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의 사이에 선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장석만(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히데]

 

이 질문은 ‘과학자가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과 비슷해 보인다. 이성과 과학을 통해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활동과, 초자연적인 존재를 신앙하거나 종교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모순괴어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과학과 종교는 전혀 다른 차원이며, 그것을 놓고 공존이니 모순이니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입장이 그럴 듯해 보인다. 이러한 입장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라기보다는 질문 자체에 대한 성찰의 결과다. 질문에 대해 질문해보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고 있던 때의 대학 캠퍼스는 언제나 뒤숭숭했고 독재정권에 대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시위가 벌어지면 학내에 상주하고 있는 사복경찰이 달려와 학생들을 연행해 갔고, 이에 분개한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 항의하였다. 그러면 대학본부에 매달려있는 스피커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쉴 새 없이 반복되었다. “학생 여러분, 이성을 찾으십시오. 이성을 잃지 말고 냉정하게 판단하십시오…….”이성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암울했던 나의 대학시절이 생각나고, ‘이성의 합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이면을 살피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상식적인 관점도 마찬가지다. 그 두 가지 영역이 맺는 관계에 대해 우리는 익숙하고 편안한 답변을 알고 있다. 또는 종종 그 상식의 내용을 거꾸로 뒤집는 답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상식이나 반(反) 상식이 담겨 있는 더욱 커다란 틀을 파악하는 것이다.

 세속화이론에 대한 재검토

 두 가지 영역의 공존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서둘러 답변을 찾으려고 애쓰는 대신, 우선 질문 자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성과 신앙은 공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이 질문은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하나는 이성과 신앙의 두 가지 영역이 서로 명확히 구분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두 영역의 관계가 갈등적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의 암묵적인 배경으로 이성과 신앙이라는 두 가지 다른 영역 사이에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적대관계가 상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물음은 두 가지 영역에 대한 갈등담론이 지배적이었다고 보고, 이런 담론을 재검토해달라는 요구하고 볼 수 있다. 이성과 신앙의 주된 활동영역을 각각 과학과 종교라고 한다면, 이런 요청은 과학과 종교의 갈등관계에 관한 담론을 점검하는 작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관한 대부분의 담론은 세속화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세속화이론의 주요관점은 이성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질수록 신앙의 영역은 점차 축소될 것이고, 결국에는 소멸할 것이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대며 지동설의 관점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세속화이론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곤 한다. 또한 성서의 ‘터무니없는’ 창조설과 대조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이 얼마나 과학적인가를 내세우는 주장도 흔히 세속화이론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자주 선전된다. 이성과 신앙 사이의 전쟁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속화이론은 합리적 이성과 비합리적 신앙을 영합(零合)의 관계로 상정하고 결국 이성이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속화이론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이 제기됨녀서 그동안 자명하다고 여겨져 왔던 이성과 신앙의 필연적인 갈등설도 다시 검토를 받게 되었다. 세속화이론의 헤게모니가 흔들리면서 이성과 신앙의 공존가능성에 대한 담론공간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성과 신앙은 그동안 공존해 왔고, 여전히 공존할 수 있으며, 앞으로 더욱 공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신앙 안에서도 이성의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주장하는 관점도 이런 맥락 속에서 나타났다. 이는 이성의 활동을 과학적 합리성의 측면만 아니라, 논리의 체계를 정교화하는 측면으로 확장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예컨대 신의 존재증명은 이제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시도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또한 근대과학의 성립에 기독교 신앙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주장도 이성과 신앙의 밀접한 연관성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아이작 뉴턴과 같은 과학자가 얼마나 깊은 신앙심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가라는 식의 논거를 제시하기도 하고 신앙과 이성 사이의 더욱 근원적인 관련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과학적인 이성의 활동을 개시할 수 있으려면, 창조주가 만든 이 세상은 결코 변덕스럽지 않고, 불변의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창조주의 능력과 의지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이므로 언제나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다.

 17~18세기의 근대과학의 성립에 개신교가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는 회고적인 논의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이성과 신앙이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주장되었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종교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기존 관점의 허구성을 실증적 자료로써 밝히고자 한 시도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예컨대 가장 과학적이라는 물리학자의 신앙심을 통계처리하여 파악해보니, 종교에 대한 현격한 적대감이나 무관심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연구결과가 그런 것이다. 또한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서 종교적신앙심의 감소를 보인다는 주장도 사실로 뒷받침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한편 여태까지 불가침의 영역에 있던 과학적 지식의 절대성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면서 이성과 신앙의 연관성 주장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과학적 지식이 사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서술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과학자들도 특정한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과학의 객관성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이성과 신앙은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

 이와 같이 과학적 지식 자체의 재평가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각각 이성과 신앙의 영역인 과학과 종교가 결코 충돌할 필요가 없는 서로 다른 성격의 영역이라는 주장이 대두하게 되었다. 과학은 사실을 다루는 영역인 반면, 종교는 의미의 영역이므로, 양자를 영합(零合)의 관계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성과 신앙을 갈등이 필요 없는 두 영역으로 분리시켜 생각하려는 관점이다. 한편 이런 영역분리의 시도와는 달리, 과학적 활동에 내재된 신앙적 측면을 강조하는 관점도 대두하였다. 근대과학도 특정의 세계관에서 태동하여 유지되고 있는 하나의 신앙체계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관점을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서로 경쟁하는 신앙세계에 속하게 되므로, 또다시 공존보다는 갈등의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과학활동에 신앙적 측면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과학 전체를 또 다른 신앙체계로 간주하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본래의 과학적 활동과 과학주의(科學主義)적 활동의 구분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과학주의란 언제나 스스로를 성찰해야 하는 과학적 태도를 망각하고, 과학을 절대화하여 숭배대상으로 만드는 관점을 가리킨다. 이러한 과학과 과학주의의 구분은 과학의 이성적 활동이 절대적 객관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앙적 활동과는 결코 같지 않단ㄴ 점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과학주의와 신앙적 자체가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태도는 다른 영역에 위치해 있으므로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 지식의 타당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이제는 오히려 신앙적 설명이 이성적 추론을 능가한다는 주장도 나타나게 되었다. 여태 보았던 이성과 신앙 사이의 갈등 및 공존관계가 아니라, 바야흐로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진화론의 빈틈을 지적하며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진리임을 주장하는 이른바 창조과학이 그 예이다. 하지만 ‘창조과학’의 역설적인 점은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자연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선전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자기 신앙의 우월성을 과학적 증거를 통해 열렬히 확인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는 과학의 한계를 주장한다하고 하더라도, 과학의 권위에 의존하고 도움을 받고 싶은 이중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창조과학’처럼 유별난 경우가 아니라도 많은 종교집단이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신앙심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여전한 과학의 헤게모니

 아무리 과학적 지식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해도, 지금도 과학의 헤게모니는 요지부동이다. 과학적 실험의 결과는 인간이성의 정화(精華)로 인정받고 있으며, 누구나 과학적 지식의 권위에 의존하려 한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의 헤게모니는 내용 그 자체의 진리성에서 도출되기보다는 주로 과학적 지식의 권위와 후광을 뽐내는 무수한 전략에 의해 유지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대표적인 전략이 바로 과학적 지식과 다른 일상적 지식의 영역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만들고, 과학적 지식은 일상적 지식의 영역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만들고, 과학적 지식은 일상적 지식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진리의 영역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이다. 일상의 주관적인 지식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과학적 지식은 더욱 객관성과 진리성을 인정받게 된다. 종교적 지식은 바로 일상의 주관성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의 권위를 확보해야 하는 과학은 종교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보게 된다. 과학자는 종교심이 없게 마련이라는 주장도 바로 이런 영역구별을 통한 권위 만들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

 이렇게 볼 때, 이성과 신앙 사이의 갈등에 관한 담론은 과학저들이 일반대중과 자신들을 구별하여 과학적 지식의 권위를 높이려는 과정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과학자들은 종교가 전통적으로 지녀온 강력한 영향력의 영역을 벗어나서 자신들이 작업할 수 있는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야 했으며, 이런 필요로 인해 종교가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일상의 차원과는 다르다는 차별성의 전력이 요청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차별화의 노력은 종교가 지배권을 누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신생의 과학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야 했던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타난 것이다. 바로 서구의 근대경험이 이성과 신앙의 갈등에 관한 담론을 등장시킨 역사적 맥락인 것이다.

■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이성과 신앙의 갈등담론이 근대서구의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그 갈등담론을 상식처럼 지니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2. 세속화이론은 인간역사 발전에 고나한 일정한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너무나 자명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논의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 전제가 과연 어떤 것인지 논의를 통해 드러내보도록 하자.

3. 과학적 지식의 권위가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일련의 장치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권위화의 장치는 어떤 것이 있는가?

4. 이른바 ‘창조과학’은 우리나라에서 적지 않은 추종자를 지니고 있다. ‘창조과학’이 주로

   미국 근본주의 문화의 영향권 아래 있는 지역에서 성행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현상은 그리 놀랄 만하지 않다. 이런 점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개항 이후 깊은 영향을 받아온 보수적인 미국 개신교의 성격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미국의 개신교가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