후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내와 함께 있다니, 이 상황을 나혜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화상의 눈빛은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출처]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명작의 비밀> - 5.‘나혜석 자화상’의 미스터리한 눈빛 - 해원(解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동아, 2019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