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는 각 나라마다 자기들 나름대로 개혁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뒤처지면 당장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인구를 늘리고 농지를 개간하여 생산력을 늘리고, 그를 바탕으로 군대를 강하게 하여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이런 경쟁 구도 아래에서 온갖 학자들이 등장해서 자신들의 학설이야말로 부국강병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선전하니 이를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합니다. 각 제후들은 혹시라도 자기 나라에 도움이 될만한 방책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 그들 학자들을 우대하고, 그들의 학술을 장려했습니다. 그리하여 학문과 언론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 온갖 사상과 학술이 화려하고 난만한 꽃을 피우게 됩니다 (백화제방 : 百花齊放).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성의 서쪽 문을 직문이라고 했는데, 직문 근처에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대규모 단지를 형성하여 학자들을 초빙하여 모여 살게 합니다. 제나라는 이런 여러 학자들에게 상대부의 작위를 내리고, 사방으로 길이 난 번화한 거리에 높은 대문과 넓찍한 방이 딸린 저택을 지어주고 그들을 존중하고 우대해주니, 중국의 수많은 학자들이 제나라로 몰려와서 생계 걱정 없이 학문에만 매진하게 됩니다. 이들을 직하의 학사들이라고 합니다. 이들 직하의 학사들이 백가쟁명을 이끈 사람들이고, 유가, 도가, 묵가, 음양가, 법가, 병가, 명가 등 온갖 학설이 등장해서 서로 경쟁하게 되니, 이 시기(제나라 위왕부터 민왕까지)에 중국의 학문과 사상은 최고조로 발전하게 됩니다.
맹자 순경 열전에는 맹자와 순자외에도 전국시대 백가쟁명을 이끌었던 여러 사상가들의 전기가 실려있습니다. 사마천은 공자에 대해서는 성인으로 생각해서 존경했지만, 맹자에 대해서는 큰 존경심을 보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호칭도 맹자라고 하지 않고 그냥 맹가라고 이름을 부르고 있어서 전국시대 여러 제자백가 중의 한 명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마천이 살던 전한 시기에는 맹자는 크게 존숭받지 못했습니다. 사실 맹자가 존숭받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때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주자가 책 '맹자'를 사서(四書)로 편입하면서 맹자의 지위가 아성(亞聖)의 위치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사마천은 맹자 순경 열전을 책 맹자의 첫부분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내가 맹자라는 책을 읽다가 양혜왕이 '어떻게 해야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에서 책 읽기를 멈추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이익을 좇아 행동하면 병폐가 많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맹자는 추나라 사람으로 이름이 <가>이고 자사(공자의 손자)의 제자에게 배웠으며 제나라의 선왕과 위나라의 혜왕에게 유세했으나 등용되지 못합니다. 그 때 정세가 상앙이나 오기, 손빈, 소진, 장의같은 법가나 병가, 종횡가들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때라 맹자의 학문이 현실에 동떨어져 있다고 여긴 제후들과 뜻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맹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공자의 뜻을 계승한 <맹자>7편을 저술하게 됩니다.
직하의 학사 중에 추자라고 불린 사람이 세 사람이 있는데, 추기, 추연, 추석을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음양가입니다. 현대에 와서도 많이 거론하는 음양오행설이 이들이 주장한 이론입니다. 고대 중국의 과학이론은 이들의 음양오행설에서 시작했습니다. 이들 중에서 추연이 특히 유명하고 음양오행의 이론을 정립한 사람입니다. 추연은 그 학설이 신비하고 웅장하며 허황되어서 추연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미혹되어 추연을 스승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제후들이 초대하여 스승으로 모셨고 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학설은 유가나 도가가 아니라 음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대인들이 과학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듯, 음양오행설은 모든 제자백가와 중국 사람들이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백가들끼리 서로 치열하게 논박하고 논쟁했지만 음양가의 이론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맹자도 음양오행설에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맹자의 오덕(인, 의, 예, 지, 신)은 오행에 영향받은 결과라고 합니다.
직하의 학사 중에서 총장에 해당하는 사람을 좨주(祭酒)라고 하는데 초대 좨주를 지낸 사람이 순우곤입니다. 순우곤은 책 <맹자>에도 나오는 사람으로 맹자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맹자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으로 아는 것이 많고 기억력도 뛰어난 능변가입니다.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지만, 기발하고 예리한 언어로 제후들과 제자백가 사상가들을 비판하고 풍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촌철살인의 발언을 높게 평가한 왕들이 벼슬을 내리지만, 순우곤은 사양하고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순우곤은 골계열전에도 등장해서 재미있는 유머와 해학도 보여줍니다.
신도, 전병, 접자, 환연은 직하의 학사들 중에서도 도가 학파입니다. 직하의 여러 학파 중에서 도가가 제일 득세하였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환연이 상하 두편의 논문을 저술했다고 했는데, 현대 중국의 저명한 학자인 곽말약의 저서 < 중국고대사상사 : 원제목은 십비판서>에 의하면 책 <노자> 상하권이 바로 환연의 논문 상하편이라고 주장합니다.
노자는 공자보다 선배로 공자가 도를 물었다는 사람인데 어떻게 전국시대 중기의 환연의 저술이 책 <노자>가 될 수 있는지 이상했지만, 곽말약의 설명을 들으니 그럴 듯 했습니다. <노자한비열전>에는 노자가 주나라를 떠나 서쪽으로 가다가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함곡관의 관리 윤이 기뻐하여 글을 남겨달라고 부탁하니 노자가 상권과 하권으로 된 책(보통 노자도덕경이라고 부릅니다.)을 저술하고 떠났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함곡관의 관리를 관윤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람도 도가를 창시한 사람으로 노자와 더불어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곽말약은 환연이 변해서 비슷한 발음인 관윤이 되었고, 중국어에서는 관윤과 환연이 비슷한 발음인 모양입니다. 관윤(關尹)은 문지기라는 뜻이어서 함곡관의 문지기가 되었고 노자가 은퇴하는 길에 함곡관을 들러 <노자> 2권을 저술해서 관윤에게 주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곽말약은 <노자: 노담>라는 사람은 있었지만, 책 <노자>는 환연이 노담의 뜻을 밝혀 저술한 것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 교수는 <노자>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노자가 책 <노자>를 저술했다고 해서 누구 말이 옳은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순자는 자가 '경'이어서 보통 순경이라고 부릅니다. 맹자보다 후세 사람이고 조나라 사람인데, 나이 50이 넘어 제나라 직하에 와서 학문을 강설했습니다. 직하에서 좨주를 세번이나 역임했으니 제자백가 중에서도 큰 스승임에 틀림없습니다. 제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순자를 참소하자 순자는 초나라로 가게됩니다. 초나라의 재상이었던 춘신군이 그를 난릉령으로 임명하였는데, 춘신군이 죽자 순자도 면직되었지만 난릉에 정착하여 살다가 죽어 난릉에 묻히게 됩니다.
순자는 틀림없이 유가이고 공자를 현창한 사람이지만, 법가인 한비와 이사의 스승이어서 후대 성리학자들은 순자를 이단으로 치부하여 크게 존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 이후 한(漢)나라의 유학은 모두 순자의 영향하에 있었다고 합니다. 열전에 "순경은 혼탁한 세상의 정치를 혐오하였다...대도를 따르지 않으면서, 무속에 현혹되어 길흉의 징조 따위를 신봉하고, 고루한 유생들이 사소한 일에 고집만 피우고 있는데다, 장주같은 사람들이 교묘한 언변으로 풍속을 어지럽히자, 유가와 묵가 그리고 도가의 과거 행적의 성패를 규명하여, 이를 정리한 수만자의 글을 저술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열전에는 이 밖에도 명가인 공손룡이 견백동이의 논리로 논쟁을 시도하였고, 극자, 이회, 시자, 장로, 우자 등이 있다고 서술합니다.
묵적은 송나라 대부로 방어 전술에 능하며 검약할 것을 주장했는데, 어떤 사람은 공자와 같은 시기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공자보다 후대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묵적은 겸애를 주장한 묵자를 말합니다. 겸애는 차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전국시대에 묵가는 유가 못지 않게 성행했지만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 쇠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