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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8월 26일 화요일]
《『대동야승』 中 조경남 『난중잡록』 趙慶男 亂中雜錄
1608년 6월 백관들이 날마다 연명상소로 진(珒)을 죽이고 사신을 잡아오기를 청하였다.》 [126]
○ 6월 16일 접대도감(接待都監) 대신의 계(啓)는 다음과 같았다.
차관이 사관(使館)에 도착한 뒤에 자못 임금께서 면회하지 않는다고 성을 냅니다. 신 등이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사관 앞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차관이 당에 나와 앉으면서 바로 신 등을 시켜 들어와 절하는 예를 거행하라 하고, 다른 여러 관원은 물러가라 하며, 신 원익ㆍ항복ㆍ덕형만 서편으로 앉으라 하고 차 마시는 의식을 갖추면서 계속하여 신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성지를 받들고 이 나라에 온 것은 반드시 임해를 보려고 하는 것인데, 보지 못한다면 무슨 말을 가지고 돌아가 아뢰겠소? 또는 임해와 사군(嗣君)은 한 장소에서 대질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번 임해만 보게 되면 일은 이것으로 결말을 것인데 어찌하여 이처럼 지체되오? 사왕(嗣王)이 이미 마중나와 맞이하지도 않고 사관에 도착 된 후에도 또한 와서 보지도 않으니 주객 간의 예절이 과연 이와 같겠소?” 하고, 말의 뜻이 확고하여 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신 등이 소방(小邦)같은 먼곳에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다는 것을 위로하고, 이어 고하기를, “소방(小邦)의 예는 명나라와 달라서 비록 서민층이라도 상복을 입은 자는 먼저 나와서 손님을 보지 않는데, 주상은 애통한 가운데 선왕의 영구(靈柩)가 겨우 떠난 뒤라 마음이 어수선하고, 또는 나라의 풍속에도 거리낌이 되어 감히 오셔서 보시지 못합니다.”고 반복해서 논란하였으나, 차관의 뜻이 심히 준엄합니다.
신 등이 또 말하기를, “임해는 죄가 종사에 있게 되어 밖에 나가 있게 되었고, 소방(小邦)에도 또한 과도관(科道官)이란 것이 있는데 모역(謀逆)한 사람은 그에 대한 사형은 비록 용서받았다 하여도 명나라의 관원과 면접한다는 것은 이치에 온당치 못한 일이라 하여 쟁론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뜻을 가지고 이미 상소로 알려 드리기도 하였고, 무진(撫鎭)에 두 노야에게도 또한 보고하였으니, 밝게 살피심을 바랍니다.” 하였고, 또 접반 배신이 개성에 있을 때에 급히 아뢰기를, “노야가 조문을 드린 것이라 하였기에 주상께서는 두 분의 조문을 받을 것으로 알고 계시는데, 두 분이 먼저 와서 보라고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차관이 대답하기를, “과도(科道)가 비록 이러한 것으로 다투나 성지도 이와 같으니 어떻게 임해를 보지도 않고 회보할 이치가 있겠소? 이미 죄가 종사에 있다고 하니 왕경(王京)으로 데리고 오면 내가 마땅히 참작하겠소. 급히 성밖에 거느려 오게 하여 한 번만 보면 일은 끝날 것이오. 우리들이 개성에 있을 때에 선왕이 빈소에 계시고 사군(嗣君)은 그 곁에 있어 가서 조문하려 한 것인데, 이제 들으니 이미 장례가 끝났다 하니 우리는 가서 조문할 것은 없는 일이요, 사군이 우리를 와서 보지 않으니 끝내 보지 못하고 간다면 큰일을 어떻게 완결짓겠소?” 하였습니다.
신 등이 절하고 물러 나오는데, 차관은 또 일러 말하기를, “사왕이 오늘 비록 늦게라도 반드시 나에게 와서 보아야 하고, 만일 끝내 오지 않을 것이면 급히 회보하시오.” 하였고, 신 등이 나온 뒤에도 또 집 안에 있는 인부를 시켜서 전해 말하기를, “사왕이 나에게 와보려면 상복 차림으로 와도 무방하다.” 하였습니다. 글의 주장하는 뜻을 보면 굳게 확정되어 움직일 수가 없고, 신 등의 말도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우므로 여러 관원들과 회의하니 저들은 주객의 예를 말하므로 무슨 말로 항거할 수가 없고 한 번이나마 접견하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항복ㆍ정구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소 인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상례인데 주인의 집에 초상이 있으면 손님이 먼저 와서 조문하는 것이요, 주인이 먼저 나가보는 예는 없으니, 여기에서 삼가지 않으면 온 세상에 기롱을 받게 되는데, 이제 노야는 빈주의 말만 가지고 책망하니 사왕이 들으시면 반드시 깜짝 놀라 편할 수가 없는 일이니 내일 바로 사관 밖에서 기다릴 것이니, 노야는 사왕이 도착 되기를 기다려 바로 막차(幕次)에서 먼저 조문하는 예를 거행하고 과군(寡君)은 조문받기를 끝내고 서로 보는 것이 거의 빈주의 예에 알맞는다.” 하였으나, 또한 듣지 아니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답하기를, “불행하게도 이러한 변례(變禮)를 만나게 되었으니, 비록 상복 입은 몸일지라도 마땅히 접견하여야 하겠으나, 다만 오늘이 월식(月食) 날이라 공식으로 서로 만나 예를 행하기가 온당치 못하다는 뜻으로 잘 말하고, 은미하게 일깨워서 그들의 마음먹음을 볼 것이요, 또는 임해를 보자고 하는 것도 진실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미 본 뒤에 대단히 난처한 일이 있게 되면 어떻게 결말지을 것인지 경 등은 뒷일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 이날 밤에 임금이 차관을 사관에서 접견하고 환궁한 뒤에 차관은 바로 회답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 부호군 최유원(崔有源)이 상소하기를, “조정에서 역적의 괴수를 성밖에 옮겨 들인다 하니 신은 가슴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면질(面質)이란 일은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가 없는 일이요, 차관이 비록 성지를 가지고만 소중히 여기나, 우리들에 있어서 어찌 잘 처리할 도리가 없겠습니까? 이미 전하를 보고, 또 역적의 괴수를 본다는 것은 면질이라는 이름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대의(大義)는 여지없이 무너진 것입니다. 명나라가 이것을 가지고 성을 낸다면 신은 청컨대 먼저 가서 죄를 받겠고, 뼈를 연산(燕山)에 묻어 오늘날에 이러한 것이 시행됨을 보지 않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니 가상하고 탄복할 말이다.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노라.” 하였다.
○ 정인홍이 명령을 받고 서울로 오다가 한강 가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또 병이 들었다고 말하였다. 임금은 문병 의원을 보냈다. 교지에 이르기를, “경의 올라옴을 들으니 국사가 거의 될려나 보다. 경학으로 보좌하고, 기강을 진착시킬 책임을 오로지 경에게 기대하는데 경은 어찌 서울에 들어오지 않고 문득 소장을 올리는가? 내가 매우 섭섭하노라. 병 조리하고 들어와서 나의 기대에 맞추어주기 바라노라.” 하였다.
[첨언] 정인홍이 교만하다. 임금이 부르면 제깍 와야지 한강 가에서 머물며 상소를 올리는 것은 자기의 가치를 올리기 위함이다. 이미 마음이 교만해졌으니 장차 실권을 장악하면 북인 독재를 할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됐다. 결국 15년 후인 1623년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 정인홍의 상소는 다음과 같았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병으로 촌가(村家)에 있다가 오늘 해질 무렵에 조보(朝報)를 얻어보게 되었는데, 금부도사와 병조낭청이 전교를 가지고 나와서야 비로소 도중에서 역적의 괴수를 데려온 줄 알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나라에서 차관을 보내어 임해 보기를 청한 것이 사신의 실수된 대답이라고 하나, 이제 역적의 괴수는 이미 죄를 자복하여 먼 섬 중에 위리안치시켰으니, 비록 역적의 괴수를 보지 않더라도 또한 황칙(皇勅)의 근본되는 의미에 어긋남이 아니며, 하물며 역적의 죄는 천지간에 용납을 받지 못할 것이어서 어리석은 백성들도 오히려 그의 면목을 보고자 않는데 명나라의 사신으로서 도중에서 흉악한 일개 인물을 보려 한단 말입니까? 마땅히 이 뜻을 가지고 타이를 것이요, 차관이 그래도 반드시 보려 들면 대신이나 대간들도 마땅히 죽을 것으로 한계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차관이 돌아가는 날에는 뒤를 따라 나가 명령을 의주의 국경에서 기다리면 황제도 마땅히 통촉하실 가망이 있을 것이요, 또는 급히 도사를 보내어 사신을 잡아와서 그들로 하여금 대답에 실수된 죄를 알게 하면 국가의 사정은 변명할 것도 없이 밝기가 하늘의 해와 같게 될 것입니다.
답하기를, “경이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바야흐로 깊이 염려하였는데, 이제 병중에도 나라를 걱정하여 주는 정성이 더욱 돈독함을 보겠노라. 다만 이러한 때에 사신을 잡아다가 국문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니 아직 그대로 두었다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노라.” 하였다.
○ 형조 참판 정구(鄭逑)의 상소는 다음과 같았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사헌부에 있을 때 깊이 알아주시는 성덕을 느끼며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차자를 올리어 죽임을 용서하여 주자고 청하였었는데, 이제 국문하는 일도 이미 끝났는데 의논이 크게 벌어져서 법대로 처단하자는 엄중성이 무섭기가 추상 같아서 모두 살려주자는 것을 그르다고 하니, 신의 생각으로 부끄럽고 두려워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해보려 하여도 인산 뒤이고 차관들은 또 도착하게 되어 정신없는 가운데에 감히 아뢰지 못하였고, 여러 날 동안 머뭇거리다가 답답하게도 아무 말 없이 죄만을 기다리던 중 시국의 의논은 더욱 준엄하고 외간의 의논도 더욱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내쫓으라고 명령하여 저의 분수에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고 함께 현재의 어려운 일을 잘 해나가자.” 하였다.
○ 정구(鄭逑)의 상소는 다음과 같았다.
신이 맡은 일에 충실하지 못하여 말하다가 실언까지 하게 되어 물의를 일으키게 되어서 더욱 오래 갈수록 떠들게 되니, 밝은 시대에 더럽힘만 되어서 성대한 은택을 등지게 되었으니, 이 때에 마음을 피력하여 물러나오지 않고 영화와 총애만 탐하여 구차하게 그대로 머뭇거리면 더욱 사방에서 일어나는 비웃음거리만 되고 뒷 세상의 나무람만 될 것이니, 전하의 인애하신 마음으로 특히 파직함을 허락하시어 크게 낭패될 데에 이르지 않게 하여 주신다면 천지 부모 같은 덕을 죽음으로도 갚기 어렵겠습니다.
답하기를, “두 번이나 차자의 글을 보니, 경의 간절한 마음 잘 알겠으니 안심하고 힘써 일어나 머물러 있어 나의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도우라.” 하였다.
○ 영부사 이덕형ㆍ호조 판서 황신 등을 보내어 대비 김씨(金氏)의 주문(奏文) 1통을 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날에 아뢰라는 사건의 의미는 살폈으니 빨리 전지(傳旨)를 내리시어 사자(嗣子)로 국왕을 이어받게 하고 처 유씨(柳氏)를 왕비가 되게 책봉하여 주시라는 것이었다. 차관이 떠난 뒤의 일이다.
○ 정구의 상소는 다음과 같았다.
신이 외람되게 절박한 사정을 가지고 여러 번 상중에 계신 임금께 아뢰었더니, 전하께서 재삼 간절히 충고하여 주시어 감동됨이 지극하여 눈물이 떨어집니다. 신이 외람되게도 세상에 없는 알아주심을 받게 되어 오직 정성을 다하여 보답하기를 생각합니다. 억지로 청명(淸明)한 조정에서 사퇴하고 곤궁한 사택에서 쭈그리고 살기가 어찌 신의 본심이겠습니까? 다만 신하가 말한 것이 정당한 게 아니라면 죄 받는 것은 마땅한 것이니 이는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의(物議)가 장차 일어나 지목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게 되면 몸은 문득 보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당연히 떳떳한 법을 받는 것도 또한 허용받지 못하게 된다면 자신이 물러 나올 것을 갈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어찌 구차하게 비웃음을 받아가며 조정에서 머뭇거리다가, 위로 전하의 사랑하심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나의 지키던 것에 어긋나게 하겠습니까? 신이 물러가기를 구한 것이 비록 간절하나 전하의 머무르라고 허락하심도 또한 정성스러우시니, 앞으로 전하께서 일시적인 성스러운 마음으로 신의 원함을 허락하시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공론이 갑자기 일어나게 되어 신으로 하여금 낭패되어 미끄러엎어지게 되면, 전하인들 어떻게 신만을 두둔하여 보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를 당하게 되면 신이 전하께 누가 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는 가고 나오고 하는 의리는 신으로서 감히 의논할 바 아니나, 신하로서는 항상 신칙하고 힘써서 스스로 극진하게 할 것을 생각하여야 하므로 늘 일찍부터 여기에 마음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오고 물러서는 것은 선비의 큰 절개라 하였으니, 오직 그 사람에게만 득실이 있을 뿐 아니라 가히 그때 조정의 청탁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머물러 있어서 밝은 조정에 누가 미치게 되기보다는 물러나와 죄가 신의 몸에 그치는 것만 같지 못하므로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결연히 가는 바입니다.
○ 종실 순녕군(順寧君) 경검(景儉) 등 35인이 상소하여 임해를 법대로 처단하여 대의를 밝히기를 청하였다.
답하기를, “우리 종척 여러 경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들으라. 나에게 형제로서 동복(同腹)된 이가 몇 사람인가? 서로 생각하는 정리가 실로 보통사람의 천륜과는 갑절이나 된다. 내 박덕으로 인하여 이러한 변이 있게 된 것을 밤낮으로 부끄럽고 속 아프게 생각하니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할 수가 없구나. 임해가 왜적의 진중에서 돌아옴으로부터 실성됨이 너무나 심했고,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고 꾀임을 받아 혹은 패악하고 망령된 일이 있으나, 어찌 본심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조정에서 모두 말하기를 죄가 종사에 관계된다 하여 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밖에 내다 두었으니 왕의 법은 이미 시행된 것이다. 끝내 그의 죽음을 용서하는 것은 나의 지극한 인정인데, 법대로 처단하라는 말이 또 종척에서 나오게 되니, 나는 매우 놀랍게 생각하여 마음 둘 바를 모르겠노라. 대의가 비록 소중하다 하나 천륜도 지극히 소중한 것이니, 경들은 은혜를 끊어 없애야 한다는 의리를 가지고 말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 이원익이 첫 번째 사직서를 바쳤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오직 경은 선조(先朝)의 덕이 있는 신하로서 조야(朝野)가 의지하는 바이다. 그 뜻대로 나간다면 탁한 것을 맑게 하고 풍속을 가다듬게 할 것이요, 그 포부를 편다면 임금을 높이게 하고 백성을 감싸줄 만하다. 사마광(司馬光)이 조정에 나오게 되면 호위하던 군사도 이마에 손을 대어 경의를 표하게 되고, 부필(富弼)이 지제고(知制誥)를 맡게 됨에 조정의 신하들은 서로 경사로 여겼다. 그러므로 경을 기용하여 수상의 자리에 앉게 하니 밝게 심문하고 법에 맡도록 하여 빨리 역적을 토벌하는 의를 바르게 하며, 나의 지극한 정을 참작해서 은혜를 보전한다는 말을 변경하지 말고, 역적 토벌이나 천륜이나 모두 저절로 모순되지 않도록 하라. 하물며 지금 국가의 일은 어려운 것이 많아서 징조가 걱정스럽다. 국장(國葬)은 겨우 끝났으나, 백성의 신음하는 소리는 아직 그치지 않고, 책봉하는 예절은 내리지 않아 사절의 왕래가 계속되고, 서쪽에는 건추(建酋)가 으르렁거리고 남으로는 일본이 소란을 피우니, 이것은 그 근심거리가 이미 나타난 것이요, 나타나지 않은 것이 더욱 염려되는 것이니, 비유하여 말하자면, 위태로운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갈 때 할 수 없이 키잡이에게 의뢰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도다. 경은 어찌하여 사직만을 말하는가? 경은 종척이니 국가와 함께 기쁨과 근심걱정을 같이할 것이요, 가버릴 의리는 없는 것이다.
○ 심희수(沈喜壽)가 첫 번째 사직서를 냈다. 비답하기를, “경은 나를 버리고 물러가려는가? 책임의 중대함도 잊어버리고 오직 자신의 편함만 구하는가? 일이 마음에 대단히 불안한 게 있어서, 자신이 분명히 말하지 않으려고 짐짓 병들었다고 사직하려는 것인가? 오직 내가 위임하기를 전일하게 하지 못하여 그 직위에서 편하게 있을 수가 없어서인가? 국가의 형편은 시들어져서 해가 서산에 걸린 것같이 위태하고 망할 징조가 비통하게도 눈에 넘치니, 이는 대신들이 물러가기를 구하는 때가 아닌데, 경은 끝내 그러하니 나를 도와서 다스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인가? 슬프다! 경은 외로운 충성이 선왕의 알아주심을 받아 맑은 재주로 말하면 한 세상의 추앙을 받는 터이므로 천문에 나타나는 규(奎)나 벽(璧)같은 별은 이것이 바로 경의 문장이었고, 얼음 같은 청고한 지조는 경의 평소의 행실로써, 지난번에 왕자로서 교만한 진(珒)에 대하여 일찍이 신칙하라고 훈계하는 뜻으로 선조(先朝)께 진언하였는데, 이는 그때의 과감하게 말하던 사람으로서도 어렵게 여기던 일인데 유독 경이 말할 수가 있었다고 보노라.” 하였다.
[첨언] 이원익과 심희수, 정구 등 원로급 신하들이 정치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는 것을 감지하고 사퇴하기를 거듭해서 청하고 있다. 반대로 정인홍을 위시한 북인 세력은 왕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임해군 등 역적들을 처벌하기를 주장하며 조정 권력을 서서히 장악하고 있다.
○ 백사(百司)의 백관들이 날마다 연명상소로 진(珒)을 죽이고 사신을 잡아오기를 청하였다.
[한국고전종합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