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남규 선생의 수업 이야기 ‘조선의 당파가 나뉘어지는 이유’를 두번에 나누어 싣는다. 앞 부분에는 조선의 당파가 갈라지고 합쳐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중심이고 두번째 글에서는 그것과 조선 이후의 현실과 함의에 대해 다룬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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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붕당정치에 대하여 정리해보기로 합시다. 붕당정치는 좋은 표현이고, 나쁜 의미로는 당파싸움을 했다고들 하지요.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사색당파라고도 부릅니다. 네가지 색깔로 나뉘어졌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훨씬 더 많이 나뉘어졌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붕당정치의 장단점을 이야기합니다. 장점은 여론을 중시하고, 상대방에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하여 건전한 정치를 했다고 합니다. 단점으로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아서 한쪽이 잡으면 다른 쪽에 보복하는 정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논쟁으로 예송논쟁을 듭니다. 효종은 둘째아들인데, 세자였던 형(소현세자)이 죽고나서 왕이 되었습니다. 이 효종이 죽었을 때, 가족 질서 그대로 둘째 아들 대우를 하느냐? 아니면 그래도 왕이었으니까 큰 아들 대우를 하느냐?를 가지고 싸운 이야기입니다. 서인은 둘째아들이 맞다, 남인은 큰 아들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한 번은 서인이 이기고 두 번째는 남인이 이겼습니다.
또 성리학이 발달하여, 율곡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고, 퇴계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고, 송나라의 성리학이 조선에 와서 더욱 깊어지고 심오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숙종은 한번은 이 쪽 편을 들어주고, 그 쪽이 너무 힘이 쎄지면 다음에는 다른 쪽 편을 들어주고 하면서 왕권을 유지하였다고 하고,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조, 헌종, 철종 때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번갈아가며 외척세력이 되어 조선을 완전히 말아먹었다고 합니다.
이상이 대략 교과서에서 늘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러면 도대체 줄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엄청 발달했다. 이이의 제자는 서인이 되고, 이황의 제자는 동인이 되었다. 붕당이 만들어지면서 초기에는 장점이 많았는데, 점차 단점이 많아졌다. 영조와 정조는 이를 막기 위하여 탕평책을 썼는데, 정조 사후에는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이렇게 되겠군요.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요? 이게 우리 역사라고? 도대체 무슨 인과관계도 없고 발전도 아니고 후퇴도 아니고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잘됐다가 안됐다가 다시 잘될라다가 망해버렸다… 교훈이라도 있는 건지, 원…
이제 하나씩 검토해 봅시다
사림이 네차례 사화(士禍) 끝에 권력을 잡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다
동인과 서인이 나뉜 이유는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심의겸과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이조(吏曹)라는 부서가 관리들의 임명과 해임과 승진과 좌천을 다루는 인사이동 담당하는 부서인데, 이조의 전랑이라는 직책이 그 초안을 만드는 자리입니다. 초안이 만들어지면 특별한 승진 이유나 결격 사유가 없는 한 그대로 유지될 것이니, 이 초안을 짜는 이조전랑 자리가 요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조전랑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들 달려들게 생겼는데, 결정적으로 이조전랑 자리만은 자천(自薦)하는 제도, 즉 전임자가 후임자를 사실상 결정하는 제도였으니, 이조전랑을 한번 한쪽이 차지하면 그 쪽 당파가 계속 차지하게 생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렇게 나뉘게 된 타이밍입니다. 이때가 선조 임기 중반쯤인데, 이때는 사림이 네 차례의 사화를 당하면서도 그 때마다 다시 세력을 확대하여, 결국 훈구파를 몰아내고 최종적으로 권력을 다 잡은 때였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림의 입장에서 더 이상 싸워야 할 적이 없어지자 사림이 분열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조전랑의 자천제도도 사림이 훈구파와 싸우면서, 훈구파가 인사를 둘러싸고 비리를 저지르니 이를 막고자, 훈구파에 비하여 맑고 깨끗했던 사림파가 자신들이 인사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자천하도록 하였을 겁니다.
훈구파가 장악하고 있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나 심지어 직속 상관인 이조판서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이조전랑직은 자천하도록 하였는데, 그 외압이 없어지자, 이제 이 이조전랑직이 권력기관이 되었고, 이를 둘러싸고 사림파 내에서 자기들끼리 분열이 생긴 것이지요. 권력을 쥐고서 타락했던 훈구파를 비판하던 사림이 막상 자기들이 권력을 잡게되니, 자기들 역시 권력을 서로 잡기 위하여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서인을 누르고 정권을 잡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다
남인과 북인이 나뉘어지는 계기를 살펴보기로 할까요? 서인과 동인은 엎치락 뒤치락 권력을 서로 잡았다 놓쳤다 합니다. 이이가 살아있는 동안은 서인이 약간 우세하며 갈등하다가, 이이가 죽고나자 동인이 압도하고,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거치면서 동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합니다. 그리고 다시 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싼 ‘건저의(建儲議)’ 사건으로 동인이 집권을 하고 이게 약 30년간 지속됩니다.
동인이 집권을 하자마자, 반대편인 서인의 정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두고서, 강경하게 정철을 사형시켜야한다는 입장(이산해)이 북인이 되고, 유배로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론(우성전)이 남인이 됩니다.
물론 남인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많고, 북인은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문적 입장에 따라 나뉘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달랐습니다.
결국 학문적 입장은 겉치레 뿐이고, 사실은 오로지 권력을 둘러싸고 친하냐 친하지 않느냐 만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같은 스승 밑의 제자라는 점은 그 스승의 사상을 따르고 지키고 발전시킨다는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었고, 단지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워서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밀고 끌어주는 인맥의 기반이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대북은 골북과 육북과 중북으로 나뉘다
남인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북인이 권력을 잡자, 이 북인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뉘어집니다. 대북과 소북이 나뉘어진 계기까지는 저도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나이든 세력이 대북이고, 젊은 세력이 소북입니다. 소북이 약해지자 대북이 나뉘어져 이산해가 이끄는 육북(肉北)과 홍여순이 이끄는 골북(骨北)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광해군 대에 또 나뉘어져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은 인목대비 폐위를 주장하고 , 중북(中北)은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합니다.
북인은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조식 선생의 사상을 제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의리에 투철한 건 기본이고 실천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선 홍의장군 곽재우며, 정인홍이며 유명한 의병장들이 북인 출신입니다. 또 현실적이어서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국가 조세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대동법 실시에 적극적이었고, 광해군 때 청과 명 사이에서 줄타기 중립외교를 한 것도 이러한 현실인식에 투철한 면이 있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물론 광해군 당시의 양다리 외교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임진왜란 때 열심히 싸운 거며, 대동법 실시한 것들을 보면 북인이 참 괜찮았다 싶습니다. 그런데도 권력을 잡으면 또 저렇게 대북과 소북과 중북이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 아— 저게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과 남인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다
인조반정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성공한 쿠데타였습니다. 광해군이 명과의 의리를 버리고 양다리외교를 했다,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였다, 임금감이 안된다고 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사례입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왕은 인조이지만, 실세는 서인과 남인의 연합 세력이었습니다.
인조가 왕위에 올라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이괄의 난은 복잡한 내막이 있지만 결국은 권력을 잡은 서인과 남인이 누가 더 공을 세웠나를 내세우며 더 많은 권력을 잡기 위한 다툼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서로 상대방이 북인이나 광해군과 연결되어 있다고 뒤집어 씌우며 서로를 탄핵하고 자리 다툼을 하였습니다.
남인에 비하여 제1당처럼 많은 권력을 잡았던 서인은 청서와 공서, 노서와 소서, 원당과 낙당 등으로 나뉘다가, 산당과 한당으로 크게 나뉘어집니다. 이게 인조, 효종 당시의 일입니다.
예송논쟁 ; 서인과 남인이 학문논쟁을 하다가 권력싸움을 하다
그리고 현종이 즉위하자 서인과 남인 간에 예송논쟁이 벌어져 1차에서는 서인이 이기고, 2차에서는 남인이 이깁니다. 둘째 아들인데 왕이 된 효종이 죽었을 때, 이 효종을 왕이기 때문에 맏아들 대우를 하여 3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게 남인의 주장이었고, 아무리 왕이었어도 집안에서 둘째이면 둘째로 대우하여 1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게 서인의 주장이었습니다. 이걸 가지고 온갖 공자님 맹자님 말씀을 갖다 증거로 들이대고, 이런 저런 해석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사례들을 갖다 대며 논쟁을 하였습니다.
이런 논쟁을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 교수들이 서로 논문을 쓰면서 하면, 학계에 저런 의견 차이가 있구나— 하고 말텐데, 이걸 권력 투쟁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1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이겼을 때, 남인이 대거 쫓겨났고,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이기자 서인을 대거 쫓아냈습니다. 이제 감정이 악화될대로 악화됩니다.
이거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여러분 어릴 적 싸우는 거랑 비슷합니다.
A : “니가 먼저 때렸잖아?”
B : “아니, 니가 먼저 나한테 욕했잖아?”
A : “그건 니가 나한테 화내서 그런거야.”
B : “너는 지난 번에도 그랬어.”
이제 옛날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그러다가 상처 받는 말이 나오지요.
A : “그 땐 장난으로 그런거야.”
B : “장난이 아니라 일부러 그런 거였어.”
A : “너, 나 의심하는거야?”
B : “내가 너 의심 안하게 생겼어? 왜? 찔리냐? 내가 틀린 말했어?”
A : “뭐라고?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왜 이러는 걸까요? 서로 서운한 감정이 풀리지 않고 쌓여왔기 때문입니다. 서운한 감정은 왜 생겼을까요? 이해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쪽이 이익을 보았을 때,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치권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정치권도 다르지 않습니다. A쪽이 대통령을 하면서 그 이전 장관 중에 유능한 사람이 있지만, 재정기획부나 국토건설부나 외교통상부나 요직이라고 생각되는 자리에는 좀 무능하더라도 자기 사람 심복을 임명합니다. B쪽에서는 수군수군 욕을 하지요. 하지만 그저 그런 장관 자리에는 옛날 사람도 유능하기만 하면 그대로 둡니다.
다음에 B쪽에서 대통령이 되면, 모든 장관을 다 자기 사람으로 임명합니다. A쪽은 엄청 열받지요. 자기들은 요직은 자기 사람을 썼지만, 요직 아닌 자리는 그래도 양보를 했다는 거지요.
다음에 다시 A쪽에서 대통령을 하게 되면 B쪽 장관들이 재직하고 있을 때 비리가 있었다고 검찰 조사를 합니다. B쪽에서는 난리나지요.
그 다음에 다시 B쪽에서 대통령을 하게 되면, A쪽 사람들이 다시는 공무원이 될 수도 없게 심한 재판 결과가 나옵니다.
이 쯤 되면 막가자는 상황이 됩니다. 이제 상대방이 하는 말과 행동은 모든 것이 자기를 욕하려고 의도적으로 하는 나쁜 일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권력과 중요 직책과 명예와 자연스레 돈이 따라 다니는 자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가지고, 은근히 한쪽 편을 들면서 거기서 자기도 이득을 보고 그러면서 같은 편이 되어가고, 그러면서 점차 편 가르기 규모가 커져갑니다.
경종 때 정권을 잡은 소론이 분열하다
숙종 때까지 대개 노론이 권력을 잡았는데, 경종 때 잠시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던 연잉군(경종의 배다른 동생. 후에 영조가 됨)을 경종의 후사로 정해야 한다고 하고, 그래서 연잉군이 세제(世弟)가 되자, 이번에는 이 세제가 경종 대신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세제의 대리 청정 주장은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로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노론의 4대신을 파직할 뿐만 아니라 거제, 남해, 진도 등에 유배를 보냅니다.
그러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4대신의 자식들이 경종을 시해할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사형 20명, 맞아 죽은 사람이 30명, 가족이라는 이유로 잡혀 죽은 자가 13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이 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걸 삼급수 고변이라고 하는데, 소론은 이 역모 사건을 정치적으로 충분히 이용하여, 노론의 목줄을 끊어놓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니 노론은 또 얼마나 소론에 대하여 이를 갈고 칼을 갈았겠습니까?
이 와중에 소론 내부에서 노론을 끝까지 씨를 말려야 한다는 급소(急少)와 너무 심하게 다루면 안된다는 완소(緩少)가 나뉘어지게 됩니다. 참 어이없지요? 소론은 솔직히 정권 잡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정말 조선은 그만두고 소론 자신을 위해서라도 잠시 정권 잡았다고 이렇게 분열되면 도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겠어요?
사도세자의 죽음과 벽파-시파
영조는 노론이 밀어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영조가 52년간 재위하고 정조가 24년간 재위하니, 둘의 재위 기간이 70년이 넘습니다. 이 둘이 탕평책을 제대로 했으면 나라가 좀 좋아졌을텐데,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잠시 덮어두는 정도 이상이 되지 못했으니, 당파의 원한과 뿌리가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허수아비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기 아들인 사도세자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을만큼 노론의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노론의 신하들이 왕이 자기 아들을 죽이도록 만들 정도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궁녀 하나하나부터 여론 조작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권력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노론의 상대는 이제 소론이나 남인이 아니라 왕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인 영조 자신은 아니었지만, 왕이 자기 아들을 스스로 죽이게끔 만들었으니, 노론이 영조와 싸워 한판 이겼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웃긴 것은 사도세자를 죽이고나서 노론이 분열하는 것입니다. 죽이기를 잘했다가 벽파(僻派)이고, 그건 너무 심했다가 시파(時派)입니다. 이 시파에는 노론의 일부와 소론, 남인이 합류하였다고 합니다.
영조는 이렇게 심한 일을 당하고도 52년간 왕을 하다보니, 이것들이 나를 가지고 놀아도 너무 가지고 노는구나— 하며 조금씩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말 미미하게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실상 영조의 탕평책은 그리 큰 실효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함부로 대놓고 당파싸움을 하지 못할 정도라고나 할까요? <계속>
조선의 당파 갈등과 그 교훈 ②
[조선생의 역사이야기] 붕당정치, 당파싸움...지금 얘기
정조의 개혁정치와 견제없는 세도정치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영조의 손자 정조는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을 키우고, 노론-벽파의 돈줄이 되는 시전상인의 특권(금난전권)을 폐지하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직속 신하들을 키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조 개혁정치의 마지막 카드가 수도를 화성(수원)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는데, 그 직전에 정조는 죽고 맙니다. 그래서 독살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많은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정조는 독살이 거의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조의 개혁 정치는 200년 넘게 이어온 노론의 집권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조 이후 순조, 헌종, 철종이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건, 왕인 본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노론의 수준이 그만큼 세련(?)되고 완전히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노론은 이제 굳이 왕을 견제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지요.
정조가 독살로 죽었건 정말 종기로 인해 죽었건, 정조의 죽음 이후 순조, 헌종, 철종의 3대에 걸쳐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번갈아 집권하면서 왕은 그야말로 허수아비가 되고 맙니다. 이제 권력은 서인, 동인, 남인, 북인 정도가 아니라, 노론, 소론도 아닌 일개 가문이 독점을 하게 됩니다.
조선은 당파싸움으로 망했다는 식민사관의 극복
일제시대에 일본이 정리한 조선사관은 식민사관이라고 불립니다. 제일 간단히 말하면 조선은 당파싸움하다가 망했다는 것이고, 좀 자세히 설명하면 조선은 발달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데 일본이 때리고 달래가며 가르쳐줘서 이만큼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처음에 말한 것처럼 붕당정치에는 장점도 있었고 단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장점과 단점을 아울러 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저는 이러한 우리의 입장이 좀 궁색하다는 느낌입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면서도 반성할 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설명은 이런 것입니다. 조선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권력이 분점되는 상호 견제가 시스템으로 갖추어져서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게 조선의 최대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성리학에 기반하여 구상한 정치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왕조시대의 어느 나라나 왕이 최고의 권력을 갖게 되지만, 조선은 경국대전에 ‘왕이 아니라’ “의정부가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조선 초기 배울 때 열심히 외웠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3사라고 불리며 왕권 견제의 기능을 하였다거나,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기록하여 조선왕조실록이 남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당시에는 왕권 견제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극에 보면 신하들이 “전하, 아니되옵니다. 신의 목을 베어주십시오.”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도 신하들과의 합의없이 왕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던 점을 보여줍니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입헌군주국 비슷한 형태를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신하들도 철저한 관료제에 따라 역할이 분담되어있었고, 신하들끼리도 권력이 집중되지 못하도록 감찰 기능이 발달하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감사원에 해당하는 기능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의 집중을 막고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있었기에, 일시적으로 외척이나 몇몇 그룹이 권력을 장악하지만, 오래 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반성해야 할 지점은?
반성해야 할 지점은 오히려 이러한 기능이 약화되거나 정지된 점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상설기구화한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신해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 기억나나요? 이 비변사를 장악한 서인-노론 세력이 조선의 후기 대부분의 권력을 쥐게 됩니다. 어찌보면 비변사 때문에 권력이 신하들에게 집중된 게 아니라, 반대로 권력이 신하들에게 집중된 결과가 비변사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입니다.
한편,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왕권보다는 신권이 강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왕 한명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이 집중될 경우, 왕이 못나거나 포악하면 그 왕 물러날 때까지는 백성들이 다 죽어날 것이니, 차라리 신권이 강한 것이 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최소한 신하들은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고, 한 명에게 집중되지 않고 서로 견제할 것이니 말입니다.
신하들이 반성해야 할 지점은 자신들에게 돌아온 권력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결국은 당파싸움으로 귀결된 것입니다. 특히, 사림에게 권력이 주어지자마자 동인과 서인이 나누어지고, 악순환으로 보복의 강도가 높아지고, 한쪽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거의 대부분 자신이 또 분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동인과 서인과 남인과 북인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각각 이론적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이황, 이이, 조식 등이 그들입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은 우리가 지금 이기일원론이네 이기이원론이네 하는 이론적 논쟁도 벌이고, 위에 말한 것처럼 예송논쟁도 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은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면서 성장 발전해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논쟁은 논쟁대로 있고, 이론은 이론대로 있고, 붕당은 붕당대로 있어서, 막상 현실에서는 상대방의 허점에 대한 비난에 몰두하기 일쑤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저는 아직 어느 붕당이나 개인도 반성하는 글 하나 보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부모님이 동시에 아팠던 그 많은 신하들 누구 하나도 반성문이 없었습니다. 병자호란 때 주화파나 주전파나 그 이후 어느 누구 하나 진심으로 반성하는 글을 쓰고, 반성하는 지점을 실천에 옮기는 양반 한 명을 보지 못했습니다. 노론은 북벌을 외치면서 끝내 실천하지 못하고서도 반성하기는커녕, 북벌을 위해 길렀던 군대를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습니다.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언행일치하는 지도자가 그리울 지경입니다.
자만하지 말자
지금 우리가 이러한 역사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권력을 잡았을 때, 분열하는 모습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개인으로 말한다면, 좀 잘 나갈 때 자만하지 말자라고나 할까요?
솔직히 자만하지 않기라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저는 바둑을 잘 못둡니다. 18급이 제일 아래인데, 17.5급이라고 하며 웃습니다. 잘 못 두니, 늘 눈 앞에 보이는 상대편을 잡으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오히려 내가 죽습니다. 가끔 제가 잡을 때도 있습니다. 이 때 말입니다. 제가 알아요, “아, 이럴 때 자만하면 안된다”라고요… 머리 속으로는 자만하지 말자, 방심하지 말자고 외우는데, 이미 입은 헤- 벌어지고 있고, 마음은 느슨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 내 것이 잡혀야지 정신을 번쩍 차립니다.
사실 가만 보면, 어느 사회나 모임이나 파벌이 나누어질 수 있고, 오히려 나누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른 나라는 다들 합심단결했는데 우리나라만 나누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그 나라를 그 모임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나누어집니다. 적극적이고 의욕적이고 근본까지 변화시키려는 쪽이 강경파이고 급소(急少)이고 청남(淸南)이고 골북(骨北)이고 벽파(僻派)입니다. 천천히 조금씩 그래서 변화가 이루어지는지 아닌지 모른다고 비판받는 쪽이 온건파이고 완소(緩少)이고 탁남(濁南)이고 육북(肉北)이고 시파(時派)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에서도 강경파인 산악파와 온건파인 지롱드파가 나뉘어졌고, 러시아혁명 때에도 강경파인 볼세비키와 온건파인 멘세비키가 나뉘어졌습니다. 영국도 대대로 휘그당과 토리당으로 나뉘어졌고 지금은 노동당과 보수당이 나뉘어져 정치를 이끌고 있습니다. 미국도 자유당과 민주당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나뉘어지는 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닙니다. 나뉘는 것은 오히려 필연입니다. 다만 한 쪽이 다른 쪽을 100% 배제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방법 – 미국과 중국의 사례
저는 지금은 기밀해제된 미국 국무부의 1953년 한국에 대한 비밀문서를 번역해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 국방부는 강경파이고 국무부는 온건파였습니다. 한국 문제에 대하여 국방부는 군사적 해결을 추구하였고, 국무부는 외교적 해결을 추구하였습니다. 국방부는 북진을 해서라도 공산주의 세력을 박멸해야 한다는 이승만 입장을 지지하는 한편, 국무부는 제3차 대전의 가능성이 있는 북진이나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는 안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한국전쟁(6․25 전쟁) 막바지인 당시 한국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합니다. 주도권은 국무부가 쥐었지만, 국무부의 온건론만이 대안은 아닙니다.
공통의 목표는 남한과 일본과 대만에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침을 보면, 일단은 휴전 협정을 맺어 현상유지를 하되(국무부 입장),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경우 즉시 반격할 준비를 갖추고(국방부 입장), 혹시 이승만이 북진을 하려고 할 경우 이승만 제거작전(Eveready Plan)을 가동하며, 휴전이 장기화되면 남한에 경제지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방침이 부서별로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 계획이 조금씩 바뀌면서 더 구체화되고 우선순위도 바뀌고 정교해진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바뀌고 정책 담당자가 바뀌어도 이 뱡식이 변하지 않습니다.
중국 혁명을 이끌었던 마오쩌뚱(毛澤東)을 충실히 보좌하였던 숨은 실세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그 거대한 중국의 온갖 이해집단을 이끌어내는 방법,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외교에서 항상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같은 것을 우선적으로 합의하여 실천하고, 서로 다른 것은 일단 그대로 두고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구동존이의 정신이 현실화되는 것이 불가능할까요?
‘무서운’ 국민이 권력 부패를 막는다
결국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고, 권력을 가진 집단의 문화나 시스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자체적으로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현대적 의미로 본다면, 아마 국민선출권, 국민소환권 같은 것일 겝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국민이 뽑는 건 잘 알고 있죠? 그리고 약 20년 전부터 구의원, 시의원, 구청장, 시장도 지방자치선거에서 뽑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국민의 목소리에, 시민의 목소리에, 구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학교, 영림중학교 교장 선생님 어때요? 맘에 들어요? 여러분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교장 선생님이라는 느낌 들어요? 영림중학교 교장 선생님은 서울에서 딱 두 학교만 내부형 교장공모제라는 제도에 의하여, 본인은 평교사였는데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투표하여 뽑은 교장 선생님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을 대통령이나 교과부장관이 임명하면, 그 교장 선생님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이나 교과부 장관의 말에 충실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을 학부모와 교사들이 선출하였다면, 그 교장선생님은 당연히 자신을 뽑아준 학부모와 교사들의 의견에 충실하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누구건 뽑힌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안하면, 임기 중에도 불러서 따질 수 있고, 심지어 물러나게까지 할 수 있는 제도가 국민소환제도입니다. 이건 거의 현실화되어있지 않은 상태인데요, 제도상으로 존재하고 가능합니다.
제 욕심만 같으면, 중요한 직책은 다, 국민이나 당사자들이 직접 선출하고, 일 잘못하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붕당이 권력만 잡으면 분열하고 지리멸렬하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겠나요? 한마디로 국민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좀 무서운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뽑을 때도 제대로 뽑고, 제대로 하는지 감시도 하고, 제대로 못하면 혼도 내주는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나라 잘 살게 하는 길이고, 우리 자신이 잘 살 수 있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