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1]
한라산 이름은 언제부터 불렸나
섬과 산 일체감, 제주인의 안식처
2012년 03월 29일< 제민일보>
▲ 제주사람들에게 제주의 상징물로 첫 손에 꼽히는 한라산이 맑은 하늘 아래
웅혼하면서도 자애로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한라산, 제주의 상징
제주사람들에게 제주의 상징물에 대해 묻는다면 첫 번째로 무엇을 꼽을까. 지난 2005년 제주도의 한 신문사에서 제주도의 이미지로 생각나는 상징물을 조사한 결과 한라산이 33.5%로 가장 높게 나왔다. 이어서 감귤(29.2%), 청정지역(12%), 휴양관광지(8.9%), 삼다도(7.9%) 등의 순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주사람들에게 있어서 한라산은 어머니의 산으로 자리한다. 한라산이 곧 제주도요, 제주도가 한라산이 표현하며 굳이 한라산과 제주도를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나고 자란 곳이요, 훗날 죽어서 돌아갈 영원한 안식처인 것이다.
육지부에서는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하는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 그렇게도 크게 보이던 마을의 뒷산이 나중에 보니 높게 보이지 않음에 놀란다고 한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다르다. 어릴 적 보던 한라산도 높지만 먼 훗날 찾은 고향에서 보는 한라산도 역시 높다고 여긴다. 제주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한라산이란 이름에서 한라(漢拏)는 운한(雲漢) 즉 은하수를 능히 끌어당길 만큼 높기(雲漢可拏引也) 때문에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도 산천 조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라산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불리게 됐을까.
탐라는 중국문헌으로 서진의 학자 진수(233-297)가 찬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주호에 대한 기록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 476년 탐라국이 백제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위의 기록에서 섬이라는 사실 외에 제주의 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제주의 산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 때의 화산활동에 대한 내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고려사절요에 목종 5년(1002년) 5월에 탐라산이 네 곳에 구멍이 열리어 붉은 색 물이 솟아 나오기를 5일 동안 하다가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와석으로 되었다(耽羅山開四孔 赤水湧出 五日而止 其水皆成瓦石)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탐라산(耽羅山)이라는 표현이 산 이름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탐라의 산을 의미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거나 당시 기록에 한라산이라는 명칭은 없다. 유의해야 할 점은 고려사절요가 만들어진 1452년(문종 2년) 당시에 한라산이라는 지명은 쓰이고 있었으나 1002년의 화산폭발을 이야기할 때 한라산이라는 명칭을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사 1198년과 1253년의 기록에서도 국가의 제사와 관련, 국내의 모든 명산대천 및 탐라의 모든 신이라 하여 명산을 이야기하면서도 한라산이라는 표현은 없다. 한라산신이 아닌 탐라의 신으로 표기되고 있다.
혜일스님 詩에 '한라산' 첫 등장
(◀ ‘한라산’이라는 명칭은 산방굴사를 창건한 혜일스님의 시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사진은 애월읍 광령리 서천암지에 세워진 혜일스님의 詩碑)
시대순으로 볼 때 한라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오는 것은 고려 충렬왕 무렵 제주에 머물며 여러 편의 시를 남겨 시승(詩僧)으로 불리는 혜일스님의 시다. 혜일은 산방굴사를 창건한 고승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가 수도생활을 했던 조공천(朝貢川) 상류, 즉 광령계곡에 위치한 서천암(逝川庵)을 노래한 시에서다. 여기에 '한라의 높이는 몇 길이던가(漢拏高幾仞) 정상의 웅덩이는 신비로운 못(絶頂瀦神淵)'이라는 문장에서 한라산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라산이 높다는 것과 정상에 못(백록담)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했다는 것은 그 당시 직접 백록담에 올랐거나 아니면 이미 백록담에 올랐던 누군가에게 전해 들어 그 형태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천암은 애월읍 광령리 사라마을 위쪽 계곡 옆에 있던 사찰로 지금은 혜일스님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서천암지에서는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의 유물인 청자국화문흑백상감 편, 분청사지백상감편 등의 도자기 편과 도질토기 편, 그리고 당초문암기와 편 등의 유물이 발굴됐다. 사찰문화연구원의 전통사찰총서21편 '제주의 사찰과 불교문화(2006)'에서는 혜일스님의 제주에서 활동시기를 고려 충렬왕 무렵인 1275년에서 1308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게 사실이면 한라산이라는 명칭은 늦어도 12세기 이전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고려 말인 1374년의 탐라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러 내려온 최영장군이 군사들을 한라산 밑에 주둔하게 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또한 고려사에는 지리편에 '진산(鎭山) 한라는 현 남쪽에 있다.'라는 표현도 있다. 고려 말에는 이미 한라산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탐라의 시작을 알리는 삼성신화가 소개된 영주지에도 한라산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사냥을 하며 생활하던 고, 양, 부 삼을라가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자줏빛 목함이 동해쪽에서 떠올랐다는 내용으로, 벽랑국의 세 공주를 만나는 과정을 표현한 대목이다. 영주지는 제주도 역사자료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저자나 저작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416년 정이오가 지은 성주고씨전과 1450년 고득종이 지은 서세문 등과 연관지어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라 여기고 있다. 눈여겨 볼 대목은 삼성신화의 내용을 고기(古記) 즉 옛 기록에서 발췌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아쉽다.
이상의 기록은 탐라국의 개국을 다룬 영주지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적 내용들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 글로 남겨진 시기는 한참 훗날이다. 영주지의 경우 고려 말 조선 초에 펴낸 것으로 추정되고 고려사는 1451년에, 고려사절요는 1452년 펴냈다. 혜일스님의 시는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漢拏高幾 한라의 높이는 몇 길이던가.
絶頂神淵 정상의 웅덩이는 신비로운 못
波出北流去 물결이 넘쳐 북으로 흘러가니
下爲朝貢川 저 아래 조공천을 이루었네.
懸瀑亂噴沫 내걸린 폭포에선 어지러이 물방울이 튀며
走若珠璣圓 둥근 구슬처럼 달아나는데
驚湍激群石 놀란 급류는 여기저기 바위에 부딪히다
間作甕穿 간혹 동이처럼 파이기도 한다.
安流得數里 잔잔히 흘러 몇 리에 이르니
澄淨涵靑天 맑고 깨끗함은 푸른 하늘을 적시는데
道人有宗海 종해라는 도인이 있어
卓庵向川邊 냇가를 향해 우뚝 암자를 세웠다.
旣從山水樂 이미 山水의 즐거움을 따랐고
且寄香火緣 또한 香火의 인연에 기대었는데
秋佳月夕 서늘한 가을, 달 고운 저녁이 와
掃石開客筵 바위를 쓸어 손님 맞을 자리를 마련하도다.
嘗新剝棗栗 새로움을 맛보려 대추와 밤을 따고
談古窮幽玄 옛 이야기 하다 그윽함이 다하니
因思仲尼語 仲尼의 말을 떠올리고
頗憶小聖禪 자못 小聖의 禪도 생각한다.
由斯無生理 이런 까닭에 삶의 이치가 공한 것을
名以期遐傳 寺名으로 삼아 오래 전해지기를 기대하나니
如能高著眼 만약 그 뜻에 높이 着眼한다면
波波皆不遷 물결이 모두 떠나가는 일은 없으리라.
기록시기로는 태조실록이 앞서
이와는 달리 기록으로 남겨진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가장 앞서 한라산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는 작품은 권근(權近, 1352~1409년)의 시라 할 수 있다. 태조실록에 나오는데 태조 6년(1397년) 3월 신유(辛酉)조에 탐라(耽羅)라는 시제의 어제시(御製詩), 즉 왕의 명에 의해 지은 시에 '푸르고 푸른 한 점의 한라산은(蒼蒼一點漢羅山) 멀리 큰 파도 넓고 아득한 사이에 있네(遠在洪濤浩渺間)'라는 표현에서 한라산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직접 제주를 다녀가지는 않았지만 탐라를 노래하며 먼저 한라산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을 보면 이 무렵에는 탐라의 상징으로 한라산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됐음을 의미한다.
耽羅
蒼蒼一點漢羅山 푸르고 푸른 한 점의 한라산이
遠在洪濤浩渺間 멀리 큰 물결 넓은 바다 사이에 있나니
人動星芒來海國 사람 따라 별빛이 바다에서 오고
馬生龍種入天閑 말은 준마를 낳아 천자의 마구간에 들도다.
地偏民業猶生遂 땅은 외져도 백성의 일은 이루어지고
風便商帆僅往還 바람 편에 장삿배가 겨우 왔다 갔다 하나니,
聖代職方修版籍 성대 직방에서 지도를 손질할 때
此邦雖陋不須刪 이 나라 비록 작아도 깎아버리지 않았도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은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은하수를 끌어당길 수 있다는 의미의 한자어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잘못된 해석이라 반박한다. 즉 원래는 하늘산이라 불렸는데,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한라산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대표적 견해로는 1930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펴낸 불교 제68호부터 제77호까지 실린 백환(白桓) 양씨(陽氏)의 한라산 순례기에 나온다. 여기서 필자는 한라산은 우리 고어(古語)로 '한울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울올음'인데 후대(後代)에 한자가 수입되며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어 이은상도 1937년 간행된 '탐라기행 한라산'에서 하늘산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은상 역시 한라라는 이름은 한자 이후에 그 한자를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종합하면 한라산이라는 이름은 예전에는 하늘산이라 불리다가 고려 말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한라산으로 바뀌어 부르게 됐다는 말이다. 하늘산과 한라산. 둘 다 높은 산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하늘산이라 할 때는 선택받은, 또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거룩함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자부심을 가지라는 얘기다.
◀ 강정효 사진작가
작가 강정효씨는 15년간 한라일보, 뉴시스통신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4·3과 관련해 발이오름 4·3유해발굴을 시작으로 현의합장묘 유해발굴, 화북가릿당 인근, 별도봉, 정뜨르비행장의 유해 발굴작업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지난 1987년 첫 사진전시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0회의 사진 개인전을 가졌다. 1991년 '제주는 지금'을 시작으로 섬땅의 연가, 화산섬 돌이야기, 한라산, 제주거욱대, 대지예술 제주 등 6권의 저서와 공저로 4·3유해발굴사진집 ‘뼈와 굿’, 한라산 등반개발사, 제주세계자연유산을 빛낸 선각자들, 제주의 돌담,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 제주도서연감 등이 있다.
현재는 제주대학교 강사, 제주민예총, 탐라사진가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