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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교회운동의 신학적 근거
1.하나님의선교
1960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선교이해가 등장하게 되는데, 즉 성과 속,초자연과 자연, 교회와 사회라는 이분법사고를 극복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다. 민중선교나 민중신학과는 시간적으로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교회로 하여금 상황에 응답하고 세계에 대한 관심및 사회참여를 가능케 한 점이 하나님의 선교개념의 유산이라는 것을 부인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여러가지 형태의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류 구원의 뜻을 보이셨는데, 이 구원의 역사가 곧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다.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를 전개해 보면 첫째, “선교의 주체 =하나님”.선교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며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일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교회 자체는 이세상을 위한 하나님 선교활동의 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교회는 다만 하나님 선교역사의 동반자일 뿐이다. 선교와, 선교하는 교회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 안에서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선교와 교회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 선교의 특성은 선교라는 전 역사속에서 되어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고 역사의 사건을 통해서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곧 선교는 하나님자신의 일이며 교회는 선교의 한 도구일 뿐이다.
둘째, “선교의 대상=세계”. 선교의 대상이 교인뿐 아니라 피조물을 포함한 세계전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의 타락으로 시작된 이세상의 역사를 하나님나라로 이끌어 가며 그 안에서 자연과 인간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룸으로써 피조물과 세계 전체가 웃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수 있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노력이다. 셋째, “하나님 활동의 장=인간 역사”.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역사의 현장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역사의 전반적 흐름에서 ,역사의 한 복판에서 찾게된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역사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중심사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콘텍스트에 강하게 의존되어 있다. 넷, “하나님 선교의 목표=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선교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구체화하는 것이요 구원은 마침내 세상 안에 나타나는 샬롬이다.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화해에 기초를 둔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하며 선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이 역사와 세계 속에 생존하는 전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로 화해하시는 것이다. 샬롬은 개인구원 이상의 것이며 평화와 통합, 공동체, 조화및 정의이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불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샬롬의 관계로 바뀔 뿐 아니라 역사속에 드러나고 있는 갖가지 갈등과 투쟁과 불만 속에 평화를 가져오려는 행위가 곧 하나님의 구원행위요, 그것이 하나님 선교다. 하나님 나라와 그 하나님 나라 선교는 오늘의 현 세계 문제와 역사적 흐름과 어떻게 관여되는가의 물음은 필수불가결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으로, 현재적으로 이 세계와 결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역사가 현실적으로 사회의 현실적 흐름 속에, 기구와 조직의 구조와 체계속에서 능력있게 활동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그런 구체적 사명 수행이 곧 선교의 사회적 기능 것이다. 이 선교적 사명속에서 불의와 불법이, 불평등의 부조리가, 불공평한 분배가, 유린당한 인권이 다시 새로와지는 역사가 가능하다. 이것이 선교적 기능인 것이다.
다째, 하나님의 선교는 역사위에 타당한 하나님의 자기 제시로서의 그리스도론의 형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세속화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음으로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누구며 무엇인가의 해석 기능이 하나님 선교신학이 제시해야 하는 특징적 요소다. 상황과 복음 사이에서 그들을 연결지어 주며 오늘의 예수를 제시해 주는 일은 선교신학의 해석학적 작업에서만 설명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고 말할때 그것은 인간의 내면성, 외면성, 인간과 관계되는 주변의 모든것을 포함한 역사적 현실과 직결되게 된다. 즉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류의 현재적, 정치적, 구체적 삶과 직접 연관된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출애굽 사건과 신약의 십자가 사건이 갖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역사적, 현실적 사건으로 이루시고 표현되는 구원은 곧 해방과 인간화, 즉 인간의 자기 정체성의 재확립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이 아니기에, 하나님과의 수직적 바른 관계에서 참 인간이 되고,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인간으로서의 참 바른 모습이 성립되게 된다. 이러한 수직적 수평적 관계란 바로 계약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이 관계 계약이 깨질때 불신앙으로, 이웃과는 불화로 나타난다. 계약이 파괴된다. 이런 불화의 관계가 화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화해 사건으로 본 계약은 다시 회복된다.
그러므로 인간화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과의 계약관계에서 형성되는 참 인간의 모습의 재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몰트만은 인간화란 기독교적 희망의 활력화, 풍성한 인간됨, 즉 full humanity의 회복이며 빈곤, 궁핍, 질병, 고난의 극복, 강직한 인간성 회복으로서 가치, 인권, 명예, 자유와 독립의 보장, 주권적 인간형성으로 인간속박의 제요소에서의 탈피, 목적있는 인간됨으로서 뚜렷한 삶의 형태 형성을 의미한다.
역사속에서 참된 인간화를 방해하는 부정적 요소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화란 자기 이익을 위한 선취권으로부터 이웃의 이익 우선에로의 전향을 의미한다. 인간화란 첫째로 인간의 비본래적 모습-죄안에 있는 인간의 갈등과 모순, 그것 때문에 생기는 모든문제들에서의 전적인 전향을 통한 본래 모습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이것이 참 회개의 모습이며, 인간화의 기초이다.
둘째로 비본래적 인간의 모습 때문에 나타나는 갖가지 부조리, 구조악과 그것에서 결과된 갖가지 비인간적 상황에로의 격하등, 이런 것에서의 탈피와 변화를 의미한다. 셋째로 인간 구원의 의미는 인간의 역사와 현재성과의 연관 속에서 의미 있어지는 것이며 인간화의 노력과 투쟁없이 구원의 의미는 무의미해지고 마는 것이다.
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부조리의 역사로부터 참다운 인간 해방을 위한 구원의 선교적 기능을 계속하시고 계신것이다. 참인간화의 문제는 내면성과 외면성이 동시적이며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고 취급되고 있다. 이상의 하나님 선교의 기치하에 한국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인간화에 참여하였는가는 다음장에서 알아보자.
2.세상을 위한교회-신앙공동체 연구
공동체란 “지리적 근접성(지역성)과 사회적 단일성(공동의식)및 사회적 집단”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동체란 동질성을 가진 일정한 인구가 자연적, 생태적, 지리적으로 한정되고 근접한 지역에 살고 잇으며, 역사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고, 일련의 기본적 봉사기관을 기지고 있고, 공동의 생활방식에 참여하고 있으며, 단일성의 의식을 가지고 협동 생활을 할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사회집단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인구의 대소, 서어비스의 기능, 사회경제적 지위, 공동성의 정도에 따라 여러종류로 분류될 수있으나, 여기서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촛점이다. 사회경제적 지위를 기준으로 한 분류는 한 공동체 사람들의 직업, 생활방식및 수준, 가치의식,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태도 등의 공통성을 근거로 부촌, 빈촌, 중산층 지역등으로 나누고 있다.
그렇다면 민중교회는 모든면에서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는 셈이다. 우선 빈촌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회적 억압을 경험하고, 가난의 문화를 공유하는 동질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다. 즉 동일한 사회적 경험, 경제적 지위, 문화적 의식을 가진 민중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바로 민중교회이다.
그다면 공동체운동으로서의 민중교회운동의 정통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또한 민중교회가 준거의틀(모델)로 삼은 공동체운동은 무엇인가? 성서에 나타난 신앙공동체와 남미의 기초 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알아 보고자 한다.
1)성서속의 신앙공동체
성서는 교회에 대하여 고정된 개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이 삶을 꾸려가는 공동체를 에클레시아(의회), 코이노니아(참여공동체), 오이코노미아(Oikonomia)등의측면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우리에게 돋보이는 교회 개념은 계약공동체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맺는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신약에서 예수는 그의 공동체를 새 계약공동체로 이해하였다. 이 계약관계가 바로 신앙의 내용이다.
이 성서적 기반을 기초로 하여 민중교회의 신학적 전제는 “하나님은 민중의 하나님이시요, 민중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민중교회는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있는 공동체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계약공동체이다” 라고 설정할수 있다고 본다. 신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민중을 자기백성으로 선택하셨다.
출애굽의 맥락에서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민중을 자기백성으로 선택하고 구원하고 해방하였다. 본래 이스라엘의 형성은 애굽의 절대 세상 왕권에서 벗어난 히브리인, 가나안인.시리아인,팔레스타인 들로 구성된 자유민들이다. 억눌린자들이 탈출하여 형성된 것이 이스라엘 “지파동맹”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 왕권을 수립하였을 때에도 그 왕권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봉사하는 목자로 규정되었다.
다윗왕권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중을 억압자로부터 보호하고 지키는 목적으로 허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상의 제왕들은, 다윗을 포함하여, 제국의 절대권력을 모방하여 하나님의 백성 즉 민중을 억압하였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에게 토지를 탈취당한 나봇의 사회전기는 민중의 사회전기요,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이다. 엘리야의 예언자운동은 나봇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민중을 선택했음을 확인하는 운동이요, 이런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신실한 응답과 순종을 촉구하고, 하느님과 민중과의 계약을 회복하여 제왕의 횡포를 배제함으로써 민중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운동이었다. 이것이 모든 예언자운동의 시발이요 원형이다. 하나님은 바빌론제국, 앗시리아제국, 희랍제국의 민중이 되어 수난당하는 민중의 하나님이다.
이들의 사회전기는 고난의 종의 이야기에서 표출된다. 고난의 종은 단순히 포로되고 식민지화된 이스라엘 민족만을 민중으로 표상하지 않는다. 고난의 종은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한다. 하나님의 정의가 온 우주와 모든 제국을 지배한다는 메시지를 선포한것이 바로 고난의 종이다.
이것을 민중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모든민족들은 제국들에 의하여 민중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정의로운 하나님이며, 이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제국들의 횡포에서 해방되어 메시아 왕국에 참여케 된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그 빛을 밝히는 자가 고난의 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민중의 계약은 이스라엘 민중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중된 민족들을 포괄한다는 우주적 계약의 지평을 가진다.
예언자 이사야의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이나 예언자 에제키엘의 평화의 왕국에 대한 선포나 예언자 다니엘의 새 시대, 새 역사의 대한 꿈은 모두 제국들의 권세와 횡포속에서 수난당하는 민중에게 새 계약공동체에서 실현되는 해방공동체에 대한 희망과 생명의 씨앗이다.
신약에서 예수는 세계를 지배하는 권세 밑에서 고난으로 신음하는 민중으로 나타난다. 그는 민중으로써 갈릴래아의 민중과 그 정체를 같이하며, 그 역사성을 확고하게 갖고있다. 그는 로마로 대표하는 모든 절대적, 억압적 권세에 의해 희생되는 민중의 질곡과 운명을 지는 고난의 종이된다.
그는 십자가를 진다. 그리고 민중은 그를 친구라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메시아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민중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계약의 새롭고도 궁극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역사적 이야기는 하나님과 민중의 새 계약의 실현이다. 따라서 예수공동체는 민중공동체요, 동시에 하나님과의 새 계약공동체가 된다.
마르코의 계약공동체 인식은 고난의 종에 뿌리를 두고 있다.즉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면 모든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는 민중의 질서를 가진다. 가난한자, 병든자, 힘이 없고 어리석은 자, 모든 소외된 자가 초대되고 선택되어 하나님의 정의의 유산을 누리는 공동체이다. 성령의 역사가 충만했을 때 루가의공동체는 재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함께나누는 나눔의 공동체행2)로 형성되었다.
“믿는 무리가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읍니다.-------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읍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읍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읍니다” 라는 경험을 가진, 사회경제적 위협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공동체였다
.마태오의 새 계약공동체는 예수 즉 민중이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될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며, 병들 때에 돌보아 주며, 감옥에 갇힐 때 찾아 주는 공동체이다. 마태오6장에서 공동체의 경제질서(헌장)를 엿볼수 있는데, 일용한 양식만을 구하며, 하나님의 지배아래 재물을 위탁, 관리할 것이며,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말것이며,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는 이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한다. 민중교회는 야웨 계약 공동체, 새 계약 예수공동체, 성령이 일으킨 나눔(계약의 내용)공동체의 전통을 이어받은 계약 공동체이다
2)남미의 기초 공동체 운동
남미의 기초 공동체 운동은 역사적으로 남미가 1400년대 말부터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있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식민지 결과로 오늘날 남미 전체인구의 90-95%가 가톨릭 교인이다. 이 교인들을 사목할 사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사제없이는 미사를 드릴 수 없기에(사제중심) 가난한 지역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식민지수탈에 따른 정치, 경제적 소외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앙생활에서도 소외되어 왔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초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탄생한 것은 1950년대 부터이다. 두가지 운동의 결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브라질의 가톨릭 교회에서 실시한 ‘의식화’교육 프로그램인 ‘기초교육 운동’의 결과이다. 이 기초교육 운동은 문맹퇴치 운동과정-80%가 문맹인 브라질 국가적사업으로 실시되는 과정에서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정치교육의 수단으로 악용-에서 ‘민중 의식화 교육’으로 탄생된 운동이다.
파우로 프레이리를 중심으로 문자해득을 통해 진정한 사회적, 역사적 문맹을 퇴치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자기 삶의 주인으로, 역사의 주인으로 살게 하는 해방의 의식화교육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식화 교육을 위한 기초교육 운동이 교회적인 작은 기초공동체들로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56년 브라질의 로씨주교가 자신의 교구 가운데서 사제가 찾아갈 수없는 지역들의 농부, 또한 노동자들을 선발하여 지역공동체의 지도자로서 훈련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사제 없이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한 복음화 캠페인의 결과에서 교회적 기초공동체 운동이 탄생되었다. 기초 공동체는 small group으로 이루어진다. 약15-20가구 정도, 12명에서 15명으로 구성된다. 라틴 아메리카에는 1985년에 10만개 이상의 기초공동체가 있다.
기초 공동체의 성격과 역활을 고찰해 볼 때, 첫째로 기초공동체는 민중의 교회운동이다. 기초란 사회적 의미로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들, 즉 주변으로 밀린 종족들, 착취받는 계급, 멸시받는 문화 등을 의미한다. 사회로부터 거절당한 자들이 기초 공동체속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발견한다.
빈곤과 주변화의 악들이 그들의 하나님께서 준 운명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들은 연대와 상호 협력, 지역적 자극성 그리고 정의를 위한 공동투쟁을 통해서 그들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기초공동체란 남미의 억눌리고 착취당해 온 민중들의 상황을 고발하고 그 상황에 맞서 싸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이다. 즉 소외된 이들을 위한 새로운 신앙 운동이다.
기초 공동체 운동은 가난한 자들의 밑바닥으로부터 성서를 읽으며 성서연구를 개별화하지 않고 공동체화 한다. 밑바닥으로부터 읽는 성서연구에는 그들의 직접적 생활 체험과 사회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함께 작용한다. 이것은 민중들이 남의 입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입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연구를 도와주는 카를로스 메스터스가 시한 성서연구 방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성서연구의 한목적은 하나님이 오늘날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민중들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b)성서연구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성서에서 발견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와 관련되는 하나님을 성서로부터 발견하는 일이다.
c)성서연구에는 세 가지 관점이 있다. 공동체와 현실과 성서의 만남 안에서 하나님이 오늘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d)성서연구의 두가지 운동에는 네 가지 질문 초점이 있다. 성서시대의 경제적,사회적,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조건들, 그리고 오늘날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조건들 이다.
e)성서연구에는 다섯 가지 계명이 있다.
-읽고 읽고 또 읽어라.
-본문과 민중의 소리를 매우 민감하게 경청하라.
-공동체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성서를 발견하라.
-아는 것은 봉사하는 것이다(사람들이 발견한것을 곧바로 가난한자들과 공동체에 적용하라).
-말씀의 의미를 읽으라
남미의 해방신학은 이러한 기초공동체들의 운동에 대한 신학적 성찰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로, 기초공동체는 평신도 사제직의 교회운동이다. 기초 공동체에는 세례, 성만찬, 설교, 교육 등과 같은 직무들이 평신도들에 의해 수행된다. 기초 공동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평신도들의 기본적인 사제직 직무는 다음과 같은 유형이다.
공동체 지도자; 공동체의 대표로서 조직과 조정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예배를 인도하거나 설교 또는 성만찬을 집례하는 직무 중 하나를 겸직하기도 한다.
말씀 지도자; 예배를 인도하거나 설교를 담당하며 성서교육의 책임을 수행한다
성례전 지도자; 성만찬, 세례, 결혼, 장례, 공동기도와 같은 성례전을 수행하는 직무로서 이는 공동체 지도자가 함께 할 수도 있고 특별한 지도자가 선정되어 수행할 수도 있다.
활동 지도자; 공동체 내의 기초 그룹에 대한 교육과 활동을 지도하며 공동체의 의식화 교육,성인교육, 구제활동, 협동사업 등과 같은 사회적 활동을 지도하는 직무를 수행한다. 이상의 직무들이 지도자들에 의해 각기 수행되지만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공동체의 권력을 집중시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공동체협의회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공동의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고 결의하므로 모든 직무들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직무 분담의 공동사목’을 실현하고 있다.
보프는 “교회는 일차적으로 위계적인 기관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성령의 성례전이며, 섬기는 그리고 해방의 선교로부터 일치를 조성하는 교회이며 모든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가 조직의 원리가되는 교회이다” 라고 말했다.
기초 공동체의 역할은 오합지졸의 대중을 생각과 활동을 같이하는 민중으로 변화시키고, 공동체안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복음화나 해방이 실천의 주제이며, 함께 참여하고 돕는 민주주의를 배운다. 구띠에레즈의 말로 표현하면, “일하는 것, 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인간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또한 지금 구원하는 것이다.”
한국민중교회는 민중의 교회운동이며, 평신도 사제직 교회운동인 남미의 기초 공동체운동의 한국적 시도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민중들의 공동체라는 유사한 점이 있으나 평신도의 자발성(자주, 자생)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본다. 구체적인 비교는 다음장에서 한국 민중교회의 실태와 성격을 통해서 알아보자.
3.민중신학고찰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나름대로의 사회적 경험들을 신앙으로 성찰한 과정의 결과”은 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민중신학은 한국 기독교가 민중운동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태동된 한국신학이다. 민중신학이 갖는 의미는 한국의 민중해방전통과 성서와 교회사의 민중해방전통의 합류된 신학사상이라는데 있다.
그 합류가 70년대에 이루어지고 있는데 민중신학은 이 합류과정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민중신학은 한국교회, 예수, 오늘의 민중이 서로 만나도록하는 신학이다. 이 민중신학이 바로 민중교회운동의 이념적, 신학적 근거가 되고 있다. 민중교회운동의 신학적 배경이 되는 민중신학에 대한 고찰은 본 논고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이다. 민중신학의 태동과 배경, 성격과 구조, 전개과정과 과제등을 살펴보려 한다
(1)민중신학의 태동과 그 배경
1)민중신학의 태동
‘민중신학’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신학자는 서남동이다. 1975년 4월초, 기독교사상에 발표된 그의 논문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1973년 부터 민중신학에 관한 논의를 본격화했고, 그것을 1975년 2월 기독교사상에 “예수-교회사-한국교회”라는 주제로 그 내용을 발표했다. 같은해 4월 문학사상에 실린 “혼미한 시대의 진리에 대해서”라는 논문에서 김형효는 서남동의 논문에 대한 반민중적인 논평을 폈다.
이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한 논문이 다름아닌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이다. 서남동은 “예수-교회사-한국교회”라는 논문에서 누가복음서 기자의 편집의도를 밝힘으로써, 예수의 출현자체를 “경제적 빈곤, 사회적-문화적 편견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작업”으로 해석한다.
예수는 자신을 무조건 민중과 동일시하고 바로 그 민중 해방에 자기동일성을 구하고 민중 해방 운동을 펴다가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서남동은 민중신학의 발판을 기독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민중해방운동에서 찾고 있고, 자신의 민중신학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한편 우리는 민중신학의 발단을 안병무의 민중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1975년 3월 1일, “민족, 민중, 교회”라는 강연에서 선언하기를 “우리 역사에서 민족은 있었어도 민중은 없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민중은 실제로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정말있는 것은 민중인데, 민중은 민족을 위한다는 이름아래 수탈당해 왔다. 지배집단이 민족을 내세워 민중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결국 민족도 없고 민중도 없고 다만 그것을 이용하는 정부만이 있게 되었기에, 한국역사에서 끊임 없는 민중운동사가 이어질수 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다. 그 전형으로 동학농민혁명, 3.1운동, 4.19학생의거를 든다. 또한 그는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를 열거했는데 첫째, 한국교회는 “민중에 의한, 민중의, 민중을 위한” 것이 되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기독교는 민중의 권리를 찾는 사랑의 새 가치관을 형성해야 한다.
세째, 이 사랑의 민중운동은 연대적 책임아래 조직화되어야 하고, 거기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네째, 이 민중운동은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이때부터 안병무는 자신의 신학의 주제를 ‘민중’으로 굳히기 시작했고, 76년 3.1절에 “3.1구국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서남동등과 함께 옥고를 치루는 등 민중운동에 몸소 참여하기에 이르렀다.이러한 점은 서남동과 함께 안 병무를 민중신학의 뿌리와 기둥이 되게 하기에 넉넉했다.
민중신학의 발단을 물을 적에 서남동과 안병무 보다 먼저 언급해야 할 학자는 현 영학이다. 그는 1973년 6월에 한국신학보에서 기독교는 “민중 속에 성육신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글에서 그는 “민중이란 말은 소위 엘리트라는 특권층과 대비되는 말로서,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부나 사회적 지위나 고등 교육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기독교가 민중의 것이 되려면 먼저 “민중과 함께 살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보고 느낄 수 있어야”하며, “민중속에 담겨있는 지혜와 참을 배우기 위해 민중 문화, 특히 민화, 민속, 탈춤 따위에 그리고 민중 종교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그는 비록 ‘민중신학’이라는 말은 직접쓰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신학이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시사했던 최초의 한국신학자이다. 민중신학의 태동은 현영학에게서 그리고 그 신학의 발단은 서남동과 안병무에게서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2)민중신학의 사회적, 사상적 배경
민중신학이 태동하게 된 데는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사상적 배경이 있다.
민중신학을 태동시킨 사회적, 역사적 배경은 1970년대 한국의 사회,정치, 경제적 현실이다. “경제적으로는 고도 성장과 산업화와 도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으론 ‘유신체제’ 라는 한국적 독재정치의 억압 속에서, 근로자들의 권익을 위하여 발언하고 정치 체제의 민주화를 위해 유신체제의 비민주성을 고발하고 ‘비상조치’를 무기로 삼는 군사독재정치에 맞서 싸우면서”“민중과 경험을 나누고 그들의 한과 희망을 대변하는 가운데서” 한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체험을 신학적으로 고찰하면서 마침내 민중신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신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이다. 이 사건은 서남동이나 안병무가 그들의 신학적 관심과 주제를 민중에게 맞추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남동의 경우, 한국민중운동과 예수해방운동을 결합시키려는 이른바 “두 이야기의 합류”를 전태일 사건에서 찾을 만큼 그 사건은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기초를 이룬다. 전태일 사건이야말로 민중신학을 태동시킨 사회적 기폭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중신학의 사상적 배경은 네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ㄱ)민중신학의 철학적 배경:함 석헌의 씨ᄋᆞᆯ사상
함석헌은 씨ᄋᆞᆯ의 ᄋᆞᆯ자를 풀이하는데, “ㅇ은 초월적인 하늘을 표시하고, -은 내재적 하늘, 곧 자아를 나타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므로 ‘맨사람’, ‘난 대로 있는 사람’인 나는 내재화된 초월이므로 ‘나 곧 하늘’이라는 동일성이 형성된다. 따라서 씨ᄋᆞᆯ로써의 나의 존재 의의는 ‘하나 곧 전체’의 실현에 있게된다. 그런데 씨ᄋᆞᆯ은 ‘하나 곧 전체’의 실현에 도전을 받는다.
안으로는 이기욕이지만 밖으로는 전체를 허물어 뜨리려는 사회악이다. 씨ᄋᆞᆯ은 여기에 능동적으로 대들어야 한다. 씨ᄋᆞᆯ의 사회적 저항이 바로 이것이다. 함석헌의 ‘대듦’은 씨ᄋᆞᆯ의 자존, 자주에 바탕한 주체적 행동이다. 이러한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이 민중신학의 철학적 기틀을 마련해 주었음을 금방 알수 있고 씨ᄋᆞᆯ의 개념규정, 그 저항정신은 민중신학과 거의 일치한다. 안병무가 말한대로 민중은 씨ᄋᆞᆯ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개념이고, 씨ᄋᆞᆯ은 민중의 존재론적 개념이다.
ㄴ)민중 사관의 대두
1960년대가 끝나면서 한국의 사학자들은 식민지사관을 극복하고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민중사관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사관은 민중신학을 여는데 길잡이가 되었다.이것은 민중신학의 기본명제중 하나가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다”라는 점을 보더라도 알수 있다. 서남동처럼 민중신학의 전거를 한국역사에서 찾을때, 민중사관에 입각한 한국민중운동사의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ㄷ)민중문학의 출현
민중신학의 형성을 뒷받침한 것은 ‘민중문학운동’이다. 해방이후 지배적이었던 민족문학은 70년대 중반부터 차츰 민중문학으로 전환되었다. 민중문학가 가운데 특기해야 할 작가는 시인 김 지하이다. 서남동은 김지하의 민중문학의 핵심을 그의 담시 “장일담”에서 읽고 있다. 두 이야기의 합류가 장일담에서 극화되어 있다고 볼 만큼 장일담의 신학적 비중을 높이 평가한다.
ㄹ)민중문화「탈춤」의 실연
민중신학을 태동시킨 배경으로서 민중문화운동을 들지 않을수 없다. 한국에서 60년대의 저항의 표제어는 ‘자유’였는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정의’가 전면에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노동자, 농민,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연대에서 비롯된다. 민중의 편에 서서 불의와 부정, 탄압과 고문을 고발하고 거기에 맞선 투쟁의 문화적 양태가 바로 ‘탈춤’이라고 할 수있다. 탈춤은 억눌린 민중의 전형적인 가면극이다.
이상과같이 한국에서 민중신학이 탄생하는데는 사회, 정치, 경제적인 현실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이미 등장한 민중운동, 민중철학, 민중사관, 민중문학, 민중예술이 그 길을 예비해 놓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민중신학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살아 운동하는 민중 현장과 거기에 대한 다양하고 진지한 신학외적 접근이 있었기 때문이다.
(2)민중신학의 성격과 구조-안병무의 민중신학 이야기를 중심으로
성서에서 민중신학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안병무의 노력은 민중해방의 실상을 예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히브리 해방전통, 곧 예언자의 저항운동, 초기 이스라엘 지파동맹, 출애굽의 해방사건에까지 소급하여 구약성서 전체로 확대시킨다.
그러나 최근동향은 단순히 성서자체를 통한 민중이해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오늘의 민중운동과 연결짓는다. 민중신학은 단연 한국의 역사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민중운동과 민중신학」이라는 교수퇴임강연에서 오늘의 민중신학의 과제로서 성서를 재해석하는 것 외에 세가지 물음을 제기했다.
“첫째,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서 ‘민중’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것인가? 둘째, 오랜 세월에 걸쳐 두꺼운 지층을 형성한 기독교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끝으로, 성서에 나타난 민중사건과 오늘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민중운동과 그사건을 어떤 관련에서 보아야 할는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한 열매가 민중신학 이야기이다.
민중신학도 하나의 신학으로서 정립되기 위해 재래신학에 대한 해석과 비판을 통한 자체의 체계화작업은 당연한 요청이다.즉 체계화의 구현이란 재래의 신학적 개념과 주제에 대한 민중신학적 견해를 밝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민중신학이 신학으로 확립되는 첫걸음이라는 데서 중요성을 갖는다.
이는 안교수가 제기한 민중신학의 과제중 두번째 문제에 대한 모색이며 민중교회운동과 관련해 볼때 신앙고백적, 교육적 측면에서 연결점이 있으리라 사료된다. 그렇다면 안병무 교수가 재래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민중신학적 해석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알아보고, 민중교회와 관련하여 적절성과 타당성측면에서 비판해 보고자 한다.
1)성서에 대하여
안병무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를 이용했다고 비판한다.즉 신앙고백이 텍스트가 되고 성서가 콘텍스트가 되어버린 셈이다. 축자영감설은 교권주의자가 교리와 영감까지 독점하려는 소치에서 비롯된 셈이다. 결국 교권의 지배가 교리를 뚫고 나가 성서자체를 제대로 볼수 없게 한 것이다. 성서의 본질은 민중해방의 역사라는데 있다.
즉 민중해방운동의 전통이 성서의 통일성(맥)을 이루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민중신학의 시각에서 성서를 본다는 것은 “민중의 자리”에서, 또는 “민중의 눈으로”본다는 말이다. 민중의 시각은 고정된 틀에 의거하지 않고 민중이 처한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에서 그들의 절실한 요청에 따라 성서를 보아야 한다고 전제한다. 민중신학의 성서해석은 어쩔수 없이 하나의 당파성을 띨 수밖에 없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관계에 있어서 안병무는 “콘텍스트에서 텍스트로냐”-상황에 안주-아니면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냐”-텍스트를 도그마화-로 갈라 놓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서 콘텍스트와 텍스트를 분리시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민은 텍스트와 콘텍스트로 갈라놓을 수 없는 살아있는 실재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텍스트(예수사건)배후에는 그 텍스트를 뛰어넘는 어떤현실(통시적 민중사건)이 있음을 그는 보고있다. 그렇기에 오늘의 민중사건을 통찰하면 새삼스럽게 텍스트(성서)로 돌아갈 필요없이 그 사건 안에서 예수사건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안교수는 성서의 정경성따위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교수가 정경성을 부정한것은 외적귄위에 국한한 것이지, 내적 본질을 포함한 것이 아니다. 성서의 본질이며 맥이 민중사건이다.
성서는 민중신학의 전거이다. 서동이 성서, 교회사와 한국민중사에까지 민중신학의 전거로 설정하는데 비해서 안교수는 민중론과 민중신학은 구별되어야하고, 민중신학자라면 성서를 근거해서 민중사건을 말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성서가 민중해방의 운동사이기 때문에 민중 아닌 사람이 성서를 잘 읽고 해석하는 길은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이것은 사실상 성서를 몸으로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민중신학이 철저하게 성서에 근거해 있다는 사실은 민중신학의 신학성을 확고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2)예수에 관하여
안교수는 지금까지의 기독론이 성서에 대한 철저한 해석에 바탕해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겠다는 변증적 목적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것이 마치 기독론의 본질인양 인식되어 왔다고 논평한다. 그 의하면, 그리스-로마문화권에서 이루어진 선교적 목적은 예수를 신격화된 구원자로 묘사함으로써 종교적 영웅으로 형상화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신인양성론을 빌어오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기독론이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의 기독론에는 ‘예수’의 행태와 삶이 빠져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예수의 민중들이 ‘고난의 종’의 모습을 멸시와 천대의 자신들의 모습과 일치시키고, 수난당한 자신들이 세상에 대해서 메시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이 혁명적 사고가 예수와 그의 민중이 연속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민중신학이 고전적 대속론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민중이 역사안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속론의 현대적 의의이다.
안교수는 복음서가 예수와 민중을 동일화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예수가 당한 죽음과 지배자에게 짓눌려서 죽은 민중의 죽음이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세계변혁-하나님나라의 새질서-을 전제한 수난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민중현장과 예수와는 어떤관계에 있는 것인가-안교수의 민중 그리스도론이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마가복음기자가 자기시대가 겪는 수난의 현장에서 예수의 고통과 죽음을 예수 개인것으로 보지 않고 민중의 고통과 죽음으로 본것처럼, 예수의 사건은 역사의 현장에서 지금 일어나고있다고 할수있다.
민중신학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민중의 구원의 문제이다. 민중의 절규가 지배자의 구원을 촉구한다. 그리스도가 바로 이 구원의 절규자이다. 이 절규가 우리를 깨우치는 바람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메시야의 바람이라 부른다. 이바람이 바로 민중운동과 민중사건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민중사건이 우리의 해방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냐고 안교수는 말한다.
“그리스도와 민중을 동일시한다면 그 민중을 누가 구원하는 것일까?”(Moltman). 안교수는 “민중이 민중사건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대답한다. 즉민중들이 고통을 연대적으로 의식하고 해방운동에 과감히 나아가는 길, 여기에 민중 스스로의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중에게서 왜 해방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순전히 지배계층의 억누름과 수탈때문이다. 정말 억누름과 수탈의 죄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할 자는 민중이 아니고 지배자이다. 죄인 지배계층의 구원은 민중들의 투쟁에서 가능하다. 이 점에서 민중을 통한 구원과 민중의 구원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수있다. 안교수가 ‘예수가 곧 민중’이라고 했을때, 우리는 오늘의 민중에게서 예수의 익명성을 읽을수 있다. 즉 예수의 현존성-오늘의 예수가 민중인것이다
이상과 같이 안교수의 민중신학이 민중과 예수를 지나치게 동일화한점-특히 십자가와 부활을 민중봉기(해방)와 일치시킨점이 초기의 민중교회로 하여금 해방운동(구조악척결을 위한 체제변혁)에 동참하는 투쟁성과 계급적 당파성은 강화(경직화)된 반면, 교회성과 신앙성을 무시하는 오류를 낳게했다고 논자는 생각한다.
즉 기독교 운동의 정체성을 상실한채 타 운동에 끌려다니고 대중을 잃어버리는 파행성을 낳았다고 본다. 역사적 예수는 있는데 그리스도가 없다.즉 전태일, 박종철이 오늘의 예수가 될수 있을 지라도 그들이 곧 그리스도는 아닌 것이다. 예수의 인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수의 신성은 자취를 감추었다. 민중교회는 해방자 예수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관한 민중신학적 이해는 민중과 직결시키어, 하나님은 곧 ‘민중의 하나님’으로 표명된다. 성서의 신은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이 아니고 삶 자체의 갈등과 모순으로 묻는 물음이다. 성의 하나님은 갈등자체이며 모순 그 자체로 안교수는 본다. 이모순과 갈등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그것이 사건을 일으키는 힘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한 사태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려는 행동은 그대로 사건을 형성한다.즉 성서의 신이 “사건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할때, 그 신은 분명히 민중사건과 연결된다. 그것은 신이 민중사건에서 ‘힘’으로 현존한다. 이 때의 신은 구약의 야훼 신에게서 밝혀진 대로 ‘해방의 신’으로 성격화된다. 해방사건과 운동을 일으키는 신이다. 즉 해방운동의 이념과 그 추진력이 ‘신’으로 표출된 것을 의미한다.
야훼만의 신앙이-신격화된 인간의 지배에 대한 절대부정선언-반군주혁명의 동력이 되었다는 그의 말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비루의 신, 곧 민중의 신인 야훼가 민중신학의 신 이해의 모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수있다. 그런데 ‘해방의 신’ 야훼가 다윗왕조에서는 왕권체제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다.
‘해방의 신이 억압의 신이 되고, 세계에 편만한 신이 성전의 신이 된’신의양면성(변형)을 민중신학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런데 예수의 출현은 이러한 신 이해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신은 눌린사람, 가난한 사람, 밀려난 사람, 병든 사람, 곧 민중을 편애하는 신이다. 민중에겐 민중의 하나님만 있고 다른신은 없으며 지배자에게는 ‘심판의 신’만이 있다.
안교수는 예수사건(운동)이 하느님(사건)을 경험하는 전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영역을 밝힌 셈이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할때, 그것은 곧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된다. 민중운동을 떠나서 신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중사건이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민중신학의 사명이다. 하나님에 대한 민중신학적 이해는 인간의 실존적 차원보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더 의미를 가진다.
4)교회에 대해서
“민중신학에는 교회론이 없다”는 세평이 있기에 민중신학이 ‘교회론’을 제시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요한 교회론을 안교수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민중신학이 더 시급한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는 이유외에도 공관서 자체가 그 당시 제도화 되어 간 교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있어서 언급자체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안교수가 말하는 참된 교회는 민중이 주인이 된 공동체이다. 이교회의 원형을 예수와 민중이 함께 이룬 공동체에서 찾는다.
예수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 도래라는 천지개벽에 참여한 공동체이다. 비록 조직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망을 안고 무턱대고 함께 모였을 것이다. 즉 맨처음의 교회는 ‘모이는 공동체’였을것이다. 모이는 공동체의 중심은 나눔(모든소유, 자유와 권리와 생명까지)에 있었다고 안교수는 말한다.
즉 모이는 공동체는 곧 ‘나누는 공동체’=밥상공동체였다. 예수는 그에게 모인 민중을 세상에 내보낸다. 모이는 공동체는 ‘보냄의 공동체’로 발전한다.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있다면 거기에 민중운동에의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즉 보냄의 공동체의 의미는 민중해방을 위한 운동체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눔의 교회는 나눔을 방해하는 세력과의 투쟁은 불가피하다. 나눔의 교회는 ‘싸우는 교회’다. 이상의 윈칙 아래, 안교수는 기성교회를 비판한다. 제도, 교권, 의식 따위를 지양하고 민중운동전승을 확보하는 것이 예수의 공동체, 교회의 본 모습을 되찾는일이 될 것이다. 민중신학이 오늘의 우리현장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참된 교회는 ‘밑바닥(민중)공동체=민중교회’이어 한다고 안교수는 말한다.
그러나 이상의 안교수의 이 견해는 교회의 원형(본질)을 규명한데 공헌한 바가 있으나 기성교회를 비판만 했지, 민중교회와 기존교회사이의 만남의 여지를 마련하지 못하고 배타적 성격을 띠게하는 문제점을 야기 시켰다. 기독교 신학의 대중성의 문제는 기독교 실천의 중심으로서 참신한 교회상에 대한 구상을 요청한다. 기존교회 대 민중교회의 이분법적 폐쇄를 과감히 열어젖히고 양자의 부정적 측면을 넘어 적극적 측면을 과감히 수용하는 통교회적 기독교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민중교회는 기존교회의 변혁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5)죄에 대하여
기독교에서 ‘죄’는 ‘불신앙’이라 한다. 여기서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믿지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즉 교권주의나 교회주의에서는 죄의 사회적 조건과 인간적 이해가 차단되었다. 안교수에 따르면, 죄의 연원인 구조악으로 인해 억눌리고 짓밟힌 현실을 죄라고 규정한다.
또한 하느님과의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즉 지배계층의 억압과 착취가 평등권을 깨뜨려 약한자들을 못살게 굴 때, 그것은 범법행위이며 죄이다. 예수의 죄이해는 안교수의 죄이해의 핵심이다. 하나님나라의 토대를 방해하는 사탄의 실체-구조악이 죄이다. 구악(사탄)이 없어지면 민중의 해방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최근에 안교수는 독특한 죄개념 즉 죄의 근원을 ‘公의 私有化’에서 찾고있다.공적 것을 사적인 소유로 만드는 것이 죄다. 공의 영역을 파괴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다.아담이 공적인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은 사유화의 본보기다.
사유화가 곧 죄다. 오늘날 생산물의 사유화는 점경쟁을 유발하여 전쟁과 살인을 일삼는다. 성의 사유화는 강간을 낳고, 재산의 사유화는 착취를 낳는다. 권력의 사유화는 억압을 낳고, 지식의 사유화는 독단을 낳고, 신앙의 사유화는 독선을 낳는다. 인간의 모든 소외는 바로 사유화에 기인한다.
그러나 안교수의 이 견해는 첫째로 공과 사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것인가? 둘째로 민중을 포함한 인간의 본능적인 사유욕을 무시했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이러한 죄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이다. 안교수는 유대교체제의 구조를 타파하는데서 구조악을 극복 할수있었던 예수의 태도를 제시한다. 사회구조의 변혁 즉체제의 변혁이 민중운동에서 이루어지고 있고,이루어져야 한다는 안교수는 믿고있고, 이런 입장은 민중신학을 대표하는 것이다
6)성령에 대하여
안교수에 따르면,“성령은 하나의 사건이다”고 정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성령의 의미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힘-낡은 세계를 물리치고 새로운 세계를 실현시키는힘-이라는데 있다. 이런 전제위에서 볼 때 민중사건이 곧 성령사건이다. 그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사건을 민중에 의한 혁명사건이라고 할 수있다고 말한다. 성령을 민중의 자기초월능력으로 성격화한다.
그런데 민중운동이 성령운동이 되려면 그것이 예수운동과 동일성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안교수는 민중운동과 성령운동의 일치성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서, 하나는 자기초월성-자기이익따위를 넘어서서 해방의 상태에 이르려는 것-이며, 다른하나는 종말성-기존의 자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세계를 실현하려는 혁명적 신념-을 제시한다.
그 말한 자기초월은 탈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역사 속에 투신함으로써 역사를 변혁시키는 행위이다. 민중해방을 위한 역사변혁, 여기에 민중운동과 성령운동의 일치성이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성령운동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역사에서 실현하는데 그 본뜻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민중해방이 실현된 세계이므로, 민중의 해방운동은 성령이 일으킨 참된 성령운동이 되는 것이다.
7)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예수의 첫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사실은 그것이 민중해방의 선포라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안교수는 서구신학이 하나님의 나라를 묵시문학과 같은 선상에 놓고 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상대화해버렸다고 비판한다.‘잔치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가 곧 민중의 나라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나의 사상이기에 앞서서 지금 수난당하고 있는 민중들의 갈망이며, 가슴에 응어리진 한의 절규이다.
민중의 고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나라 운동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안교수는 예수의 민중운동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의 현실(실재)이라고 본다. 하나님의나라가 민중의 나라라는 것을 안교수는 주기도문의 해석을 통해 밝힌다.
“온세상이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는 하나님의 주권만이 참된 주권이라는 사실의 고백이며, 그러므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염원할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민중해방운동이 당장에 실현되기를 민중들이 갈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먹는 세계-物이 공동으로 분배되는 세계임을 의미한다.
그는 주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행진하는 자들의 고백이며 노래라고 말한다. 요음 안교수가 하느님 나라의 실체성을 物의 세계와 연결시켜 사고한다는 점은 우리가 주목할 점이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추상화나 정신화를 철저히 거부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物性을 가장 잘드러내는 본보기로서 안교수는 ‘요한집단’의 고백을 든다.
예수가 비역사화되고 교리화되고 추상화되고 복음서마저 케논화되어가는 데 대한 반발로서 요한복음서는 말씀이 살이 되었다고 폭탄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생명의 떡이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등의 선언은 구체적 현실을 증언한것이다. 요한은 物이된 신을 내세움으로써 예수와 그 나라의 비역사화, 추상화, 관념화에 저항했던 셈이다.
신은 역사의 현장에서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민중사건 속에 육화하고 物적 형태로 현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신앙은 오늘의 민중해방운동에 실질적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은 신앙의 육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교수의 이같은 견해는 지나친 물성으로 민중교회내에서 영성적 측면의 무시및 결여 현상을 야기시켰다고 사료된다. 물성과 영성이 통전되는 신학이 요구된다.
(3)민중신학의 전개과정과 과제
역사적으로 볼때, 민중신학은 70년대이래 한국의 상황에서 전개된 특정한 신학의 흐름을 의미한다. 우리는 80년대에 이르면서 운동의 신학, 실천의 신학, 변혁적 신학, 물의 신학 등과 같은 다른 신학의 이름을 접하게 됐다.이 신학들은 민중신학과 다른 어떤신학이 아니라 70년대 민중신학을 발전적으로 혹은 비판적으로 계승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중신학을 이루려고 한 데 있다. 민신학은 종결된, 사문화된 신학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현재진행형의 신학이다.
또 한편으로 등장한 개념이 소위 1세대 민중신학 혹은 2세대 민중신학이라는 말이다. 이분류개념은 70년대의 기성신학자-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문동환, 서광선, 김용복-들에 의해서 전개된 신학과 80년대 소위 소장신학자들에 의한 신학작업 결과를 구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1세대 민중신학의 신학적 성격은 첫째 민중상황의 신학이다.둘째 민중의 주체성에 대한 신뢰(민중구원론)-하나님과 민중을 동일시했다.세째 민중편에서 지배 체제와 기존 교회를 비판하는 신학이었다. 70년대의 한국민중운동이 주로 인권개념을 중심으로 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었던 것에 반해, 80년대 한국민중운동은 80년 광주 민중항쟁을 계기로 하여 근본적 사회 변혁운동으로 그 성격을 전환했다.
80년대 한국민중운동이 제기한 과제는 운동의 과학성과 당파성의 담보, 대중성의 확보라는 문제였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한국기독교 민중운동 주체들에게도 공유되었으며,그들의 실천을 매개로 민중신학의 자기성찰의 계기로 작용했다. 민중신학 2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유물론적 세계관과 정치경제학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이것과 민중 신학을 결합하려는 노력을 시도했으나 교회나 학계에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신학적 원칙에 합의되지도 않고 그럴만큼 신학화 작업이 진전되지도 않은 것같다.
민중신학 2세대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물의 신학’은 한편으로 민중생명의 세계관과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의 성육신 신앙을 접목할수 있는 민중생명해방의 신학 또는 ‘상생의 신학’과 담화공동체를 형성해야한다고 박종천교수는 말한고, 이를 위해 민중신학은 물질적 세계관의 정신사적 형성과정에 대한보다 면밀한 검토를 해야하며,물성과 영성의 거룩한 통전을 기할수 있는 기독교 복음의 생명 이해를 재활용할수 있어야한다.
민중신학이 한국의 민중상황과 기독교운동권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신학이 되기위한 90년대의과제는 째로 유물론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정립이다.본래 민중신학은 기독교 민중운동과의 긴밀한 관련속에서 형성되었고, 기독교 민중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할 과제를 안고 있다.
유물론적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과 결합될 수 있는가를 신학적으로 논하기 전에 유물론적 세계관을 이론적 기초로 삼고서 대중적인 기독교 사회운동이 가능하겠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 계급이 역사발전의 주역이고 미래사회의 주인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史적 유물론이 필요하고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의 적대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필요할 뿐이다.
기독교인이 노동자의 해방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신앙과 유물론은 대화와 서로 배움을 통해 서로를 보충할수 있을 것이다. 양자의 만남은 해석학적 매개고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성서에서 유물론의 중요한 계기들-민중적 당파성, 민중해방을 위한 실천, 물질적 생산활동, 공산적 나눔-을 찾을 수있을 것이다. 둘째로 민중신학은 통일신학이어야 한다.
민중은 민족의 실체와 주체이며 통일을 주도하는 주체이다. 통일신학은 화해의 신학, 밥의 정의의 신학, 공동체 신학이어야 할것이다. 세째 민중신학은 기독교운동권 가운데서도 특히 민중교회 운동과 깊은 유대속에서 신학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민중교회운동이 여러 측면에서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신학 작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형성한다는 자체가 설교, 기도, 예배, 신자교육, 성서연구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네째 민중신학은 한국교회를 설득하고 동원할 수 있는 신학이어야한다. 민중신학이 대중을 장악하고 물리적 힘을 지닐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민중운동주체와 민중신학을 어떻게 결합시키느냐에 따라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의 신학, 실천의 신학을 말할때, 단지 신학의 내용이 운동 혹은 실천을 반영해야한다는 차원만이 아니라 신학의 자기전개방식 자체가 운동적, 실천적이어야함을 의미한다. 각각의 실천주체들이 각각의 장에서 자기나름의 운동 내용과 형식을 개발하고 전개하면서도,공동의 운동목표를 달성하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통일된 전체의 작업을 하는데 있다.
그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민중신학은 한국민중운동에 참여하는 한국기독교 민중운동주체들의 실천에 복무하는 명실상부한 운동의 신학, 실천의 신학이 될 수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