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롬 6:1~11
*제목; 로마교회에 보낸 사도바울의 편지(10) 죄에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방법
1.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롬 5:20’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합니다. 이는 왜 그렇습니까? 죄가 많으니 그 만큼 사하심이 많고, 그 만큼 받은 은혜도 커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큰 은혜를 받으려면, 큰 죄를 지어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롬 6:1~2’입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1)
우리는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사함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포함하는 완전한 대속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더합니다. “죄 사함”뿐만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을 통한 구원의 상태입니다. 모든 죄를 다 사함 받았으며, 또 우리는 이 믿음으로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진 자, 그래서 구원받은 자는 전혀 “죄값”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죽었으니 당연히 죄를 더 이상 짓지 못합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3~5절’입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 6:3~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구주로 고백한 자들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이고, 이런 자들은 모든 죄에 대한 “죄 사함”을 받고, 또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도 없는 자가 됩니다.
이 말씀이 바로 그 유명한 ‘갈 2:20’ 말씀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인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2. 당신은 죄에 대해서 죽었는가?
많은 분들이 이 질문에 “예!”라고 크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믿고 고백한 이후, 죄 사함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의 믿음과 고백은 다 거짓된 아무런 소용없는 것입니까?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8~11절’입니다.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8~11)
분명히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와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의와 하나님 앞에 한 번에 살아난 자가 되었습니다. 이를 “거듭남”(중생, Born Again)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렇게 생각하라”(헬, 로기조마이, 이성적인 인식)는 의미입니다. 이는 이성적으로 그렇게 알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잘 느껴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여전히 죄 가운데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이상,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이는 느낌이나 사실을 초월한 예수님의 선언이요 말씀입니다.
한 아이가 7살까지 고아원에 살다가, 한 부요한 집에 아들로 입양이 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 가정의 아들처럼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어색합니다. 고아원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기에 불편하기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고아원으로 돌아갑니까? 돌아가고 싶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어색할 뿐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이 이제부터 그는 법적으로 그 집안의 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느낌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이나 경험에 의존하면 곧 넘어집니다. 항상 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삶으로 금방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 죄된 삶에 젖어서 살았기에 금방 믿음의 삶이 익숙하게 살아 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오직 말씀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구원받고 천국의 백성이 된 것을 알고 나면, 그래서 그것을 고백하고 나면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안에는 ‘죄에 대한 욕망’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허락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욕구는 있지만, 욕구대로는 살지 않습니다. 내 욕구(죄)는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예수님의 뜻대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실을 마음으로 받으면, 마음에 당연히 “감사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구원받고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며, 인도하시고 천국의 길을 완성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이 욕구대로 살지 않게 나에게 더욱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기는 자들은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함”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의 완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 욕구로 살지 않고 드디어 예수님의 바람대로 살게 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갈 2:20’의 완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구원의 분명히 “고백하는 그 순간” 완성됩니다. 그러나 “구원을 누리는 삶”은 점진적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먼저는 우리 안에 ‘죄성’이 가득하기 때문이고, 이를 이용해 날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는 ‘사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이나 행위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선포하시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이 구원하셨다면 구원하신 것이고, 주님의 죽었다고 하면 죽은 것이고, 주님이 살았다고 하면 산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하면, 드디어 감사와 그 감사로 인해서 작은 순종이 따라옵니다. 다음 오늘 작은 믿음과 감사의 순종이 있을 때,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그 은혜의 경험이 우리를 통치함 속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한 번에 일어나지만, 구원의 완성은 점진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수고와 노력을 게을리 할 때, 처음 고백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것은 그 고백을 잃어버리면 그 결과인 구원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서, 그리고 선포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결국 그리스도의 통치함 속으로 들어가서, 그 주신 은혜를 완성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구원 받은 자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내 상태나 느낌 혹은 행위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말씀을 날마다 입으로 고백할 때, 드디어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하고, 그래서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