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야기
임병식
지구의 뼈대를 이룬 암석이 떨어져나와서 바위와 모래의 중간 형태를 이룬 것. 모암(母岩)에서 떨어져 나온 후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오늘날의 작은 크기로 변화한 것이 돌이다. 한데 이 돌은 크기와 형태를 가지고도 달리 부르지만 무게에 따라서도 구분을 짓는다.
즉, 한눈에 바라보아서 숨 차 보이고 장정이 혼자서 들기에 벅찬 건 바위, 그보다는 손쉽게 들수 있고 운반이 가능한 것은 자갈 또는 돌, 그 밖의 작고 가벼운 알갱이는 모래로 일컬어진다.
태초의 지구는 심층부에서 마그마가 끓어올라 지표면을 덮은뒤 서서히 식어가면서 바위로 탄생했다. 그런 만큼 무심코 발부리에 차이는 어느 돌을 들어올려도 지구 나이인 45억년의 유구한 연륜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돌은 성분의 비례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가령 경도(硬度) 가 모스 측정계로 10에 가까우면 금강석, 6,7이면 방해석이나 석영류, 그리고 2, 3정도의 것은 활석으로 구분한다.
그렇지만 물질의 귀하고 안 귀하고 차이는 쓰임과 사람의 선호에 따를 뿐, 암석은 공업용재나 건축재료로서 우리의 실생활에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다.
뿐인가. 우리의 정신면에도 이바지한 바가 크다.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주고 감상의 대상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돌을 미로 승화시켜 보는 수석문화는 고급스러운 착안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가 때로는 사교의 매개물이 되기도 하고 희열을 맛보게 하니 얼마나 기특한 것인가.
생각하면 사람들은 이 돌에 얼마나 빠져들었던 것인가. 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 점에 대하여 나는 그 이유를 조심스럽게 몇가지로 생각해 본다. 첫째는 돌은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사람은 원초적이고 가공하지 않는 천연그대로의 것에 빠져드는 데 바로 수석이 그런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변질이나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바위가 차차로 모래나 흙으로 분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상상외 범위의 변화일 뿐이다.
거듭해 강조하거니와 우리 주위을 둘러보아 그만큼 나이먹은 것은 없다. 이 땅에서 가장 수명이 오래되었다는 은행나무도 1000살, 그보다 오래된 전설적인 울릉도의 향나무도 나이는 2500살을 먹었을 뿐이다. 그런데 돌은 가늠 하기도 어려운 수십억 살이다.
그러니 돌은 얽혀있는 사연도 많은 수 밖에 없다. 그 중에는 벼슬을 한 바위의 전설도 전해온 다. 전남 장흥과 강진사이의 경계에는 사인암(舍人岩)이라는 바위는 단종시에 김필이라는 이가 그 위에 정각을 짓고 지냈단다. 그러면서 왕위를 빼앗긴 임금을 생각하며 날마다 북향망배(北向望拜)를 했는데 그 이야기가 조정에 전해져서 정사품의 벼슬이 내려졌단다.
그리고 경남 하동 쌍계사에는 제수마석(除睡魔石)이라는 유래석이 있는데 이 돌은 조선시대 광활선사(1680-1741)가 수행중에 잠을 물리치기 위해서 메고서는 천일동안을 가파른 칠보암까지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진주시 마석면 신기리 명석각(鳴石閣)에 보존된 두개의 입석돌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말에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성석(城石)을 목도로 운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근에 있는 광제암의 물었다.
"영혼없는 돌이 어디로 가는 거요."
해서 진주성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니. 공사가 다 끝났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돌이 갑자기 낙담하여 크게 울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 광경을 감탄하며 '보국충석(報國忠石)이라며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감상을 위한 돌, 지극한 애석인을 들라면 송나라 사람 미불(米芾 1051-1107)을 꼽아야 하리라. 그는 평소 큰 바위를 만나면 배석(拜石) 하고 시를 지었다. 그는 심미안도 깊어서 수석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소위 질(質)형(形)색(色)의 조건에다 투(透)준(皴)수(搜) 즉, 구멍뚫리고 주름잡히고 파리하게 여워어야 한다고 설파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돌에 구멍이 뚫여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지금도 무리가 없으며 금과옥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밖의 사람으로는 시인 소식(蘇軾)과 호국(湖國 ) 이정신(李正臣)을 들수 있다. 특히 소식은 영롱한 작은돌 298개와 함께 소유동천석(小有洞天石)이란 구멍뚫린 돌과 설랑석(雪浪石)의 눈덮인 돌을 아꼈다.
그리고 이정신은 역시 아홉 개의 구멍이 뜷린 구지석(九池石 )을 소장하며 즐겼다. 한데, 이에 비하여 백낙천(白樂天)은 구멍 숭숭 뚫린 태호석을 들여다가 동성의 주택을 장식하고 남곽의 농막길에 진열하여 두었다고 한다.
이렇듯 일찍이 시인묵객들은 수석을 사랑했다. 신비롭고 상징성이 있으며 산수가 집약된 축경미(縮景美)에 빠져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때 이름을 얻은 돌들은 다만 시문과 그림으로만 전해질뿐 실물이 전해오는 것은 없어 아쉬움을 준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선 헌종임금이 애석했다는 산수석도 나중 역관 오경석이 소장했다는데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실물이 나타나지 않으니 아쉽기 그지없다. 그리고 70년대 남한강에서 탐석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대만의 애석가 양쿵평씨가 와서 감상하면서 줄담배 세대를 피웠다는 그 나무토막을 닮은 호수석도 지금은 오리무중이다.
그런 돌은 어떻게 생겼던 것일까. 돌에도 기품이 있고 내면에서 풍기는 향기가 있다고 하는데 보면 볼수록 빠져들게 하는 돌이 아니었을까.
가까이로는 내가 사는 여수에서도 명석의 사연이 전해온다. 생활고에 시달힌 애석인이 아끼던 명석을 팔아먹었는데 나중에 보고 싶어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만 당했단다. 이처럼 소장자들은 돌을 무슨 금은보화로 여겨고 꼭꼭 숨겨놓고 있는 것일까.
돌은 본래 주인이 없는 것이고 물과 공기처럼 생명을 지탱하는 터전인데, 사유로 생각하여 접근금지를 시켜도 되는 것일까. 실로 그 속내가 야박할 뿐이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