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 번 가려면 그 길이 쉽지는 않지요.
그래도 축지법이라도 쓴 듯 갈 때는 쉽게 갑니다.
지난 토요일도 모처럼 남산 둘레길을 걷기로 약속이 있던 터라, 서울을 갔습니다.
평택역에서 7시48 분 기차를 타고 서울 가는 길.
자동차로 가면 편하기는 합니다만 서울 진입해서는 많이 막히지요.
그래서 예정했던 시간을 훨씬 넘기기 일쑤여서 이번엔 기차를 탔습니다.
남이 해 주는 밥만 맛있는 게 아니라 남이 대신 해 주는 운전도 맛있습니다.
편하게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며 가는 길.
기차로 가면 잠깐이긴 하지만 두 손과 두 발이 모두 자유로우니 생각도 자유롭습니다.
그렇게 가다보면 어느새 목적지.
명동을 가려는데 용산역에서 내립니다.
명동이 서울역에서 가깝다 그러지만 1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어쩌고 하다보면 번거롭단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용산역에서 내려 잠깐 신용산역으로 가면 한 번에 명동을 갈 수 있으니 편하더군요.
그렇게 명동역을 향하여 갔습니다.
명동역에 내려보니 투명한 안전문에 시민들이 쓴 시들도 있고, 그 사이로 윤동주 시인의 시도 보입니다.
겨울은 아니지만, 문득 쓰고 싶어지는 편지이기도 합니다.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이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 윤동주 시인, <편지> 전문-
한 여름에 겨울의 편지를 받고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 갔습니다.
매번 갈 때마다 출구를 달리하여 갔고, 돌아오는 길엔 명동의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오자니,
지하철 타는 곳을 잘못 찾아 한참을 헤매기도 하던 명동.
그러나 이제는 10 번 출구를 찾아 갑니다.
남산 둘레길을 바로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명동 성당도 가톨릭 회관을 거쳐 바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음을 알고난 후 부터는 다른 출구로 가지 않습니다.
토요일도 그 10번 출구를 찾아 경쾌한 걸음걸이로 올라갔습니다.
10 번 출구에 미리 나와 계시는 분.
이십 여 년 만에 다시 뵌 후, 가끔 만나는 분이십니다.
지금의 제 나이 비슷한 때에 처음 뵈었으나 지금은 이십 년도 더 지났으니 어느새 칠십이 넘으신 분.
그러나 목소리와 걸음걸이는 여전하셔서 세월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거의 석 달 만에 뵈었는데, 만나자 마자 선물도 주시더니 세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첫째, 대한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둘째, 남산 둘레길을 간다.
셋째, 성지 순례를 한다.
마침 무료 영화 볼 수 있는 것도 남아서 예매를 하려 했더니, 그날 따라 검색창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통과.
남산 둘레길은 지난 번에도 다녀왔으니, 그럼 기꺼이 성지 순례를 하자고 결정했지요.
"함께 하는 길이면 어디든 좋습니다." 하고는 성지순례의 출발점인 명동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대성전 안으로 들어가 잠시 기도를 한 후 출발.
순례길 지도를 미리 검색하여 찾아 놓았던 것도 지워진 상태.
그러니 기억을 되살려 서소문을 향하여 걸었습니다.
한국은행 건물을 지나 시청도 보이고, 숭례문을 시가지 한복판에서 바라보는 것이 새로웠지요.
서울에는 이십 년도 더 전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기에, 그때 오가던 길을 다시 보니 감회도 달랐습니다.
남대문 시장도 생각나고 잠시 머물던 기억들이 솔솔 되살아났지요.
그렇게 걷다보니 남대문 밖 칠패 시장의 표지가 보이더니 염창교가 나옵니다.
조금 익숙하다 했더니 서울역 뒷편으로 있던 수제화 만드는 상가가 주욱 늘어선 것이 보이더군요.
예전엔 북적거리던 곳이었단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렇질 않은 듯 했습니다.
그 바로 맞은 편이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이 있는 성지였습니다.
서소문 공원 안에 있어서 주변에 사는 시민들이 언제든 산책하며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지요.
걷다가 벤취에 누군가 누워 있는 듯한 모습이 보여 가까이 갔더니, <노숙자 예수님> 조각상이었어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분을 표현한 듯 했습니다.
그런데 아, 이게 무슨 일이람!
명동 성당 바로 아래에서 쭈그리고 앉아 구걸하던 분들을 그냥 지나쳐 왔건만.....
공교롭게도 노숙자 예수님을 만나다니!
서울역에서도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노숙자들이어도 한 번 관심을 가진 적은 거의 없었지요.
그냥 지나치기에 바빴으니 말입니다.
건강하면서도 일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지요.
노숙자 예수님이 계속 머리에 남은 채, 순교자 현양탑 앞으로 가서 한 분 한 분 성인의 호칭을 부르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혼자였으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서소문 밖 성지를 벗어나니 중림동 약현 성당의 모습이 바로 보이더군요.
언덕배기에 있으니 멀리서도 보일 법 했어요.
명동 성당보다 더 먼저 서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성당.
그곳은 마침 결혼식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 기도의 장소로 가니, 서소문 순교 성지 표지석이 보였습니다.
뽀얗게 먼지가 앉은 표지석을 말없이 물휴지를 꺼내어 닦으시는 분의 모습을 보고,
저도 얼른 물휴지로 표지석을 닦았습니다.
깨끗하게 닦아 놓고 나서 보니 그제야 서소문 밖 성지는 100 여 명이 넘는 교우들이 순교한 가장 큰 순교 성지이며,
마흔 네 분이 성인으로 선포 된 빛나는 영광의 땅이고, 거룩한 믿음의 터전이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의 터전에서 새로이 출발하는 신혼 부부의 모습을 보게 되니, 무언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지요.
성인들의 삶을 따라 갈 수는 없지만 '표지석의 먼지를 닦아내는 그 마음이라도 잊지 말자.' 그러며 다시 길을 걸었습니다.
서울 시내 한 복판을 제가 그렇게 걸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 그러나 저는 걷고 있었습니다.
순례길을 가자 하고는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기회는 이렇게 찾아 오는 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구나 싶기도 했어요.
아직 오전이라고는 하나 여름의 뜨거운 열기로 후끈거리는 길.
그러나 곳곳에 놓인 화분에 핀 꽃이 걷는 길을 환하게 밝혀 주었습니다.
오후 한 시 쯤엔 내려와야 하는 일정이므로 많은 곳을 갈 수는 없기에,
마지막 순례지로 계획한 당고개 성지를 향하여 걷는 길.
옛날 고갯 마루에 당집이 있어서 당고개로 불리었다는 그곳.
4호선 당고개 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청파동을 지나 신계 역사 공원 안에 있는 성지였어요.
삼각지 역에서 내려 가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인데, 서소문에서 이야기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하더군요.
아파트로 둘러싸인 곳에 포근하니 자리잡은 곳.
기해 박해(1839년)가 일어나던 해, 당시 일반인은 서소문 밖, 사제는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는데..
설 대목장을 앞둔 상인들의 요구로 처형지를 바꾸어 한강가로 조금 나아간 당고개에서 사형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모두 열 분의 교우가 순교한 곳이지요.
심순화 카타리나 화백의 '어머니의 성지, 어머니의 품'이라는 주제로 디자인 되었다는 성지는.. 그래서일까요.
아이를 안은 한복 차림의 성모님은 포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 14처와 열 분 순교자의 모습이 흙벽에 옹기와 도자기 조각으로 그려져 있는데, 낯설지가 않더군요.
결연한 표정의 순교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이웃의 모습이기에
그 순교의 넋이 더 와 닿는가 싶었습니다.
푸근한 성모님의 모습이 저절로 웃음짓게 하는데...
성지의 순교자들은 그 무참히 피 흘리던 참혹한 순간이 아니라,
이제는 오랜 세월이 지나 도심 한 가운데에서 웃음 짓고 계시는 듯 했습니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가정의 중심에 평화의 모습으로 함께 하고 계시는 건 아닐는지.....
세 시간 가까이 걷다보니 기차 시간이 간당간당 하여 서둘러 용산역으로 향했습니다.
석 달 만에 뵈었으니 맛있는 점심도 함께 하리라 생각했는데, 성지 순례길을 걷느라 먹을 시간을 내지 못 했지요.
겨우 용산역에 도착하니 이십여 분 시간 여유가 있더군요.
그냥 헤어지기는 섭섭하여 근처 빵집으로 가서 빵과 함께 시원한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셨습니다.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걸었던 순례길.
기차역에서 먹는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의 시원함이 어느 때 보다 더욱 맛있는 점심이었어요.
예정에 없던 순례길이었지만, 동행하신 분이 건강하셔서 함께 걷는 길이 감사했습니다.
10 번 출구로 나온 길이 순례길로 이어지니, 늘 함께 하는 길의 시작인 것만 같았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때도 더없이 귀하게 여겨 주시는 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도 그렇게 대하여 주시는 분.
10번 출구로 가면 언제든 두 팔 벌리며 반가이 맞아 주실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셔서 오래도록 그 사랑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저도 조금씩 그 사랑을 닮아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첫댓글 핸드폰으로 올렸더니 글씨가 한꺼번에 몰린 것이 되더군요.
깜짝 놀라 다시 컴퓨터를 켰는데.. 그 사이 읽으신 분도 계시네요..ㅎㅎ
잠시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사진을 요런 방법으로 올릴 수 있는 것을 몰랐구먼요.
하여 다른 댓글로 올린 사진은 지웁니다.
새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항상 바쁜 와중에도 순례의 길을 다녀온 벨라 자매님의 신심이 대단하십니다.
10번 출구로 가면 그리 쉽게 연결이 되는 줄 참고하겠습니다.
장문의 글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가짐니다.
성지 순례의 길을 부러워 하며 감히 동행하자고 말못하겠습니다.
종종 순례의 뜻 깊은 시간을 가지기 바랍니다.
동행하신 분이 누구일까 참 궁금도 하여라.~~~
신심이 대단하다는 말에 어찌할 쥴 모르겠구먼요~~^*^
글 올린지 며칠이 지났건만
이제서 읽어 봅니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신심이 깊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다재다능한 자매님 옆에 항상 붙어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