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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정 수용인원은 모두 1178명 밖에 안되어 1513명의 희생자를 낸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이며 이때 국제적으로 정해진 구난신호SOS>를 최초로 발신하기도 하였다. 이 참사 결과 1913년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런던에서 열려 오늘날과 같이 배의 안전시설을 충실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최대의 해양참사를 계기로 Titanic 과 관련된 이름을 선명에는 붙이지 않게 되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배의 구조·구명설비·무선설비·유빙감시(流氷監視)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어, 해난사고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결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 |||||
1912년 4월 14일 늦은밤, 캐나다 뉴펀들랜드 해안에서 640km 떨어진 곳에서 빙산에 충돌 후, 2시간 40분만에 심해 속으로 가라앉은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발견되었다.
TITANIC 타이타닉호 건조에서 ~ 침몰까지..
타이타닉호 건조가 마무리될 무렵 좌후방에서 찍은 모습
(1912년 4월 10일 첫 출항,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빙산 충돌, 2시간 40여분 만인 4월 15일 02시 20분에 완전 침몰)
20세기 초에 조선업으로 영향력이 있던 하란드 월프사의 회장인 피리 경이, 런던에서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한 화이트 스타 라인사의 사장에게 대형 여객선 3척을 건조할 계획이 있다고 말한 게 타이타닉호 건조의 발단이었다.
건조는 토머스 앤드루가 맡았다.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당시 북대서양 항로에 있어서 속도 경쟁보다는 느긋하고 쾌적한 선박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고 설계하였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서 방수구획이 있었다. 방수 격벽은 16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었고, 2구역(뱃머리로부터 4구역)까지 침수해도 침몰하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격벽은 제어실에서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호는 침몰하지 않는 배로 소문났다. 그러나 방수 격벽은 완전히 밀폐된 구역이 아니고 상부의 주 갑판에 구역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는 타이타닉 호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격벽 한계치를 넘어서면서 넘쳐난 물이 다른 구역을 차례대로 침범하여 돌이킬수 없는 길을 걷게 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 회사에는 타이타닉보다 1년 일찍 건조한 올림픽호와 상선인 HMS 브리타닉호가 재적했다. 원래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 배 한 척으로는 운항에 차질이 생긴다. 따라서 북대서양을 항해하려면 항상 배가 두 척 이상 필요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이러한 필요에 맞춰서 올림픽호를 먼저 건조하고 같은 해에 타이타닉호를 건조하였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브리타닉호를 건조하였다.
타이타닉호는 올림픽호와 거의 동시에 건조하기 시작했다. 대계단이나 식당의 장식, 식사의 메뉴나 객실의 서비스등, 그 외관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닮았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호가 가장 거대한 배처럼 연출되었지만, 당시에는 올림픽호가 대표적인 배였으며, 타이타닉호와 브리타닉호는 자매선이었다. 이 세 선박을 통틀어서 올림픽 클래스라고 불렀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호의 사진으로 종종 올림픽호 사진이 사용된다.
앞서 운행되고 있던 올림픽호의 문제점이나 개선점을 듣고 타이타닉호 설계는 다소 변경되었다. 먼저 외관부터 올림픽호와는 다소 달랐다. 예를 들면 북대서양의 추운 강풍을 막기 위하여 A 갑판의 1등석 전용 산책용 갑판(Promenade)의 창에 유리를 장착했다. 이러한 변화는 외관상으로 두 개의 자매선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 밖에도 올림픽호는 B 갑판의 창가 전체에도 산책용 갑판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타이타닉호의 설계도에서는 B 갑판의 산책용 갑판이 폐지되었고, 대신에 창가 전체에 1등 선실을 새롭게 마련하였다. 그 결과, 1등실 수가 올림픽호에 비해 훨씬 많아져 올림픽호에는 없는 스위트 룸이 설계되었다. 스위트 룸은 자체 산책 갑판까지 있었다.
당초 자매선의 중량은 거의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타이타닉의 객실의 수가 증가하면서 최종적으로 타이타닉호의 중량은 올림픽호의 45,324톤보다 1004톤 무거운 46,328톤이 되었다.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타이타닉호는 올림픽호를 넘어,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다. 그러나 그늘에 숨은 타이타닉호가 유명해진 이유는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탓이다.
1등실에는 총 329명의 부유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급한 사정보다는 즐기려고 승선한 승객들이 많았다. 객실은 최상층인 보트 갑판부터 갑판 E(상갑판)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호화 호텔 수준이었고 개인 목욕탕이 있었다.
2등실에는 총 285명의 중산층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등실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많은 편리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객실은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흡연실(갑판 B), 레스토랑(갑판 B), 도서관(갑판 C), 상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3등실에는 총 710명의 가난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주로 아메리칸 드림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승선한 승객들이었다. 객실은 2등실과 마찬가지로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시설은 1등실과 2등실만 못하고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다른 배들에 비해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배에 탑승하기 전에는 검역을 걸쳐서 전염병이나 이/벼룩을 확인했고 여자와 남자는 배의 앞머리와 뒷머리에 각각 따로 떨어져 승선했으나 가족 단위일 경우 같이 승선할 수 있었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타이타닉호는 첫 항해를 시작했다.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2,200명 이상이 배에 탔다. 프랑스의 셰르부르(Cherbourg)과 아일랜드의 퀸즈 타운에 기항해, 미국의 뉴욕으로 향했다. 출항당시 쌍안경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서, 승무원은 배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낼 수 없었다. 망지기들은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하고 눈으로만 위험 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이는 후에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한 요인이 된다.
타이타닉호는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떠다닌다는 소식을 선박사이의 무선통신으로 받았다. 특히 4월 14일에는 빙산 경고를 6통 받았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통신사 잭 필립스는 승객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통신사들은 이 계절에서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에는 자주 있는 일로 생각하여 빙산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심각한 실수를 하였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안 호가 무전을 보낼때에는 타이타닉의 통신사가 바쁘다면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러자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는 화나서 잠이 들었다. 이는 1513명의 사람을 죽게 하는 또 한가지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6번과 5번 보일러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화부들은 물을 피해 도망갔다.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은 방수 격벽의 스위치를 내렸다. 조타실과 망루에서는 빙산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충격을 느끼고 올라온 사람들이나 갑판위에 있었던 승객들은 오히려 즐거운 분위기였다. 3등실 승객들은 올라나와 얼음조각으로 축구를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기념으로 위스키에 쓸 얼음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우현에는 수면 아래로 약 90미터에 걸쳐서 손상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5구획에 걸쳐서 엄청난 해수가 배 안으로 들왔다. 4번째 방수구역까지 물이 들어오면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지만 5번째 방수 구역에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애초에 격벽이 위 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해수는 격벽을 넘어서 차례차례로 다른 구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뱃머리에 실린 물로 배는 서서히 앞으로 기울고 뱃머리가 해수면 아래로 점점 들어갔다.
타이타닉호의 벽이 이처럼 쉽게 허물어진 것은 당시의 낮은 제강 기술 때문이었다. 최근의 샘플 조사결과에서 선체에 사용한 강철에 불순물인 황화 망간을 다량으로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북대서양은 수온이 낮다. 물 온도가 낮으면 황화 망간의 강도가 약해진다. 그 결과 배가 빙산에 충돌할 때 강철이 찢어진 게 아니라, 강철을 지지하던 나사못이 한순간에 풀려 해수가 들어왔다.
타이타닉의 스미스 선장은 배수 펌프로 해수를 밖으로 빼내려고 했지만 그저 몇 분의 시간을 버는 정도였다. 12시 45분, 타이타닉 호는 조난 신호를 발신하고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했다. 불과 20km 정도의 거리에 정박중인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있었지만, 통신사가 타이타닉의 통신사에게 일침을 듣고서는 화가 나서 취침중이라 타이타닉 호의 긴급 신호를 받지 못했다. 약 90km 떨어진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가 조난 신호에 응답해 전속력으로 타이타닉이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배의 최대 속도가 17노트밖에 되지 않는 카르파티아 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은 지 약 1시간 30분이 지난 새벽 3시 55분이었다.
12시 45분쯤 구명보트 7호가 정원 65명에 28명을 태우고 처음으로 내려졌다. 곧 이어 55분에 좌현에서 구명보트 6호가 7호와 마찬가지로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다. (여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빙산에 부딪히고 있었을때 배를 맡았던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 빙산을 목격했던 보초 두명, 그리고 훗날 "Unsinkable"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마가렛 몰리 브라운도 있었다.)
한편, 배 밑 보일러실에서는 화부들과 기관사들이 물이 보일러에 접촉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증기와 해수를 배출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관실에는 기관사들이 계속해서 동력을 공급했다. 배수를 시작하고 얼마 후 5번 보일러실에서 첫번째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기관사 몇명이 펌프질을 하다가 6번 보일러실의 석탄 저장고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익사한것. 화부 대장이었던 프레드릭 바렛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또 한편 우편 직원들은 침수하는 우편물 저장고에서 우편물을 물에서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리고 하갑판에 남아있던 몇몇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물이 복도 구석구석에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구명보트는 좌현과 우현 양쪽에서 하나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허나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 정원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내려졌다. 구명보트 5호는 41명이 탔고, 3호는 32명이, 8호는 39명이 탔고 ,1호는 겨우 12명(정원 40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이제 점점 혼란이 가속되지 시작했고, 그에 따라 사고도 약간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여성은 구명보트 10호와 배 사이에 떨어져 끼었다가 구조되었다. 어떤 승객들은 구명보트에 타기 위해 줄을 타거나 뛰어들기도 하였다. 물론 이 와중에 부상자들도 생겨났다. 이제 승객들도 상황의 심각함을 어느정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한편 무전사 잭 필립스와 해롤드 브리드는 계속해서 모스 신호를 보내고, 하늘에는 계속해서 로켓이 발사되었다. 캘리포니안 호에서도 이것이 조그만하게 보였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선박이 목격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선박은 후에 포경선으로 밝혀졌으며, 해양경비대로 착각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상황이 지속되고 배가 서서히 기울어짐에 따라 이제 혼란이 훨씬 더 가중되었다. 이제 대다수의 승객들이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닫고, 공황에 빠졌다. 아직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약간씩 있었다.
한편, 3등실에서는 일부 승무원들이 승객들이 구역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고 많은 구역에 철창이 쳐저있었기 때문에 3등실 승객들의 탈출에 지장을 겪었다. 또한 3등실에는 영어를 잘 모르는 승객들도 꽤 많았다. 이렇게 배 안에 갖히게 된 승객들은 이리저리 헤메며 어떻게든 갑판으로 올라오거나, 같이 모여 지시를 기달리거나, 식당이나 숙소에 남아 기도하고 있었다. 물론 후에 지시가 내려지고 대부분 어떻게 해서 빠져나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구명보트가 떠나간 상태였다. 3등실 승객들의 사망률이 높은 건 이때문이다.
1시 30분쯤에는 배의 앞머리가 잠기기 시작하고, 혼란은 계속해서 가중되었다. 구명보트도 이제 정원에 어느정도 맞추기 시작했다. 구명보트 11호는 정원을 다섯명을 초과해서 내려졌고, 배에서 펌프질로 빠져나오는 물이 들어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13호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지만 마찬가지로 가까스로 피했으나, 밧줄에 문제가 생겨 옆에서 함께 내려지던 15호 바로 위에 내려져' 깔리게 일보직전까지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구명보트에 타고있던 프레드릭 바렛을 포함한 선원들이 아슬아슬하게 밧줄을 잘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명보트 14호가 내려지려 하자, 공황에 빠진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타기 위해 우르르 밀려왔다. 이에 14호를 맡은 5등 항해사 로우는 혼란을 저지하기 위에 허공에 대고 총을 쐈다. 5분 후에는 구명보트 16호가 내려졌는데, 여기 타고 있었던 사람들 중 간호사였던 바이올렛 제솝은 후에 자매선 브리타닉이 침몰했을 때도 살아남았다.
구명보트가 하나둘씩 내려짐에 따라 이제 후미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접이식 보트 C는 1시 40분에 내려졌는데, 내려지기 직전 두 사람이 몰래 탔는데, 한명은 가족을 구명보트에 미리 태운 승객이었고, 나머지 한명은 화이트 라인 사의 회장이자 배의 선주 브루스 이스메이가 몰래 탔고, 이때문에 돌아와서 욕을 꽤 먹고 책임을 지고회사에서도 사퇴했다. 1시 45분에는 구명보트 2호가 내려졌다. 이때 어떤 외국인들이 타려 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권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 존 제이콥 애스터는 어린 아내를 태우고 아직도 빈 공간(40명 중에 25명이 타고있었음)이 많은 것을 보고 타도 되냐고 물었으나, 라이톨러에 의해 거절당했다. 마지막 구명보트(선교 위에 비상용으로 있었던 접이식 보트 2개는 제외)는 접이식 보트 D로, 2시 5분에 내려졌다.
이 와중에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노부부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이 좋은 노부부였는데, 이사도라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은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하고 하인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구명보트에 태운 뒤 함께 죽었다.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현지처와 하인을 보트에 태우고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2시 5분, 두개의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를 제외한 마지막 구명 보트인 접이식 보트 D가 떠났다.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모두 제 살길을 찾으라고 했으며 배를 포기함을 선포했다. 남은 사람들은 접이식 보트 2개를 기다리거나 바다로 뛰어들거나 선미로 달려나갔다. 프로펠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2시 15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파도에 의해 깨짐으로써 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 와중에서 안전한 곳을 찾던 사람들 몇몇이 그곳으로 빨려들어갔다. 2시 17분, 배가 보트 갑판이 있는 곳까지 가라앉았다.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리드는 더 이상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침수되어가는 통신실에서 빠져나왔다.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 두 척은 파도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보트 B는 30여명의 사람들이 선 상태로 뒤집혔고(이후 카르파티아에 구조될 때까지 2등 항해사 라이톨러의 지휘아래 아침까지 떠 있었다.) 접이식 보트 A는 물이 반쯤 찼다. 그리고 굴뚝 1이 선교루쪽으로 쓰러지면서 몇몇 사람들을 덮쳐버렸다. 배가 급속도로 기울면서 가라앉기 시작함에 따라 배 내부의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발생했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시켰다. 2시 18분,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더 커졌다. 그러던 중,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잠깐 깜박거리다가 완전히 정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잠깐 후, 바닷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굉음과 함께 3번째와 4번째 굴뚝(환기구)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동시에 굴뚝 3과 환기구인 4가 부러졌다. 이윽고 뱃머리 부분은 잠기고 배 뒤쪽은 바다로 내동댕이 쳐서 일직선이 되었으나 곧바로 다시 기울어서 점차 수직에 가까워졌다.
마침내 운명의 시각 2시 20분, 배와 해수면 사이의 내부 압력이 같아지자 타이타닉호는 물을 뿜어내며 수직으로 서면서 서서히 물속으로 들어가다가 완전히 침몰했다. (이 와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차디찬 바다로 떨어져 나갔다.)
배에 남아 있던 1500여명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러졌다. 구명보트에 탔던 사람들은 배가 침몰했던 곳에서 울려퍼지는 아우성을 들었다. 가장 적은 탑승수인 12명을 태운 1번 보트에 탑승한 화부 헨더릭손은 현장에 돌아가자고 요구했으나 더프 고드만 부부와 배를 맡은 시몬스가 반대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고 결국 무산되었다. 5번 보트의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만 또한 현장에 돌아가려 했으나 몇몇 여자들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6번 보트에서는 마가렛 몰리 브라운 또한 현장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요구했고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으나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길 것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14번 보트의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 보트들을 재편성한 뒤 지원자는 남기고 다른 사람들을 다른 구명보트로 옮긴 뒤 구조를 향해 나섰으나 그가 준비를 갖추어 구조로 향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대부분이 30분 안에 죽었다. 저체온증 이전에 심장마비로 몇 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별세자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모친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중 6명만이 그 곳에서 건져나왔다.
배가 침몰한 뒤 약 1시간 30분 후인 새벽 3시 55분에 도착한, 선장 아서 로스톤이 맡은 카르파티아 호는 약 4시간 30분 동안에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5명의 사람은 구명보트에서 죽었다.) 배는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 담요,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해 놓았다. 그리하여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한 후, 속도를 줄이고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으나 시신들은 파도에 쓸려가서 거의 보이질 않았고 흩어진 잔해들과 시신 1구밖에 보이질 않았으며, 이때까지 물 속에 살아있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더 이상의 수색은 포기하고 뒤늦게 사고 해역에 도착한 캘리포니안 호에게 생존자를 더 찾아달라고 한 뒤에, 3일 후 뉴욕에 도착했다.
며칠 후, 시신 인수를 위해 맥케니 베넷 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이 보내졌다. 총 328구의 시신이 바다에서 인수되었는데, 그중 119구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그리고 선원들의 시신(바다에서 죽은 선원은 자신의 고향인 바다에 묻힌다는 전통에 따라)은 영국에서 바다에 장사지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 승무원과 각 호실, 또는 남녀, 아동간 구조된 인원과 구조되지 못한 인원들은 다음과 같다. 1등실에 탑승한 어린이 중에서는 당시 2살이였던 헬렌 로레인 알리슨양만 유일하게 구조되지 못했으며 2등실에 탑승한 어린이는 전원 구조되었다. 반면 2등실에 탑승한 성인남자 승객은 168명 중 겨우 14명만 구조되어 92%에 달하는 인원인 154명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구조된 탑승자가 1등실과 2등실(여성) 위주로 몰려있는 것으로 미루어볼때 구조작업시 공평하게 구조하지 않고 각 객실의 승객들을 차별해서 구조했음을 알 수 있다. 부자들과 사회 각계층의 고위인사들은 1등실에 탑승했기 때문에 상당수가 구조되었지만 3등실에 탑승한 이민자들은 과반수 이상이 구조되지 못했는데 특이하게 이민자들보다도 신분이 낮은 하인들이 많이 구조되었다. 하인들의 경우 고위인사들을 보좌하기 위해 1등실에 탑승한 상태였는데 해당 하인의 주인들이 자신의 하인을 구조하라고 승무원들에게 요구했기 때문이였다.
탑승자 종류 | 총원 | 구조율 | 사망율 | 구조인원 | 사망인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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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실, 어린이 | 6 | 83% | 17% | 5 | 1 |
2등실, 어린이 | 24 | 100% | 0% | 24 | 0 |
3등실, 어린이 | 79 | 34% | 66% | 27 | 52 |
1등실, 여성 | 144 | 97% | 3% | 140 | 4 |
2등실, 여성 | 93 | 86% | 14% | 80 | 13 |
3등실, 여성 | 165 | 46% | 54% | 76 | 89 |
1등실, 남성 | 175 | 33% | 67% | 57 | 118 |
2등실, 남성 | 168 | 8% | 92% | 14 | 154 |
3등실, 남성 | 462 | 16% | 84% | 75 | 387 |
승무원, 여성 | 23 | 87% | 13% | 20 | 3 |
승무원, 남성 | 885 | 22% | 78% | 192 | 693 |
어린이 총합 | 109 | 51% | 49% | 56 | 53 |
여성 총합 | 425 | 74% | 26% | 316 | 109 |
남성 총합 | 1690 | 20% | 80% | 338 | 1352 |
전체 총합 | 2224 | 32% | 68% | 710 | 1514 |
승객들을 구하거나 품위있게 죽은 영웅들도 있었다.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구명보트 승선을 거부하고 끝까지 승객들을 지도하다가 죽었다. 배의 설계자인 토마스 앤드류스는 승객들이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돕다가 1등실 흡연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기관장인 조셉. G.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와 기관부 승조원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오직 2분 전, 그러니까 배의 불이 완전히 꺼질때까지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는 충분히 구명보트에 탑승할 수 있었으나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을 도와주러 간 것이 화근이 되어 구명보트에 탑승하지 못하고 타이타닉호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타이타닉호의 5등 항해사인 해럴드 로우는 구조자들을 인솔하기 위해 보트에 탑승했다. 하지만 보트가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곳으로부터 벗어나자 구조자들이 탑승한 보트를 전부 한곳에 모아놓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해럴드 로우는 자신이 탑승한 14번 배에서 여자, 어린이, 노약자들을 다른 배에 옮겨 태운 뒤 지원자들을 자신의 배에 모아서 타이타닉이 침몰된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 곳에서 해럴드 로우는 필사적으로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겨우 4명을 구조하는 데에 그쳤다. 이후 해럴드 로우는 영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도 해군 예비역으로 참전, 중령 계급에 이르렀다. 1944년에 고혈압으로 6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감리교회 신자인 월리스 하틀리(1878년-1912년)가 바이올린 연주와 지휘를 맡은 8명의 연주대는 혼란에 빠진 승객들을 위로하기 위해 배가 침몰하기 고작 10분 전까지 곡을 연주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빈 후 헤어졌으나 비극적이게도 그들 모두는 죽었다. 연주대가 연주한 곡이 어떤 곡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두 곡으로 성가인 '364. 우리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Nearer my God, to thee(가톨릭 성가로는 '151. 주여 임하소서')와 감리교회 찬송가인 가을/Autoume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연주대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 연주한 뒤에 행운을 빌며 헤어지는 것으로 나온다.
토마스 바일스 신부는 기독교 성직자의 양심으로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고 사람들의 구명보트 승선을 도왔다. 구명보트를 타지 못하고 죽을 운명만을 기달리는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 용서를 받는 성사인 고해성사를 집전하여 위로하였고, 갑판 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다가 죽었다.
백만장자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자신은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 현지처와 하인을 구명보트에 태웠다.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것이다"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그가 남긴 유산으로 훗날 구겐하임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노부부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실이 좋은 노부부였다. 이사도라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그의 부인도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하였다. 부인은 하인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구명보트에 태운 뒤 남편과 함께 죽었다. 이들 부부의 포옹을 기억하는 생존자가 많다.
당시 최신 과학기술로 만든 타이타닉호의 침몰참사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문명의 진보와 인간의 이성에 낙관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당시의 서방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 희생자 수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3명에 달해 당시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라고 불렸으며, 살아남은 사람은 711명에 불과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항해의 안전성 확보에 대해서, 조약의 형태로 국제적으로 결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14년 1월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회의"를 열어 13개국이 참가, 1914년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SOLAS), 1914)이 채택되었다. 또한 영국 상무성은 구명보트 구비 기준을 배의 총 정원으로 변경하였다. 그 후로, 여러 배가 조약에 따라 구명보트를 늘렸으며, 이중에는 타이타닉의 자매선 올림픽호, 브리타닉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미국에서는 선박에의 무선 장치 배치의 의무 부여가 강화되어 무선 통신 기계가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 미국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Robert Ballad)는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최초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과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수심 약 4000미터에서 발견된 두 동강난 선체는 각각 600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약 20% 정도가 침몰 과정과 그 후의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배의 앞쪽 부분은 비교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뒷쪽 부분은 선체가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서 훼손이 심했으며, 잔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배의 모든 연돌은 침몰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망루는 선교를 뭉개고 쓰러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옷은 발견되었으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마 조류로 인해 흩어졌거나 바닷물의 유기물에 녹아 없어진 듯 하였다. 발라드는 배를 발견하고 한동안은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으며, 참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1985년 미국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Robert Ballad)는 뉴펀들랜드 섬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과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1993년 9월에는 미국 조선 전문가 윌리엄 가츠케(Wiliam Garzke)가 당시 기록을 근거로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로 해석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배가 빙하와 충돌하는 순간 엄청나게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고 증언했는데, 그 소리는 저급 강철판이 만들어낸 대재앙의 신호였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건져올린 선체 파편을 연구한 결과 충돌시 휘지 않고 부서지는 질이 낮은 강철판을 사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면 침몰을 막았거나, 침몰시간이 지연되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타이타닉를 만든 회사가 사용한 강철판은 가장 좋은 것이었다. 당시 제철기술로는 최고급 강철판조차 황의 함유량이 너무 많았기에 낮은 온도에선 휘어지기보다는 부서져버리게 된 것이다.
영국 화이트스타라인사(社)의 대형 호화여객선. 1912년 건조되었다. 총톤수 4만 6329t, 길이 269.1m, 나비 28.2m, 속력 22kn. 획기적인 이중 선저(船底)와 방수구획을 채용한 <불침선(不沈船)>으로서, 당시 4만t급 이상 객선의 개척선이었다.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뉴욕을 향해 2224명의 승객·승무원을 태운 처녀항해로 출항하여, 5일째인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의 그랜드 뱅크스 남쪽 150㎞ 난바다를 22kn(시속 약 40.7㎞)로 항해하던 중 빙산에 부딪쳐 수면 아래에 길이 90m 가량의 틈이 생겨, 16개의 방수구획 가운데 앞부분 5구획이 침수되어 15일 오전 2시 20분에 침몰하였다. 구명정 수용인원은 모두 1178명 밖에 안되어 1513명의 희생자를 낸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이며 이때 국제적으로 정해진 구난신호 <SOS>를 최초로 발신하기도 하였다. 이 참사결과 1913년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런던에서 열려 오늘날과 같이 배의 안전시설을 충실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2년4월10일, "Titanic"(타이타닉호)의 운명은 출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4일 뒤, 14일은 타이타닉이 심야 빙산에 접촉하여 침몰, 다음날 새벽에 걸쳐 침몰한 날이다. 승원승객 1,513명(인원의 통계에는 불분명)이 희생이 되어, 당시 세계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되었다.
이 배는 영국의 White Star Line이 북대서양 항로용으로 계획한 3척의 여객선 가운데 2번째의 배였다. 자매선으로는 올림픽(RMS Olympic), 이후에는 병원선으로 운항된 브리타닉(HMHS Britannic, HMHS는 His Majesty Hospital Ship)이 있다. 이 세척을 통틀어 "Olympic Class"라고 불린다. 토마스 앤드루스(Thomas Andrews Jr., 본문 하단에서 추가설명)에 의해 설계되어,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 있는 허랜드 앤 울프(Harland and Wolff Heavy Industries Ltd) 중공업 회사에서 건조되었다.
당시 세계최대의 객선이 었으며, 타이타닉의 정식명칭은 RMS Titanic(Royal Mail Ship or Steamer)이라고 불린다. 타이타닉의 조선계획은, 20세기 초두에 조선업으로 세력을 자랑하던, 허랜드 앤 울프의 회장 피리가, 1907년 런던의 메이페어의 저녁식사 때에, White Star Line의 사장 브루스 이즈메이 사장에게 대형객선 3척의 건조계획을 발표함으로 시작된다. White Star Line은 당시 치열한 경쟁을 다투고 있던 북대서양 항로에서, 대서양 횡단의 스피드 경쟁 기록인 "불르 리밴드(Blue Riband) 상" 이라고 불리는 스피드 경쟁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여유 있고 쾌적한 여객을 목표로 선전하고 있던 회사였다.
따라서 타이타닉도 스피드보다는 설비의 화려함에 중점을 두어 설계되었다. 물론 안전 대책에도 만전을 다했으며, 방수구획이 설치되었다. 선체는 수면 위까지의 높이가 있는 격벽으로 16구 획으로 나누어져, 이 가운데 2구 획이 침수되어도 침몰하지 않는 구조로, 격벽은 선교(브리지)에서도 원격조작으로 즉시개폐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타이타닉은 불침선(不沈船)이라고 선전까지 되었다.
실제 배의 구조는 지금 알려진 그때의 구조를 보아도 상당히 안전한 것을 알 수 있다. 라는 지적도 있다. 올림픽 클래스 타이타닉에는 1년 전에 먼저 준공된 "언니 선박" 올림픽과, "동생 선박" 브리타닉(HMHS Britannic)이 존재했다. 이것은 돈이 되는 "달러 항로"였으며, 타사와의 경쟁이 심해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는 1척으로는 당해낼 수 없어서, 최저 2척을 항상 교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객선 3척 가운데 처음으로써 올림픽호의 조선이 개시되어, 거의 같은 시기에 2번째의 타이타닉호가, 이보다 조금 늦게 3번째의 브리타닉호가 건조되었다. 브리타닉은 타이타닉 침몰로부터 상당히 늦게 조선되어, 안전 면에서도 새롭게 크게 보완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병원선으로 징용되어, 상선으로써 한 번도 쓰인 적 없이 침몰했다.
한편, 올림픽은 유송선으로써 징용되었으나, 무사히 전화를 피해 객선으로 복귀에 성공했다. 1935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다 은퇴한다. 타이타닉은 올림픽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 되었던 관계로, 커다란 계단이나 다이닝 룸의 장식, 식사의 메뉴 그리고 서비스 등, 그 외관은 물론 모든 점에서 상당히 닮았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 만이 가장 커다란 선박인 것처럼 연출되고 있었으나, 당시는 사실 올림픽이 이 부분에서는 그 대표였으며, 타이타닉, 브리타니라는 2척의 자매 선을 포함해 "올림픽 클래스"로 불렸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의 사진으로 올림픽의 사진이 쓰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좀 더 알게 쉽게 설명하자면, 타이타닉은 재탕한 홍차였으며, 당시에는 올림픽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던 존재였다.
올림픽과의 차이점, 먼저 운항하고 있던 1번째 선박 올림픽의 문제점이나 개선점을 보완하기 위해 타이타닉의 설계는 다소 변경되어, 외관도 올림픽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를들면, A 갑판(B deck)의 일등 전용 프로멘나드 덱(Promenade deck, 유보도)의 창이 전면 바다를 향해 베란더와 같이 개방되어 있는데 반해, 타이타닉은 중앙부분에서 선수측의 전반 부분에 유리창을 설치하여 반 실내의 구조로 되었다. 이것은 북대서양의 강풍으로부터 승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며, 이 결과 타이티닉호는 올림픽호 보다 날씬한 스마트한 인상을 주어, 외관상으로 2개의 자매 선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차이의 요소가 되었다.
RMS Titanic의 first class cabin과 프로미나드덱(Promenade deck, 갑판산책로)
이 외에도 올림픽호는 B 갑판(B deck)의 창 측 전체에도 프로미나드 덱(Promenade deck, 갑판 산책통로)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타이타닉호의 설계도에서는 B 갑판(B deck)의 프로멘나드 덱이 폐지되어, 대신 창측 전체에 1등 객실을 새롭게 설치하도록 변경되었다. 그 결과 1등 객실이 수가 올림픽에 비교해 증가하여, 전용의 프로멘나드 덱도 설치된 스위트룸(영화 타이타닉의 히로인의 혼약자의 방)이 2방이 설치되게 되었다.
세계최대의 객선, 당시 두 자매 선의 중량은 같을 예정이 었으나, 객실 수가 늘어나 최종적으로는 타이타닉의 중량이 올림픽의 45,324톤보다 1,004톤 무거운 46,328톤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타이타닉은 올림픽을 넘어, 당시 확실히 세계최대의 객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에 가려 있었던, 타이타닉의 지명도가 올라가게 된 것은 우습게도 침몰사고 뒤부터이며, 나쁜 의미에 의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조난사고의 불길한 전조
1912년4월10일에,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 사진 참고)에서 타이타닉(RMS Taitanic)은 처녀항해에 출항했다. 이때부터 불행한 징후는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이타닉의 스크루에서 발생한 수류로 인해, 객선 뉴욕 (SS City of New York)과 충돌을 일으킬 뻔했었다.
오른쪽의 타이타닉(RMS Taitanic)과 충돌 일보 직전에서 회피한 왼쪽의 뉴욕 (SS City of New York)
"Nearmiss" 타이타닉(RMS Taitanic) 스쿠류에서 발생한 거대수류 발생장면
Titanic on her way after the near collision with the SS New York.
On the left can be seen the Oceanic and the New York.
E.J 스미스(Edward John Smith) 선장의 지휘하에 승원승객 2,200명 이상을 태우고 있었다. 이 배의 1등 특별실는 6일간의 항해 비용이 4,350달러로 알려졌다. 출항하여 먼저 프랑스 쉘부르(Cherbourg-Octeville)와 아일랜드의 퀸즈타운(현 Cobh)에 기항해, 미국의 뉴욕 항으로 향했다. 쌍안경을 넣어 두었던 록커에 열쇠를 인수인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담당 선원이 퇴선해 버려, 록커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한 채 육안으로 전방의 장애물을 관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타이타닉 운명"의 결정적이었다한다.
이것이 뒤에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오게 되는 원인이 된다. 14일 오전부터 가끔 해당 해역에서는 빙하의 해류군의 위험이 선박 사이에서 무선 통신으로 경고되고 있었다. 적어도 타이타닉은 같은 날 6통의 이와 같은 경고 통신을 수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절의 북대서양 항해에서 경험상 자주 있을 수 있는 일로 취급되어 무시되었다.
"Olympic Class"의 3번째 선박 브리타닉호(HMHS Britannic, HMHS는 His Majesty Hospital Ship)
병원선으로 탈바꿈한 브리타닉호의 최후
1915년12월12일 진수직후 영국 해군성의 명령으로 병원선으로 징용되어 선체는 순백으로 도장하고 녹색 라인과 적십자를 그려 넣었다. 1916년11월12일 14시 23분 영국에서 그리스 에게해 림노스(Limnos or Lemnos)를 향해 출항했다. 이것은 브라타닉의 6번째 항해였다. 11월15일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11월17일 아침에는 석탄연료와 식수보급을 위해 나폴리 항에 도착했다. 메시나 해협 (Stretto di Messina)을 통과하고, 11월21일 그리스 에게해에서 독일군이 3주전에 부설한 기뢰에 접촉하여 21명의 사망자를 내고 120미터 해저에 침몰했다. 이것이 브리타닉의 마지막 항해였다.
그리고 타이타닉의 통신사들은 여객들의 전보발신 업무에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4월14일 23시40분, 북대서양의 뉴펀들랜드(Grand Banks of Newfoundland) 해역에 도착했을 때, 타이타닉의 감시역이 전방 450미터에 높이 20미터 정도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 불행히도 물론 이때에 쌍안경은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타이타닉의 높이는, 선체 바닥에서 굴뚝 끝 부분까지 52.2미터. 빙산은 그 10% 정도 밖에 수면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수중에서 충돌할 위험이 대단히 높다.)
충돌 회피행동, 감시역의 프레더릭 프리트(Fredrick Fleet)와 레지널드 리(Reginald Lee)는 빙산을 발견하자 즉시 비상종을 3번 치고 나서 전화로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취해진 행동은, 전속력 후진(Full Astern)이란 지령을 보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22.5노트에서 정지하기까지는, 족히 1,200미터의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수부분은 회피가 되었으나 배 전체의 접촉을 피할 수 없었다.
빙산은 우현을 스쳐서 배는 멈추었다. 충격은 선교(브리지)에서는 적었고, 이때 회피되었는지 아니면 피해가 적은 걸로 생각했었다. 배와 빙산은 최대한 10초간 정도밖에 접촉하지 않아 선체의 흔적은 겨우 몇 인치 정도로, 손상 넓이를 합쳐도 겨우 1입방 미터 정도의 손상이었던 것이 나중에 해저탐색에서 판명되었다.
그러나 우현 선수에는 거의 90미터에 걸쳐서 가늘고 길게 생긴 손상은, 선수의 5구 획에서부터 침수를 가져왔다. 이것은 방수격벽의 한계를 훨씬 초과하는 것으로, 격벽을 넘어 엄청난 해수가 방수구획을 흘러 넘쳐, 선수에서 선미로 향해 침수가 확대, 배는 선수부터 천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침몰까지 하게 되는 손상을 받은 원인으로써는, "측면을 스치는 듯이 빙산에 충돌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또 당시 뒤떨어진 철강기술로 인해 불순물로 황화 망간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선체의 철강이 사고가 난 이 날과 같은 저온 날씨에 약해지는 성질이었다는 것이 최근의 샘플조사에서 알려졌다.
타이타닉 선장 E.J 스미스(Edward John Smith)는 배수를 시도해 보았으나 겨우 수분의 시간을 버는데 그쳤으며, 거의 효가 없는 수고로 그쳤다. 날이 바뀌어 4월15일 0시15분, 조난신호 "CQD"를 발신, 부근의 선박에 구조를 청했다. 이때 약 18-3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리랜드 사의 화물선 캘리포니어가 정박해 있었으나, 한 명밖에 없는 통신사가 취침 중으로 연락이 전달되지 않았다.
또 캐나디안 패시픽 사의 마운트 텐푸르호(SS Mount Temple)도 조난신호를 수신하여 구조에 향했으나, 타이타닉에서 20킬로 근처의 지점에 도착해서, 선장 헨리 무어가 빙산과 충동을 두려워해 정선하여, 모든 조명등을 끄고 모르는 척, 죽은 척하고 있었다. (조사 위원회에 제출한 항해일지에는 약 88킬로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은 복수의 승객이, "타이타닉 선체가 부러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의 소리를 들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 외에도 바마(129킬로 거리), 프랭크프르트(277킬로 거리 ), 발틱(244킬로 거리 ) 등 많은 선박이 조난신호를 수신했었으나, 어느 선박이나 타이타닉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구조 현장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매 선인 올림픽도 타이타닉으로부터 약 800킬로나 떨어져 있었다. 결국 약 90킬로 떨어진 지점에 있던 객선 카파치아(RMS Carpathia)가 구조요청에 응답하여 전속력으로 구조 현장으로 향했으나, 17노트의 늦은 걸음걸이로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침몰로부터 2시간40분 뒤(타이타닉 빙산충돌에서 침몰까지와 거의 같은 시간)인 오전 4시였다.
조난신호는, 모르스 신호(Morse code)의 "SOS"(. . .---. . . /Save Our Ship or Save Our Souls)가 사용되었었으나, Global Maritime Distress and Safety System(GMDSS)로 바뀌어, 1999년 모르스 방식의 신호는 통신으로 폐지되었다. 당시에는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1874-1938, 이탈리아 무선 연구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 마르코니 무선회사 설립)가 발명하여, 1904년에 채택된 "CQD"(come quick, distress)가 사용되었으나, 이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되지는 않았다. 1906년에 열린 베를린 제1회 만국 무선통신 회의에서 "SOS"가 채택되어, 1908년에 정식으로 비준되었다. 그러나 "CQD"는 최초로 쓰기 시작한 영국의 통신사 사이에서는 이 뒤로도 수년간 계속 쓰여왔다. RMS Titanic과 충돌하여 침몰의 원인이 되었다는 빙산. 타이타닉과 같은 붉은 도료와 파편과 같은 것이 부착되어 있다. 빙산의 규모는 사진으로는 정확히 그규가 파악이 안 되고 있다.
Willy Stower가 그린 RMS Titanic의 침몰하는 모습
"CQD"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09년1월 북유럽 발틱 해(Baltic Sea)에서 "플로리다"와 "리버브릭"의 충돌 해난사고 였으며, 이 신호로 승객 1,500명이 구조되었다. "SOS"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09년6월 포르투갈에서 대서양 해상으로 1,000킬로 떨어진 아소레스 제도(Acores) 해역에서 난파된 "스라보니아 호"였다. 타이타닉 호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SOS"를 발신했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타이타닉 호가 처음 "SOS"를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마르코니식 전신기를 장비한 선박 가운데, "SOS" 조난신호를 처음 사용한 것이 타이타닉이었다 라고 하는 일이다.) 더불어 타이타닉은 당시 막 제정된 새로운 조난신호 "SOS"를 도중에 "CQD"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었다.
모르스 신호(Morse code)의 전신기( Telegraph machine, 1845년)
대만 淡水 紅毛城(옛 네덜란드 및 영국 대사관저) 소장 전시품의 모르스 신호기, 20090531 紅毛城은 영국의 중국(상해) 공략의 최초의 전초기지로 사용된 전략적인 무대였다.
RMS Titanic에서 타전된 "CQD" 및 "SOS" 구조 전문내용
충돌 약 30분 뒤인 0시15분에 "CQD"로 시작하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타전했다.
「CQD CQD CQD DE MGY 41.46N 50.14W SINKING WANTS IMMEDIATE ASSISTANCE」
번역 : "조난했다. 여기는 타이타닉. 북위 41.46 서경 50.14, 침몰하고 있다. 급히 구조를 요청함."
그리고 3분이 경과하고 나서 선장은 국제회의에서 정해진 새로운 조난신호를 보내도록 명령했다. 이것이 "SOS"라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이다.
「SOS SOS SOS DE MGY CQD REQUIRE ASSISTANCE POSITION 41.46N 50.14W STRUCK ICEBERG TITANIC」
"조난당했다. 여기는 타이타닉. 구조를 요청한다. 북위 41.46 서경 50.14, 빙산에 충돌했다. 타이타닉"
구명 구출
침몰이 다가오자 타이타닉에서는 좌현은 라이트러 2등 항해사가, 우현의 머독 1등 항해사가 구명보트에 승선을 지휘, 라이트러는 1등 객선의 여성, 어린이 우선의 승선원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한편의 머독은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하게 대응을 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상무성의 규정에는 정원 분의 구명보트를 설치할 필요가 없고(규정에는 978명분), 또 덱 위의 장소를 차지하는, 무엇보다도 이처럼 단시간에 침몰하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1,178명분의 구명보트밖에 준비돼 있지 않았다.
또 정원수를 태우지 않은 채 타이타닉으로부터 피난한 보트도 많았고, 이 가운데는 정원의 절반도 안 되는 인원을 태운 채 피난한 보트도 있었다. 결국은 많은 승원승객이 본선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충돌로부터 2시간40분 뒤의 2시20분, 굉음과 함께 타이타닉의 선체는 두 동강을 내며 갈라지면서(수중에서는 셋으로 분열), 드디어 차가운 해저에 침몰했다.
침몰후, 곧 구조로 향하면 조난자 모두가 달라붙어 구명보트까지가 침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른 승무원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많은 구명보트 중에서 한 척(좌현 14호 구명보트)만이 익사자 구출에 향했을 뿐이었다. "로우" 5등 항해사가 준비를 하고 구출에 향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결과,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기온, 해수온도가 낮았었던 관계로, 저체온증 등으로 거의가 짧은 시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저체온증상 이전에 차가운 해수로 심장마비로 수분 이내에 사망한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이 가운데는 아직 어린 아기를 껴안은 채의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영웅적 구조활동을 전개한 여객선 카파치아호(RMS Carpathia)
객선 카파치아호(RMS Carpathia)는 큐너드 라인 사(Cunard Line)의 외양객선으로 1903년 영국 리퍼풀에서 미국 보스턴이 처녀 출항이며, 1912년4월의 타이타닉 조난사고에서 생존자 구조를 담당한 선박으로 유명하다. 타이타닉호 사건에서는, 통신사 해럴드 콕댐이 타이타닉으로부터 조난신호를 받았을 때는, 카파치아호(RMS Carpathia)는 뉴욕에서 항해 중이었다. 콕댐은 이때 취침 중에 있는 선장 로스트론(British mariner Sir Arthur Henry Rostron, 1869 - 1940)을 깨워 보고했다.
British mariner Sir Arthur Henry Rostron (1869 - 1940) 선장
선장은 즉시 항로를 타이티닉으로 향하도록 해 전속력으로 구조현장으로 급행했다. 당시 카파치아호의 설계 최고속도는 14노트였으나, 선장은 선체의 과잉진동으로 인한 손상, 고압증기로 인한 보일러 폭발이라고 하는 위험성을 인식하면서도, 17노트라는 속도로 향했다. 오전 4시 카파치아호는 위험한 빙산해역을 벗어나 조난지점에 도착하여 706명을 구조하였다.
여객선 카파치아(RMS Carpathia)로 접근하는 Titanic-Lifeboat
여객선 카파치아(RMS Carpathia)의 선장과 승무원에게 감사엽서를 보낸 Titanic 생존자들
선장 로스트론은 뒤에 미국 대통령 윌리엄 타프트(William Howard Taft, 제27대, 1867-1930)로부터 백악관에 초청되어, 그에게 수상가능 것으로는 최상급의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18년7월17일 수송임무에 있던 카파치아호는 아일랜드 동해안에서 독일 잠수함 U55의 어뢰공격을 받았다. 생존한 승원승객 157명은, 다음날 구출되었다. 1999년 미국 작가이며 다이버인 커슬러(Clive Cussler)씨가 카파치아호의 침몰 해저에서 선체를 발견했다. 현재 카파치아호의 소유자는 Premier Exhibitions Inc로, 침몰선에서 유물인양을 하고 있다.
타이타닉 침몰의 음모설
"선박을 소유하고 있던 White Star Line이 재정난으로, 타이타닉호의 보험금을 받기 위해 일부러 가라 앉혔다."라고 하는 음모설이 있다. 이 소문의 근거로는, 타이타닉호를 관리하고 있던 곳은 White Star Line 사였으나, 그 사실상의 소유자는 White Star Line 사에 출자하고 있던 국제 해운 상사의 사장이었던 J.P 모건이었다.
모건은 타이타닉 호의 스위트룸에 승선 예정이 었으나, 출항 직전에 병을 이유로 취소하여, 대신 다른 부호의 부부가 승선하게 되었으나, 이 부부도 승선을 취소하여, 결국 White Star Line 사의 사장인 브루스 이즈메이가 이 방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틀림없이 병중인 모간은, 같은 시기에 북아프리카에서부터 프랑스에 걸쳐 여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나중에 판평되 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애인과도 만나고 있었다.
취소한 승객 중에는 모건과 상당히 깊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수명이나 되었던 점이 판명되었다. "모건은 이 처녀항해 중에 무언가 일어날 것을 사전에 감지하고 있었 던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것이다. 또 모건은 타이타닉호에 운반할 예정이었던 개인화물도 출항 직전에 취소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이 승선을 취소하면 이에 따라 사적인 물건도 취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도 있다. 또 승선취소의 원인이 된 "여행"의 목적 자체가 무엇이었 던가 하는 점이 밝혀지지 않은 것과, 이 사고는 처음부터 부주위한 운항으로 사전에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으로 "음모설"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 당시 타이타닉 호의 승선취소를 한 사람은 이 외에도 50여 명 이상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점은 증명된 사항이 아니다.
바꿔치기 된 여객선
타이타닉에는 자매 선으로 "올림픽"이 타이타닉 보다 1년 정도 빠르게, 북미노선에 투입되었었다. 올림픽에는 타이타닉이 취항하기 전에 2회 사고를 일으키고 있다. 1911년9월30일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 해역에서 영국 해군 순양함 "호크"와 접촉, 이 사고는 영국 해군 사문회에서 심리되어, 올림픽측의 실수로 인정되어, 해난보험은 일체 받지 못하였다.
1912년2월24일 대서양을 항해 중에 바닷속의 장애물에 자초되어, 스쿠류 한 장을 손상시키는 사고를 일으켰다. 이 외에도 선체의 중요한 부분에도 문제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어, 장기간의 수리가 필요로 했다. 이 두 가지의 사고로 볼 때, 올림픽이 가까운 장래에 파기될 운명의 선박이 아니었는가? 이 점으로 선박을 바꿔지기 했다는 논거가 되고 있다. 즉 폐기 직전의 올림픽을 내장설비 등 약간 사양을 변경하여 "타이타닉"으로 부활시켜, 고의로 빙산에 부딪치게 했다는 소문이었다.
이러한 일연의 음모설이 일어나는 상황증거로,
*석탄창고의 화재가 빙산과의 접촉 사고 전일까지 진화되지 않았다. (일부러 연소시켜 선박을 약체화 시켰다)
*대서양을 항해 중에 다른 선박으로부터 6,7회 "빙산경보"가 보내졌으며 이 가운데는 항로상에 존재하는 가능성이 있는 빙산도 있었으나, 매번 무시되었다. ("빙산에 둘러싸여 움직일수 없다"는 의미깊은 메시지가 보내졌다.)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 출항 뒤에 감시용의 쌍안경이 일체 사용되지 않았다. (록커 속에 있었으나 열쇠가 없었다.)
*항해 중에 순항속도는 항상 22노트 이상이 었다. (감시가 불미한 상황에서 비상식적으로 선박의 속도가 빨랐다.)
*침몰 때에 빙산과 격돌한 부분과 다른 곳에 선체가 자체 무게로 두 동강이 났다. (선체가 자체 무게로 두 동강이 나는 일은 설계상 보통 있을 수 없다)
*타이타닉이 침몰했을 때, 100만 파운드의 보험을 받았다.
(당시로써는 이례의 금액이며, 건조비 50만 파운드를 크게 웃돈다.)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형의 선박이라고 하더라도 올림픽과 타이타닉에는 구조상의 상이한 점이 많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집트 미라의 저주설
"운반된 짐 속에 있던 미라에의 한 저주설"이란 서적이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미라의 저주인가? 라고 하는 점이 아래와 같이 언급되고 있다. 1910년 이집트에서 도굴자들이 피라미드 내부에서 "아문 라 신전"의 여왕의 미이라를 훔쳤다. 미라의 도굴 중에 도굴자의 한 사람은 급사. 이 미라를 도굴자는 영국의 학자에게 팔았다.
그러자 미라를 판 도굴자는 그날 밤에 급사. 미라를 산 영국의 학자는 3일 뒤에, 사냥을 갔다가 총이 폭발하여 커다란 부상. 미라를 가지고 영국으로 가는 도중, 동행한 2명이 급사. 그리고 미라를 취급한 이집트인 두명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학자는 공포를 느껴, 관을 어느 부호의 부인에게 양도했다. 그러자 부인의 모친이 돌연사. 이 부인도 공포를 느껴 미라를 대영 박물관에 기부했다. 전시된 미이라의 사진을 찍으려고 하던 카메라 맨이 급사. 전람회를 기획한 학자도 그날 밤 침대에서 급사.
이 무렵 뉴욕의 박물관이 미라가 필요하다고 요구해 왔다. 그래서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에서 뉴욕으로 수송하기 위해 타이타닉호에 실기로 했다. 그러나 미라는 불침선으로 알려진 타이타닉과 함께 대서양에 가라 앉아 버렸다. 그 뒤로 미라는 바다에서 끌어 올려져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또 미라는 2001년 경까지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까지도 보관되어 있는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또 생존한 선원이 "선장은 보통 때와 같이 빙산의 경고를 무시했다. 성격도 돌변해, 배의 스피드 업에 정신이 없었다."라고... 타이타닉 선장 E.J 스미스(Edward John Smith)에게 이상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이것에 대해서는 "미라의 저주"와의 관련성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 아무도 없다. 또 스미스 선장의 태도가 보통 때와 달랐다고 하는 것은, 처녀항해로 대서양 횡단의 스피드 경쟁 기록"(Blue Riband 상)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 라고 하는 설도 있다.
대서양 횡단의 스피드 경쟁(Blue Riband 상) 기록설
타이타닉이 빙산에 충돌한 것은, 대서양 최속 횡단기록(Blue Riband 타이틀)을 획득하려고 한 것이 원인이란 설이 있다. 이것은 당시 일반에 가장 널리 신빙성 있게 알려져 있다. 1912년 당시에 "Blue Riband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서쪽 항해와 동쪽 항해와 함께 모리타니아(RMS Mauretania, 통상 Maury)였으며, 평균속도는 26노트 가까운 것이었으며 두 배를 비교해 보면,
모리타니아 : 31,938톤, 기관 증기터빈 4기/4축, 기관출력 68,000마력, 최고속력 26노트(최고기록 28노트)
타이타닉 : 46,328톤, 기관 증기 레시프로 2기, 증기터빈 1기/3축, 기관출력 46,000마력, 최고속력 23노트이며, 기관의 성능으로 보아, 타이타닉은 "Blue Riband 타이틀"을 노릴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당시 "Blue Riband 타이틀"을 획득을 목표한 모리타니아와 같은 고속선은, 그 막대한 운항비용(연료비)을 수송하는 인원과 화물만으로는 충당이 불가능하고, 정부의 보조금에 의해 운항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타이타닉은 총톤수를 확대하여 수송력을 증대하여, 기관출력을 억제하여 연료비의 코스트를 절감하여, 보조금 없기로도 채산이 맞도록 운항이 되도록 설계된 배였다. 이 점으로 보아 타이타닉이 "Blue Riband 타이틀"을 획득을 노린다는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선적은 영국의 Cunard Line 소속, 당시 세계 최속의 객선. 이전에는 1897년 독일 객선 SS Kaiser Wilhelm der Große가 22노트(41km/hr)를 기록하여 "Blue Riband 타이틀"을 수상했다. 영국이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제1차 세계대전 때에 군사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주로 병사를 운반하는데 쓰였다. 모리타니아는 고속이었던 관계로 독일의 U보트에 격침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으며, 캐나다 정부의 의뢰로 하리팩스에서 리퍼풀까지 병사를 수송하는 수송선으로 활약하였다. 또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1917년에는 미군병사를 수송하기도 했으며, 이 가운데 종전을 맞이했다. 이 뒤로 다시 객선으로 부활. 1935년 정식으로 현역은퇴. 역사깊은 모리타니아의 해체가 결정되자 많은 팬들이 항의를 했으며,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까지 항의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타이타닉 사고후의 대책
최신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불린 최 신예선의 대사고는, 문명의 진보에 낙관적인 희망을 갖고 있던 당시의 구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고의 희생자 수는 여러 설이 있으나,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의하면, 이 사고로 희생자 수는 1,513명에 달해, 당시 세계 최악의 해난사고였다. 이 사고를 교훈으로 선박, 항해의 안전성 확보에 관해, 조약의 형태로 국제적으로 정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 1914년1월 "해상에서 안전을 위한 국제회의"가 열려, 구미 13개국이 참가, "1914년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조약"(The 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1914)로써 채택되었다. 또 미국에서는 선박에의 무선장치 설비의 의무제가 강화되어, 무선통신이 보급되는 원인이 되었다.
타이타닉의 해저탐사
이 뒤로 바트러의 호응으로 "타이타닉 국제보호 조약"이 제정, 같은 해 6월18일, 미국이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타이타닉을 보존대상으로 지정하여, 유물의 열화 등을 방지, 그리고 불법적인 유품회수 행위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해저의 타이타닉은 전복한 상태가 아닌 배 바닥을 밑으로 하여 가라앉아 있어. 제3굴뚝의 바로 밑 부분에서 부러져 있어, 해상에서 선체가 두 동강 났다는 증언과 일치하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심해는 박테리아의 활동이 약해 선체의 보존상태는 좋아, 많은 조각품으로 사용된 내장제품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운 나쁘게 다른 심해와 비교하여 수온이 높아 박테리아의 활동이 활발하여 배의 손상은 예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당초 선체는 충돌하듯 해저에 추락해, 선내의 비품은 물론 갑판의 작은 물건이나 유리창 등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을 걸로 생각했었다. 선수 부분의 난간은 아직 남아 있으며, 항해사실의 유리창도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또 선내에는 샹들리에를 포함한 비품이 아직 존재해, D deck(D 갑판)의 다이닝 룸에는 호화로운 장식으로 치장된 커다란 창문이 깨지지 않은 채 여러 장이, 아직도 빛나고 있었다. 객실의 한 곳의 세면대에 놓여 있었던 꽃병과 컵은 침몰 당시의 충격이나 90년 이상의 부식에 견디어, 현재까지도 침몰전과 같은 장소에 그대로 놓여 있다. 이것으로 보아 해저에 곤두박질 치듯이 해저에 가라않은 것이 아니라, 선수 부분부터 해저에 서서히 가라 않았다고 생각된다. 현재 타이타닉은 철을 소비하는 박테리아에 의해 이미 철재의 20%가 산화되어, 2100년경까지는 붕괴소멸할 것으로 보고있다.
RMS Titanic 항해사들
뒷줄 왼쪽으로부터(전원생환)
객선사무장, 허버트 맥크엘로이(Chief Purser Herbert McElroy)
2등 항해사, 찰스 하버드 라이트러(Second Officer : Charles Herbert Lightoller)
3등 항해사, 하버드 존 빗트맨(Third Officer : Herbert John Pitman)
4등 항해사, 죠셉 그로브 복스홀(Fourth Officer : Joseph Grove Boxhall)
5등 항해사, 해롤드 곧후리 로우(Fifth Officer : Harold Godfrey Lowe)
앞줄 왼쪽으로부터(전원사망)
6등 항해사, 제임스 폴 무디(Six Officer : James Paul Moody)
항해사장.부선장, 헨리 와일드(Chief Officer : Henry Tingle Wilde)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Captain : Edward John Smith)
1등 항해사, 윌리엄 맥마스터 머독(First Officer : William McMaster Murdoch)
RMS Titanic 콜렉션
1910년 White Star Line(RMS Titanic) 사의 항해사용 유니폼 단추(직경 2.6cm)
1910년 White Star Line(RMS Titanic) 사의 스튜디어스 유니폼 단추 (직경 1.6cm)
항해사와 스튜디어스 용의 실물 크기 비교
(직경 2.6cm) (직경 1.6cm)
White Star Line 사의 선장 모자용 "Wappen"
RMS Titanic(White Star Line)의 기관사용 호루라기
오리지날은 생환한 3등 항해사, 하버트 존 빗트맨(Third Officer : Herbert John Pitman)이 가지고 있었으나, 1991년 런던 옥션에 약 800만원에 낙찰되었다. 아래의 것은 1912년 당시의 것을 충실히 재현했다.
"The Acme Thunderer, Made in England"
RMS Titanic의 메뉴(Titanic Entertainments)
일등선 객실용 메뉴 75호주 달러, 3등선 객실용 메뉴(Steerage) 75호주 달러, 그리고 각 메뉴에는 어린이 요금이 따로있다. 일등선 객실용 (First Class) 레스토랑에서는 남성은 쟈켓 그리고 넥타이 착용이 의무적이다. 이 메뉴표는 細野正文(호소노 마사부미, 일본인 유일의 생존자로 승선자의 한 사람)씨가 제공한 것임.
타이타닉의 주요 승원승객 명부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이 사건으로 자기 스스로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
항해사장.부선장, 헨리 와일드는 이 사고로 사망
1등 항해사, 윌리엄 마크마스터 머독은 이 사고로 사망.
(실제는 승객을 쏘지도 않았으며, 자살하지도 않았다.)
2등 항해사, 찰스 하버드 라이트러는 전복한 B호보트에서 12호 보트로 생환.
3등 항해사, 하버드 존 빗트맨는 5호 보트로 생환
4등 항해사, 죠셉 그로브 복스홀은 2호 보트로 생환
5등 항해사, 해롤드 곧후리 로우는 14호 보트로 생환
6등 항해사, 제임스 폴 무디는 이 사고로 사망
기관장, 죠셉 벨은 이 사고 사망.
밴드 마스터, 월레스 하트리는 이 사고로 사망.(그는 승무원의 신분이 아닌, 2등 선객으로 승선)
細野正文(호소노 마사부미, 일본인 유일의 생존자로 승선자의 한 사람)
Isidor Straus 조난자(1845-1912), 독일출신 미국 실업가, 뒤에 메이시스 백화점을 매수, 세계적인 백화점으로 키웠다.
Elizabeth Gladys “Millvina” Dean(1912- ) 오늘 현재 유일의 생존자, 당시 생후 2개월로 최연소 승선자.
바바라 웨스트 타닌턴, 2007년 사망, 최후에서 2번째의 생존자, 조난당시 생후 11개월.
리리안 애스프런드(Lillian Gertrud Asplund, 1906-2006)미국 여성,
사고의 기억이 있는 최후의 생존자로, 조난당시 5세
*레오날드 데카프리오(Leonardo Wilhelm DiCaprio, 1974- )는 이 사고로 사망,
윈슬랫과 함께 타이타닉 침몰사고와 깊은 관계가 있음, 할리우드 배우.
*케이트 윈슬랫(Kate Elizabeth Winslet, 1975- )은 이 사고에서 생환,
데카프리오와 함께 타이타닉 침몰사고와 깊은 관계가 있음, 할리우드 배우우
”The Titanic is now about complete and
will I think do the old Firm credit tomorrow when we sail”
타이타닉을 설계한 조선 기술자는, 북아일랜드 콤버(Comber)에서 1873년2월7일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치가로 활약, 고등 재판소 판사였으며, 그의 형 존은 뒤로 아일랜드 수상이 된 인물이다. 조선 기술자 토마스는 명문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타이타닉을 건조한 "허랜드 앤 울프"(Harland and Wolff Heavy Industries Ltd) 중공업 회사의 회장 "피리 경"의 자매이다. 토마스는 1884년 왕립 벨파스트 아카데미에 진학하여 1889년 16살 때에 "허랜드 앤 울프"에 견습생으로 입사했다.
MS Titanic의 설계사 Mr Thomas Andrews Jr."
간부 후보생으로 5년간의 수업은 기계공학. 기계구조 등의 기술적인 재능을 습득했다. 현장에서 중역과 같은 기술자 동료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으며, 1901년 28살 때에 "허랜드 앤 울프"사의 조선 책임자로 발탁되어, 유명한 해군 건축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Andrews는 이 무렵 White Star Line사 발주한 4척의 대형객선 「Celtic」, 「Cedric」, 「Baltic」, 「Adriatic」의 건조를 지휘했다. 1907년 "허랜드 앤 울프"사는, Andrews의 능력을 인정하여 이 회사의 사장으로 승진했다.
벨파스트 조선소에서는 위에서 아래까지 누구나가, 그의 일에 대한 능력과 성실하고 겸허한 인품을 존경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해에 "올림픽 건조" 계획이 발표되고, 세계 최대의 호화객선 "올림픽" 그리고 "타이타닉"의 기공식이 시작된다.
1908년 Andrews는 결혼하여, 2년 뒤에 1910년 장녀 "Elba"가 태어났다.
"Elba"
1911년5월31일 타이타닉 진수식, 동시에 올림픽이 처녀항해를 위해 리퍼플로 떠나는 이 날에는 이 모습을 보려고 10명의 인파가 벨파스에 모였다. 1912년4월2일 시험운전을 마친 타이타닉은, 10일 드리어 출항하는 날이었다. Andrews는 올림픽 때와 같이 선내의 최종점검과 이후 개량해야 할 점을 파악하기 위해 타이타닉에 승선하기로 했다.
그가 항해 직전에 처에게 보낸 편지에는, "지금 타이타닉은 거의 완벽한 배다. 내일 무사히 출항하면 우리 조선소는 더욱 이름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Andrews는 티켓 No. 112050으로 A36호실에 승선했다.
출항 후로 그는 차후 개선점을 첵크하고, 브릿지에서 설계도를 점검에 몰두하는 매일이었다. 4월14일 밤 11시30분 타이타닉은 빙산과 충돌, 선체우현측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했다. 스미스 선장과 함께 배의 손상을 조사한 Andrews는, 타이타닉이 1시간이나 1시간 반에 침몰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선장은 항해사들에게 구명보트 준비를 명령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Andrews는 승객, 승원들에게 "구명보트에 타라, 구명동의를 착용해라."라며 명령하면서, 다들 용기를 갖도록 힘썼다. 오전 2시10분 Andrews는 일등 흡연실에서 구명동의를 착용하지 않은 채, 난로 위에 걸려 있는 그림, "새로운 세계의 접근"(The Apporoach To Plymouth Harbour, Norman Wilkinson)을 바라 본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최후의 모습이었다고 생존자의 한 사람이 증언했다.
Mr Thomas Andrews Jr. 이 때 그의 나이 39세.
선내 개량점검을 위해 타이타닉에 승선한, Andrews가 선발한 "허랜드 앤 울프"사의 기술자 8명도 이때 전원 사망했다.
The Nine Men Harland & Wolff Guarantee Group
Mr.Thomas Andrews Jr. ( Managing Director) |
Mr William Henry Campbell (Joiner Apprentice) |
Mr Roderick Robert Crispin Chisholm (Chief Draughtsman) |
Mr Alfred Fleming Cunningham ( Apprentice Fitter ) |
Mr Anthony Wood "Archie" Frost ( Foreman Fitter ) |
Mr Robert J. Knight ( Leading Hand Fitter Engineer ) |
Mr Francis "Frank" Parkes ( Apprentice Plumber ) |
Mr William Henry Marsh Parr ( Assistant Manager of the Electrical Department ) |
Mr Ennis Hastings Watson ( Electrician Apprentice ) |
유명한 자선가이자 뉴욕의 맨하탄 한복판의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한 스트라우스부인은 구명보트에 탈 권유를 두번이나 뿌리치고 남편과 마지막 순간을 같이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친척이나 가족들은 그다지 그들의 선택에 놀라지 않았다. 이유인즉, 둘은 생일잔치도 항상 같이 치루는가 하면, 헤어져 있을때도 매일 편지를 교환할 정도였기에....타이타닉이 가라앉기 시작할때 선원들이 보트에 타도록 권유했지만 그녀는 대신 하인을 태우고 이제 이것도 필요없을 것이라며 입고있던 모피코트마저 건네주었다.
마지막으로 두번째 보트에 강제로 태워진후 남편이 물러서자, 이 또한 뿌리치고 나와 67세의 남편과 마지막으로 포옹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 "물은 사랑을 채울수도 없는 반면, 사랑을 죽이지도 못한다....."
1912년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생존자 '릴리언 거트루드 애스플런드' (1907~2006)
사고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생존자로 침몰 당시 5살 이었으며, 평생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2006년 5월 6일 99세로 사망했다.
마지막 남자 생존자 (2001년 사망)
타이타닉 탑승자 생존율
1위 - 1등실 여자와 아이들 (탑승객 156명, 생존자 145명) 생존율 93%
2위 - 여자 승무원 (탑승객 23명, 생존자 20명) 생존율 87%
3위 - 2등실 여자와 아이들 (탑승객 128명, 생존자 104명) 생존율 81%
4위 - 3등실 여자와 아이들 (탑승객 224명, 생존자 105명) 생존율 47%
5위 - 1등실 성인 남자 (탑승객 173명, 생존자 54명) 생존율 31%
6위 - 남자 승무원 (탑승객 876명, 생존자 194명) 생존율 22%
7위 - 3등실 성인 남자 (탑승객 486명, 생존자 69명) 생존율 14%
8위 - 2등실 성인 남자 (탑승객 157명, 생존자 15명) 생존율 10%
좌 : 침몰한 타이타닉호에서 발견된 실제 다이아몬드 목걸이
우 : 태양의 심장 호프 다이아몬드
2009년5월31일, 타이타닉호 최후의 생존자인 밀비나 딘(Millvina Dean, 여)이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타이타닉 인터내셔널 소사이어티는 폐렴 증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전했다. 딘은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생후 2개월의 갓난 아기로, 최근 생활고 때문에 자신의 소장품을 경매에 내놓아 화제가 되었다. 타이타닉 영화는 좌측의 학습자료실에 올려두었으니 한번씩 감상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