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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5년 신축년(1781) 12월 9일 대산선생大山先生 이공李公이 안동安東 소호리蘇湖里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남의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대산선생께서 복이 없는 것은 실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영남의 선비들은 서로 마주보고 곡哭하며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없으니 우리들은 앞으로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라고 하였으며, 조정의 사대부들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재주를 끝내 펼치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무엇으로 권면할까.”라고 하였다.
장례 지낼 때에 모인 사림士林들이 1,20여 명 정도 되었으며, 그들 중에 돌아가서 개인적으로 대산선생의 언행言行을 기술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선생을 따르는 것이 마치 70여 명의 제자들이 공자孔子를 따르는 듯하였으니61), 선생이 살아서는 오도吾道(유가儒家의 도)의 중대한 책임을 자임自任하셨으며, 돌아가셔서는 사문斯文(유학)의 운명에 관계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증험할 수 있다. 아! 성대하구나.
공은 영조英祖 을묘년(1735)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얼마 뒤에 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당시 25세였는데, 명망名望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60) 채제공(蔡濟恭, 1720~179):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이다. 1743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61) 마치 70여 명의 …… 듯 하였으니:「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에 따르면 공자(孔子) 말년(末年)에 따르는 제자들이 삼천여명이었는데 그 중에 직접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명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대산선생의 학문과 덕행(德行)에 감화되어 그대로 따랐음을 의미한다.
이보다 앞서 공은 어려서부터 외조부 밀암密庵 이재李栽 선생에게 배웠는데, 개탄스럽게 세속의 학문은 힘쓸 것이 못됨을 알았다. 그래서 벼슬에 나아가서는 영리榮利를 하찮게 여겼으며 이 학문에 몰두하였다. 몸은 마치 걸친 옷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약했지만 도道를 실천하는 용기勇氣는 맹분孟賁62)도 뺏을 수 없고, 말은 마치 입에서 나오지 못하는 듯하였지만 이치를 분석하는 정밀함은 실오라기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았다.
62) 맹분(孟賁):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역사(力士)의 이름이다. 일설에는 맹열(孟說)이라고도 한다. 물로 가면 교룡(蛟龍)을 피하지 아니하고, 뭍으로 가면 호랑이를 피하지 아니하고 노기(怒氣)가 나면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고 하였다.
차라리 성인聖人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잘한 일로 명성을 이루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향에서 30~40년 동안 하루도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글을 잃지 않은 적이 없고, 존양성찰存養省察의 공부를 한 순간도 그치지 않았다. 또한 일상의 인륜에 힘써서 문로門路가 분명하고 물망물조장勿忘勿助長에 마음을 두어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으며, 체體가 갖추어지고 용用이 갖추어져서 거처함이 편안하고 바탕이 깊어졌다.
만년晩年에 이르러 긍지矜持(굳세게만 바름을 지키다)하였던 것은 화순和順해지고, 괴로웠던 것은 시원하게 풀렸다. ‘얼굴에 윤택이 나고 등에 후덕스러운 기품이 드러나서 엄연儼然히 덕을 이루었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사림의 공통적인 말이요, 사림의 말일 뿐만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이다.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본래 두 가지의 이치가 아니니, 수신修身한 공으로 하여금 천하와 국가에 미루게 한다면 어디에 간들 마땅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하늘이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려하지 않으니, 어찌 하겠는가.
벼슬은 내직으로 승정원 정자·별검·전적·예조 정랑·병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연원 찰방連原察訪과 연일延日, 강령康翎 두 고을 현감을 역임하였다. 연원 찰방은 부임한 지 반 년만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연일 현감은 2년 동안 다스리다가 일 때문에 체직遞職되었고,63) 강령 현감은 부임하지 않았다.
63) 일 때문에 체직(遞職)되었고: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지자 소금을 구워 백성들의 구휼 비용으로 사용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암행어자 윤동성(尹東星)이 ‘소금을 구워 해금(海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백성과 아전들을 심문하고 조사하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으니 바로 그 일을 말하는 것이다.
영조英祖가 일찍이 공을 등용하고자 하여 경연經筵하는 자리에서 여러 번 물어보았으나 끝내 등용하지 못하였다. 정조正祖 원년元年 정유년(1777)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 또 대신들이 하나같이 천거하므로 특별히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하였다가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옮겼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신축년(1781)에 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이미 공이 유림儒林 중에 으뜸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즉위한 뒤에는 직접 발탁하여 몇 년 사이에 세 번이나 좌이佐貳(참판 및 참의)에 옮겨 반드시 조정으로 그를 한번 불러들여 문치文治를 빛내고자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직접 어명을 내려 반드시 한번 보고 싶다고 타이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경연經筵의 신하에게 출사出仕를 권면하는 글을 보내도록 명하였으니, 측석側席64)의 마음이 지극하였다.
64) 측석(側席):임금이 어진 이를 존대하기 위하여 상석(上席)을 비워 놓고 옆 자리에 앉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임금이 어진 사람을 구하려는 마음이 지극함을 뜻한 것이다.
공이 때를 생각하고 의리를 헤아려 일정하게 정해놓은 큰 계획이 있었지만, 집에 있으면서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은 신하의 본분으로 감히 편안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미 출발하였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 두 번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직접 나아갈 수 없다면 말[上疏]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 또한 옛 사람들의 도이다.”라고 생각하고는 ‘9조소條疏’를 올렸다.
첫 번째는 뜻을 세우는 것[立志], 두 번째는 이치를 밝히는 것[明理], 세 번째는 경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居敬], 네 번째는 천리를 체득하는 것[體天], 다섯 번째는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納諫], 여섯 번째는 학문을 일으키는 것[興學], 일곱 번째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用人], 여덟 번째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愛民], 아홉 번째는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尙儉]이다. 앞의 다섯 조목은 군왕君王의 덕을 논한 것이고, 나머지 네 가지 조목은 다스림의 대체大體를 논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70세가 되면 벼슬을 그만둔다는 뜻을 말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서 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을 하였다.
소장疏章이 왕에게 이르자 왕이 급히 소장을 들이라고 명하였다. 소장을 읽은 뒤 오랫동안 탄식하고 비답批答하기를 “아홉 가지 조목의 모든 말들은 참되고 간절하기에 이를 좌우명座右銘으로 대체하여 성찰하는 자료로 삼으려 한다.”라고 하였다.
공의 어릴 때 학문과 성장한 이후 실천을 사람들에게 날마다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오직 연원 찰방 재직 시 굳은 지조로65) 자신을 다스리고, 연일읍延日邑을 다스림에 교화가 백성들에게 젖어 들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고, 오직 9조條의 상소문에 제왕帝王들의 정치하는 근본과 유학儒學의 체용體用이 환하게 갖추어져 있다.
65) 굳은 지조:원문에 있는 빙벽(冰蘗)은 소식(蘇軾)의 시에, “십년의 빙벽이 고량(膏粱)과 싸운다[十年氷壁戰膏粱].”고 하였으니,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황벽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굳게 절조를 지키면서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공이 일찍이 정력을 다 쏟아 부었기 때문에 결국 임금의 윤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났는데, 병이 위급해지자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들이고 옷을 덮고 띠를 걸치게 하시고는 “여러분들이 착실하게 공부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고, 또 “우리 학문은 다만 평범한 것이다. 평범한 가운데 오묘한 점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아우 광정光靖에게 말하기를 “분수에 따라 수습하여 후학들을 힘써 나아가게 하라.”고 하고, 또 재종제 사정師靖을 불러서 “자제들은 본분을 따르고 유가의 체통을 잃지 않도록 가르치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편안히 세상을 떠나니, 향년 71세였다. 다음 해 임인년(1782) 3월 안동부 북쪽 학가산鶴駕山 아래 사향巳向(남동향)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공의 지극한 행실은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의 윤리를 다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픔의 예를 다하였고, 문장은 약중편約中篇을 지어 정情이 강렬해져 성性이 올바로 작동하지 않음을 근심하였으며, 제양록制養錄을 지어 외면을 제어하여 내면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지경持敬이 평상시 공부의 요점이 되니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을 지어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았으며, 이기理氣는 언제나 깊게 생각해야할 것이니 이기휘편理氣彙編 을 지어 선후先後와 편전偏全과 동이同異와 분합分合을 밝혔다. 주자어류朱子語類와 퇴계서退溪書의 분량이 대단히 많아 모두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절요節要를 만들어 외고 익히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논설은 주자와 퇴계의 정론定論이 있었지만 이후 담론談論하는 사람들이 붕당朋黨을 지어 나누어졌다. 공은 이理와 기氣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 곳에 저절로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 있으며, 분리할 수 없는 가운데 또한 분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여겼다. 성현의 말에는 혼륜渾淪을 말할 때에 또한 분개分開를 말한 곳이 있고, 혼륜한 것은 혼륜하게 보고 분개한 것은 분개해서 보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지었다.
친구들과 문답한 것과 여러 문체의 논저論著 또한 몇 권이 있다. 공은 타고난 품성이 이미 남보다 뛰어난데다 힘쓴 것이 또한 지극하였다. 무릇 절묘하게 뜻이 맞으면 빨리 기록하였으니6) 모두 주자와 퇴계를 조술祖述67)하고 사도斯道를 돕기 위해서였다.
6) 무릇 절묘하게 …… 빨리 기록하였으니:원문에 있는 묘계질서(妙契疾書)는 절묘하게 계합(契合)되는 것을 급히 씀이라는 뜻으로, 이는 주자의 장횡거 화상찬에,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였으며 절묘하게 뜻이 맞으면 빠르게 기록하였다[精思力踐 妙契疾書].”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
다. 장횡거가 정몽(正蒙)을 지을 적에 기거하는 곳마다 필연(筆硯)을 갖추어 두고, 혹 밤중이라도 해득한 것이 있으면 일어나서 촛불을 켜고 써 놓았으니, 이렇게 빨리 써두지 않으면 바로 잊어버릴까 염려해서였다.
67) 조술(祖述):조(祖)는 조종(祖宗)처럼 높인다는 뜻이요, 술(述)은 이어서 따른다는 뜻이니, ‘조술한다’는 말은 높이어 따른다는 말로, 옛사람의 도道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글로 쓰는 것이다
사방의 학자들이 백 리나 되는 먼 길에 발이 부르트는데도 경전을 가지고 와서 어려운 부분을 질문하니, 사람들이 날마다 집안에 가득하였다. 그렇지만 공은 각각의 재주에 따라서 매우 정성스럽게 지도하여 한결같이 심술心術을 활짝 열고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공은 비록 돌아가셨으나 영남 선비들 중에 말이 겸손하고 모습이 공손하며 시선을 단정하고 엄중하게 하는 사람은 물어보지 않아도 오히려 대산공大山公의 문인임을 알 수 있다.
공은 휘가 상정象靖이고, 자가 경문景文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문효공文孝公 곡穀과 문정공文靖公 색穡은 문장과 절행節行이 천하에 알려졌는데, 공은 그 후손이다. 조선조에 와서 몇 대를 지나 대사간大司諫 윤번允蕃에 이르러서 맑은 절개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다. 또 홍조弘祚는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호는 수은睡隱이니 공의 4대조이다. 광해군光海君이 인륜을 어지럽히자, 온 집안이 조령鳥嶺을 넘어 외숙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에게 의지하여 살았는데, 자손들이 마침내 안동사람이 되었다.
증조부는 효제孝濟이고, 조부는 석관碩觀이고, 부친은 태화泰和이다. 모두 은덕隱德이 있어 고을에서 존중을 받았다. 모친은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밀암密菴 재栽의 딸이다. 밀암은 가학을 이어 받아 남쪽지방에서 도를 창도倡導하였다. 모친은 법도가 있는 가문에 성장하여 어진 행실이 있었다. 숙종 신묘년(171)에 공을 낳았다. 4~5세 때부터 비록 장난치고 노는 작은 일에도 반드시 올바른 방법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공은 이미 두려운 듯 경계할 줄 알았다.
공의 부인은 증 숙부인贈淑夫人 장수 황씨長水黃氏이니, 익성공翼成公 희喜의 후손이고, 처사 혼混의 딸이다. 공이 행실을 깨끗하게 닦고 성정을 기르는데 부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공보다 14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은 완埦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별검別檢을 지냈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영운永運은 약관의 나이에 진사가 되어 크게 선비들의 신망을 얻었다.
차자는 영진永進이고, 다음은 영원永遠이다. 장녀는 진사 류회문柳晦文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어리다. 옛날 정이천程伊川(정이程頤) 선생이 말하기를 “명도明道(정호程顥)선생의 장례에 문인과 친구들이 글을 지어 그의 도학을 기술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각각 자기가 아는 것을 기술하여 그 내용이 대체로 같지 않았지만, 맹자 이후로 성인의 도를 전한 사람은 명도明道 한 사람 뿐이라고 한 것은 같았다.”고 하였다.
지금 공의 친구와 문인들이 지은 제문祭文과 개인적으로 공의 언행言行을 기록한 것을 보면 칭찬하고 그리워한 말은 일치하지 않지만, “도산陶山(이황)의 적전嫡傳을 이었다.”고 말한 것은 이견異見이 없다. 아! 옛날 명도明道를 맹자 이후 일인자一人者라고 칭찬한 것이 지금 정확하여 바꿀 수 없는 논의임을 안다면 후대에 지금을 보는 것이 마땅히 지금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1720년(숙종 46) ~ 1799년(정조 23) 1월 18일
채제공의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부친은 현감을 지낸 채응일(蔡膺一), 조부는 좌윤을 지낸 채성윤(蔡成胤), 증조는 현감을 지낸 채시상(蔡時祥), 고조는 현감을 지낸 채진후(蔡振後)이다. 그는 영ㆍ정조 대에 활동한 남인(南人)의 지도자였다. 남인은 숙종 연간 권대운(權大運)이 재상을 지낸 이래 근 100여 년간 재상에 오른 인물이 없었는데, 채제공 대에 와서야 비로소 재상을 배출하였다.
채제공은 1720년(숙종46) 충청도 홍성(洪城)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홍성의 외가에서 자랐다. 병조 판서를 지낸 이지억(李之億)이 그의 외삼촌이다. 본인이 외삼촌댁에서 자랐으니만큼 그는 친누이 또는 사촌, 육촌 누이들에게서 얻은 조카들을 자식처럼 돌보고 가르쳤다. 《번암집》 간행에 주도적 역할을 한 참판 유태좌(柳台佐), 홍문관 교리 윤영희(尹永僖), 참판 정홍경(鄭鴻慶) 등이 그의 종질 또는 재종질, 삼종질이다.
그는 18세 때인 1737년(영조13) 오필운(吳弼運)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24세 때인 1743년 문과에 급제했지만 청요직의 환로를 걷지는 못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바로 그해에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부임하는 부친의 임소에 따라가기도 하였다. 이후 오필운의 형인 오광운(吳光運)의 후계자로 관직을 시작하면서 오광운을 매개로 소론(少論)의 이종성(李宗城)과도 면식을 익혔다.
그의 환력(宦歷)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1755년 을해옥사였다. 이때 그는 문사랑(問事郞)으로서 옥사의 실무를 처리하면서 영조의 정통성을 지지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영조의 신임을 받았고, 이후 승지로서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그리고 1758년 도승지로 있으면서 영조가 폐세자 비망기를 내렸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이를 환납한 일이 있다. 이 일은 사도세자를 보호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고, 그가 정조 연간 사도세자 숭봉 사업을 주도하는 데 정당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1762년 모친상을 당하고 3년 뒤 부친상을 당하였기에 1760년대의 정국에서는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탈상한 뒤인 1770년대에야 병조 판서, 예조 판서, 호조 판서, 평안도 관찰사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채제공은 정조 즉위 후 예조 판서와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777년(정조1) 4월에는 규장각 제학을 겸하기도 하였다. 1778년에는 사은겸 진주 정사(謝恩兼陳奏正使)로 중국에 다녀왔고, 돌아와서 호조 판서와 규장각 제학 등을 지냈다. 그런데 1780년 8월, 홍국영(洪國榮)과 화응했다는 혐의로 조시위(趙時偉)가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노량진과 명덕동 등지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이 시기 그는 영남 남인들의 묘도 문자를 작성해 주는 등 그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하여 1788년 우의정이 되었을 때 무신란 60주년을 맞이하여 영남에서 창의한 영남 남인들을 포상하는 데 앞장섰다. 정조는 권만(權萬) 등을 포상하고 조덕린(趙德隣), 김성탁(金聖鐸), 황익재(黃翼再)의 신원을 주청하는 유소도 받아들였다. 이처럼 영남 남인의 지원과 채제공의 정치력에 힘입어 남인이 반역의 온상이 아니라 반역을 토벌하는 데 힘쓴 세력임이 밝혀졌고,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하는 데 하자가 없음을 인정받았다.
이윽고 그는 사도세자 숭봉 사업에 관여하였다. 1789년(정조13) 총리사로서 수원 현륭원(顯隆園) 공사를 감독하였고, 1790년에는 좌의정 겸 경모궁도제조(左議政兼景慕宮都提調)가 되었다. 1793년 1월에는 수원 유수가 되었고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하였다. 좌의정이던 그를 화성 유수로 보냈다는 것은 정조가 화성을 중요시했음을 보인 것이다. 같은 해 5월에는 드디어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당시 중앙 정계에서 영향력을 점차 키워 가던 남인은 1791년 진산 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서학(西學)의 소굴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정조는 서학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학(正學)을 바로 세울 것을 강조하였다. 그 방안의 한 가지가 성리학에 충실했던 영남 지방의 학풍을 진작하고 영남 인재를 선발하는 일이었다. 정조는 1792년 이만수(李晩秀)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선비들을 시험하여 선발했고, 이를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으로 간행하였다.주-D001 채제공은 정조의 명을 받아 〈도산시사단비명(陶山試士壇碑銘)〉을 써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주-D002 정조의 이러한 영남 진흥책에 부응하여 1792년(정조16) 윤4월 27일에 1차 영남 만인소가, 같은 해 5월 7일에는 2차 영남 만인소가 올라왔다. 이러한 여론이 조성되자, 당시 수원 유수로 있던 채제공은 1793년 5월 28일에 영의정에 제수되면서 사도세자를 무함한 역적을 토벌할 것과 의리 제방(義理隄防)을 엄격히 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처럼 1790년대 사도세자 숭봉에 대한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채제공이 이러한 상소를 올리자, 노론 측에서는 그가 영조의 임오의리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그를 논핵하였다. 이때 정조는 금등지서(金縢之書)의 일부를 공개하고 노론 김종수(金鍾秀)를 불러 양측의 합의를 도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종수는 이에 응하지 않은 채 1793년 자신의 입장을 굳건하게 지키며 채제공을 논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김종수는 1794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봉조하로 은퇴하였다.
채제공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변함없어서, 이후로도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 사업과 화성 성역을 주관하였다. 1794년 12월에는 경모궁 추상존호도감 도제조(景慕宮追上尊號都監都提調)가 되었다. 1795년 2월에는 화성에서 열린 혜경궁 회갑연 의식의 예행 연습을 총괄하여 지휘하였다. 이후 재상으로서 정조를 보필하다가 1798년 노병으로 사직을 청하였고, 1799년 돌림병이 돌 때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조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그의 병을 걱정하였고, 약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편지로 의견을 말하였다.주-D003
정조는 채제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의 일생에 대한 매우 적실한 평가라고 생각되기에 그 일부를 인용한다.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 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할 경우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연조 비가(燕趙悲歌)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중략)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라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 보기 어려운 경우이다.
1799년 1월 18일에 사망, 3월 26일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1801년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그는 영조연간 청남(南人淸流)의 지도자인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蔡彭胤)과 이덕주(李德胄)에게서 시를 배웠다.
친우로는 정범조(丁範祖)·이헌경(李獻慶)·신광수(申光洙)·정재원(丁載遠)·안정복(安鼎福) 등이 있고, 최헌중(崔獻中)·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 등이 그의 정치적 계자가 된다.
순조 때 유태좌(柳台佐)가 청양(靑陽)에 그의 영각(影閣)을 세웠고,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洪可臣)·허목·체제공을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세워졌다.
저서로 『번암집』 59권이 전하는데, 권두에 정조의 친필어찰 및 교지를 수록하였다. 그는 『경종내수실록』과 『영조실록』·『국조보감』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출처] 대산선생실기 권2 묘갈명墓碣銘 채제공蔡濟恭 지음|작성자 류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