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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6 - 앙코르와트의 크메르와 참파 및 베트남 3국지에서 최종 승자는 베트남이라?
베트남 리왕조는 송나라가 왕안석의 신법때 침공해올 움직임을 보이자 대신이자 장군 리트엉끼엣의 주장으로 10만
대군을 동원해 네갈래로 송나라를 선제 침공해 광서성 옹주를 함락하자, 송나라도 20만 대군을 동원해 반격하니
서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다가 화의를 맺는데 송나라는 북쪽에서 요나라를 이은 금나라 압박이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장군이 전쟁터에 나가 "큰 공을 세우면 하늘도 시기하고 임금도 미워한다" 고 했으니... 베트남의 인종은 전쟁이
끝나고 6년후 최고의 공신인 리트엉끼엣을 견제하여 남부 타잉화성의 자사로 보내고는 20년동안
부르지 않는데 그래도 모함하는 자들의 말에 넘어가 충신을 죽이지는 않고 먼 남부 타잉화주 지사로 보낸 것이라?
리트엉끼엣도 큰 불만에 모반이라도 할법 했지만 오지인 타잉화 지방에 농민을 대거 이주시켜 개간함으로써
장차 중부 베트남으로 남진할수 있는 인적, 물적 토대를 쌓았는데.... 베트남 중부와 남부에 자리한
참파 왕국은 1070년에 베트남에 뺏긴 꽝빈성과 꽝찌성을 되찾기 위해 1103년에 베트남을 침공해 왔습니다.
참파국은 서기 192년에 말레이계 민족인 참족이 베트남 중남부에 세운 나라로 1832년까지 존속했는데 중국에서
남하해 베트남을 세운 비엣족과는 다른 민족이며.... 원 거주지는 보르네오섬으로 2천년전에 이주해 왔습니다.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베트남과 달리 참파는 힌두교를 받아들인 인도-동남아 문화권 민족이며 두 나라
모두 대승불교를 주로 믿었지만... 베트남은 유교와 도교이며, 참파는 힌두교와 이슬람을 믿었습니다.
14세기초 참파의 자야신하바르만 3세는 대월국 영종 황제의 여동생인 현진공주 (玄珍公主) 를 왕비
로 맞았으나 국왕이 1년 만에 죽자 현진공주는 사티(순장) 를 피해 친정으로 다시 돌아온
일도 있었는데 현재는 베트남에 흡수되어 소수민족으로 떨어졌지만 미얀마, 태국, 베트남
이전에는 동남아의 강자였으며.... 크메르 제국 전성기 시절에도 일진일퇴를 주고받았을 정도 입니다.
참파는 베트남과 천년 넘게 끊임없이 대립과 전쟁을 반복해왔으니 베트남 최대의 숙적이며, 종종 참파가 베트남을
역으로 밀어붙이며 수도까지 함락시킨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베트남이 참파를 상대로 우세를 점했는데
참파는 14세기 말부터 베트남에 밀리기 시작했고, 18세기에 베트남의 종속국으로 전락했다가 19세기에 망합니다.
192년에 중국 관리 출신인 우련이 한나라령 베트남 남단인 교주 일남군에 '임읍 (林邑)' 을 세웠으며, 이후
'환왕(環王)', '점성(占城)'. '참파(占波: 점파)' 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제2왕조 초대 국왕 범문(范文)
이 중국 양주 출신이라 중국 문화권에 속했지만, 불교, 힌두교, 인도 문화를 도입하면서 인도 문화권이 됩니다.
참파는 국력이 융성하던때 캄보디아를 공격하고, 중국 해남도 일대까지 원정을 다녀왔으며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몰아붙이던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밀렸으며,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베트남 원정에 나설 때 남북 양쪽
으로 진공하면서 참파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비록 베트남이 몽골을 격퇴시켰어도 참파의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참파국은 베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주해온 리작의 길 안내에다가 잃어버린 고토를 되찾겠다는 병사
들의 사기가 높아 막강한 전력으로 1103년에 북진해 꽝빈성과 꽝찌성 두 성을 탈환하고는 더
북상할 움직임을 보이자 경악한 베트남은 84살 노인 리트엉끼엣을 불러 다시 권권을 주고 반격을 명합니다.
84살의 리트엉끼엣은 흰 갑옷을 입고 백마에 올라 행열을 이끌자 감격한 병사들은 창을
부여잡고 그의 뒤를 따랐고 백성들은 노장의 마지막 출정을 눈물로 환송
했으니..... 전열을 재정비한 베트남군은 용기를 내어 참파군에 맹열한 반격을 시작합니다.
겨우 찾았던 꽝빈성과 꽝찌성등 두 성을 다시 뺏긴 참파왕은 싸을 의욕을 잃고 베트남에 조공을 바치니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강자로 떠오르고 인종은 과거제도를 실시해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데 참파는 국력이 쇠하다가 14세기에 강력한 왕이 등장해 5~6차례나 북진해
베트남의 수도인 탕롱을 3번이나 함락하고 백성들을 잡아가지만 그것은 2백수십년 훗날 이야기 입니다.
인종은 어린 나이에 등극해 56년간이나 통치하면서 베트남 최초로 과거제를 도입하여 귀족
세력을 제어했으며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었으니 십가(十家) 라는 농촌
협동체를 조직해 농사일을 서로 돕도록 하고 농경에 필요한 물소의 도축을 억제했습니다.
그러다가 후사없이 죽자 1128년 조카 신종이 제위를 계승했는데 농업을 진흥하던 중에 남쪽 참파를 바라보다가
난데없이 서쪽 크메르군의 침략을 3차례나 받게 되니 리 왕조가 쇠퇴하는 게기가 되는데 .....
크메르는 300여년 전인 802년에 자야바르만 2세가 마헨드라파르바타 산에서 의식을 치르고 왕조를 열었습니다.
후계자들은 끊임없는 확장 사업으로 크메르의 영토를 넓혀나갔으니 877년에 제위에 오른 인드라바르만
1세때 수도 하리하라라야는 바콩 사원이 들어섰고 889년 야소바르만 1세가 들어선후 앙코르의
첫번째 도시 야쇼다라푸라를 건설했으며 950년에 크메르 제국과 참파 왕국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크메르의 내전을 봉합하고 정벌사업을 펼쳤으며 앙코르 와트를 지어 힌두교 비슈누 신에게 봉헌
했고 중국에서 내려온 타이족이 차오프라야강에 흘러들자 정벌후 대월과 전쟁을 벌이는데, 1127년 수리야바르만
2세는 베트남 리 왕조의 신종에게 봉신국이 되어 조공을 바칠걸 요구했지만 신종이 이를 거부하자 전쟁을 일으킵니다.
크메르 왕조 17대 왕으로 크메르의 최전성기를 이끈 수리야바르만 2세는 당시 국왕의 조카였는데
어릴때 부터 영민하고 용감했으며 권력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았으니 힌두교 브라만
사제들의 지지을 얻어낸후 무능한 다라닌드라바르만 으로는 난국을 타개하기 힘들다고 판단합니다.
당시 크메르는 태국 중부 롭부리 지역의 크메르 왕가 세력과 톤레삽 호수 지역의 다른 왕족 세력이
맞서고 있었는데, 수리야바르만 2세는 지방 순행중이던 다라닌드라바르만 왕을
암살하고 왕위를 찬탈했으며 6년후 전투 끝에 남쪽 톤레삽 세력을 쳐부수고 크메르를 통일했습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불교에 기울었던 전임 왕들과는 달리 힌두교를 신봉했으니 왕명도 인도 고대
서사시 리그베다에 나오는 태양신 ‘수리야’ 에서 따온 “태양의 신”
이란 뜻이며 힌두교의 수호신인 비슈뉴신을 위한 사원을 지었으니 오늘날 “앙코르와트 ” 입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1128년 전투 꼬끼리에 2만명의 대군이 쯔엉썬 산맥을 넘어 응에안
지방을 침공하는데 사방에 지편선이 펼쳐진 캄보디아의 대평원에 익숙한
크메르군에게는 산맥과 강에 호수가 뒤얽힌 복잡한 베트남 지형에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낯선 지리와 환경에서 고전했고 반면에 베트남군은 20여년 전에 중국의 송나라 대군을 2번
이나 물리친 전력이 아직 건재했던지라 베트남군과의 싸움에 패해 물러났으며
700여척의 대함대는 몇 달 후에나 타잉화에 도착했지만 육군이 패한걸 알고는 물러갔습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단ㄴ며하지 않고 4년 후인 1132년에는 참파와 동맹을 맺어 힘이 약해진
대월을 함께 공격하자는 협약을 체결해서는 베트남에서 가장
풍요로운 성들 중 하나였던 응에안 성을 함락하고 해안가를 약탈하는 성과를 올리기는 합니다.
1138년에도 다시 공격했지만 크메르군은 베트남 북부를 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리
왕조를 복속시키는 데에도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며.... 참파와 크메르 제국의 일시적인
동맹은 1138년까지 이어졌지만 이후 참파는 베트남군에 수도 비자야가 점령당하자
독자적으로 베트남 리 왕조와 화해하고 평화 조약을 맺으니 크메르와 참파와의 관계도 틀어집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혼자 베트남의 리 왕조를 공략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는
연합군에서 이탈한 참파에 괘씸죄를 물어 1145년에 공격하니 참파의
국왕이던 자야 인드라바르만 3세를 죽이고 수도 비자야를 약탈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새 왕 자야 하리바르만 1세가 죽을 힘을 다해 반격하면서 크메르 군대가 참파에 묶여버렸고, 수리야바르만 2세가
참파의 꼭두각시 왕으로 앉혀놓았던 하리데바 왕자가 자야 하리바르만 1세에게 패해 1149년에 참파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잃어버렸지만 참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원정을 계속했지만 판두랑가 평원 전투에서 패합니다.
1177년 경에는 톤레삽 호수에서 참족인 참파군과 벌어진 해전에서 크메르 제국이 대패하고 당대 황제인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이 전사하였으며, 수도가 약탈당했는데, 1181년에 제위에 오른
자야바르만 7세는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걸출한 군주로 군대를 규합해 참족에게서 수도를 탈환합니다.
그는 이 공로로 왕좌를 물려받았으며, 이후 22년 동안 동부의 왕국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며
내부 규합에 신경을 쏟았으니 1203년에는 참파를 꺾는데 성공하며 막대한 영토를
얻어냈으며 수도인 앙코르 톰을 축조하면서 제국의 위엄을 드높였고 바이욘 사원을 축조합니다.
신종 이후 베트남 리왕조의 왕들은 향락에 빠져 국사를 멀리하면서 나라의 기강이 무느지기 시작
했으며 관료들은 부패하고 지방 호족들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니 수탈에
지친 백성들이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다가 도적이 되었고 혼란한 세월에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고종때 남부 응에안성의 한 관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권인 당쩌우 출신 호족 팜반지에게 진압을 명하니 반란을
평정한뒤 가담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불태우자 간신히 몸을 피한 관리는 중앙의 대신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모함하니.... 어리석은 왕이 팜반지를 투옥하자 격분한 진압군 장수들이 응에안에서 수도 탕롱으로 쳐들어 옵니다.
왕은 피난길에 올랐고 태자도 타이빙선 해안 호족으로 어부이자 해적인 쩐리에게 몸을 의탁했는데 고단한 태자는
쩐리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자 신이난 쩐(陳)씨들은 탕롱으로 쳐들어가 찬탈자들을 쫓아내고 고종을
복위시키니 왕비는 천하디 천한 며느리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지만 1년후 왕이 죽자 태자가 왕위를 이어 받습니다.
당시 쩐씨들의 세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으니 귀족들이 단합만 했다면 좇아낼수 있었지만 그들은 우유부단
했으며 그 사이 쩐 (陳 진) 씨들은 세력을 확대하자 처가의 세력을 경계한 혜종은 호족 도안씨와
응우옌씨를 불러 견제하려고 했으나.... 결국 충성을 조건으로 쩐씨들의 권력 장악을 용인해야만 했습니다.
혜종의 병이 깊어지니 둘째딸 7살 찌에우타잉 공주에게 왕위를 넘기고 절에 들어갔으며 외척들이 발호하니
쩐리의 조카로 궁궐 수비대장 쩐투도는 8살 조카, 쩐리의 차남인 쩐트아의 아들 쩐카잉을 궁궐에
들여보내 여왕을 보필하니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지 않은 것은 쩐씨 일족의 단합을 위해서라고 보여집니다.
쩐투도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어린 여왕 찌에우타잉이 놀이로 쩐카잉
에게 공을 던지자 베트남 풍습에 여자가 남자에게 공을 던지면 그건 청혼을 하는
행위라며 둘을 결혼 시킨뒤 왕위를 쩐카잉에게 넘기도록 하니 제2차 쩐(陣) 씨
왕조로..... 그간 200여년을 지속하며 송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리(李) 씨 왕조는 막을 내립니다.
아들이 왕이 되자 쩐트아는 자신이 태위가 되어 최고 권력을 휘두르게 될 것이라 믿었지만 태위 자리까지
꿰찬 쩐투도는 퇴위해 절에 들어갔던 혜종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수많은 리씨 왕족들을
살해하니 살아남은 리씨들은 응우엔씨로 성씨를 바꾸게 하는데 이성계가 고려 왕씨들을
수없이 학살하니..... 살아남은 자들이 왕씨 한자에 획을 더해 전씨나 옥씨등으로 바꾼걸 떠올리게 합니다.
쩐투도는 이에 따른 반란들을 여러해에 걸쳐 진압했으며 태종이 10년이 넘게 아이를 얻지 못하자
조바심을 냈으니... 쩐(陣) 씨 새 왕조의 왕은 리씨 왕가의 피를 이어받아야 또 다른 반란을
잠재울수 있는지라 여왕의 언니는 태종의 형 쩐리에우와 결혼해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쩐투도는 태종의 왕비인 전 여왕을 강제 이혼을 시켜 내쫓은뒤 쩐리에우의 아내를 끌어다 다시 결혼을
시키니 아내를 뺏기고 상심한 쩐리에우는 몇몇 무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태종은
이렇게 해서 왕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중이 되겠다며 밤에 대궐을 빠져나와 멀리 꽝옌의 절로 달아납니다.
쩐투도가 쫓아와 설득해도 안되니 베트남의 수도를 이 절로 옮기겠다면서 억지로 수도로 데려왔는데 쩐리에우를
참수하려고 했지만 동생 태종이 간청하는지라 목숨만은 살려주었으며 토지를 하사하니 비참한 목숨을
이어야 하던 쩐리에우는 엄마를 뺏긴 아들 쩐꾸옥뚜언을 저 재산을 이용해서 교육을 시키는 것을 낙으로 삼습니다.
쩐투도는 리씨왕족을 학살하고 귀족들을 거세했으며 반독립적인 토후들을 와해시켜 중앙
집권화를 한후 태위와 군 지휘관에 지방의 성주들까지 요직을 모두 전씨 일족으로
채우니 종실 독점 지배체제를 형성했고 어떤 왕조들 보다도 쩐씨 가문의 결속력이 강했습니다.
왕과 중앙 및 지방 귀족들 사이에 한 집안이라는 유대감이 형성됐으니 쩐씨들의 대 토지 소유는 유랑하던
농민들을 정착시키고 대규모 개간사업이 가능하도록 햇으며 농업 생산을 증대시켰고 그들이
보유한 엄청난 사병들은 이후 몽골군 침략시 불시에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는게 가능한 체제가 되었습니다.

첫댓글 지난주는 비가 많이 와서 시원하더니 일요일부터는 비가 안오니까 불볕더위가 연일 계속됩니다.
여름철 건강관리에 각별히 유의하시길빕니다.
그렇지요! 이제 막 초복이 지났으니.....
중복과 멀복까지는 한참 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