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산은 뒤에 내외(內外) 선유동을 두고, 앞에는 용유동(龍遊洞)에 임해 있다. 앞뒤편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고…. 흙봉우리에 둘린 돌이 모두 수려하여 살기(殺氣)가 적고 모양이 단정하고 평평하여, 수기(秀氣)가 흩어져 드러남을 가리지 않아 자못 복지(福地)라 하겠다.”
내쳐 속리(俗離)로 들자 했더니 청화산(靑華山 984.2m)의 고운 이름이며, 이 산기슭에 여러 해 머무르며 호까지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불렀던 이중환의 「택리지(擇里誌)」 한 구절이 그만 발길을 청화산으로 옮겨놓게 했다.
아래로는 속리산의 높다란 연봉들이 병풍처럼 늘어섰고 위로는 백두대간의 도도한 줄기(기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 그런 고금(古今)의 이끌림에 산에 들었더니 예서 원효 스님의 존안을 우러르게 될 줄이야!
신라 무열왕 7년(660) 원효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청화산 원적사(圓寂寺, 054-533-9010)에는 현재 이 땅에 남아 있는 스님의 모습으로는 최고(最古)라는 ‘해동초조원효조사진영’이 석교 스님의 진영과 함께 문수·보현 보살처럼 우뚝 정좌해 계시니 말이다.
햐아! 곤두선 눈썹, 강직한 얼굴, 전체적으로 건장한 모습의 스님이시다. 가까이에서 뵈니 희끗희끗 백발이 올라오기 시작한 굵직한 얼굴이 멀리서 뵐 때와는 달리 금세 후덕한 인상이시다. 가히 어느 때나 거리낌없었던 원효 스님의 당당한 모습 그대로란 생각이다. 들리는 말로는 200∼300여 년 전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원적사는 고종 40년(1903) 석교대사(石橋大師)가 중창을 한 이래 지난 ’87년 서암 큰스님께서 거대한 암석으로 이중 축대를 쌓고 땅을 돋아 법당과 선원, 요사채를 신축하고 길을 정비한 것이다.
가을로 들어섰음(立秋)에도 급한 오르막인지라 송알송알 땀이 맺힌다. 부처님을 뵙기 전 숨을 고르고 목을 축인다. 물맛 좋기가 비할 데 없다. 이 높은 곳에 이만큼 시원한 물이 철철 넘치니 빈약한 안목으로도 수행터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법당 바로 뒤에 솟아오른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독특한데 청화산 정상에서 내려서다 곧추 솟아 오른 독봉(獨峰)이다. 앞에서 보면 절벽 같기도 하고 햇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그 앞에 법당이 있고 그 안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니 그 빛나는 모습이 꼭 부처님 광배 같다고나 할까.
주지 혜진 스님께 여쭈어 보니 원적사 스님들께서는 이 봉우리를 ‘부처님탑(佛塔)’으로 여겨오신단다.
“환적대(幻寂臺)는 일명 갈모봉이니 갈모와 같이 뾰족한 석산(石山)이다. 주봉에서 뚝 떨어져서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조금 작을 뿐이다. 벽(壁)도 아니고 반(盤)도 아닌 무수한 돌을 층도 없이 아무렇게나 마구 쌓아 올렸다. 돌무덤이다. 그러나 봉이다. 송죽(松竹)이 있고 화초(花草)가 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의연히 독립하여 있다. 다만 양편을 더 높은 줄기가 돌려 싸서 바람 한 점 못 들어오게 보호하고 아주 양명(陽明)하여 석산은 항상 반짝인다. 대(臺) 밑에 원적사가 있다.”
화북면 옛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화동승람(華東勝覽)』에서는 이곳을 환적대라고 기술하고 있으니 택리지에서 속리 남쪽에 있다던 환적대 또한 이쯤이 아닌지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
원적사에서는 매일 새벽 2시에 죽비소리에 맞춰 새벽예불을 올린다. 원적사 선원 용상방(龍象榜)은 현재 네 분의 스님들과 채공 소임을 맡고 있는 보살님 한 분까지 총 다섯 분이 서암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수행 안거 중임을 알려준다.
원적사에서 청화산 정상까지는 한 시간 남짓.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니 이 높은 곳까지 아름드리 소나무가 적지 않다. 그 아래 앉아 땀을 식히자니 파아란 하늘이며, 저 아래 용유동(쌍룡계곡)의 검푸른 물줄기가 시원스레 다가오는 듯하다. 동국여지승람, 산경표 등에는 화산(華山)으로만 불리더니 택리지에 이르러 청화산(靑華山)으로 불린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케 된다.
“옛날 원적사에 원효 스님, 의상 스님, 윤필 거사 세 분이 계셨어.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은 형제 같았지. 이 위의 의상대는 10리나 떨어져 있고 원효암터도 있어요. 옛날 기왓장도 있고….
윤필 거사는 심원사에 계셨다고 하는데 옛날 심원사터가 청화산에 있었으니까 세 분이 다 청화산에 다 있었던 게지. 세 분이 각기 토굴을 만드셨지. 서로 기운 좋으니까 왔다갔다 하고 그랬지. 도인이니까. 윤필 거사는 거사지만 원효, 의상 스님과는 도반과 다름 없었지. 법력이 못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원효 대사가 어디 갔다오니까 의상 대사가 뭘 찾는 거야. 그 전에 어떤 동자가 이 깊은 데까지 늘 글 배우러 오는 거야. 지금도 원적사 있는 데가 깊은데 옛날에야 밀림 아니었겠어. 이 깊은 곳까지 어린 동자가 찾아오는 거야. 용자(龍子)야, 용궁 용왕의 아들이지. 의상 스님이 글을 가르쳐 줬지.
그런데 그 용자가 어느 날 집에서 선생님을 모셔오라고 했다는 거야. 가까운 덴 줄 알고 따라 나섰지. 그런데 쌍룡폭포 아래 용소(龍沼)로 가는 거야. 용궁으로 통하는 소야. 업혀서 갔지. 으리으리한 용궁이야.
용왕에게 소개하니까 용왕이 철부지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융숭히 대접을 했지. 그리고 돌아가려니까 돌시루, 요령(搖鈴), 도끼(月釜, 도끼 ‘斧’를 스님께서는 ‘釜’로 말씀하셨다), 낫(月鎌)을 선물로 주는 거야. 그런데 돌시루는 이 용궁에 대대로 전승해오는 보물이었지.
의상 대사가 모르고 다 가져왔는데 이 돌시루가 안 보여 찾는다는 거야. 원효 대사가 저기 보인다고 하는데도 의상 대사에게는 안 보이고…. 도력을 나타내는 거였지. 원효 대사는 이 돌시루가 용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보물임을 알고 (의상 대사를 깨우쳐 주기 위해) 그랬던 거였지. 그래서 돌시루는 용궁으로 다시 돌려보내게 되었다지.
나머지 세 가지는 최근까지 남아 있었는데 낫은 심원사에 있었고 월부는 흔들면 댕그랑 소리도 나고 그랬어. 청담, 성철 스님도 보았고 봉암사 스님들도 많이 보았는데 어느 때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지. 요령은 6.25 때 마을 사람이 가져간 것을 내가 되찾았지. … 지금은 직지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해.”
50여 년 가까이 원적사에서 머무셨던 서암 큰스님께서 한 시간이 넘도록 그 자상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도반으로 형제처럼 지낸 원효와 의상 두 분 스님께서 어찌 도력을 자랑하고 겨루었을까마는 이 이야기는 천촌만락을 누비고 다니며 민중과 가까이 하고자 했던 원효 스님을 좀더 우러르고자 했던 민중들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원효 스님을 만나뵈려거든 한번쯤 청화산 원적사에 가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