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고향 - 김 용완
고향에 가는 날 해월암 산사 선바위에 앉아 내려다 보는 소재지는 커다란 사막과 같다.아니 고기잡는 포경수가 힘차게 내던진 날카로운 작살,옆구리에 맞고 비틀거리며 달아나는 한마리의 고래나 다름없다.산사로 가는 구부러진 산길을 걸으며 이따금 멈춰서서 바라보는 지나온 길처럼 되돌아보면 삶은 텅 빈 뱃속마냥 어디에서나 꾸르륵거린다.한군데도 성한곳이라곤 없는 흉터투성이다.어디에서건 마음받에서 사막의 세찬 모래바람만 휑하니 불어댄다.
몇년전,황사바람이 불던 어느날 친구 하나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작년엔 두친구가 폐암,담낭암으로 죽더니 올초엔 또 한친구가 세상을 떠나 다들 납골당이나 산에 묻혔다.이처럼 세상의 끝,삶의끝인 산에 묻혔다.죽어서야 비로소 숨막히는 사막을 떠나 고향으로 회귀한 것이다.죽어서야 비로소 옆구리에 박힌 작살을 뽑아내고 어머니의 뱃속에 안긴것이다.생각과 생각의 이편과 저편에 서서 늘 허둥거린다.손을 내밀어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그저 허방일 뿐이다.있지도,없지도 않은 그 무엇,그 무엇을 붇잡으려는 몸부림 허무함.우리네 삶이란 움켜쥐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빈주먹이게 만드는 모래알같은 그런 것이다.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도 마찬가지다.죽음의 실체는 이 세상 아무곳에도 없다.그냥 생리학적,해부학적 견해에 대하여 '주검'이라 규정지울 뿐이다.그 실체는 없지만 누구든 태어났으면 죽게 마련이다.사리에 통달한 성인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그늘은 피할 수 없고,그 어떤 영웅호걸도 언젠가는 죽는것이다.그런점에서 인생은 누구에게나 겪게되는 것으로 공평한 룰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다같이 어머니의 뱃속을 빌려 태어나 각자 다르긴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이생을 마쳐야 한다는 관점에서다.더욱이 우리나라의 무덤들은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자궁과 흡사한 형태이다.결국 둥근 자궁에서 나와 다시금 그 속으로 되돌아가는 순환궤도 위에서 한 평생 허우적거리며 산다고나 해야할까 싶다.그래서 옛사람들은 인생을 '덧없다'거나 '하룻밤의 꿈' '부질없다' 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른다.평소 남에게 베풀면서 상대를 배려하고,친근했던 존경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접했을 때 이러한 생각과 느낌은 더욱 절실해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삶이란 참으로 덧없고 허무한 것이다.
가을산의 침묵
만해 한용운 시인은 ‘침묵은 산이요 산은 나의 마음’이라 했다.
가을산은 온통 오색물감 잔치라, 그래서 가을 산이 좋은가보다. 그저 가을산 앞에 서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숙연해진다. 마치 산이 참선을 하듯, 산 앞에선 내 자신이 삶의 의미를 묻게 된다. 낙엽이 뿌리를 찾아서 돌아가듯 내 삶의 뿌리를 찾아서 가는 길을 터득케 한다. 가을 산을 찾는 사람들은 어쩌면 저마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가을산 앞에서 물을 것이다. 늘상 산을 오르내리는 산꾼들이 아니더라도 일반인들도 배낭을 메고 산을 찾고 있다. 세상이 산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산이 세상 사람들을 품어안고 그들의 불편한 삶을 다독여 주는 것이 아닌가싶다.
내 주변을 돌아보면 죽기 살기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직장인은 주말에 짬을 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평일에 산을 오르내린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그들에게는 안정된 직장과 행복한 가정이 있어 세상을 살아가는데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굳이 산을 찾는 것일까. 그냥 산이 좋아서 산을 찾는 것일까. 그들 중에 죽마고우는 아니지만 평소 나와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있는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날도 어김없이 인근 산으로 산행을 하고 귀갓길에 만났던 것이다. 그는 차 한 모금을 머금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연당 자네는 행복한가.”라고 했다. “즐거우냐.”고 했다. 그 말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무슨 대답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나를 보던 친구는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이, “사는 게 그냥 힘들다.”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에 알뜰한 가정에 모든 것들이 잘 풀리는데 갈수록 힘들다는 것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라면서 산을 찾는 이유를 말했다. “그저 묵묵히 산에 오르다보면 어느새 마음의 무거운 짐을 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문제만 있지 어떤 답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말이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자 답이라고 생각하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배움이나 가질 것은 다 갖춘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내면적 삶에 대한 불안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산에 가는 이유는 바로 침묵과 고행을 통해 자신을 허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적막감에서 정겨운 내면의 얼굴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는 그에게 중국 청나라 임금이었던 순치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순치황제는 대 중국의 왕위를 버리고 속세를 떠났다. 순치황제는 거대한 중국을 통일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속세를 떠나면서 유명한 시를 남겼다.
‘열여덟 해 사는 동안 자유라고는 없었구나 / 산하에서 큰 싸움에 몇 차례나 쉬었던가 / 내가 이제 왕위를 뿌리치고 절산으로 돌아가리 / 천만가지 시름 어이하여 상관하리.’라고 읊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통치자를 단숨에 내다버린 순치황제는 조직과 돈에 탐착하여 어처구니 없을 만큼 끝없이 탐욕에 눈이 어두웠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순치황제를 통하여 참으로 대단한 역설과 욕기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무한의 소유욕을 갖고 있다. 시 구절을 듣던 그 친구는 찻잔을 입안으로 기울이면서 “내가 산을 찾는 이유는 바로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속세를 떠나 순수 몸으로 체험 하고 있는 순치 황제처럼 저 가을 산은 그걸 나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했다.
줄기를 꿈틀거리며 붉게 물든 낙엽을 온 몸에서 털어내고 산을 찾아가는 것은 바로 돌고 도는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가을산으로 산행을 한번쯤 떠나보자. 이 풍진 세상, 자신 안에 숨어있는 또 다른 세상을 찾아서 침묵의 가을산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세상에서 명예나 가진 것은 없어도, 아니면 대단한 성공을 이루지 못해도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위대하고 아름다운 승리다. 살아 있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척박한 중남미가 원산지인 용설난은 한 번 꽃을 피울 때 1,300개나 되는 꽃봉오리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꽃봉오리마다 평균 75만개나 되는 씨앗을 퍼뜨린다. 하지만 그 가운데 싹이 트는 것은 겨우 한 두 개에 불과하다. 비단 용설난 뿐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간이 어머니의 태 안에서 잉태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3억 개 이상의 정자가 치열한 경쟁을 통해 태속에 잉태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강렬한 생존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생명력은 살아남으려는 열정이다. 생명력이란 새로 시작하는 능력이다.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생명력이란 살아남은 능력만이 아니고 새로 시작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몸의 세포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물론 죽어가는 세포도 있지만 동시에 수많은 세포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죽기 살기로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죽게 된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새롭게 태어나는 세포가 없는 몸은 죽어가는 몸이거나 이미 죽은 몸이다. 새롭게 태어나는 신생아가 없는 나라는 죽어가고 있는 나라다. 숲에 어린나무가 없으면 그 숲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새롭게 시작하는 기업이 없다면 어느 순간 경제성장은 멈추고 실업자만 늘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시작이 없는 삶은 죽어가는 삶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시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조용히 시작된다. 우리가 어머니의 몸에 잉태될 때의 모습은 작았다. 우리는 작게 시작되었고 조용히 시작되었다. 우리는 비록 작지만 날마다 조용히 성장해 왔다. 그래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격려하고 축하해 주어야 한다. 거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해야 한다. 언젠가는 죽게 되지만 나는 날마다 새롭게 시작한다. 자그마한 꿈과 소망을 위해서 조용히 숨 가르며 살포시 움직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