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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64, 끝)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강원도 태백시 황지 (낙동강)→ 낙동강하구둑
2020년 8월 3일 (월) ~ 11월 11일 (수) ▶ [백파 종주기] 에필로그
* [에필로그] — 낙동강 종주를 마치고
낙동강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전장 525km, 낙동강은 태백의 발원지에서 장장 1300리를 흘러서 부산 앞바다, 남해에 이르렀다. 나는 그 낙동강 물길을 따라, 두 발로 걸어서 내려왔다. 그런데 낙동강의 그 먼 물길을 혼자서 종주하면서, 한 번도 외롭거나 고독한 적이 없었다. 낙동강이 늘 나와 더불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은혜로운 강(江), 무한 공간으로 열린 하늘, 무한 생명으로 흐르는 강(江)이 든든하게 나를 이끌어주는 노정이었다.
…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다. 그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크기는 수천 리가 되어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없다. 곤이 변해서 새가 되었는데, 그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수천 리나 되어 얼마나 넓은지 알 수가 없다. 솟구쳐 날면, 붕의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출렁이어 큰 바람이 일면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그곳은 하늘만큼 큰 연못이다.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 『莊子』「逍遙遊」)
장자(莊子)는 하늘과 땅과 더불어 구만리 장천(長天)에 붕(鵬)이 되어 날아오른다. 그리하여 우주(宇宙)를 벗하고 노닌다. 대붕의 비상(飛翔), 그것은 자유요 해방이요 해탈이다. 이는 하늘 같이 크나큰 마음[德]이다. … 나 또한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아무 것도 구애됨이 없었다. 묵묵히 사유(思惟)하면서, 저 아득한 남쪽 바다[南冥]을 향하여 걸었다. 하늘에는 장자의 대붕이 날아가고, 나는 유장한 낙동강 일천 삼백리를 혼자서 유유히 걸었다. 청정한 강물처럼 내 마음이 스스로 무심(無心)해지면, 나의 마음도 구만리 장천(長天)이 되는 것 같았다. … 하늘은 무한(無限)하고 대지는 무궁(無窮)하다. 거기 낙동강이 쉼 없이 흐른다.
낙동강은 은혜로운, 생명(生命)의 강이다
세상의 모든 물은 산(山)에서 발원한다. 청산은 언제나 물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산이 품은 물은 하늘의 정령(精靈)이다. 산은 한결같이 하늘의 생명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산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은 하늘의 생명이 지상의 생명으로 용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이 물이요 물이 곧 산이다. 대하 장강, 아니 한 방울의 물이라도 하늘과 산(山)이 아니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산은 강의 어머니요 하늘은 강의 아버지다. 이렇게 하늘과 산과 물이 ‘하나의 생명’의 이어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골이 깊으면 물이 넘친다. 지상의 모든 생물은 이 물이 아니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물은 생명(生命) 그 자체다. 지상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곳곳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오고, 그 물줄기가 ‘하나’가 되어 깊고 넓은 강(江)이 된다. 유장한 강물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굽이굽이 먼 길을 흘러오는 것이다.
낙동강은 태백시의 서쪽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白頭大幹)과 태백시 구봉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한 낙동정맥(洛東正脈) 사이의 모든 산곡의 물들이 모여 흐르는 장강(長江)이다. 총 525km, 장장 1천 3백리 — 백두대간 태백산의 꿋꿋한 정기를 받아, 강원도 태백시에서 남으로 유유히 흘러내리며 가야와 신라의 찬란한 문화, 그리고 조선의 유교 문화를 꽃피워온 영남의 생명줄이다. 평생을 낙동강을 사랑하고 연구하고 답사하고, 깨끗한 낙동강을 지키는 데 일생을 바치는 대구대학교 지리교육과 오세창 교수가, 1996년 7월에 낙동강의 실제 발원지 ‘너덜샘’을 찾아, 그 푯말을 세우고 그 근원을 밝힌 바 있다. 이후, 낙동강은 태백의 ‘너덜샘’에서 부산의 ‘을숙도’까지 ‘낙동강 1300리’임을 규정하게 되었다.
산(山) 위에 하늘이 있다. 태백산(太白山) 천제단(天祭壇)은 하늘의 기운과 산이 정기가 교감하는 성지(聖地)이다. 낙동강의 원류인 황지천은 그 백두대간의 배꼽인 태백의 ‘너덜샘’에서 발원한다. 이 청정한 물은 수많은 지천(支川)의 물과 한 몸이 되어 1300리 장강을 이루어 흐른다. 대간과 정맥 사이의 산곡에서 물이 솟는다. 유역의 모든 사람들은 이 강물을 마시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낙동강은 생명(生命)의 강이다. 참으로 은혜(恩惠)로운 생명의 강이다.
낙동강, 선현의 학문과 의리가 살아있는 도맥
낙동강은 우리나라 유학(儒學)이 도도하게 관류하는 도맥(道脈)이다. 낙동강의 상류, 청량산의 맑은 물이 안동의 도산 앞에 와 머물면서 고절한 현자를 낳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로 일컬어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평생 동안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삶을 살면서, 진리(眞理)의 샘을 길어 올려 온 세상에 참다운 삶의 길을 열었다.
사실 낙동강은 상류 도산서원을 위시하여, 우리나라 도통(道通)의 큰 흐름을 이루는 물줄기이다. 강물이 크게 굽이치는 곳마다 학문(學問)의 꽃이 피고, 강물이 어려운 세상과 만나면 불퇴전의 의리(義理)가 번뜩인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높은 경지의 학문과 선비정신은 당대 현실의 정치적 질곡 속에서도 허리 굽히지 않고 시퍼런 의리(義理)의 정신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낙동강이 배출한 수많은 현인들이 도통의 길을 열고 넓혀 나갔다. … 저 고려 충렬왕 때 회헌 안향(풍기 소수서원)이 길을 열고, 포은 정몽주(영천 임고서원), 야은 길재(구미 금오서원, 채미정)가 그 길을 닦았다. 이어서, 조선시대에는 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밀양 예림서원), 회재 이언적(경주 옥동서원), 한훤당 김굉필(달성 도동서원), 일두 정여창(함양 남계서원), 탁영 김일손(함양 청계서원), 신재 주세붕(풍기 소수서원, 함안 무산서당 무릉사), 퇴계 이황(도산서원), 서애 류성룡(안동 병산서원), 학봉 김성일(안동 임천서원), 우복 정경세(상주 도남서원), 한강 정구(성주 회연서원), 한주 이진상(성주 주리세가) 그리고 저 경상우도의 남명 조식(합천 뇌룡정, 김해 산해정, 산청 지리산 산천재, 덕천서원)에 이르기까지, 낙동강은 처처에서 우리나라 도학(道學)이 빛나는 강(江)이다. …
어디 그 뿐인가. 낙동강 푸른 물은, 의리(義理)를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린 사육신(死六臣)의 숨결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선산 월암서원에 단계 하위지가 모셔져 있고, 대구 하빈의 육신사에 취금헌 박팽년, 매죽헌 성삼문, 백옥헌 이개, 단계 하위지, 낭간 유성원, 벽량 유응부 등 사육신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살아서도 불의에 굽히지 않은 생육신(生六臣), 경은 이맹전(선산 월암서원)과 어계 조려(함안 서산서원) 선생은 충절과 의리의 표상이다.
또 낙동강은 구한말 독립지사 석주 이상룡(안동 석주고택), 독립운동가 추산 정훈모(예천 풍양), 심산 김창숙(성주 청천서원, 성균관대학교 설립자), 지사시인 이육사 등을 배출하였으니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다. 특히 구한말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선생은 낙동강에 유입되는 영강의 상류인 문경의 가은 출신으로, 1895년 을미왜변(乙未倭變, 명성왕후 시해사건) 때는 문경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활약했다.
그리고 낙동강은 20세기 후반 혼란한 시대에 많은 국민의 존경을 받는 김수환 추기경을 배출하였고 그 분의 성자적 사랑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김수환은 1922년 낙동강에 유입되는 위천의 상류인 경상북도 군위군 용대리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지독한 가난 속에서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어머니의 훈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51년 9월 15일에 대구에 있는 계산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1969년 3월 28일, 스테파노 김수환 주교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인 최초로 가톨릭 추기경(樞機卿)에 서임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의 철권통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으며, 수많은 정치 사건에 사회 정의를 위한 올곧은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번 나의 낙동강 대장정은 그 선현들의 학덕(學德)을 추모하고 그분들이 추구한 길을 감히 좇아서 왔다. 낙동강 상류의 청정(淸淨)한 강물을 따라 나의 몸과 마음을 씻으면서, 선현의 학덕과 참다운 사람의 길을 생각하며 걸어왔다.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학문의 도(道)
낙동강의 아름다운 도학의 전통(傳統)은 오늘날에도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 예컨대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 선생은 근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한문학자이며, 서예가이다. 그는 대학자일 뿐만 아니라 한문 문장과 한시(漢詩)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한문학 작가였다.
이가원(李家源) 선생은 1917년 4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지금의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온혜리(溫惠里)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14대 후손으로 태어났다. 퇴계의 후손 가운데서도 종가 계통의 집안사람으로 그 증조부까지는 퇴계의 종손이었고, 조부는 퇴계 종손의 아우였다.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온 가문에서 생장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선생의 5대조인 후계(後溪) 이이순(李頤淳)은, 퇴계학을 계승하여 다시 중흥시킨 큰 공이 있었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고조부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은 퇴계의 10대 종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학문과 덕행으로도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영남의 선비사회를 주도하였다.
선생의 조부 노산(老山) 이중인(李中寅)은, 자신은 어려서부터 몸이 아파 큰 공부를 못 했기 때문에, 선생을 큰 학자로 만들기 위해서 5세 때부터 같이 데리고 자면서 지극정성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훌륭한 스승을 골라 배우도록 하고, 장가도 학문이 높은 무실 류씨 집안에 들게 하였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선생은 뛰어난 자질과 강의(剛毅)한 집념으로 6세 때부터 학문에 정진하였다.
23세 때 안동의 향리에서의 연학(硏學)을 종결짓고, 서울로 올라와 5년 동안 당대 우리나라 한문학계의 최고봉인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을 종유(從遊)하며 새로운 안목을 키웠다. 그리고 중국문학을 전공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한문학사를 저작한 성암(聖岩) 김태준(金台俊)을 따라 ‘한문학사’ 집필의 의지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 받았다.
서울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에 재직하면서 사고전서(四庫全書) 등 많은 중국 서적을 접하게 되어 학문의 깊이와 폭을 더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중국문학사인 《중국문학사조사(中國文學思潮史)》를 집필하게 되었다. 선생은 연세대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100여 권의 저서와 2500편의 한시와 2000여 편의 한문문장을 저작해 낸 대학자요, 대문장가, 대시인이다. 그리고 한국한문학회(韓國漢文學會) 등 여러 학회나, 퇴계학연구원(退溪學硏究院) 등 여러 학술단체를 맡아 운영하면서 후학들을 인도하고 학문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였다.
동시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 도산서원(陶山書院), 죽수서원(竹樹書院), 심곡서원(深谷書院) 등의 원장을 맡아 전통유림의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일본의 우리 문화 말살과 해방 후의 서양문물의 범람으로 우리 민족의 학문이 인멸되어 가는 시기에 태어나 우리 학문을 정립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선생의 학문은, 《한국한문학사(韓國漢文學史)》,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 집필 등 한문학을 전반적으로 조감하는 거시적인 학문과 교산(蛟山), 연암(燕巖) 등 참신한 개혁파의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무엇보다 정통유학인 퇴계학(退溪學)을 평생 연구하였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최고 경지에 이른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같은 분들이 극찬을 했고, 그의 한시문집인 《연연야사재문고(淵淵夜思齋文藁)》를 읽고, 공자(孔子)의 종손(宗孫)이며 대만대학 교수인 공덕성(孔德成), 대만대학 고명(高明) 등 여러 대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광호(李光虎) 선생은 1948년 경상북도 문경(聞慶)에서 태어났다. 문경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영강(潁江)이 발원하는 곳이다. 1993년 서울대에서 『이퇴계 학문의 체용적 구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제퇴계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국제퇴계학연구회’ 회장으로, 연구와 강연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이광호 박사는, 유학은 '인간의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인격 수양(修養)을 통해 참다운 삶의 도(道)를 실천하는 것이 동양철학의 요체이다. 무엇보다 유학이, 서양의 과학과 물질문명이 초래한 병폐를 해결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물질이나 대상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참다운 마음을 통하여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강조한다. 그래서 현대인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며 참신한 인문학을 펼쳐 나가고 있다.
이기동(李基東) 선생은 1951년 청도군 각남면에서 태어났다. 청도(淸道)는 낙동강에 유입되는 밀양강 상류에 있는 청정지역이다. 성균관대학교 유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 일본 쓰쿠바(筑波) 대학에서 『동양 삼국의 주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국제퇴계학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기동 박사는 갈수록 혼탁해지는 세상에서 동양철학의 가치를 올곧게 세워 나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이 행복해지는 지혜‘를 전하고자 동양철학 고전아카데미 ‘동인문화원’을 설립하여 시민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바쁘고, 욕심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진리를 잃고 불행의 늪에 빠져든다. “진리가 사람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멀리한 결과이다.(非道遠人 人自遠矣)” 이제 진리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기동 박사는 ‘참다운 삶’, ‘진정한 행복’은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사심이 없이 ‘한마음’이 될 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진주 남강의 허권수(許捲洙) 선생은 1952년 경상남도 의령 출신이다. 본관은 김해 허씨(金海許氏)이며 호는 실재(實齋)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문에 몰입하여 수많은 한문학 고전을 독파했다. 경상대 국어교육학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한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성균관대학교(한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진주 경상국립대학교 중어중문학과·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7년 정년퇴임했다. 경상대 재직 시절 남명학연구소장·도선관장을 역임했다. 정년퇴임과 함께 진주시 상대동에 ‘동방한학연구소’와 ‘실재서당(實齋書堂)’을 창립했다. 현재 경상대 한문학과 명예교수이다.
동방한학연구소·실재서당은 오로지 ‘허권수교수 연학 후원회(許捲洙敎授硏學後援會)’(회장 유택하)와 독지가들의 협찬으로 이루어졌다. 2012년 2월 18일 창립된 이 ‘후원회’는 당시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허권수(도서관장) 교수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허 교수가 학문을 더욱 크게 발전시키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도록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는 모임이다. — 한 명의 교수를 후원하는 모임은 과거에는 ‘유계(儒契), 학계(學契)’라는 것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국적으로 거의 유일한 후원회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허권수 박사는 유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특히 남명학파에 관한 저서가 많다.
특히 허권수 박사는 대 장서가(藏書家)로 널리 알려져 있다. 평생 동안 수집하여 소장한 도서가 6만여 권에 달하는데, 이 방대한 장서는 동방한학연구소·실재서당(實齋書堂)에 비치되어 있다. 한문학 및 한국학 관련 우리나라 최고의 개인도서관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허권수 박사는 지금도 연구와 번역 사업 그리고 한문학 강좌를 개설하여 지속적으로 강의활동을 하고 있다.
가야(伽倻)의 재발견 — 함창의 고령가야
이번 낙동강 종주를 통하여, 특별히 가야(伽倻)에 대한 역사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나에게 엄청난 일이었다. 그 동안 가야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가야사(伽倻史)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고 그 왜곡된 바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나라 식자층에서도 왜곡된 내용으로 역사를 잘못 이해하거나 긴가민가하다가 외면하기 일쑤다.
가야에 관한 역사서로는 고려 문종 대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 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문인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일연스님의『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다. 가야(伽倻)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지역에 있던 여러 부족국가들의 연맹체 왕국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아라가야(阿羅伽倻, 함안), 고령가야(高寧伽倻, 함창), 대가야(大伽倻, 고령), 성산가야(星山伽倻, 성주), 소가야(小伽倻, 고성), 금관가야(金官伽倻, 김해), 비화가야(非火伽倻, 창녕) 등의 명칭이 나오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은 내용이 설화적인 요소가 있고 워낙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가야사를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가야사(伽倻史)에 대한 논란(論難)과 왜곡(歪曲)은 일제의 황국신민-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서술 때문이었다. 가야사(伽倻史)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일제시대 황국신민—식민사관을 신봉하는 일본인 학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일제의 조선침략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물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대사 부분을 부정하는 등 우리나라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폄하하고 치밀하게 왜곡했던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스에마쯔 야스까즈(末松保和)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의 남부 지역인 가야 지방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근 200년간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현재 어느 정도 수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본의 교과서에는 그 내용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우월감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일본 어용학자들은 그 근거로써 『일본서기』의 ‘진구황후의 한반도 정벌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송서(宋書)〉 등을 제시하고 있다. 저들은 ‘광개토대왕비’의 비문까지 몰래 쪼아서 고치는 죄악을 저질렀다. (재일사학자 이진희)
일제의 식민사관에 따라 우리 역사를 해석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이병도’와 ‘신석호’이다. 1919년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이병도(李丙燾)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등 일제식민사학의 핵심인물의 영향을 받아, 실증사학을 내세운 식민사관으로 무장하였다. 그는 해방 후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국사학계의 태두로 추앙을 받는다. 이후 사학계는 신석호나 이병도의 제자나 후학들이 장악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해석하고 교과서 집필 등 우리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재야 사학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이 식민사학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가야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 대한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야(伽倻)는 낙동강 연안의 평야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부족국가이고 그 연맹체의 중심 교통로는 낙동강(洛東江)이었다. 가야는 낙동강 주변의 기름진 평야를 바탕으로 벼농사가 발달했고, 품질 좋은 철을 생산해 중국과 왜(일본) 등지에 수출하기도 했다. 발달한 문물을 왜(倭)에 전해주었는가 하면, 바다를 주름잡는 해상 강국이 되어 신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가야사 연구에 따르면, 가야국은 지역적으로, 금관가야는 김해(金海), 아라가야는 함안(咸安), 대가야는 고령(高寧), 성산가야는 성주(星州), 고령가야는 함창(咸昌). 비화가야는 창녕(昌寧), 소가야는 고성(固城) 지역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가야 제국(諸國)의 고도(古都)에 남아있는 고분과 유적·유물 등으로 확인된 고고학적 성과이다.
그런데 가야국 가운데, 식민사학자 이병도(李丙燾)는 고령가야(高寧伽倻)를 ‘진주’라고 주장했다. 이후, 결정적인 근거 없는 이 주장이 지금까지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고령가야는 진주가 아니라 ‘상주 함창(咸昌)’이라는 사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과 상주 ‘공금지’와 함창의 ‘가야왕릉’과 ‘오봉산 고분군’ 그리고 ‘산성’ 등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다. 문경 월방산 봉천사 지정스님이 수년간 함창 고령가야 유적지를 수차례 답사하고 연구하여 고령가야가 함창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사실(史實)을 규명하고, 최근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학술대회’(2021.08.28.)를 개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요컨대, 가야 제국(諸國)는 ‘낙동강칠백리비’가 있는 상주 함창에서 낙동강 강안을 따라 성주, 고령, 합천, 함안, 창녕, 김해로 이어지는, 낙동강 벹트의 비옥한 평야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동맹체 왕국이었다.
낙동강은 나라를 구한, 역사(歷史)의 강이다
조선시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에서 세 번의 처참한 전쟁(戰爭)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1632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그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압록강을 건너온 청나라 12만 기병이 한강(漢江) 이북의 국토를 유린하고 한양을 점령한 뒤, 남한산성과 한강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졌던 치욕적인 전쟁이었다. 병자호란의 전장은 낙동강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6·25전쟁은 모두 낙동강(洛東江)을 중심 하여 치러진 전쟁이었다.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국가 운명을 가름하는 처절하고도 장렬한 전장(戰場)이었다.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에서 국난을 극복한 것은, 명나라의 도움도 있었지만, 남해의 이순신 장군의 승전과 ‘낙동강 의병(義兵)’들의 활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강의 병자호란은 조선의 임금이 청나라 홍타이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하며 세 번 큰절을 올리고 머리를 아홉 번 땅바닥에 내리박으며 항복한 전쟁이었다. 천추의 한이 되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낙동강의 임진왜란과 ‘6·25전쟁’은 그렇지 않았다. 적의 침략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을 당한 처참한 전쟁이었지만 끝내 무릎 꿇지 않았다. 관군의 빈 자리에 백성이 일어나 끝까지 맞서서 싸워 전란을 극복했다. 임란의 의병과 6·25의 어린 학도병들이 주저없이 전선으로 나아갔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낙동강 의병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인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전란이다.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이라 하며,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처참한 싸움의 하나였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만 8,7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 섬의 오우라 항[大浦港]을 출항하여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군민과 더불어 항전했으나 전사했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4월 18일 가토 기요마사의 후속부대가 부산에, 구로다의 제3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4~5월에 걸쳐 제4~9번대에 이르는 후속부대가 상륙하여 수군병력 약 9,000명을 합해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총병력은 약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부산·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는데, 중로는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를,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을 거쳐 조령에서 만나 충주로 향하기로 했고, 우로는 김해-성주-지례-김천-추풍령의 길을 택해 경기도로 북상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18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고니시는 평안도, 가토는 함경도, 구로다는 황해도로 진격했다, 김명원의 조선군 3000명이 임진강에서 고니시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해 27일 일본군은 임진강 이북으로 북상했다. 고니시군이 대동강 연안까지 이르자, 조정은 다시 평양 사수를 포기하고 6월 11일 선조는 평양을 떠나 숙주·안주·안변을 거쳐 박천에 이르러 군권을 광해군에게 넘겨주고 의주로 향했다. 6월 14일 평양이 함락되었고, 6월 17일 가토군은 함경도까지 유린하고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부산 상륙 이후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북으로 밀려가는 전시의 조정(朝廷)을 이끌고 전쟁을 지휘한 사람이 영의정 서애 류성룡이었다. 퇴계의 수제자인 류성룡은 명나라 원군을 청하고 이순신과 권율 장군을 발탁하여 그나마 꺼져가는 조선의 불씨를 살려 내었다. 퇴계의 또 하나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왜적 불침론’으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전쟁이 시작되자 경상도초유사가 되어 관군과 의병을 연계하여, 흩어진 전열을 가다듬어서 왜적과 맞서 싸웠다. 그의 활약으로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전란의 와중에서 병사했다.
이순신 장군 승전과 낙동강 의병(義兵)의 분투로 국난을 극복하다
전쟁의 준비가 되지 않은 조선의 관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왜적을 막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승전을 거듭하여 왜적의 진로를 막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은 거북선과 함께 평상시부터 훈련시켜 두었던 군사를 이끌고 경상도 해안에서 일본의 수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한산 대첩과 부산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바다를 장악하여 적의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해전에서 잇따른 승리를 거둘 때 육지의 곳곳에서도 의병(義兵)이 일어나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에 나서고 있었다. 내륙에서는 각계각층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저항하였는데, 양반 유학자들이 의병 활동을 주도했다. 한편 조정은 명나라의 도움을 얻어 평양을 다시 찾게 되었다.
왜적이 우리 땅을 유린하고 백성들을 죽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특히 의병(義兵)은 우선 왜군에 점령당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주로 지방에서 어른 역할을 하던 선비들이 주도하여 창의(倡義)했다. 경상도의 경우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권응수(權應洙) 등이 활약했다. 전라도의 경우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김덕령(金德齡)·유팽로(兪彭老) 등이 활약했다. 특히 고경명은 유팽로와 함께 담양에서 회맹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7월 9일 금산에서 일본군과 격전 도중 장렬하게 전사했다.
충청도의 조헌(趙憲)은 10여 명의 유생들과 합의하여 공주·청주 간을 왕래하며 의병(義兵)을 모집, 옥천에서 기병했다. 이들은 차령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온양·정산·홍주·회덕 등에서 병력을 보충한 다음 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 500여 명과 합동하여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금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8월 19일 700명 전원이 전사했다
이 중에서, 왜적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어 전의를 꺾은 것이 낙동강(洛東江)을 중심으로 한 의병의 분전(奮戰)이었다. 특히 현풍 유생 곽재우(郭再祐)는 사재를 털어 의령에서 기병하여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의령·삼가·합천·창녕 등을 수복하는 등 경상우도를 보호하여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곽재우는 의령의 ‘정암나루전투’를 시작으로 창녕 ‘기음감전투’, ‘화왕산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적의 예봉을 꺾었다. 그리고 합천의 정인홍, 고령의 김면, 손인갑 등은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왜적을 격파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김해 주둔의 왜군이 전라도와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주(晉州)를 점령하기 위해 3만 명의 병력으로 공격해왔을 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판관 성수경, 이광악(李光岳)의 지휘 하에 수성군 8,600명과 곽재우·최경회(崔慶會)·이달(李達) 등 의병장들이 성 밖에서 호응하는 6일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전사했지만, 적을 격퇴시킴으로써 전라도를 점령하여 곡창을 노리는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았다. 특히 초유사 학봉 김성일은 판관 김시민을 진주목사로 임명하고 곽재우 등 의병진을 규합하여 군-관-민이 하나가 되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전투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학봉 김성일의 지원을 받은 의병들이 낙동강 전투와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고 남해의 이순신 장군의 연이은 승전으로 일본군을 좌절시켰다. 의병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지만 낙동강 의병의 경우 영천과 문경의 의병을 소개한다.
* [금호강 상류, 영천의 의병]
왜적이 유린하는 지방 곳곳에서 의병(疑兵)이 일어나 대를 조직하여 왜적에게 타격을 주거나 향토방위에 나섰다. 조선의 관군이 패퇴한 내륙에서는 각계각층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저항하고 실제로 전과를 거두었다. 대체적으로 지방 유림들이 의병 활동을 주도했다. 예컨대 금호강의 상류 영천(永川)에도 의병이 활약했다. 그 의병 활동을 기념하여 세운 「壬亂義兵漢川戰勝捷塔」(임란의병 한천전 승첩탑)에 조선 의병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의(義)가 승리할 때, 역사는 치(治)하고 그렇지 못하면 난(亂)이다. 이 민족사에는 일찍이 국난(國難)을 이겨 나온 위대한 승리의 원동력이 있었으니 바로 의병(義兵)이란 청청한 그 정기(精氣)가 그렇다. 병(兵)은 일시 패할지라도 의(義)는 결코 불패하는 법, 이로써 우리의 군자국에는 이처럼 인자(仁者)의 수(壽)가 반만년의 긴 불사조였다.”
* [낙동강 문경의 의병]
낙동강의 지천인 금천(錦川)의 문경 산양에서도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이 지역의 선비 권의중(權義中), 고상증(高尙曾)·고상안(高尙顔) 형제 등이 주도하여 문경의병이 창의하여, 문경, 함창지역에서 끈질기게 활동하였다. 늘 기습적인 공격으로 왜적을 처단하였다. 나아가서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장군과도 회맹(會盟)하고 창녕 화왕산전투에서 참가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17년 5월 22일 영강(穎江) ‘솔숲공원’에 「壬亂聞慶義兵紀念碑」(임란문경의병기념비)가 제막되었다.
▶ 갑작스런 왜적의 침입으로 처참하게 짓밟히고 피폐해진 조선 땅. 왕은 도망치고 조정 대신들은 입으로만 싸워대고 있었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서 조선의 백성은 자기의 가족과 땅을 지키려 목숨을 걸었다. 그것이 바로 의병(義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남아 있는 영웅의 이름만이 아닌 이름도 없이 맨손으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낙동강이 품은 우리 선조들의 뜨거운 역사를 생각한다.
6·25전쟁,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洛東江)
동족상잔의 처참한 6·25 전쟁 —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기습적인 불법남침으로 시작되었다. 개전 3일 후에 서울이 함락되고, 이후 북한군의 막강한 공세에 밀려 전 전선에 걸쳐 후퇴를 거듭하며 수원—천안—대전을 차례로 북한 공산군에게 내어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7월 말 낙동강을 건너 전열(戰列)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사이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했다. 결국 낙동강(洛東江)은 나라의 존망(存亡)을 좌우하는 최후의 방어선이 되었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턱 밑에 있는 대구는 물론 부산이 위험하게 되고 대한민국은 공산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낙동강은 처절한 전투의 현장이 되었다.
8월 1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왜관에서 마산과 진해로 이어지는 낙동강 서부방어선은 미군이, 왜관에서 동해안 영덕을 잇는 동부전선은 국군이 사수하도록 했다. 이른바 ‘워커라인’이다.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 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다. 왜관에서 창녕—진해로 이어지는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미군(美軍)이 담당하고, 유학산-다부동-영천-포항으로 이어지는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 제1사단을 비롯한 국군이 담당하였다. 미 제1기갑사단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왜관, 현풍 일대에 이르는 방어를 담당하여 낙동강 강변에 제5, 제8, 제7기병 순으로 병행배치하고 있었다. 창녕 박진일대에는 미군 제25사단이 포진했다.
전쟁 발발 1개월 반 만인 8월 초, 북한군은 목포 진주 김천 포항을 함락시켰고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전선사령부가 있는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이 오기 전에 끝내라.”, “8월은 승리의 달이다.”라고 전투지령을 내렸다. 전쟁 발발 35일 만에 미 24사단이 상주에서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하였으므로, 이곳 낙동강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남한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은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북한군 13개 사단의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워커장군은 이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했다.
낙동강(洛東江) 왜관전투
8월 3일에는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 위의 모든 다리가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낙동강전투는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했던 전투가 8월 16일에 있었다. 이날 왜관 건너편 낙동강 대안 일대에 북한군 4만 명이 집결, 대규모 도하(渡河) 작전을 감행하여 왜관이 곧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주한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일본의 UN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폭격을 요청했다. 일본에서 이륙한 B-29 폭격기 98대가 불과 26분 동안 왜관 서북방 67㎢의 지역에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이날 퍼부은 폭탄은 960t. 낙동강을 건너려고 한데 모여 있던 북한군 4만 명 가운데 적어도 3만 명이 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른바 ‘융단폭격’이었다.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은 6.25 전쟁 당시, UN지상군총사령관 겸 초대 주한 미8군 사령관이다. 낙동강 전선을 성공적으로 사수해 인천 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한 장군이다. 워커 대장은 6.25 전쟁 발발 직후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북한군을 낙동강 방어선에서 막아내면서 부하들에게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낙동강 금무봉(錦舞峰) 전투
금무봉(268고지) 일대의 낙동강 지역은 미 1기병사단 7연대 장병들이 낙동강을 건너 4번 도로를 따라 대구방면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군 3사단 주력부대를 상대로 하여 용감히 싸워 적군을 격퇴한 전투의 현장이다.
1950년 8월 9일 북한군 3사단(김영호 소장) 예하 2개 연대가 야음(夜陰, 3:00)을 틈타, 왜관교 남쪽 3㎞ 지점, 성주의 노촌에서 총을 머리에 받쳐 들고 낙동강 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미 1기병사단 5연대는 도하 중인 북한군을 집중 포격하였다. 적의 부대는 거의 궤멸되었으나 도하(渡河)에 성공한 북한군 1개 대대가 금무봉(錦舞峰)을 선점하고, 아군의 후방 지휘소와 주병참선인 4번 도로와 경부선 철도에 포격을 가해 왔다. 금무봉은 부산-서울-신의주를 거쳐서 만주에 이르는 경부선 복선 철도가 이 산의 북쪽 기슭을 지나고 있고, 그리고 아군의 주 보급로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고지였다.
이에 8월 10일, 미 7기병연대 1대대와 전차 1개 소대가 금무봉(錦舞峰)을 점령한 북한군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적 4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금무봉 정상을 탈환했다. ... 그리하여 미군은 왜관을 거쳐 대구방면으로 진격하려는 적의 기도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북한군을 낙동강 전선에 고착(固着)시킴으로써 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였으며, 우리 국군과 유엔군 등 아군이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고 반격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다부동(多富洞)전투
낙동강 전선에서 쌍방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또 하나의 전장(戰場)이 다부동(多富洞)이다. 조선시대에는 다부원(多富院)으로 불리며 역참(驛站)이 있었던 이 작은 한촌(寒村)이 동족이 서로를 살상하는 전쟁의 고비에서 피로 얼룩진 전장이 된 것은 그 지형적인 특징 때문이었다.
다부동 마을의 서북쪽에 유학산(839m)이, 동쪽으로는 가산(902m)이 솟아 국군으로서는 방어에 유리한 지점이었다. 반면 이 지역이 돌파될 경우에는 10㎞ 남쪽의 도덕산(660m) 일대까지 철수해야 하고, 그럴 경우 대구시가 인민군 지상 포화(砲火)의 사정권 안에 들게 되므로, 다부동 일대는 대구 방어의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여기에서 북한군 3개 사단과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 1개 사단은 창과 방패가 되어 1950년 8월 초부터 달포가 넘도록 피로 점철된 전투를 전개했던 것이다.
8월 18일 가산에 침투한 적(敵)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는 등 대구일대가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 후 미 제1기병사단 정면의 적(敵)은 낙동강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고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었고, 국군 제6사단 지역에서도 유엔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함으로써 적의 대구 공격은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전선에 집중되었다.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제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다. 마침내 8월 20일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제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고, 이로써 8월의 다부동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2개월여 동안 대한민국의 사활을 건 낙동강방어선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 할 만큼 치열했던 전투였다. 낙동강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승리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다.
당시 윌턴 해리스 워커 장군은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에게 “다부동에서 패하여 전선이 후방으로 밀리면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배수의 진을 쳤다.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이곳 전투에서 국군이 밀리자,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백선엽 장군은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며 패퇴 직전인 아군에게 “우리가 밀리면 미군들도 철수한다. 내가 앞장선다!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고 말하며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뛰어올라갔고 용감한 국군병사들이 이를 따랐다. 그리하여 극적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 다부동 전투 승리 덕분에 국군은 낙동강에 전열을 다시 재정비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낙동강 전선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낸 생명선(生命線)이었다.
낙동강 창녕 박진전투
창녕 남지의 낙동강은 6·25전쟁 당시 치열(熾熱)한 전선(戰線)이었다. 이른바 북한의 인민군 정예부대와 격전을 벌인 ‘박진전투’의 현장이다. 특히 낙동강을 따라 창녕 이방면, 유어면에 이어 남지읍에 이르는 낙동강에 대구와 부산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인민군과 싸운 곳이다. 강 건너 지역(의령)은 북한 인민군 4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적은 낙동강을 도강(渡江)하여 호시탐탐 침공을 노리고 있고, 이곳 남지의 박진교와 마분산 영아지고개 그리고 남지읍에 이르는 전선은 미군 24사단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개전 이래 40여일이 경과한 8월초에는 마침내 낙동강을 앞에 두고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에 더 물러설 곳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왜관-영천-영덕 등 동서를 잇는 전선은 국군이, 왜관-현풍-창녕-진동을 잇는 낙동강 전선은 유엔군이 방어하게 되었다. 창녕 박진지역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낙동강을 도하하기 위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는 북한 공산군과 미군(미 24사단―25사단)이 2주간 사투를 벌였던 격전지이다. 당시 북한의 최정예부대인 제4사단이 8월 5일 야간에 이목나루터를 이용, 기습 침투함으로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8월 11일에는 영산면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공산군은 일거에 부산을 함락시키기 위해 박진나루터에 가마니 등으로 수중교를 만들어 각종 차량과 병력 등 주력을 투입시킴으로써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유엔군(미 24단)은 대구, 마산 등지에 있던 전 예비 병력을 이곳으로 집중시켜, 8월 19일에서 9월 15일까지 시남리, 대봉리, 성사리에서 국운이 걸린 대 혈전이 벌였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혈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끝까지 이 진지를 사수(死守)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어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6·25 참전 학도병들의 활약과 희생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책 대신 총을 들고 참전한 학생들을 학도의용군(학도병)이다. 이들은 계급과 군번도 없이 각 부대에 편입되어 전투 및 지원 임무를 맡았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기본적인 소총 사격술과 수류탄 투척 요령만 배운 뒤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어 낙동강 방어선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였다. 1951년 2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의 학교복귀령에 따라 해산될 때까지 27,000여 명의 학도병이 참전하였고, 그 중 7,000여 명이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6.25전쟁에서 전투에 참여한 어린 학도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학도병은 1950년 북한 공산군의 침략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 대한민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각급 학교 재학하는 14~20세 학생들이 현역병으로 치열한 전선에서 투입되었다. 이들은 훗날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 국토의 90%가 점령당한 대한민국의 운명을 판가름한 전투가 낙동강전선이었다. 특히 학도병은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기계·안강전투, 포항전투 등등 전 전선에 투입되어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적을, 목숨을 다하여 지켜냄으로써 낙동강 교두보 구축하는데 활약하였고, 그 전투 중에 수많은 학도병이 죽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낙동강 전선을 지켜냄으로써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할 수 있었고, 전세를 반전(反轉)시키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낙동강전선이었다. 낙동강전선에서 유엔군이나 국군의 활약은 한국전쟁사의 빛나는 수훈이다. 그 가운데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고 전선에 투입된 어린 학도병들은 오직 뜨거운 정신으로 전투에 임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학도병도 있지만 수천 명의 꽃다운 소년들이 희생되었다. 어린 학도병들은 역사의 처참한 조난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순결한 호국영령이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적으로 학도병의 참전과 그들의 희생에 대해 어떻게 예우하고 있는가? 작금 그들의 희생을 제대로 기리고 예우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는 북을 추종하는 정권이다. 유엔군의 참전과 국군의 활약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정권에게는, 학도병들의 희생을 기리고 추모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에게 모독이고 국가적 배신이며, 살아 있는 역사에 대한 정치적 폭력이다.
▶ 낙동강은 구국(救國)의 강이다. 임진왜란 중에는 왜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관군을 대신하여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의병(義兵)들이 결연히 일어나 왜적과 맞서 싸웠고, 6·25전쟁에서는 학도병(學徒兵)들이 치열한 낙동강전투에 투입되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정식 군인이 아닌 ‘의병’과 ‘학도병’은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의 순수한 호국정신을 잠시 잊지 말고 두고두고 기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을 부정하는 정권에 의해 자중지란(自中之亂)을 겪고 있다. 전쟁이 아닌 데도 국가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마음이 아프고 부끄럽다!
'낙동강의 태극기', 하나 된 나라를 위하여
지난 8월 3일 태백에서 하늘에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낙동강 종주를 시작할 때 나는 배낭에 태극기(太極旗)를 꽂았다. 작금 대한민국이 위기(危機)에 처해 있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태극기는 무한한 생명창조의 원리를 담고 있는 철학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선량한 마음이 음양의 상생 조화를 통하여 세워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표상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렇게 건국된 대한민국을 UN총회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를 근간으로 탄생한 나라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태극기(太極旗)는 대한민국의 그 국가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태극기(太極旗)는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독립의 염원을 담은 불굴(不屈)의 정신이고, 그리고 6·25 전쟁을 통하여 피로써 지켜낸 뜨겁고 순결(純潔)한 우리의 표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떤가? 지난 2017년 5월에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에 건국한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否定)한다. 철저하게 종북 좌파(주사파) 사상을 가진 문재인 정권은 대한민국의 정통성(正統性)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歪曲)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비롯된 6·25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라 하고, 미국은 한반도를 분단시킨 원흉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정권은 끊임없이 분열의 정치를 자행하면서 국정을 농단하고,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 잘못된 부동산정책, 소득주도경제정책, 특별한(?) 노동정책 등으로 기업과 서민경제의 기반이 흔들리고 국방·외교에서는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면서 굴욕적인 종북(從北) 노선을 추구한다. 갖가지 권력형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고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폐하고 왜곡한다. 그래서 국민은 분열되어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라의 정체성(正體性)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 ‘낙동강의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자존(自存)과 국가적 안녕(安寧)과 국민적 화합(和合)을 염원하는, 간절한 깃발이다. ― 낙동강은 모든 지천의 물을 강심에 품고 하나가 되어 흐른다. 그리하여 그 유역의 모든 생명(生命)을 살린다. 태극기의 정신도 그 ‘하나 됨’에 있다.
생명의 근원인 강과 자연, 위기에 처한 지구
나는 낙동강 종주를 통하여 ‘자연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은 결국 ‘하늘과 인간이 하나’라는 말이다. 생명의 차원으로 볼 때 모든 생명은 하나의 하늘, 하나의 자연이다. 하나의 생명은 모두 하나의 우주이다. 낙동강 물길은 멀고도 먼 고단한 노정이었지만, 발길이 닿는 곳마다 감동이요, 눈길이 가는 곳곳마다 경이로움이었다. 그러므로 멀고 먼 낙동강 종주는 스스로 즐기는 ‘고통의 축제’였고, 내 맑은 영혼이 누리는 ‘고독한 행복’이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가슴속에 충만해 오는 우리 국토에 대한 아픈 사랑이라고나 할까.
문명(文明)이란 우리 인간이 창조한, 고도로 다양화된 삶의 양식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慾望)이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특히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물질문명은 집요하게 물질을 개발하고 자연을 이용해 왔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물질적 문명생활이 윤택해질수록 자연(自然)은 속절없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은 모든 생명(生命)의 근원이다. 인간의 생명도 예외가 아니다. 자연이 훼손되면 인간 생명도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 그런데 작금 곳곳에서 그 자연(自然)이 신음(呻吟)하는 소리가 들린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길한 조짐이다. 무엇보다 개발 일변도의 경제정책이나 눈앞의 수익성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결과이다. 그리고 일상화된 풍요로운 생활이 배출하는 각종 쓰레기는 아주 심각한 지경이다. 쓰레기는 인간 욕망의 쓰레기요, 문명의 쓰레기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이 매일 쏟아내는 각종 생활쓰레기를 비롯하여, 산업폐기물, 폐수, 폐유, 탄소가스 배출 등등 어쩌면 현대인이 생활하고 움직이는 몸짓 하나하나가 모두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상에 쏟아내는 쓰레기의 양은 실로 엄청나다. 이 쓰레기들은 땅을 오염(汚染)시키고 강과 바다를 오염시키고 대기를 오염시키고 만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폐플라스틱 쓰레기가 지구의 바다를 죽이고 있다. 작금 인간의 문명 생활이 배출하는 온갖 쓰레기에 의해 지구의 온난화(溫暖化)가 급격하게 진행되어, 전 지구적으로 심각한 기상이변(氣象異變)이 속출하고 있다.
‘가이아의 이론’을 세운 제임스 러브록(1979)에 의하면 ‘가이아(Gia)란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물을 비롯해 토양, 바다, 대기권 등의 무생물계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다. 즉, 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기조절 시스템을 통해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는 범유기체이자 거대한 생명체(生命體)가 바로 지구(地球)라는 이론이다.’ 하나의 생명체인 지구는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지구는 이제 인간의 각종 폐기물을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아, 드디어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러브록의 의하면, 가이아 즉 생명체인 지구가 인간에게 반격(反擊)하기 시작했다고 경고했다.
사실 요즘 세계 곳곳에 벌어지고 있는 자연 재난(災難)을 생각하면 실감이 가는 말이다. 예컨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혹독한 가뭄과 홍수, 고온현상과 대형 산불 등이 그것이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는 자연의 생명성(生命性), 천지자연의 도(道)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 즉 지구가 병들면 인간도 생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심각한 것은, 물질문명의 발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신문화의 빈곤이다. 물신적 자본주의와 절제되지 않은 인간의 이기주의가 불러온, 인간성의 타락은 온갖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대량생산-대량소비의 경제구조와 무자비한 인간의 이기심이 우리의 삶을 병들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인간의 부조리는 모두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질문명[有爲]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상대적으로 자연의 순수한 가치[無爲]를 경시하기 일쑤다.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갖가지 이기적 행태와 파렴치, 위선과 오만 … 그리하여 세상은 탐욕이 빚어내는 온통 갈등의 전장이다
자연이 죽으면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지금 지구가 위기(危機)에 처해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물질적인 소비를 미덕으로 아는 인간의 생활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성서에 이르기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국가적으로 자연을 훼손하는 무분별한 개발이나 탄소배출을 줄이고 개인은 생활쓰레기를 대폭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정신문화를 고양시키고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절실한 때다.
특히 노자(老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말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은 자연의 순리[無爲]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사람이 사는 도리의 근원을 ‘하늘’[天命]이라 하고, 하늘은 인간의 마음의 근본[本性]‘이라 했다. 하늘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천지자연의 도(道)는 바로 하늘이요, 하늘은 곧 인간의 착한 본성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양심(良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친 욕심이 세상을 망친다. 그러므로 욕심 때문에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천벌(天罰)을 받는다. 그래서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데가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고도 했다. ― 생명의 낙동강이, 그 낙동강의 하늘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낙동강, 자기 성찰의 길
낙동강은 백두대간의 정기가 모여 솟아나는 청정한 샘물에서 발원한다. 그 청정수는 ‘인간의 본성’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청정수가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면서 수많은 지류를 한 가슴에 받아들이며, 갈수록 풍부한 강물이 되어 도도히 흐른다. 낙동강은 순례자에게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하고 있었다. 순례자는 그 물의 지혜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거리낌 없는 영혼의 바다를 향하여 걸었다. 그래서 낙동강 멀고 먼, 고난의 여정이 하나의 수행처(修行處)가 되었다.
조용히 흐르는 강물이 평범한 삶의 깨달음을 안겨준다. 삶이 시련(試鍊)을 주는 것은 깨닫게 하기 위함이고,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삶이 고난(苦難)을 주는 것은 단련하기 위함이며, 인생이 쉽지 않은 것은 겸손하게 하기 위함이다. 세월이 말없이 흐르는 것은 늘 새롭게 하기 위함이고, 인생이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인생은 매 순간 순간이 선물이니, 어려운 선물은 성찰(省察)이 되고 좋은 선물은 감사함이 된다.
칠십 생애를 살아도 아직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그 동안 겪어온 수많은 우여곡절의 삶을 생각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부끄러움’과 ‘실존의 고독’을 느끼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낙동강 물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영혼의 알몸’이 되어 많은 마음의 대화를 나누었다. ― 나는 만득자(晩得子) 외아들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늘 외롭게 살아왔다. 그래서 내 젊음은 격정적(激情的)이었다. 나를 키운 건 ‘외로움’이었다. 그야말로 고군분투(孤軍奮鬪), 나는 외로워서 공부를 했다. 나는 혼자서 많이 아팠다.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느낀다. 낙동강 물길을 조용히 걸으면서 줄곧 우리 가족의 면면을 떠올리며 감사하고 감사했다. 나이가 들면서 집안에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서, 해맑은 미소를 꽃피울 때면 더없는 축복을 받는 느낌이다.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다. 사사로운 가족애를 떠나, 우리 세상의 삶 또한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저 유장한 강물처럼 ‘마음이 하나 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 우리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는 ‘한마음 사랑’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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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의 글 ☆
낙동강 물길을 걸어오는 동안 유형무형의 성원과 격려를 보내준 모든 분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낙동강 1300리는 ‘내 두 발’이 걸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와 함께 마음의 동반자가 되어준 분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리하여 낙동강 물길은 조금도 지루하거나 외롭지가 않았다. 그렇게 걸을 수 있도록 온몸에 힘을 실어준 고마운 동반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낙동강 대장정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1300리 종주를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은 히말리스트 이상배 대장에게 우선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
… 봉화 청량산 노정에서 탈탈탈탈 경운기로 잠시나마 무거운 발품을 대신해준 진성 이봉원 님, 봉화 명호면 낙동강 별장에서 힘차게 격려해준 연한당 주인 임규철 님, 고단한 나그네에게 특별히 잠자리를 마련해준 청량산 ‘하늘정원’ 팬션 배선일 사장, 한 편의 시(詩)로써 청정한 물길의 의미를 깊게 해준 국제퇴계학연구회 회장 이광호 박사님, 그리고 따뜻한 격려와 함께 조언을 아끼지 않은 김경조 시인, 청량산—도산의 여정, 퇴계선생 종택에서 지치고 목마른 나그네에게 시원한 오미자차를 넉넉히 내어주고 자신의 저서『퇴계에게 묻는 삶의 철학』까지 선물해준 퇴계선생 차종손 이치억 박사, 안동—풍산 여정에 동반하면서 해주 오씨 선대(先代)의 묘소를 참배하도록 안내하고 풍산의 별서(別墅)에서 따뜻하게 숙식을 제공하고 우리 집안의 대소사와 안동문화권의 모든 것을 자상하게 설명해준 족손(族孫) 오정택과 착한 손부의 정성, 우리 해주 오씨 득봉 후손 풍산지파의 주손(冑孫)인 동국대 교수인 오승택 박사의 성원 — 모두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풍산의 족질 오부석, 옥산지파의 종제 오세학, 울산의 족질 오일석, 대우종합건설 상무를 지낸 종질 오광석 (주)오스템 본부장 등이 보내준 성원이 여간 든든하지 않았다.
낙동강의 하늘이 눈부시게 맑은 날, 하얀 쟁반에 싱그러운 청포도와 따뜻한 차(茶)까지 대접해준 예천 구담정사의 권 여사, 예천의 지보와 풍양, 동래정씨 세가(世家)의 내력을 자상하게 일러준 친구 정성수, 풍산—삼강나룻길 어둠 속에서 지친 나그네를 마중하여 따뜻한 식사와 감동적인 격려를 아끼지 않은 고향 친구 한학수와 이경임(전 경북도의회 의원) 내외분, 낙동강 종주의 여정을 성원하며 삼강나루까지 나와 마음의 선물을 전해준 고윤환 문경시장, 그리고 삼강-상주보 긴 여정에서 우정 마중 나온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주인 만촌 안휘덕-유미순 내외분 등 —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을 올린다.
낙동강 달성의 하빈 마을에서 만난 박팽년 선생의 후손 삼가헌 박종규 님, 묘동의 도곡재 주인 박종혁 님, 육신사 경내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숭정사의 문을 열어 ‘삼가’ 참배하도록 배려해준 문화해설사 백현주 님, 대구의 강정-고령보에서 긴 여정에 지친 나그네를, ‘낙동강을 사랑하는 지킴이’들을 동반하여 대대적으로 환영을 해준 ‘낙동강의 대부’ 대구대 오세창 박사,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해준 금별 단장, 김학연 총무를 비롯한 김진희, 박나경, 남재안, 홍성자, 김상육 님 등 낙동강포럼 회원분들에게도 깊이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강정보-달성보의 긴 여정, 힘들게 달성보에 도착한 고단한 친구를 위하여 멀리 여수에서 차를 몰고 달려온 친구 유응하, 같은 대구지만 멀리 떨어진 동대구 효목동에서 차를 몰고 달성보까지 찾아온 고향 친구 정복순, 현풍테크노폴리스에서 함께 식사하며 따뜻한 성원을 보내준 두 친구의 우정은, 감동이었다.
그리고 현풍-합천보의 여정에서 서울에서 합천보까지 차를 몰고 달려와 지친 나그네를 맞아서 합천의 ‘고향집’에서 함께 어울려 힘을 실어주고, 이어서 의령-창녕-남지-밀양-삼랑진-양산까지 카니발과 미니벨로를 번갈아 타며, 1박 2일을 동행한 이상배 대장과 기원섭을 비롯한 이진애, 김옥련 등 낙동강 동지들의 우정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리고 창녕의 ‘박진전투기념관’과 ‘승전기념탑’ 등 전투의 현장, 이어서 영아지고개, 남지 개비리길 입구까지 승용차로 안내해준 창녕의 숙항(叔行) 오두환 님, 그리고 따끈한 소고기국밥과 맹개떡으로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주신 의령의 숙항 오병환 님, 그리고 그리운 누님이 사셨던 양산을 지날 때 격려를 보내준 생질 이석 사장 등 —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낙동강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 전화로, 카톡의 메시지로 격려를 아끼지 않은 분들이 많았다. 죽파 조명규, 일송 손상오를 비롯한 ‘동지회’ 친구들, 인산 김창인 그레고리오, 한국화가 삼강 임무상 화백의 격려, 청도에 「운문사 가는 길」 시비로 서 있는 시인 유재영의 성원, 히말라야 드락마르포리 초등(初登)을 촬영한 전 KBS 이형종 감독, 뮤자컬 연출가이자 아시안게임 개막식을 연출한 박주현 감독, 생명의 꽃에 포커스를 맞추는 사진작가 고흥곤, 동양철학 아카데미 동인문화원의 나대용 박사를 비롯한, 최동춘, 허선례, 조인선 님들, 그리고 김영길, 장복옥 등 산양 금천의 ‘죽마고우’들, 울산의 친구 태영인더스트리 변대수 사장, 문경의 양재동 교장, 문경의 향토사학자 조시원 선생, 산양의 이상경 님, 그리고 늘 그리운 친구 하두진, 영강의 벗 박노대, 김학노, 박재호, 손문숙, 삼영전자 김대호 사장, G&G 신관철 사장, 김종식 사진작가, 부산 다대포의 김성종 등 ‘재경일사회’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중원 이기태 총경을 비롯한 늘 푸른 ‘청랑회(靑浪會)’ 선·후배님, 임란 문경의병의 실체를 밝히고 기념비를 세우는데 앞장선 고려기계 고만진 사장,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중 이정일 청권사 이사장, 녹산 정휘복 회장, 문산회 정용호 회장, 채홍철 총무, 노연옥 5회 회장을 비롯하여, 경희대 정연모 교수, 신한대 김정호 교수, 한국문인협회 부회장인 권갑하 시인, 이정식 사무국장, 백두대간 종주의 곽덕용 등 ‘재경문고동문회’의 선·후배님들, 독도사랑 천길주 사장, 현대정밀 김천식 사장 등 경향의 출향 인사(人士)들, 그리고 대전의 생질 신용석 사장, 진주의 생질 신정숙 박사, 시화의 시인 박소담의 장미꽃 마음, 장호원 송산리의 오선철 댁 제수씨, 자전거로 북한강 소양강—광명 간을 종주한 산뚯한 바이커 황인갑, 대구의 친구 신승호, 삼진플라스틱 김남철 사장, 진보 송진규 사장 —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2020년 북한산 심곡사 「21일 동굴학교」 도반 한명구 교수와 부산 영신대 송봉구 교수, 아침이슬 그리고 햇비의 정종용 교수, 영주의 유서 깊은 인동 장씨 연복군 종택을 지키는 미헌 장덕필 선생과 종가 화계정사 탐방을 안내한 장기덕 문우, 늘 학문의 의기가 살아있는 최명환 공주교대 명예교수, 청야 이상철 전 교장, 그리고 산죽 이정인, 김준섭, 김의락, 민창우, 강완식, 류경, 한영옥, 박은배, 권순식 등 새재사랑산악회 산우들, 정천도 회장, 김두섭, 오인영, 신일섭, 신용호 등 신기산우회 산우들, 그리고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의 하담 윤여형 형님을 비롯한 서울의 일지(一志) 형제들, 그리고 의제(義弟) 조석현을 비롯한 성신사계(星新四季) 대신고 아우님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 (종주를 마친 일주일 후, 11월 19일 서울 서대문에서 조석현, 이경일, 박철응, 김용태, 강형수, 신종태 등 성신사계 아우들이 축하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그 자리에서 향기로운 축하란(祝賀蘭)까지 안겨준 경원기계(주) 신종태 상무의 마음을 잊을 수 없다.) ♣
첫댓글 외로움과 아픔 이겨내며 이룩하신 웅장한 여정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