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박공 묘갈명병서(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朴公墓碣銘幷序)
나는 일찍이 선주(善州)의 부사(府使)가 되었을 때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밀양(密陽) 박경길(朴敬吉) 길보(吉甫) 공(公)과 함께 유람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지금에 이르러 거의 30년이 흘렀지만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함은 하루와 같았다.
금년 무술년(戊戌年, 1658, 효종 9) 2월에 공이 병에 걸려 죽었으니, 공이 태어난 정축년(丁丑年, 1577, 선조 10)과 시간적 거리가 82년이 된다. 10월에 상주(尙州) 만악산(萬岳山) 생물리(生物里)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아, 내가 차마 공의 명을 쓸 수 있겠는가?
공은 성품이 순수하고 돈독하여 선조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였다. 나이 16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임진년의 큰 난리를 만나 예를 갖추지 못하고 장사를 치른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겨 죽을 때까지 화려한 복장을 하지 않았다. 상장(喪葬)에 필요한 물품은 간략함과 소박함을 따르라고 유언을 남겼다.
송당(松堂)선생의 유고(遺稿)가 산실되어 공이 성의를 다해 찾아내어 문집 한 질을 만든 뒤에 종제(從弟) 전(前) 병사(兵使) 박경지(朴敬祉)에게 간행하도록 부탁하였으니, 먼 선조를 추모하는 효성의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남에게 베풂에 왕소소(王昭素)를 흠모하고 손님을 사랑함에 진맹공(陳孟公)을 흠모한 일은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몸이 더욱 강녕(康寧)하였고, 강호를 방랑하며 음주를 스스로 즐겼으며 학발동안(鶴髮童顏)으로 바라보면 신선과 같았다. 태창(泰昌) 원년(1620년, 광해군 12)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훌륭한 후손이 이어졌다.
비조(鼻祖)는 고려 때에 규정(糾正) 삼품(三品)을 지낸 박현(朴鉉)이고, 아래로 십여 대에 높은 벼슬이 대대로 이어졌다. 고조 박영(朴英)은 성리학에 잠심(潛心)하여 세상에서 유림의 종장이 되었고, 후인들이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관직이 병조 참판에 이르렀으니 바로 송당(松堂) 선생이다.
증조 박거이(朴居易)는 좌통례(左通禮)를 지냈고, 조부 박돈복(朴敦復)은 영릉 참봉(英陵參奉)을 지냈다. 부친 박몽필(朴夢筆)은 부사과(副司果)를 지냈고, 모친 의인(宜人) 일선 김씨(一善金氏)는 대사간(大司諫) 김취문(金就文)의 따님이다.
아내 숙부인(淑夫人)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부친이 예조 좌랑을 지낸 최산립(崔山立)이다. 맑은 행실이 있었지만 공보다 14년 먼저 죽었고 묘소는 공의 무덤 뒤쪽에 있다.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 회(繪)는 아들 수고(守古)ㆍ수순(守淳)ㆍ수진(守眞)과 전응규(田應奎)에게 시집간 딸이 있다. 차남 집(緝)은 아들 수백(守)ㆍ수헌(守憲)과 유만하(柳萬河)에게 시집간 딸과 아직 어린 딸이 있다. 막내아들 륜(綸)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4녀 중에 장녀는상례(相禮) 이이송(李爾松)에게 시집가서 아들 전오(全吾)ㆍ명오(命吾)ㆍ회오(會吾)ㆍ동오(仝吾)를 두었고, 세 딸은 김선기(金善基)ㆍ전시성(全是性)ㆍ김익견(金益堅)에게 시집갔다. 둘째 딸은 김전(金烇)에게 시집가서 아들 정기(正基)ㆍ명기(命基)를 두었고, 박시창(朴施昌)ㆍ임세유(任世維)에게 시집간 딸과 아직 어린 딸 하나가 있다.
셋째 딸은 김만정(金萬挺)에게 시집가서 아들 윤(潤)을 두었고, 이산년(李山年)ㆍ박세주(朴世胄)에게 시집간 딸과 나머지 어린 딸이 있다. 넷째 딸은 정렴(鄭燫)에게 시집가서 아들 요신(堯臣)을 두었고, 권동로(權東老)에게 시집간 딸과 아직 어린 딸 하나가 있다. 내외(內外)의 손자와 손녀, 증손자와 증손녀를 합하면 백여 명이 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신선 고을에서 태어나 / 生仙鄕
명문가에서 자라고 / 長名家
술로 세월을 보내며 / 酒爲年
자연에서 여든 두 해를 넉넉히 놀았네 / 優游八十二春秋於煙霞
아, 천년만년이 지나도 / 嗚呼千秋萬歲兮
아름다운 자취는 낙동강 가에 남으리라 / 芳躅留於洛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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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선주(善州):
경상도 선산(善山)의 다른 이름이다. 학사 김응조는 1633년 9월에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임명되었다.
[주02]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 박수종(朴壽宗)이고, 어
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褆)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났고,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는데, 1494년에 성종이 승하한 뒤 고향으로 가서 낙동강 가에 집을 짓고 ‘송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鄭鵬)ㆍ박
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대학》과 경전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1655년 4대손 박경길(朴敬吉)이 박영의 시문을 수습하였고 종제(從弟) 박경지(朴敬祉)가 박경길의 부탁에 따라《송당집》초간
본을 간행하였다. 이후 1864년, 1905년에《송당집》을 간행하였다. 저서로《송당집》이 전한다.
[주03] 왕소소(王昭素):
894~982. 송나라 개봉(開封) 산조(酸棗)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 행실이 지극했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면서 생계를 꾸
렸다. 왕소소가 방을 수리하면서 목재를 쌓아놓았는데, 벽 사이로 도둑이 들어오다가 목재가 가로막혀 들어오지 못하였는데, 왕소소
가 알아차리고 방안에 있는 물건을 전부 밖으로 내던지며 도적에게 말하기를 “너는 속히 떠나라. 포졸이 올까 염려된다.”라고 하니,
도적이 부끄러워 물건을 그냥 두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읍중(邑中)에 도적이 없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구경(九經)에 두루 해박했고, 노장(老莊)도 함께 연구했는데, 특히
《시(詩)》와《역(易)》에 정통했다. 성격이 순수 질박했으며, 사람을 잘 판단했다. 저서에《역론(易論)》33편이 있다.
[주04] 진맹공(陳孟公):
한(漢)나라 때 사람 진준(陳遵)으로, 맹공은 그의 자이다. 진준은 술을 좋아하여 술자리를 자주 마련하였는데, 손님이 모여들면 대
문을 잠그고 그들이 타고 온 수레의 비녀장을 샘에 던져 넣어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漢書 卷92 游俠傳 陳遵》
[주05] 최산립(崔山立):
1550~1615. 자는 입지(立之), 호는 우암(愚庵)이다. 선산(善山) 해평(海平)에 거주했다.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
다. 1599년(선조 32) 진보 현감에 재직하여 청덕(淸德)으로 추앙을 받았으며, 1609년(광해 1)에는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
되어 3년간 재직하였다.
[주06] 상례(相禮):
통례원(通禮院)에 소속된 종3품 관직이다. 통례원은 조선 시대 국가의 의식을 주관하던 관청이다. 예조의 속아문으로 조하(朝賀)ㆍ
조참(朝參)ㆍ제사(祭祀)ㆍ행례(行禮) 등 조회와 의례를 관장했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