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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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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난중일기의 현장을 가다①②
이장희 추천 0 조회 25 14.06.03 16: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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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의 현장을 가다①- 이순신의 상승(常勝) 뒤에 숨은 절대 고독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 국보 제76호 난중일기(아산)

● 국보 제304호 진남관(여수)

● 국보 제305호 세병관(통영)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군함, 상륙정, 여객선, 시외버스, 개인택시를 번갈아 타고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기록된 이순신의 전승지 남해안과 다도해횡단 답사 7박8일. 열세함대로 우세함대를 격파, 임진왜란을 전승으로 종결시킨 이순신의 상승(常勝) 전략을 추적했다.

 

 

牙山 현충사에 모신 李忠武公 영정.

 

 

월22일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아침 7시20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한상일 기자와 만났다. 溫陽(온양) 가는 고속버스는 7시30분 정각에 출발했다(1인 요금 5000원). 오전 9시, 온양에 도착하여 터미널 부근에서 잠시 요기하고 택시 편(요금 1만원)으로 牙山市(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소재 順天鄕(순천향)대학교에 내려 부설 「李舜臣(이순신)연구소」로 찾아갔다.

 

오전 10시, 이순신연구소 소장 權淳庸(권순용) 교수와 연구위원 이건영·박현규 교수를 만났다. 필자는 이번 亂中日記(난중일기) 현장 답사기간(7월22∼29일) 가운데 처음 2박3일간을 순천향대학교에서 주최하는 「李충무공 전승지 해상·국토 순례」(7월22∼26일)를 따라가기로 했다. 순례에는 전국에서 지원한 고교생 104명 그리고 순천향大 학생 21명 등 모두 165명이 참가한다.

 

오후 1시, 순례단원들은 순천향대학교 강당에 집합했다. 오후 3시, 관광버스 세 대에 분승한 순례단은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사적 제155호 李忠武公 遺墟(이충무공 유허)에 도착했다.

 

이곳의 성역화는 1966년, 朴正熙(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주도로 이뤄졌다. 境域(경역)이 10만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고, 顯忠祠(현충사)와 유물전시관이 새로 건립되었다.

 

먼저 李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 현충사로 갔다. 사당 안에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장군의 영정이 중앙에 모셔져 있다.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다. 벽면에는 문학진·정창섭·장우성 화백이 합작으로 그린 「한산대첩도」 등 기록화 10폭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 현판 「현충사」는 朴正熙가 썼다. 순례단은 빗발을 피해 처마 밑에 도열하여 조별로 참배했다.

 

이곳에 이순신의 사당이 처음 설립된 것은 숙종 32년(1706)이었다. 이듬해 왕은 현판 「顯忠祠」를 내렸다.

 

 

 

 

 

亂中日記는 水軍 지휘를 위한 메모

 

 

 

 

이어 유물전시관으로 갔다. 이곳엔 국보 제76호 亂中日記를 전시하고 있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쓴 일기다. 난중일기가 시작된 날은 선조 1592년, 곧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음력 1월1일(이하 이순신 및 壬亂 관련 일자는 모두 음력)이다. 일기가 끝난 날은 왜적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17일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武官이면서도 달필이며, 文體(문체)는 간결체다. 後世(후세)의 누군가가 읽을 것을 의식하여 쓴 글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일기에는 왜(why), 어떻게(how) 등을 과감하게 생략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 연구로 저명한 키타지마 만지(北島萬次) 日本公立女大 교수는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조선 水軍을 지휘하기 위한 메모』라고 평한 바 있다.

 

 

 

 

 

난중일기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얘기가 많다. 조선 水軍의 현황과 왜란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 특히 이순신 휘하의 목수·石工·弓匠(궁장) 등 職人(직인), 노비, 피난민, 승려, 병졸 등의 역할도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바쁜 陣中생활 틈틈이 기록한 것이지만, 문장이 유려하다. 그는 兵法書(병법서) 한 권을 손에 잡으면 하룻밤을 밝혀 독파하는 독서인이었던 만큼 그런 문장력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국보 제76호의 정식 명칭은 「李忠武公 亂中日記 附 書簡帖 壬辰狀草」(이충무공 난중일기 부 서간첩 임진장초)다. 그가 상부에 전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청한 문서인 壬辰狀草, 가족·친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書簡帖과 더불어 국보 제76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李충무공의 유물로는 장검 2점, 玉鷺(옥로: 갓 위에 다는 해오라기 모양의 玉 장신구) 1점, 腰帶(요대) 1점, 桃盃(도배) 1쌍 등이 전시되고 있는데, 보물 제326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장검은 1594년 4월 閑山島(한산도) 진중에서 太貴連(태귀연), 李茂生(이무생)이 만든 것으로, 칼몸에 다음과 같은 이순신의 친필 劒銘(검명) 16자가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李충무공 유허」에는 그가 기마술을 연마했다는 치마장, 궁술을 연마했다는 활터,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宗家(종가)와 旌閭(정려)가 있다. 이순신의 셋째 아들로서 1597년 牙山에 침범한 왜군과 맞서 싸우다 21세의 나이로 전사한 이면의 묘도 있다.

 

현충사 참배를 끝내고 순례단은 李충무공 묘소로 이동했다. 묘소는 현충사에서 9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중턱에 있다. 묘소 참배를 끝내고 순천향대학교로 되돌아왔다. 고교생·대학생들과 어울리는 일은 매우 즐겁다. 순천향대학교 기숙사에서 1박했다.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3월8일(음력·이하 동일) 서울 乾川洞(건천동: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에서 德水(덕수) 李씨 貞(정)의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 그의 생가 터에는 왕년의 名배우 신영균씨 소유의 명보극장이 들어서 있다. 소년기 이순신의 행적에 관해서는 동네아이들과 함께 南山에 올라가 전쟁놀이를 하면서 대장 역할을 했다는 정도의 일화 이외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그는 소년기에 충남 牙山으로 이주했다. 그렇다면 이순신 집안의 형편을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순신의 조부 白祿(백록)은 깨끗한 선비로서 명망이 있었는데, 中宗(중종)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白頭(백두: 평민)로 지냈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草溪(초계) 卞씨 守琳(수림)의 딸로 그녀의 친정이 아산고을 백암리(지금 현충사가 있는 뱀밭 마을)에 있었다. 서울생활이 어려워지자 李貞은 부인의 친정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순신에게는 외가인 牙山 백암리가 그의 고향처럼 되어버렸다.

 

牙山 이주 당시 이순신의 나이에 대해서는 8세, 13세, 16세, 18세 說(설) 등이 있는데, 필자는 열여섯 전후로 추측한다. 왜냐하면 1591년 좌의정 柳成龍(류성룡)이 『이순신과는 이웃에 살아 일찍이 그의 인물됨을 잘 안다』면서 그를 宣祖에게 임란 1년2개월 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품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천거하려면 적어도 청년기 초입까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류성룡은 이순신보다 세 살 위로서 이순신의 둘째 형 堯臣(요신)의 친구였다.

 

 

李舜臣이 걸어온 軍人의 길

 

 

 

 

牙山에서 이순신은 21세 때 寶城(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결혼했다. 방진은 武班(무반) 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행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무예에 뜻을 두고 騎射(기사) 연습과 병법서 연구에 정진한 것은 결혼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壬亂 직전까지 그가 걸어온 군인의 길을 간단하게 짚어 보아야 난중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572년(선조 5년) 8월, 그는 28세의 나이로 훈련원 別科(별과) 시험에 응시했다. 시험 도중에 落馬(낙마)하여 불합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성적은 합격자 28人 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實職(실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시대가 어수선하여 武官의 수요가 늘어난 것 같다. 북쪽 변경에서는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고, 남쪽 해안 지방에서는 왜구가 준동했다. 급제 10개월 만인 그 해 12월에 그는 함경도 童仇非堡(동구비보)의 權管(권관: 종9품)이 되었다. 당시로선 어지간히 나이 먹은 초급장교였다. 그 후 그는 함경도의 변경과 훈련원의 하급직 등을 전전했다.

 

1580년 7월, 36세 때 전라도 鉢浦(발포: 지금의 전남 고흥군 남단)의 水軍萬戶(수군만호)로 올랐다. 萬戶라면 종4품 무관직이다. 그러나 武官 천시 풍조 때문에 종4품 만호에서 종6품인 현감으로 전보되어도 榮轉(영전)으로 치던 시대였다.

 

그런 발포만호 재직도 불과 1년8개월로 끝났다. 1582년 1월, 서울로부터 軍器敬差官(군기경차관)이 내려와서 軍器 관리를 잘못했다고 트집을 잡아 그를 파직시켰기 때문이다.

 

「원칙장교」였기 때문에 그의 하급 武官시절은 대체로 불우했다. 그는 時俗(시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먼 친척이었던 栗谷 李珥(율곡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한번 만나자고 해도 『그가 인사권을 맡아 보는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찾아뵐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발포만호 자리에서 쫓겨난 일만 해도 그의 훈련원 奉事(봉사: 종8품) 재직 시절에 그의 상관이었던 徐益(서익)이 그의 항의로 情實人事를 하지 못한 데 앙심을 품고 있다가 배후조종을 했기 때문이라는 說이 있다.

 

이순신은 그해 5월에 복직하여 다시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가 1583년 7월에 함경도 병사 이용 막하의 군관이 되었다. 다시 그해 10월에 함경도 乾原堡(건원보: 지금의 경원군) 權管이 되어 여진족 鬱只乃(울지내)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다. 다음달 11월에 정례승진으로 훈련원 參軍(참군: 정7품)이 되었으나 15일 아버지가 73세를 일기로 작고하여 고향 牙山으로 내려가 3년상을 치렀다.

 

 

 

 

난중일기의 현장을 가다②- 이순신은 전략가인 동시에 유능한 행정가

 

일본 해군을 압도한 판옥선과 총통

 

 

첫 백의종군

 

 

 

 

 

1586년 1월, 42세 때 복직하여 함경도 造山堡(조산보) 만호로 부임했다. 다음 해 8월에는 鹿屯島(녹둔도: 지금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의 屯田官(둔전관)을 겸임했다. 그해 가을 식량약탈을 노린 여진족이 대거 남침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기습을 받은 이순신은 이들과 맞서 싸워 포로가 된 양민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함경도병사 李鎰(이일)은 이순신의 병력 증원요청을 묵살한 자신의 과실을 덮기 위해 피해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돌려 그를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할 것을 조정에 상신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일단 그에게 책임을 물어 白衣從軍(백의종군)을 하라고 명했다.

 

1588년 윤 6월에 北邊(북변)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 한거하던 그는 이듬해 2월, 전라도 순찰사 李洸(이광)에게 발탁되어 군관이 되고, 11월에 선전관을 겸했다가 12월에 井邑縣監(정읍현감: 종6품)이 되니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임진왜란 1년2개월 전인 1591년 2월에 珍島郡守(진도군수)로 임명되어 부임도 하기 전에 加里浦(가리포: 지금의 완도읍) 첨사로 전직, 그것 역시 부임하기도 전에 같은 달 1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使)로 임명되어 左水營(좌수영: 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불과 13일 사이에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수군절도사로 6계단을 뛴 것이다.

 

왜 이런 파격 승진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만큼 시대의 풍운이 급박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 전국의 통일정권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중국과 인도를 아우르는 「大아시아帝國 건설」이란 허황한 꿈을 꾸면서 조선에 대해 明나라를 치러 가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도 전란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조정은 將材(장재)를 찾았다. 좌의정 류성룡이 이순신을 강력히 천거했음은 앞에서 썼다.

 

전략가인 동시에 유능한 행정가

 

 

 

 

 

7월23일 아침 5시30분에 기상하여 일조점호를 한 다음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오전 7시 관광버스에 승차, 남하하여 정오 무렵에 해군사관학교에 도착했다. 오후 2시, 예행연습을 거쳐 입교식을 마쳤다.

 

이어 海士 부두에 정박해 있는 實物의 2분의 1인 거북선에 올라 그 내부를 참관했다. 거북선은 왜군이 長技(장기)로 삼는 登船肉薄戰(등선육박전)을 막기 위해 당시 조선 水軍의 主力 戰船인 板屋船(판옥선)의 갑판 위에 철판을 둘러씌운 돌격선이다.

 

박물관도 둘러보았다. 현재 두 개 남아 있는 天字銃筒(천자총통) 중 하나도 소장하고 있다. 천자총통은 壬亂 당시 海戰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던 대형 화포다.

 

석식 후에는 李敏雄(이민웅) 해사 교수로부터 강연 「이순신과 리더십」을 들었다. 현역 해군소령인 李교수는 2002년 논문 「임진왜란과 海戰史(해전사) 연구」로 서울大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 학자이다. 필자의 면담 요청에 그는 『마침 당직근무이니 밤 8시30분 교수연구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음은 李교수와의 대담 요지이다.

 

―이순신은 어떤 유형의 장수라 해야 할까요.

 

『智將(지장)이죠』

 

―난중일기의 이순신과 三國志(삼국지)의 諸葛亮(제갈량)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둘 다 將帥(장수)인 동시에 뛰어난 행정가였죠. 屯田(둔전)을 만들어 군량을 자급자족하고, 兵器(병기) 개발에도 적극적이었으며, 信賞必罰(신상필벌)에 철저했어요.

 

『난중일기와 壬辰狀草를 읽어 보면 이순신은 대단한 지적 능력을 가진 장수인 데다가 휘하에 유능한 지휘관과 참모를 두었어요. 勇將 녹도만호 鄭運(정운), 경상도 물길에 능통한 광양현감 魚泳潭(어영담), 순천부사 權俊(권준), 방답첨사 李純信(이순신), 사도첨사 金浣(김완)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활용했거든요.

이순신의 屯田(둔전) 경영과 관련해 주목할 인물은 丁景達(정경달)입니다. 善山府使(선산부사) 재직시 능력을 발휘한 그를 이순신은 從事官(종사관)으로 스카우트하여 屯田의 경작을 맡겨 성공을 거두었어요. 이순신으로선 제일류 병참참모를 곁에 둔 겁니다』

 

 

日本 軍船을 압도한 板屋船과 銃筒

 

 

 

 

―이순신의 리더십도 탁월했지만, 화포·戰船(전선) 등 무기체계에 있어서도 이순신 함대는 일본 함대를 압도했습니다.

 

『이순신의 뛰어난 점은 미리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壬亂을 앞두고 거북선 제조, 화기검열, 군사조련, 군기확립 등 대비에 철저했음은 난중일기에 잘 기록되어 있잖아요. 조선 수군은 건국 이래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국왕과 조정의 주도下에, 즉 국가적 차원에서 통일성을 갖고 발전된 것이 특징입니다. 태종과 세종代에는 화기의 개발과 군선 개량에 노력을 기울였어요. 특히 明宗 10년(1555) 乙卯倭變(을묘왜변)을 계기로 板屋船(판옥선)과 대형 총통이 개발되어, 이것이 임진왜란 해전의 핵심 무기체계가 되었습니다』

 

―板屋船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배의 밑면이 평탄한 平底船(평저선)이죠. 평저선은 尖底船(첨저선)에 비해 물 속에 잠기는 吃水(흘수)가 깊지 않고 선회반경이 작아 배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이 특징입니다』

 

―판옥선의 핵심부분인 板屋의 구조는 어떠했습니까.

 

『갑판 위에 上粧(상장)갑판을 설치하고 그 좌우에 女牆(여장: 성가퀴)을 설치한 겁니다. 이 구조는 戰船에 승선한 전투원과 非전투원을 구분하여 전투원은 上粧갑판 위에, 非전투원은 上·下 갑판 사이에 위치하도록 함으로써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죠』

 

 

 

 

 

―판옥선의 크기는 얼마쯤 되었을까요.

 

『壬亂 당시 사용된 戰船의 크기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일반 판옥선의 경우 底板(저판)의 길이가 15∼21m였습니다. 승선인원은 100명 안팎이었죠』

 

―일본의 주력 軍船(군선)인 安宅船(안택선: 아타케)이나 關船(관선: 세키부네)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판옥선은 일본의 아타케나 세키부네에 비해 선체가 높아 왜구 이래 일본 수군의 자랑인 登船肉薄戰術(등선육박전술)을 어렵게 한 것이죠. 또 판옥선은 일본 軍船에 비해 강한 구조를 가졌어요. 外板(외판)의 겹이음 구조와 木釘(목정; 나무못)을 이용한 결과, 강도에서 일본 軍船을 압도한 거죠』

 

―일본 군선은 구조물의 이음새 부분을 凹凸로 만들어 서로 끼우고 「ㄷ」자 형 꺾쇠로 양쪽을 이었죠. 건축가들은 그걸 우리말로 「사춤 넣기」, 영어로 Dove-tail join이라고 하더군요. 일본 함선은 우리 판옥선과 부딪치기만 하면 깨져 버렸죠.

 

 

 

 

『난중일기에 「中船」이라고 표현된 關船은 壬亂에 참전한 일본 군선들 중에 가장 많았는데, 조선의 판옥선보다 크기와 높이가 모두 작았죠. 이 때문에 일본 수군은 판옥선에 뛰어올라 그들의 장기로 삼는 칼싸움을 벌이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높은 위치에서 날아오는 판옥선의 화살 공격에 고전했던 겁니다』

 

―난중일기에 「大船」이라고 표현된 安宅船은 어떠했습니까.

 

『크기는 대체로 조선의 판옥선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택선은 대개 大將船이거나 指揮船(지휘선)이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특히 갑판 위의 2·3층 누각은 화포 공격의 타깃이 되었어요』

 

 

火砲에서 日本水軍 압도

 

 

 

 

 

―판옥선과 安宅船, 어느 쪽의 속력이 빨랐다고 보십니까.

 

『당시 양국 軍船 간에 속도 차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선박의 속도는 櫓役(노역) 방법과 帆裝(범장)에 의해서도 좌우됩니다. 판옥선은 돛이 두 개인데, 일본 군선은 대개 하나였어요. 또 판옥선의 경우 櫓 한 자루에 4∼5명이 배치되었는데, 일본 군선에서는 한 명이 원칙이었습니다』

 

―일본 수군은 해적 집단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죠. 예컨대 히데요시의 직속 水軍을 대표하는 구키(九鬼嘉隆),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와의 전투에서 사살된 구루시마(來島通之) 형제, 그 밖에 스가(菅達長), 호리우치(堀內氏善) 등 다수의 수군장들이 해적 출신이었거든요.

 

『일본의 해적 집단들은 戰國시대를 지나면서 통일정권 휘하의 직속 수군, 혹은 지방 다이묘에 속한 수군으로 재편되었죠.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는 壬亂에 참전한 수군 편성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일본 수군이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한 한계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왜군은 이미 3교대에 의한 연속사격 등의 전술에 숙달해 있었죠. 일본은 1543년 種子島(종자도)로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鳥銃(조총)을 입수한 이래 꾸준히 개량하여 實戰(실전)에 사용하면서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갔어요. 임진왜란 도발 당시 조총은 세계에서 가장 명중률이 높은 소총이었습니다. 조총을 가진 왜군은 육상전투에서 연전연승했는데, 왜 이순신 함대와의 해전에선 연전연패했을까요.

 

『조총의 명중률이 높다지만 물결 때문에 흔들리는 해상에선 조준사격이 어렵고, 유효사거리도 50m여서 조선의 화포에 비해 위력과 사정거리가 뒤졌거든요. 조선은 1555년 을묘왜변 이후 1563년(명종 18년)까지 화포 제조에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여 적어도 10만 근 이상의 銅鐵(동철)을 소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명종 12년부터는 해전에 사용할 天·地·玄·黃字 등의 대형 화포를 제작했는데, 이때 만든 총통류가 임란 해전에서 사용되었어요』

 

 

 

 

―그런데도 임란의 초전에 경상좌수사 朴泓(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 싸워보지도 않고 戰船들을 불태우고 도주했을까요.

 

『700여 척의 왜선이 새까맣게 몰려오니 박홍과 원균은 싸우기기도 전에 워-포비아(war-phobia: 전쟁공포증)에 걸린 것입니다』

 

―박홍과 원균의 함대는 기습을 받고 휘하의 僉使營(첨사영)·萬戶營(만호영)의 戰船을 한 번 집결시켜 보지도 못한 채 궤멸했어요. 만약 이순신이 임란 발발 당시 경상좌수사 혹은 경상우수사였다면 상황이 어떠했을까요.

 

『적어도 박홍이나 원균 같지 않았을 거예요. 이순신은 7년 전쟁기간을 통해 적 함대의 동향을 항상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名將의 조건이죠. 그리고 이순신은 신중하여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이길 만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여 싸웠어요.

특히 임란 초년도인 1592년의 전투에서 이순신의 전공은 눈부셨어요. 10전10승을 했습니다. 특히 한산해전에서는 일본의 정예함대와 싸워 완승을 거두었죠. 그 결과 南海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곡창 전라도 방어와 局面 전환을 달성할 수 있었어요』

 

7월24일 오전 7시 해군부두에 도착하여 30분 만에 「비로봉함」에 승선을 완료했다. 배수톤수로 2660t이라니까 상선이라면 5000중량톤쯤 되는 상륙함(LST)이다. LST는 자동차 전용선처럼 船首를 열고 그 통로로 사람이나 차량 등을 실어 흔히 「아가리」라고 불린다.

 

 

(계속)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 조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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