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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책
하성자(시인 , 수필가)
포르토벨로의 마녀(The witch of Portobello)
저자 : 파올로 코엘료(Paulo Coelho)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신비주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1947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산층의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는 시, 연극 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7세부터 세 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불행한 청소년기와, 록밴드를 결성하고 극단 활동에 참여하는 등 히피문화에 심취한 청년기를 보낸다. 1986년, 돌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난다. 이때의 경험은 삶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이 순례에 감화되어 [순례자]를 썼고, 이듬해 자아의 연금술을 신비롭게 그려낸 [연금술사]로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저서로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흐르는 강물처럼] [포르토벨로의 마녀] 등이 있다.
들어가는 말 - 행복(幸福)이란 병(病) -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손을 꼽아 보다가 숫자를 놓쳐버리고 발견하게 된 규칙은 소중한 것들의 양(量)은 내가 가진 욕심들과 동량(同量)이라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소중한 것들뿐이다. 그 소중함의 가중치를 두루두루 꼼꼼히 따져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내 본다. 곧 발견되었다. ‘나’란 존재가치.
이번 가을을 어영부영 보내고 있었다. 시간의 손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지는 순간, 마음이 이내 산란해졌다. 살아가기 위해 맺은 관계 속을 허둥대다 보니 계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가을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다. 작물을 거두어 뿌린 씨앗을 종결짓는 농부처럼 생각 없이 앞서던 마음과 질주하던 몸짓을 멈추고 문득 내 살아감을 정돈하게 된다.
거리 양쪽에 늘어선 은행나무의 변색 덕분일까? ‘파올로 코엘료’란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인 ‘포르토벨로의 마녀’, ‘아테나’를 만났기 때문일까?
성철 스님은 “책을 버려라”로 말씀하셨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책을 읽을 때 비로소 안정되면서 스스로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나는 체험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소중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거리에 내가 거닐 여유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일 게다.
어릴 때부터 ‘책이 밥 먹여 주나’ 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지만, 나는 책을 손에 들면 그 책에서 헤나오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 책을 읽는 도중 전화를 받거나, 식사를 챙겨주어야 할 때 내 자유의 침해됨에 대한 저항이 가장 강하게 작용함을 늘 느껴왔다.
참 큰 병이긴 하다. 무지개 잡기처럼 실현 불가능한 행복이 아니다. 도달 가능한 책 읽기의 기쁨은 원하고 행동하면 얻을 수 있는 행복이다. 책은 소중한 나의 친구가 되어 늘 내 곁에 머물면서 변함없이 나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한비문학의 ‘내가 만난 책’ 코너, 누구의 강요도 아닌데 나는 책임감을 느낀다. 이 책임감은 소중한 의미로서의 내 행복이다. 독서의 행복으로 도달하는 지름길 중의 하나가 한비문학의 ‘내가 만난 책’ 코너이다. 덕분에 나는 한 달에 한 번은 책 읽는 행복의 절정에서 희열하곤 한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읽다 보니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의 명제에 대한 내 스스로 의무도 일정 부분 충족시킨 것 같다. 마음의 중량도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 이런 것이 책 읽는 맛이다. 치유 불가능한 병이며 치유하고 싶지 않은 행복이란 증상을 가진 병, 바로 ‘책 읽는 병‘인 것이다.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읽으며 경험했던 나의 병상일지를 기록하고자 한다.
‘포르토벨로의 마녀’ 줄거리 -
주인공 ‘아테나’, 본명 ‘셰린 칼릴‘ 이란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는 한 남자가 하는 이야기의 배경 설명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이 남자는 런던경찰로 아테나의 남자친구였다. 그는 아테나를 알고 경험했던 사람들의 실명과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서 우리 앞에 아테나를 데려다 놓았다.
아테나는 집시인 생모와 잠시 동안 열렬한 사랑을 공유했던 영국 남자 사이에 태생이다. 생모에 의해 보육원에 맡겨진 ‘셰린 칼릴’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던 양모 사미라 칼릴의 선택을 받아 베이루트의 권위 있는 가정인 칼릴가에서 사랑스런 외동딸이 되었다. 양모인 사미라 칼릴은 입양된 아테나에게 헌신하는 어머니였으며 양부 칼릴은 능력 있는 가장이었다. 양부모는 루마니아계 집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셰린이란 이름을 아테나로 개명하여 정성을 다 해 길렀고 아테나 자신도 개명한 이름을 더 좋아하였다.
베이루트는 차갑고도 혼란스러운 도시로 독재자가 제거된 이후에도 문제는 남아있었다. 다가올 레바논의 큰 혼란을 미리 예견하는 어린 아테나의 무의식적 계시를 믿은 양부는 베이루트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아테나도 양부를 따라 런던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게 된다. 아테나는 어릴 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춤을 추고 나면 어렴풋이 강신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녀가 내리는 계시는 늘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부부는 줄 수 있는 부모의 사랑을 아낌없이 주면서 키웠지만 아테나에게 내재한 집시의 유전자는 생모의 것이었다. 그저 사랑과 기다림으로 양부모는 아테나와 언제나 함께한다.
대학에서 만난 루카스 에센은 부모의 반대를 외면하고 성당에서 아테나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아테나는 아들 비오렐을 출산한다. 두 사람 모두 대학을 중퇴하고 새롭게 꾸며진 가정을 지키려 하였지만 생활은 현실이었다.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십대 초반에 자립은 큰 짐이었다. 아내와 아들까지 부양할 책임을 어린 남편 루카스는 힘들게 감내하였다. 자신이 버려졌던 상처를 안고 있었던 아테나는 모든 정성을 아들 비오렐에게만 쏟아 부어 남편의 존재에는 관심도 없다. 둘은 이혼하게 된다. 이혼 후 아테나는 양부모의 집에서 비오렐을 키우며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집을 얻어 나가게 된다.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은 아테나와 나눈 대화의 결과로 업무능력이 향상되는 신기한 결과를 얻게 된다. 지점의 영업실적이 좋아졌다. 그 공으로 아테나는 두바이에 근무할 수 있게 된다. 아테나는 은행 업무로 받는 수입뿐만 아니라 두바이에서 부동산 중개업으로 부를 쌓게 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하였다. 아테나가 추었던 엇박자의 춤사위가 준 깨달음은 대단한 것이었다. 아테나는 그와 유사한 서법의 경지를 두바이의 서법 스승으로부터 인정받는다. 아테나의 서예스승, 아랍의 서법 스승은 아테나에게 춤과 춤 사이의 막간,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여백을 이해하는 그런 도를 깨우치기만 한다면 더 이상의 경지는 없을 거라고 말한다.
성공한 사업을 미련 없이 떨쳐버린 아테나는 두바이를 떠난다. 양모를 설득하여 입양서류를 받아든 아테나는 생모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이 여행 중에 그녀 인생의 일부 전기를 증언해줄 신문기자 헤런 라이언과 에바를 만나게 된다. 생모를 만난 아테나는 생모로부터 스승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집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낸다. 아테나는 런던으로 돌아온다.
의사이며 집시의 기질을 지닌 스승 에바를 만난 아테나는 자신이 남을 위해, 남에게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정직한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헤런의 여자 친구이자 연극배우인 앤드리아 매캐인은 아테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며 아테나에게서 어떤 깨우침을 얻고 스스로 집시라는 정체성을 깨닫는다.
포르토벨로 거리는 아테나가 여는 작은 모임으로 떠들썩해졌다. 엇박자의 춤과 그 춤 이후 아테나에게 강신하는 ‘아야소피아’란 존재는 또 다른 아테나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아야소피아인 아테나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에 의해 치유된다. 수많은 사람이 포르토벨로 거리에서 열리는 아테나의 집회에 모여들었고 신비한 치유방식은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사회적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기독교 목사는 아테나를 경계하는 기사를 신문에 발표하였고 아들 비오렐은 학교에서 마녀의 아들이라는 놀림을 받고 폭행을 당하게 된다. 아테나가 힘들어하자 양모는 아테나를 꼭 안아준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믿었듯이 너의 가는 길이 예수가 가는 길이거나 혹은 아닐지라도 그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지라도 언제나 지지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테나가 여는 일종의 집회로 인한 문제와 아들 비오렐의 양육권 박탈 문제는 법정에서 아테나의 편을 들어주어 일단락되었다.
아들 앞에 어머니인 아테나, 그녀가 행하는 모든 일과 그녀의 생각과 자유행위, 어느 것 하나 아들 비오렐 보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테나는 집회를 중지하였다.
그녀는 신문기자이자 남자친구인 헤런 라이언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녹취를 한다. 이후 아테나는 종적을 감추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다음 아테나는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다.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든, 그녀 스스로 죽음으로 다가간 것이었든 아테나는 지상에서 그 존재를 상실했다.
이 소설의 결말 부분은 반전이다. 아테나를 사랑했던 한 남자, 런던 경시청의 남자 친구는 늘 아테나와 함께했었다. 포르토벨로 집회 당시 경찰을 은밀하게 풀어 아테나를 보호하려 노력했고, 아테나가 법정시비와 여론몰이로 힘들어 하자 그녀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아테나를 보호했다.
그녀가 가십거리가 되는 것에서 보호하기는 쉽지 않았다.
무연고의 시신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얼마 뒤에 햄스테드에서 그런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는 용의주도하게 옥스퍼드에 은거해 있는 아테나를 찾아가 약간의 혈액과 머리카락을 확보해 두었다. 경시청에서 할 수 있는 힘을 동원하여 그 시체를 아테나의 것으로 만들었다.
아테나는 아야소피아의 후계자이며 군중을 현혹하는 마녀에서 차츰 사람들에게 망각되어질 존재가 될 것이다. 그녀의 장례식은 그녀의 양부모와 그녀를 기리는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건하게 치러졌다. 이런 정리를 다 끝낸 런던 경시청의 남자는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라는 것을’에서 오랜 질문의 해답을 얻는다.
책을 읽고 나서 -
이상의 줄거리는 소설의 내용 중에 껍데기를 정리한 것이다. 아테나의 행적을 따라 이동했을 뿐, 내가 쓴 줄거리는 아테나의 내면을 정리하지 못했다.
아테나는 집시들이 받드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나 ‘비너스’ 등 고대의 여신들처럼 현대에 나타난 성녀인 것일까? 그녀가 했던 행적을 보면 일반인의 눈에 틀림없이 마녀로 보일 그런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자세, 그녀가 권하는 인생의 길은 마녀의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사람들이 익히 믿어왔던 ‘사랑’ 의 행함이란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남에게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내면에 잠재된 자유의식을 정직하게 드러내어 사랑으로 발현하였으며 그것은 모든 상처받은 이와 미래에 상처받을 이를 치유해주는 ‘아야소피아’적 자비행 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마녀인가, 성녀인가, 구세주인가, 구세주를 모방한 인간의 전형인가? 모성성인가 아니면 이기적 여성성인가? 아가페적 사랑의 화신인가? 에로스적 여성의 특성적 행동의 소유자인가 심히 혼란스러웠다.
소설을 읽은 뒤 혼돈을 질서로 잡아준 내 결론은 바로 아테나의 그것, 사랑이었다. 주인공 아테나는 루마니아 집시의 후예이니 집시이다. 집시는 마녀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한 인간이며 타고난 능력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한 사랑의 화신이다.
이 책에는 온통 사랑이란 메시지로 가득하다.
주인공 아테나가 행한 집시의 춤과 강신의 결과는 모두에게 긍정적 결과를 선물해 준 사랑이었다. 아테나의 생모도 지극한 사랑의 마음으로 아테나를 버렸고, 기다렸고, 만났고, 가르쳤다. 그녀의 양모 또한 어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결코 아테나를 탓하지 않았고 따뜻한 지지와 사랑이란 든든한 기둥으로 아테나를 향한 긍정적인 아우라를 제공하였다. 완고한 성격의 양부도 아테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아테나를 위해 팔 걷고 나서는 무조건적 부모의 사랑을 실행하고 있다. 그녀와 잠시 사랑했거나, 그녀가 만난 남자와 여자들, 즉 이 소설의 줄거리가 되어 준 증언을 해 준 자들 또한 아테나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이 강하다. 신문기자, 신부님, 역사학자, 배우, 경찰, 은행가, 서법스승 등 아테나와 접촉한 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테나로부터 긍정적인 동기유발을 발견하였고 그들의 증언에서 보여 지는 아테나에 대한 연민, 그리움, 아쉬움들이 사랑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사랑은 어머니다. 파올로 코엘료의 ‘포르토 벨로의 마녀’는 사랑의 모습으로 모성적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모성성, 미의 여신 비너스의 여성성, 심지어 전쟁의 여신 아테나라는 주인공 이름에서 보이는 강한 이미지의 여성성이 내재되어 있다. 세상의 질서를 잡아가는 모태로서의 모성의 위대함을 여신과 결부시켜 주인공의 행동의 결과로 발현되게 해 놓았다. 그녀와 접촉한 사람들은 모두가 안도하였고 행복하였고 꿈을 가지게 되었다.
자유의지의 발현, 자유행위가 주는 긍정성을 믿었던 아테나가 집회를 포기하고 경시청의 친구가 주선한 대로 은둔자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배경은 소설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않았지만, 그 근거는 아마도 아들 ‘비오렐’ 을 보호하기 위한 아테나의 모성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해 본다. 설사 죽임을 당할지라도 그녀의 자유의지와 자유행동을 전파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어 주려고 했던 용감한 아테나마저 아들을 위해 그 존재를 대지에서 감추어 버린 것이리라. 그녀의 ‘스스로를 버림’이란 용기는 지극한 모성성의 선택일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유행했다는 기록은 역사적인 많은 사례로 남아있다. 오늘날 ‘마녀사냥식’ 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마녀라 불리었던 그녀들은 남다른 능력의 소유자라는 이유로 시대의 희생물이 되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주기도문을 외우고 외과 수술을 할 줄 알기에 시술했던 여자들, 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어준 쟌 다르크도 마녀로 몰아붙이면 마녀가 되는 세상이었다. 전제군주나 영주의 통치기법 중에 마녀사냥은 오늘날 월드컵 축구를 방영하는 만큼의 여론몰이 효과가 있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현대에 이르러 파올로 코엘료는 그 마녀 중에 ‘아테나’를 우리 앞에 데려다 놓았다.
런던의 집시거리 포르토벨로에서 아테나가 벌인 회합이 결국 그녀가 참혹한 죽임을 당할 그런 죄악이었을까? 아니면, 아테나 스스로 그 죽음을 승인한 것일까? 그녀는 은둔자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옥스퍼드의 정원을 거닐지라도 그녀는 더 이상 살아있는 아테나, 즉 아야소피아는 아닌 것이다. 그녀의 자유의지는 그렇게 대지에서 가이아의 품 속 깊이 숨어 버렸고 그녀의 존재가치는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저자인 파올로 코엘료는 집시적 예측이 가능한 작가일까?
얼마 전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집시추방과 관련한 발언을 하여 문제가 된 뉴스를 보았다. 유태인 박해에 버금가는 사르코지의 언행에 대해 유럽은 물론 세계가 들썩거렸다. 2012년 대선에서 극우파가 이민과 치안 이슈를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르코지가 이런 발표를 하였다는 보도를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 황석영 작가가 쓴 ‘바리데기’의 주인공 ‘바리’가 런던으로 이민을 한 사실에 주목한다. 편견이 없는 나라 프랑스의 이미지는 이번 사르코지의 결정으로 퇴색되었다. 파올로 코엘류는 ‘아테나’를 런던으로 이주시켰고 황석영 작가도 우리나라의 만신 무당인 ‘바리’를 런던으로 데려갔다. 아테나는 집시무당이면서 아랍 서법 스승에게서 도를 배우고 ‘바리’는 만신무당으로 파키스탄인 이주민인 남편의 할아버지에게서 치유를 받는다. 프랑스에 불법 체류하는 집시를 추방하는 사르코지의 주장은 21세기에 벌어지는 마녀사냥이란 생각이 든다.
몇 년 전 옛 유고 연방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를 방문했을 때 번화한 거리 맞은편 길 하나 건넌 곳에 집시 판자촌이 있었다. 그들은 이주할 곳을 보장받지 못하여 이주를 거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마 아직 그대로 있을 것 같다. 베오그라드 첨단 건축물과 길을 마주한 판자촌의 모습, 내가 만난 거리의 집시 아이들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들만의 생존방식이 있을 것이다.
바리의 간절한 사랑, 아테나의 지극한 헌신과 사랑, 이런 것들이 유럽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알 수 없지만 인간 본연의 입장에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랑의 파노라마가 기적을 일으키기를 고대해본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곳곳에 세계인들이 소수인으로 존재하며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든 소중한 사람으로 관계되어야 함을 깊이 자각한다. 아테나가 말하듯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인 것을. 나의 존재가치가 크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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