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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0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가정주일 * 홍지훈 목사
에베소 6:1-4
정상 가족
매일 아침에 방송하는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올해로 20년째라고 합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5일 간 방송하는데,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한 가정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주인공은 24세 여성인 지안씨입니다.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남의 집 앞에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랐고, 만 18세가 되어서 고아원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 “보호종”이라고 자기들끼리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보호 종료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나이가 되면 공적인 보호를 받는 나이가 종료되어서 고아원을 떠나 자립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과 그 가족 이야기가 평범하지 않기에 <인간극장>에 나왔습니다.
함께 사는 “가족”이 있는데, 그녀가 엄마라고 부르는 여인은 38세입니다. 14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엄마입니다. 주로 “마미”라고 부르지요. 그 엄마이름이 “마미나”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초등생 아이들 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엄마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작은아버지”입니다. 혼란스러우시죠? 주인공 이름은 “지안”인데 어린 아이들은 주인공 여성에게 “지안 이모”라고 부릅니다. 더 혼란스러우시죠?
왜 이런 복잡한 가족이 구성되었는가하면, 마미나씨 부부가 고아원 봉사를 통해서 오랜 세월 지안씨를 보고 살다가 한집에 사는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안 씨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마미나씨를 엄마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여인의 아이들은 지안 씨를 그동안 이모라고 부르며 친해졌기 때문에 호칭이 복잡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23세 난 또 다른 아들은 이제는 독립해서 삽니다.
문제는 “작은 아버지”입니다. 왜 작은 아버지인가하면, 지안 씨에게는 49세난 아버지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은 “보호종” 청년들과 긴 시간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자발적으로 가져온 사람입니다. “보호 종료 아동들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센터”를 운영던 중에 한 청년이 응급상황에서 수술 받아야하는데, 보호자가 없다고 거절당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입양하여 여러 명 아이들의 법적 아빠가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지안 씨의 법적 아빠입니다. “보호종” 청년들은 이 법적 아빠와 대화하면서 자신이 버려졌다는 오랜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 옆의 “작은 아버지”를 통해서 함께 일하며 생활비를 법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면 정말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됩니다. 자립하고 독립해서 흩어져 살지만,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제 눈에 분명히 “가족”입니다. “이상한 가족”, “비정상 가족”이라고 할까요. 방송은 연출된 프로그램이니, 시청자가 알지 못하는 다른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개된 내용은 제가 요약한 대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법률로 정한 가족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2005년 이전에는 호주를 중심으로 하는 부계혈족이었는데, 이 후에는 “생계를 같이하는 특정한 범위에 해당하는 인척, 배우자의 직계혈족과 배우자의 형제자매까지” 가족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족의 범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우리는 가족이란 혈연관계 안에서 규정합니다. 그래서 가족의 최소 구성단위를 만드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런데 통계조사에 따르면, 25년 전 연간결혼 건수가 40만 건 정도인데 비해, 요즘은 일 년에 25만 건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출생률이 심각하게 떨어진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결혼하는 나이도 같은 기간 동안 약 5살 씩 늦어져서, 요즘 평균결혼 나이는 남성 33세 여성 31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혼률은 결혼률이 줄어드는 동안 조금씩 늘어나서 일 년에 약 11만 건이 좀 넘는다고 합니다. 이 통계가 말해주는 것은 한국사회의 가족형성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느냐?”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20여 년 전에는 약 73%가 해야 한다고 했지만, 요즘은 평균48%가 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결혼필수에 대한 견해는 요즘은 반반이라는 것입니다. 이혼반대에 대한 생각도 약 33%정도만 반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1인 가구, 2인 가구에 대한 통계조사결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현재 1인 가구가 30%정도이고, 2인 가구 16%정도입니다. 통계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부부와 미혼자녀가 함께 사는 가구 수는 31%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농담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지 않지만, 뼈있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안주인에게 관심 1순위는 무조건 자녀가 된지 오랩니다. 남편이 1순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남편은 서운해도 은근히 2순위는 되기를 기대했는데, 2순위는 애완견이랍니다. 이 뼈있는 농담은 <가부장적 가정>의 한계를 칭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아버지가 혼자 가정경제를 책임지기에 늘 밖에서 일에 치여 사느라고 아내와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다 이해해 주겠거니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는데, 세상이 변한 것입니다. 전처럼 가장인 아버지의 말씀 한 마디면 온 집이 부들부들 떨 때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더 변화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정의 구성단위가 혈연을 넘어서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가정을 유지하는 중요한 가치는 혈연을 넘어서 “소통”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인간극장의 “지안 씨”가 사는 가정은 혈연이 아닌 소통이 가정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의 설교의 절반을 성경말씀 아닌 이야기로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제게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성경에 나오는 옛날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들면서 오늘의 현대사회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압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현대사회속의 인간이 어떻게 성서의 정신을 회복하며 살 수 있을까 제안하고, 이 정신에 따라 살아가도록 안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한 번 이 시간에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소위 “정상 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의미를 점점 잃어가는 이 시대에 성서와 교회는 어떻게 대답해야하겠습니까? 오늘 에베소 6장 말씀처럼, 자녀에게는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종을 말하고, 부모에게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라고 하는데, 문자를 넘어선 성서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현대사회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할까요?
전에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을 독신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은 “비혼주의자”라고 바뀌었습니다. 미혼과 기혼 사이에 “동거”라는 개념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독신주의는 아닌데 비혼주의라는 의미도 됩니다. 통계조사 좋아하는 분들이 이 문제도 조사했습니다.
오늘날 동거에 대해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고 답한 수가 63%입니다. 물론 나이에 따라 차이는 큽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절반 이상이 비혼 동거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가 비혼 자체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한 대답이 77.7%로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상 가족”의 개념이 도전을 받기 시작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혼인관계로서의 가족 개념을 넘어서서, 함께 거주하고 생계를 공유하는 관계가 가족의 개념이 되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혈연관계의 가족의 경우에도, 함께 거주하지 않고 생계를 공유하지 않아도 정서적 유대관계가 돈독한 만큼 가족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통신수단의 발달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무료로 화상통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지 않아도 마치 함께 사는 것처럼 생생한 모습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혈연관계이건 아니면 비혈연관계이건 변화된 가족개념을 정의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적 가족”이란 용어입니다.
오늘은 우리교회가 가정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하여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혼자 또는 부부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생각이드시던가요? 물론 모든 자녀가 다 출가하여 이미 부부만 살게 되거나, 다른 이유로 인하여 혼자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의 경우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가정예배라고 부르려면 그래도 옛날처럼 오손도손 모여앉아 예배드려야 가정예배의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정 또는 가족 역시, 과거의 모습과 사뭇 달라졌다는 현실 앞에서 크리스천의 가족관계 역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제는 부모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강요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같이 살 때는 그래도 따라오지만, 분가하면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의 상황 속에서 크리스천에게 가족이란, 그리고 가정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앞서서 혈연을 넘어서 소통이 가족개념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부모가 살아온 경험에 근거하여, 자녀들의 앞날을 염려해서 말하는 일방적인 조언을 자녀들이 잘 받아주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라는 말은 자녀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인 동시에, 부모가 해서도 안 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소통이란 일방적인 대화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왜이래”라는 말도 사용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요즘 세대는 반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어른들은 왜 그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극장에 나오는 24세 지안씨는 속상한 것이 참 많습니다. “정상 부모”가 없이 자라서, 남들이 해 본 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안씨 마음에는 “못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런 마음이 가끔 얼굴에 나타날 때마다, 겨우 14살 많은 엄마가 지안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미 가진 것을 보라.”고 말입니다. 아주 자신 있게 말입니다.
방송에 등장하는 “엄마”, “작은 아버지”,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혈연으로 낳은 자녀 키우기도 이렇게 힘든 세상에, 자기가 낳지도 않은 아이를 자녀로 삼아 데리고 살면서, 해야 할 조언을 아낌없이(?)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저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조심스러운데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자녀의 가치관을 의심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의 가치관이 겉모양 그대로 자녀에게 전수되어야 한다면, 자녀들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정상 가족”의 개념이 달라져가고 있는 것처럼, 가치관도 외형은 변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살면서 지켜온 삶의 가치관이 지닌 정신은 부모가 원치 않아도 자녀에게 그대로 전수되는 것입니다.
지안씨 같은 “보호종” 아이들이 모이도록 공간을 만들고 정기적으로 만나서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지안씨의 “법적 아빠”는 모인 아이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하면 스스럼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떤데?”라고 말입니다.
그는 고민하는 문제에 자신이 법적아빠로서 또 보호자로서 모범답안을 만들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고아원에 살면서 “안돼!”또는 “반드시 이렇게 해!”라는 명령 같은 말을 이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요.
생각해보면 혈연관계라는 사실 때문에 부모는 자녀의 미래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가깝기 때문에 자녀를 그냥 두고 볼 수 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일수록 소통은 더 힘들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가정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으로 설교말씀의 결론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일방적이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우리 속사정을 들어주고, 우리를 이해해주고, 우리를 지지해주기를 바랍니까? 이것만 생각해보아도 당장 우리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나를 지지해주고 믿어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어서 언제나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동시에 교인들도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 운운하면서 자기주장을 늘어놓거나,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것을 경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정이든, 일터이든, 교회이든, 학교이든 그리고 사적인 모임이든 모두가 일방적으로 운영되는 시대는 다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인내와 긍휼입니다. 평화목교회 안에 그리고 그 가정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