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남자가 병원에 왔다. 키가 훤칠하고 체격도 좋았던 그에게선 어떤 질병의 징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에겐 남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이 있었다. 이따금씩 대변으로 뭔가가 나온다는 것, 분명히 기생충 같은데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 그가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때는 병원에 오기 8개월 전이었다. 변을 보는데 항문에 뭔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대부분은 변이 채 안 나와서 그런 거겠지만, 이 환자의 경우엔 그게 아니었다. 손으로 잡아 빼보니 흰색의 기다란 벌레였고, 길이는 무려 60센티나 됐다. 이때 해야 할 최선의 방법은 그 벌레를 들고 병원에 가는 거였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기생충에 걸렸다는 게 부끄러워,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선다.
광절열두조충은 촌충의 일종이다. 촌충의 성체.
이분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 벌레를 변기에 버린 뒤 약국에 가서 회충약을 사먹은 게 그가 한 일이었다. 약을 먹었으니 이제 별 일 없겠다 싶었지만, 그로부터 두 달 뒤 또다시 기다란 벌레가 나오자 그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다시 회충약을 먹고, 또 벌레가 나오는 일이 반복됐다. 그가 병원을 찾은 건 4번째로 벌레가 나온 뒤였다. 그 벌레마저 변기에 버리는 바람에 병원 측에선 진단을 위해 환자 몸에서 벌레를 꺼내야 했다. 나온 벌레는 총 3.5미터 가량 됐고, 노란색이었다. 그에게 말했다. “광절열두조충이네요. 혹시 회 좋아하시나요?”
광절열두조충의 생활사
광절열두조충(Diphyllobothrium latum)1)은 온대지방이나 북극에 가까운 곳에서 분포하는 촌충의 일종으로,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유행지로 알려져 있다. 주요 종숙주는 사람으로, 사람의 장에 사는 광절열두조충 어른이 알을 낳으면 그 알들은 대변과 함께 변기로 떨어지고, 하수시스템을 타고 물로 간다. 물로 간 알이 부화해 유충이 나오고, 플랑크톤 등의 갑각류한테 먹힌다. 보통 먹힌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지만, 기생충의 경우는 절대 그렇지가 않다. 갑각류에서 소화되어 영양분이 되는 대신 유충은 갑각류 안에서 더 큰 유충으로 자란다. 이 갑각류를 다른 물고기가 먹을 때도 유충은 죽는 대신 물고기의 근육으로 건너가 사람에게 감염력이 있는 유충으로 자란다. 이 유충을 플레로서코이드 (plerocercoid) 유충이라 부르며, 이걸 가진 물고기를 사람이 덜 익혀 먹을 때 인체감염이 이루어진다. 물론 이런 일이 아무 물고기에서나 일어나는 건 아니다. 유럽에선 강꼬치고기, 농어, 모캐 등을 먹어서 걸리고, 한국과 일본에선 연어나 송어가 감염원으로 추정된다.
광절열두조충의 생활사
욥기를 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이 있다 (8장7절). 광절열두조충을 보면 이 말이 생각나는 것이, 들어갈 때는 불과 5-15 mm에 불과하지만 나중에 몇 미터에 달하는 긴 벌레로 자라기 때문이다. 플레로서코이드 유충의 한 쪽 끝에는 홈(groove)이 있는데, 이걸로 사람의 장점막에 달라붙은 뒤 본격적으로 몸을 만들기 시작한다. 벽돌을 세워서 한 줄로 쌓는 것처럼 네모난 조각들이 계속 만들어져 몸길이가 길어지는데, 이 기생충의 이름 ‘광절열두조충’에서 ‘광절’이 의미하는 건 각 조각의 가로 길이가 세로보다 더 크다는 뜻이고, ‘열두(裂頭)’는 유충의 머리 부분에 홈이 나 있는 게 찢어진 것처럼 보여서 붙인 말이고, ‘조충’은 촌충을 학술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다 자란 벌레는 보통 3-10미터에 달하고, 기록된 것 중 가장 긴 건 무려 25미터다. 암수한몸인 이 벌레는 어른이 된 뒤 알을 낳기 시작하며, 플레로서코이드 유충이 들어가 알을 낳는 어른이 되기까지는 4-6주 가량이 소요되며, 하루 배출되는 알의 숫자는 백만 개에 달한다. 거기에 더해 광절열두조충은 시시때때로 몸의 일부분을 30-50센티씩 끊어 외계로 내보내는데, 이건 알로 가득찬 조각들을 외계로 내보냄으로써 자손을 많이 전파하려는 기생충의 전략이다. ‘이러다 광절열두조충이 지구를 지배하는 게 아닌가’는 불안감이 들겠지만, 다행히 이 알들 중 제대로 부화해 사람한테 전달되는 비율은 극히 낮으니 너무 걱정하진 말자.
광절열두조충의 증상과 진단
이 기생충이 기특한 건 크기에 비해 증상이 별로 없어서다. 광절열두조충을 꺼내주면 대부분 놀라 자빠지는데, 이유인즉슨 이런 게 있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거다. 하지만 기생충은 원래 숙주를 괴롭히려고 있는 건 아니다. 남의 집에 들어와 살면 눈치를 보느라 조용히 살게 마련인 것처럼, 서식장소와 음식물을 숙주한테 의존하고 사는 기생충도 행여 숙주가 자기를 쫓아낼까봐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간다. 자신의 존재를 들키는 날이 제삿날이란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사람의 소장 길이는 5미터 남짓인데, 그보다 더 큰 광절열두조충이 몸을 이리저리 접은 채 숨죽이고 사는 모습을 상상하면 왠지 좀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물론 모든 사람에서 증상이 없는 건 아니어서 배가 살살 아프다든지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고, 충체가 비타민 B12의 흡수를 막아 빈혈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게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위 환자처럼 충체의 일부가 대변과 함께 나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들키는 게 훨씬 더 흔하다. 실제로 우리나라 환자 43명을 분석한 결과 40% 가까운 환자에서 ‘기다란 벌레가 대변과 함께 나왔다’고 증언했다.
아무리 증상이 없다 해도 몇 미터짜리 벌레가 몸 안에 있다는 건 영 찜찜한 일이다. 게다가 이 벌레의 수명은 20년에 달하고, 최고로 오래 산 건 25년이나 되니, 자칫하면 “내 청춘을 광절열두조충과 함께 보냈다”며 한탄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사실 이 기생충의 진단은 그리 어렵지 않다. 대변과 함께 나온 광절열두조충의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병원에 가져가면 되니까. 벌레가 말라비틀어지지 않게 식염수에 넣어서 가져오면 더 좋지만, 그냥 벌레만 가져와도 충분히 감사드릴 일이다. 만의 하나 그게 뭔지 잘 모르는 의사도 있을 테니, 대부분의 의과대학에 있는 기생충학교실에 문의하면 훨씬 더 빠른 진단과 치료가 가능하다. 실수로, 혹은 너무 징그러워서 그 조각을 버렸다고 하더라도 진단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광절열두조충은 엄청나게 많은 충란을 대변으로 내보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만일 당신이 광절열두조충에 걸려 있다면 당신의 변에는 광절열두조충의 특징적인 충란이 무더기로 들어 있을 테니, 변검사만 해도 얼마든지 진단이 가능하다. 문제는 위 환자가 그랬던 것처럼 벌레 조각을 버린 뒤 약국에 가서 기생충약을 사먹는 일이 많다는 거다. 약국에 가서 기생충약을 달라고 하면 100% 회충약을 준다. 물론 회충약도 광절열두조충에 약간의 타격을 입히는지라 벌레의 일부를 끊어지게 만들 수도 있지만, 원래 촌충이라는 건 머리 부분만 장점막에 잘 붙어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기다란 몸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위 환자가 기생충약을 먹었어도 계속 광절열두조충의 조각을 배출했던 건 이 때문인데, 기다란 벌레가 나올 때는 회충약 대신 디스토마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걸 꼭 기억하자.
광절열두조충의 알. (왼쪽부터 D. latum D. pacificum. D. nihonkaiense의 알이다) <출처 : Toma´sˇ Scholz, Hector H. Garcia, Roman Kuchta, and Barbara Wicht, 2009, Update on the Human Broad Tapeworm (Genus Diphyllobothrium),Including Clinical Relevance>
대장내시경하다가 광절열두조충이 발견되기도…
2010년 NEJM이란 학술지에 대장내시경 도중 광절열두조충을 발견한 논문이 실렸다. 원래 소장은 대장내시경이 미치지 못하는 부위지만, 광절열두조충은 소장 중에서도 맨 말단인 회장에 기생하며, 길이가 꽤 길다보니 몸을 조금만 길게 뻗으면 대장으로 넘어온다. 게다가 요즘엔 대장암 예방 차원에서 대장내시경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지라 대장내시경에서 우연히 광절열두조충이 발견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하지만 광절열두조충이 의심된다고 무조건 대장내시경을 하는 건 좋은 선택은 아니다. 환자에게 주는 스트레스 차원에서 대장내시경은 대변검사에 비할 바가 못 되며, 대장내시경을 했다고 반드시 광절열두조충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생충의 조각을 배출했던 한 환자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벌레를 제거할 목적의 대장내시경을 받았지만, 벌레는 찾지 못한 채 조그만 용종만 떼어 낸 병원 측의 처사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또한 대장내시경으로 벌레를 끄집어내려고 시도하는 경우 머리 부분을 제거하지 못한 채 중간에 끊어져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일본에선 이 기생충을 대장내시경으로 제거하려다 실패했는데, 해당 논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불행하게도 머리 부분은 제거하지 못했다. 그래서 1개월 후 다시 제거를 시도해서 450센티짜리 벌레를 제거했다.” 그러니 가장 좋은 건 역시 대변검사고, 가장 좋은 치료법은 디스토마 약이다.
광절열두조충 다이어트?
기다란 벌레가 몸 안에 들어 있으면 밥을 먹어도 그 기생충이 빼앗아 먹으니 살이 안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몇 년 키우다 나중에 약을 먹어 기생충을 빼낸다면 소위 말하는 기생충 다이어트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네이버에서 ‘기생충 다이어트’를 검색해 보면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마리아 칼라스라는 오페라 가수가 광절열두조충을 이용해 체중감량에 성공했다는 소문도 기생충 다이어트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우리 생각과 달리 기생충은 그다지 많이 먹지 않으며, 광절열두조충처럼 긴 기생충도 하루 밥 한 숟가락을 먹지 못한다. 몸에 기생충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밥맛이 없어질 수는 있겠지만, 긴 기생충의 존재가 살을 빼지는 못한다는 게 기생충학자들의 상식적인 견해다. 만일 기생충 다이어트가 정말 가능하다면 광절열두조충의 유충이 진작에 상품화되지 않았겠는가?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다이어트는 없다. 광절열두조충을 먹는 대신 고기를 덜 먹고 운동을 하자.
1)광절열두조충(Diphyllobothrium latum) : 분자생물학적 연구결과 우리나라와 일본에 분포하는 광절열두조충은 Diphyllobothrium latum이 아니라 다른 종, 즉 Diphyllobothrium nihonkainense로 밝혀졌다. 유럽, 미국과 인체 감염원이 다른 것도 이걸로 다 설명이 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광절열두조충으로 표기했다.
- 글
- 서민 /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호칭·직책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다. 저서로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