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데(Daudet)/김사행(金思行) 옮김
오늘은 아침 문을 열었을 때, 풍차간 주위는 온통 흰 서리로 덮여 있었습니다. 풀잎은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고 바스락거렸으며 언덕 전체가 추위로 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동안에 사랑하는 프로방스가 한대 지방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서리가 하얗게 빛나고 있고, 저 맑게 갠 하늘 위엔 하인리히 하이네의 나라에서 온 황새들이 커다란 삼각형을 이루며 까마르그 쪽으로 '추워… 추워…' 외치며 날아가고 있었는데, 나는 흰 서리가 꽃술처럼 덮인 소나무들과 수정의 꽃이 핀 라벤더 숲 속에서 다소 독일풍인 두 편의 환상시를 썼습니다.
왕자의 죽음
어린 왕자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왕국의 모든 교회에서는 왕자의 회복을 빌며 낮이나 밤이나 성체를 내어 놓고, 커다란 초에 불을 켜 놓았습니다. 고색 창연한 거리는 고요하고 쓸쓸했으며 교회의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마차들도 조용조용히 다녔습니다……. 궁궐 주위의 주민들은 궁금해서, 위엄 있는 태도로 궁정 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금줄 단 뚱뚱보 위병들을 창살 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성 안이 온통 들끓고 있었습니다. 시종들과 청지기들이 종종걸음으로 대리석 층계를 오르내립니다. 현관에는 비단옷을 입은 신하들과 시동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새로운 소식을 알아내려고 수군거립니다. 넓은 계단 위에서는 눈물에 젖은 시녀들이 수를 놓은 고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오렌지 온실 안에서 가운을 입은 의사들의 회합이 거듭됩니다. 그들의 긴 검정 소매가 움직이고, 길게 늘인 가발이 점잖게 수그러지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입니다. 사부와 시종은 문 앞에서 서성대며 시의의 발표를 기다립니다. 요리사들이 그들 곁을 인사도 없이 지나갑니다. 시종은 이교도처럼 욕설을 퍼붓고, 사부는 호라스의 시를 읊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 편 마구간 쪽에서는 구슬픈 말 울음 소리가 길게 들려 옵니다. 그것은 마부들이 잊고 밥을 주지 않아 텅 빈 구유 앞에서 슬프게 울부짖고 있는 왕자의 밤색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어디 계신가? 임금님은 성 끝에 있는 방 안에 홀로 들어앉아 계십니다. 임금님들이란 남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왕님은 다릅니다. 여왕님은 어린 왕자의 머리맡에 앉아 고운 얼굴이 눈물에 젖은 채 비단장수처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흐느껴 울고 계십니다.
레이스가 달린 침대에는 어린 왕자가, 깔고 누운 요보다도 더 흰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습니다. 잠들어 있는 듯 하였지만 자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그가 울고 있는 것을 보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마마마, 왜 울고 계셔요? 정말 제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여왕님은 대답을 하려고 하였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어마마마, 제발 울지 마세요. 제가 왕자라는 것을 잊으셨군요. 왕자가 이렇게 죽을 수 있나요?"
여왕님은 더욱더 흐느껴 웁니다. 그래서 왕자도 무서워집니다.
"그만두세요! 전 죽고 싶지 않아요. 절대로 죽음이 여기까지 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을 거예요 ……. 당장 사십 명의 아주 힘센 근위병을 오게 해서 침대 주위를 둘러싸게 해 주세요 ……. 대포 백 문을 창 밑에 배치하여 도화선에 불을 붙인 채, 밤이나 낮이나 지키게 해 주세요. 그래도 죽음이 접근해 올 때는 호통을 쳐 줄 거야!"
왕자를 즐겁게 해 주려고 여왕님은 손짓을 합니다. 당장 궁정 안으로 커다란 대포가 굴러 오는 소리가 들리고 창을 든 장대한 사십 명의 근위병들이 몰려와 방 안에 둘러섭니다. 이들은 수염이 허옇게 된 노병들입니다. 왕자는 그들을 보자 손뼉을 칩니다. 왕자는 그들 중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로뎅! 로뎅"
그가 침대 앞으로 한 걸음 나섭니다.
"로뎅, 난 당신이 참 좋아……. 당신의 장검을 좀 보여 줘. 죽음이 나를 잡으려고 하면 죽여 버려야 하겠지?"
로뎅이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노병의 거무죽죽한 뺨 위에는 굵은 눈물이 두 줄 흘러내립니다.
이 때, 궁정 목사가 왕자 곁으로 가까이 오더니 십자가를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 왕자는 아주 놀란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더니 갑자기 목사의 말을 가로막습니다.
"사제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친구 베뽀 녀석에게 돈을 많이 주고 내 대신 죽게 할 수는 없을까요?"
목사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어린 왕자는 더욱더 놀란 얼굴을 합니다.
목사가 이야기를 다 끝내자, 어린 왕자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제님의 말씀은 한마디한마디 나를 아주 슬프게 합니다. 하지만 저 하늘 위 별들의 낙원에 가도 나는 역시 왕자일 터이니까 안심이 되는군요……. 하느님은 나의 친척이니 나를 신분에 맞도록 대우할 것을 잊으시진 않겠죠."
그리고는 어머니 쪽으로 몸을 돌리며 왕자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제 가장 고운 옷들, 흰 담비가죽 저고리와 빌로오도 무도화를 가져오라고 하세요! 왕자의 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천사들에게 뽐내고 싶어요."
목사는 세 번째 어린 왕자를 향해 몸을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왕자는 화를 내며 말을 가로막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왕자란 아무것도 아니군요!"
그리고는 더 이상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하지 않고, 벽을 향해 돌아눕더니, 왕자는 흐느껴 우는 것이었습니다.
<풍차간의 편지>
▶ 줄거리 요약
여기에 인용된 부분은 '산문으로 쓴 환상시'라는 단편의 일부이다. 이 단편은 '왕자의 죽음'과 '들판의 군수님'이라는 두 개의 에피소드(episode)로 구성되어 있다.
'들판의 군수님'에는 군민(郡民)들 앞에서 멋진 연설을 하려고 원고를 쓰기 위해 숲 속에 들어갔던 군수님이 등장한다. 군수님은 숲 속의 동물들이 내는 소리에 신경질을 낸다. 원고 쓰는 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수님은 곧 새들의 노랫소리, 짐승들의 행복한 세계에 빠져 원고 쓰는 일을 포기하고 노래하며 시를 쓰는 일에 몰두한다. 원고 따위의 일은 까맣게 잊고 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