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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이티엠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상선약수(지운흥)
두바이+유럽(5개국)+발칸(3개국) 여행기 4 ☆
6일 2019. 08. 19(월) 네움-두브로브니크-모스타르-치트룩
[ 네움 - 두브로브니크 약 1시간 소요 ]
● 프란체스코회의 웅장한 수도원 프란체스코 수도원
● 이탈리아 건축학자 버팔리니가 설계한 두브르브니크 대성당
● 하얀 대리석이 깔려있는 플라차 거리
● 단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렉터 궁전(외관), 스폰자 궁, 시계탑, 대사원 등을 관광
두브로브니크 스르지산 정상에서 아드리아해와 두브로브니크 성을 배경으로....
네움에서 두브로브니크로 이동 중에 바라본 아드리아해 해변 마을
■ '아드리아해의 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 안내도
두브로브니크 성 필레문 입구 전경
필레문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오노프리오 분수와 플라차 대로(스카라둠)
■ 오노프리오 분수
1448년에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가 만들었으며 분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중앙에 커다란 돔 모양의 석조 물이 있고 그 아래는 16면으로 되어 있으며 각 면에서 물이 나오도록 설계되었다.
원래는 돔 위에 커다란 쿠폴라와 조각상이 장식되었으나 1667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규모가 크고 지리적으로도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분수의 물은 약 20km 떨어진 리예카 두브로바츠카(Rijeka Dubrovacka)에 있는 우물에서 공급받는데,
둘 사이에 놓인 수로는 크로아티아에서 건설된 최초의 수로이며 당시로서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물을 공급받는 시설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 플라차 대로(스카라둔)
좌측으로 큰길이 보이는데 이곳이 플라차 대로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스트라둔이다.
플라차는 그리스어로 길이라는 뜻이고 스트라둔도 마찬가지로 베네치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플라차 대로 이외의 마을 길 대부분은 경사진 좁은 골목길로 이루어져 있다.
좌측 건물은 렉터 궁전, 우측은 성 블라이세 성당이다.
도로 바닥은 대리석을 깔아 만들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갔는지 유리면처럼 반질반질하다.
두브로브니크 구항과 성이반 요새 전경
■ 스르지산
두브로브니크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
두브로브니크를 방문했다면 두브로브니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르지산 정상은 꼭 올라가 봐야 할 곳이다.
구시가지 위로 병풍처럼 우뚝 솟아 있는 스르지산은 해발 415m인데 구시가지에서는 개인 차량이 아니면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스르지산에서 바라본 두브로브니크 전경
■ 두브로브니크 Dubrovnik
크로아티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 불릴 정도로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크로아티아 여행의 핵심 포인트이다.
중세 시대에는 아드리아 해에서 중요한 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크게 성장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다 1358년 라구사(Lagusa)라는 도시 국가가 된다.
라구사 공화국은 인근의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 정책을 통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667년 대지진으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고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1808년 나폴레옹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가
1991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끝난 후에는 크로아티아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를 침공한 세르비아 군대가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하고 포격을 가해 도시의 건물 상당수가 파괴되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전 세계의 학자들이 인간 방패가 되어 두브로브니크를 지켰으며 전쟁 후 유네스코 등의 지원을 통해 대부분의 유적들이 복원되었다.
■ 건물 지붕이 거의 주황색일까?
지방의 토질은 라테라이트 토질이다. 메마른 땅이며 농경에는 불리하지만, 벽돌 재료로는 제격이다.
라테라이트토는 붉은 색상이다. 그 흙으로 진흙을 만들어 지붕재료로 사용하고 구워서 지붕을 만들었다.
좌측으로 일부만 보이는 섬은 로쿠룸 섬(Lokrum)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산(415m) 전망대에 올라와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케이블카 선과 구조물 때문에 예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자동차나 택시를 이용하여 정상 부근 전망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어야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 두브로브니크 성벽 투어
두브로브니크 성벽은 길이 2킬로미터 높이 최고 25m의 육중한 성곽으로 두브로브니크의 옛 시가지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성벽 투어로 성벽 위를 걸으며 아드리아 해의 짙푸른 바다와 중세 도시를 굽어볼 수 있다.
성곽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일상의 장소로 중세의 마을을 타임머신을 타고 그대로 옮겨진 모습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문학가 버나드 쇼는 이곳을 '지상낙원'이라고 표현했고, 유럽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 1위로 꼽히기도 하는 곳이 바로 두브로브니크이다.
너무도 완벽히 보존된 중세의 모습 덕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 투어 중에 스르지산을 배경으로....
■ 로브리예나츠요새(Fort Lovrijenac)
두브로브니크의 지브롤터'라고도 한다.
해발 37m에 있는 요새에서는 땅에서 필레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두브로브니크 성의 남쪽 바다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절묘한 장소이다.
[ 두브로브니크 - 모스타르 약 2시간 소요 ]
두브로브니크 관광을 마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로 이동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Bosnia And Herzegovina
수도 : 사라예보 / 언어 : 세르보크로아트어 / 시차 : 한국과 -7시간 차
면적 : 약 5만 1천㎢, 한반도의 0.232배
인구 : 약 350만 명, 세계 134위
GDP : 약 201억 5천만 달러, 세계 115위
통화 : 마르카 KM 또는 BAM으로 표기, 1 KM = 약 650원 (2019.1월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어 (Bosnian, Bosanski)로 Bosna i Hercegovina (보스나 이 르체고비나),
Bosna (보스나)라 불리거나, BiH 라고 표기되고,
영어로도 Bosnia and Herzegovina로 풀어쓰기보다는 흔히 Bosnia 혹은 B&H로 줄여 쓴다.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표기하는 것은 국가 명칭이 길기 때문에 이하 문장에서는 보스니아로만 표기함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보스니아 내전의 상흔
■ 보스니아 내전
1992년 2월[1] 혹은 4월 6일[2] – 1995년 12월 14일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한 충격을 준 전쟁으로, 400만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이들이 난민으로 전락했고,
40%의 집들이 방화와 폭격 등으로 초토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25∼30만 명의 사람들이 내전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나 아직도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다.
전쟁의 피해는 초기에 집중되었으며, 내전 희생자 가운데 절반 가량인 13만 명이 내전 초기 1년 동안에 희생당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내전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집단학살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이 내전에서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 무슬림 모두가 민병대를 조직해서 서로 개처럼 싸웠고, 모두가 고문, 집단 강간, 대량학살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아직 남아있는 내전의 상흔은 아닌지?
관광객이 붐비는 거리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구걸하고 있는 여인..
■ 모스타르 Mostar
모스타르는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네레트바(Neretva) 강의 깊은 계곡에 우뚝 솟은 역사적인 도시 모스타르(Mostar)는 15, 16세기 오스만의 전초 기지로 건설되어
19, 20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발전하였다.
모스타르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연방으로 합쳐지기 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였다.
■ 모스타르 다리(Stari Most - Old Bridge in Mostar)
네레트바 강이 도시를 감 싸돌며 흐르고 있는데 이 강 위에 우뚝 솟은 돌로 된 다리가 유명하다.
1566년에 만들어져, 건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 다리였던 '스타리 모스트(오래된 다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올라 있다.
1993년 보스니아 내전에서 크로아티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유네스코가 재건축 프로젝트를 후원하면서 2004년 7월에 제 모습을 찾았다.
역사의 도시를 흐르는 강과, 유서 깊은 다리, 그리고 내전의 상처와 재건의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다리 바닥 모양이 독특하고 요철이 있다.
모스타르는 카톨릭과 이슬람이 공존하는 지역인데 다리 입구로 들어서면 이슬람 지역이다.
전쟁의 흔적인 총알로 작품을 만들어서 판매하기도.....
7일 2019. 08. 20(화) 치트룩-메주고리예-자그레브
[ 치트룩 - 메주고리예 약 30분 소요 ]
● 성모 발현으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성 야곱 성당, 평화의 성모상
● 무릎의 작은 구멍에서 물이 흘러나와 이것을 적셔서 아픈 곳에 대면 낫는다는 이야기가 있는 치유의 청동 예수상 관광
■ 메주고리예
보스니아 서남쪽 언덕에 작은 가톨릭 교회가 있는 마을이 하나 있다.
원래 이름 없는 작은 농촌마을이었지만, 1981년 마을의 여섯 아이들이 성모 마리아를 직접 보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카톨릭의 성지가 되었다.
이후 인구 5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마을에 수천만 명의 관광객이 이 곳을 찾았고 이에 따라 마을의 관광사업도 크게 발전했다.
성모가 나타난 언덕뿐 아니라 이를 기념하는 여러 기념물들이 많아 눈이 심심하지 않다.
근처 520m 높이 산 위에 있는 콘크리트를 사용해 만든 십자가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치유의 청동 예수상
무릎의 작은 구멍에서 물이 흘러나와 이것을 적셔서 아픈 곳에 대면 낫는다는 이야기가 있는 치유의 청동 예수상
메주고리예 성 야곱 성당
평화의 성모상 초상화
[ 보스니아 메주고리예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약 5시간 소요 ]
보스니아 관광을 마치고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로 이동
◆ 크로아티아 Croatia
수도 : 자그레브 / 언어 : 크로아티아어 / 시차 : 한국과 -7시간 차
인구 : 약 416만 명, 세계 129위
면적 : 약 5만 6천㎢, 한반도의 0.256배
GDP : 약 612억 5천만 달러, 세계 76위
통화 : 쿠나 1KN=181원 (2019.08.04)
발칸 반도 중서부에 있는 국가.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던 공화국이었으나, 1980년대 말 개혁의 흐름 속에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수도는 자그레브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크로아티아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했다.
발칸 3국 지도
메주고리예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로 이동 중에 크르카 휴게소에서 바라본 크르카 다리 (Most Krka) 전경
■ 크르카 국립공원
플리트비체에서 남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크르카(Krka) 국립공원은 플리트비체와 유사한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크르카 국립공원 안에는 수많은 호수와 폭포로 유명한 크르카 강(Keka river)이 흐르고 있다.
스크라딘스키 부크(Skradinski buk)
폭포는 저 스크라딘 마을에서 4km 정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데,
강물은 석회암지대를 지나면서 깊이 200m 이상의 깊고 좁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강바닥들은 자연적으로 절벽을 이루어 폭포를 형성했다.
2019.8.10일 한국인 부녀가 사고를 당한 곳이 크르카 국립공원 내의 스크라딘스키 폭포이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는 2018년도에 한국 여성 관광객이 실족사하여 금번 방문하니 안전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스크라딘 마을 전경
과일 파일 노점상, 일조량이 많아서 인지 과일은 달고, 가격은 저렴했다.
집에서 담근 과일주를 파는 포대화상을 닮은 동안의 노인장
과일주 시음은 무제한 제공...
수 킬로미터를 달려도 이어지는 고사리 밭. 재배하는 것이 아니고 자생하는 것이라 한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 해질 무렵에 도착하다.
8일 2019. 08. 21 (수) 자그레브-부다페스트
● 자그레브를 대표하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첨탑이 이색적인 자그레브 대성당(외관)
● 자그레브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빨강, 흰색, 파란색 타일로 만든 지붕이 유명한 성 마르크 성당
● 크로아티아의 영웅인 반 첼라치크의 동상이 있으며, 자그레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반 옐라치치 광장
● 중앙시장인 노천시장 등 관광
자그레브 대성당 앞에 세워진 천사와 성모 마리아 기념비
■ 자그레브 대성당
1093년에 헝가리 왕인 라디슬라스(Ladislas)가 건설을 시작하여 1102년에 완공했고 1217년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성당은 높이가 77m, 넓이가 46.2m이며 두 개의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데 북쪽 탑이 105m, 남쪽 탑이 104m이다. 성당 내부의 면적은 1,671㎡로 최대 5,0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큰 규모이다.
바로크 양식의 제단, 신고딕 양식의 제단 등이 있고 성당에만 보물급 유물이 10개 이상이 되어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라 부른다.
자그레브를 대표하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첨탑이 이색적인 자그레브 대성당 전경
자그레브 대성당 내부 모습
■ 성 마르코 성당
자그레브의 성 마르카 교회는 정말 예쁜 교회로 좀 귀엽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아담한 교회 지붕이 눈에 들어오는데, 지붕 전체가 타일 모자이크로 되어 있어 마치 조립식 블록으로 조립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화려한 지붕의 문양 2개는 크로아티아의 문장과 자그레브 시의 문장이다.
■ 반 옐라치치 광장
반 옐라치치 광장은 자동차가 다닐 수 없고 대중교통으로는 유일하게 트램만이 지난다.
광장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잠시만 오르면 자그레브의 상징인 대성당을 만날 수 있고 그 옆으로는 재래시장인 '돌락 시장'이 있다.
■ 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
에디슨 그늘에 가린 빛나는 천재
출생 : 1856. 7. 9, 크로아티아 스밀란
사망 : 1943. 1. 7, 미국 뉴욕 시
미국의 주간지 ‘라이프 매거진’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를 꼽았다.
이보다 앞서 2005년 말 크로아티아는 테슬라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06년을 ‘니콜라 테슬라의 해’로 정했고, 세
르비아는 2006년 3월 베오그라드 국제공항 이름을 ‘테슬라 공항’으로 바꿨다.
테슬라를 두고 미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가 서로 자기 나라의 발명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으로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갔다.
테슬라는 현대 전기 문명을 완성한 천재 과학자다. 현대 전기 문명의 근간이 되는 교류를 발명했으며, 수많은 전기 실험으로 ‘거의 모든 현대 기술의 원조’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시대를 앞선 과학적 통찰력과 독특한 삶 덕분에 많은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업적을 대표하는 교류발전기와 송·배전 시스템은 웨스팅하우스사(社)에서 일하면서 만들어냈다.
교류는 전기가 흐르는 방향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전기다. 직류에 비해 적은 손실로 전류를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현대 전기 문명을 일으킨 원천기술이다.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 인터넷은 등 수많은 전기 문명이 테슬라의 교류 전기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1891년에는 유명한 테슬라코일(Tesla Coil)을 제작했다. 테슬라코일은 간단한 장치로 수십만 볼트의 전압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당시 60Hz에 불과했던 가정용 전기를 수천 Hz의 고주파로 바꾸며 엄청난 고전압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를 사용해 테슬라는 최초의 형광등과 네온등도 만들었다.
또 테슬라는 한 발 앞선 발명가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알려 줬다. 그가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후대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이론으로 만들어낸 기기들은 무궁무진하다.
그는 테슬라코일을 이용한 실험 도중 라디오 신호를 같은 진동수로 공명시키면 송수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원리는 현재 라디오나 TV 등에 응용돼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무선조종장치를 연구하던 테슬라는 현대 로봇의 가능성도 언급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잠수함을 탐지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2차 대전에서 레이더로 실용화됐다.
테슬라의 발명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그는 전기기계용 전류 전환장치, 발전기용 조절기, 무선통신기술, 고주파 기술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기시스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리고 전자현미경, 수력발전소, 형광등, 라디오, 무선조종 보트, 자동차 속도계, 최초의 X선 사진, 레이더 등도 그의 작품이다.
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현대 과학기술을 예견하고 아이디어를 준 테슬라는 그의 업적만큼 살았을 때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라이벌이었던 에디슨 때문에 그의 업적은 많이 가려졌다.
1882년 테슬라가 에디슨 연구소에 들어가 발전기와 전동기를 연구할 때부터 에디슨은 천재적인 테슬라의 재능을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기이한 삶처럼 그의 성격도 특이했다. 식사 전 광택이 나도록 스푼을 닦아야 하는 결벽증이 있었고, 손수건은 하얀 비단으로 된 것만 썼다. 호텔방의 호실은 3의 배수여야만 했고,
비둘기에 집착해 말년 그의 호텔방에는 비둘기 새장이 가득했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발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러나 세상은 시대를 앞서갔던 테슬라를 잊지 않았다.
1961년 국제 순수 및 응용물리학 연맹(IUPAP)의 표준단위 및 그 정의에 관한 위원회는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테슬라의 이름을 딴 T(Tesla)를 쓰기로 했다.
전기를 이용한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던 테슬라의 이름에 걸맞는 단위라 하겠다.
이를 통해 테슬라의 이름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나게 되길 기대한다. (퍼온 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시가지에서 만난 테슬라.
자그레브 기념 엽서
자그레브 노천시장인 돌락시장
농부가 손수 지은 농작물을 판다고 하는데 가격이 저렴하다.
납작 복숭아
특이한 모양이지만 맛은 좋았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자그레브. 보스니아 모스타르, 메주고리예 여행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