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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20일 목요일
[(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고 수난을 예고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9,1-13
1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3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4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5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6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7 너희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땅에 우글거리고 그곳에서 번성하여라.”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때때로 되새겨야 하는 물음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참조)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내놓은 답은 모든 이에게 공통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교리상의 정답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과 고백이 담긴 답을 요구하실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는 출제자가 바라는 정답을 맞히고도 칭찬 대신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마도 그가 “그리스도”(8,29)의 의미까지는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섣불리 알리기를 바라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과연 시험을 멋지게 통과한 바로 다음 순간 베드로는 스승에게서 “사탄”(8,33)이라는 극단적인 꾸지람을 듣습니다. “내게서 물러가라.”(8,33)라는 말씀은 그리스 말 원문을 볼 때 “내 뒤로 가거라.”입니다.
스승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으로 스승의 앞을 가로막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자리로 곧 스승의 뒤로 가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 사탄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진짜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순교를 향하여 가는 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도록” 교우들의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오로 사도의 극적인 삶의 전환에 대한 묵상도 은혜롭지만,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에 대한 묵상도 참으로 풍요롭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 사도는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나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은 꼭 저를 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그리 저와 빼닮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제자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래서 결심하고, 시작은 잘하는데, 뒷받침이 그렇게 안 됩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될 것 같은데, 삶이 받쳐주지를 못합니다.
첫출발 때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이 달려들던 그 열렬한 마음, 예수님을 향해 활활 타오르던 그 불같은 열정, 순수한 신앙, 그런 초심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는데...생각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일단 용감히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워낙 신앙의 기반이 약하다보니, 의지력이 부족하다 보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분위기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수제자 직분까지 맡다 보니 거기서 오는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세속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삶보다는 육적인 생활에 익숙해 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단의 대표 격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요청과 제자단의 미성숙 사이에 끼여 참으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학창시절, 돌아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당신들이 담당하셨던 학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먼저 반장을 불러 혼을 내거나 족쳤습니다.
제자단의 반장이었던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이 맡았던 직책상 무수히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혼도 엄청 많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엄청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옛 삶의 방식, 옛 사고방식을 떨치지 못하는 제자들, 무조건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엄청난 꾸중을 하시는데, 반장인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꾸중을 듣습니다. 꾸중의 강도가 엄청납니다. 화들짝 놀랄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베드로 사도의 문제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십자가 신비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으로 다가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개방성 부족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 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따졌던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토록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한참 기다려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지속적으로 수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한 우리지만, 아직도 고통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부족한 우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표징(sign)과 상징(symbol)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교통 신호등, 결혼반지, 국기 등은 모두 특정한 의미를 지닌 표징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표징을 주셨을까요? 오늘 저는 구약의 무지개와 신약의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과 사랑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창세기의 말씀은 노아의 홍수 이후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첫 번째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라고 말씀하시며 무지개를 그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 무지개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무지개는 하늘에서 바라볼 뿐, 그것을 통해 직접적인 생명의 은총을 받지는 못합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떤 표징을 통해 하느님의 언약이 완성될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표징을 주시는 장면을 듣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축복하신 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들어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기념의 표징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무지개와는 달리, 단순한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표징입니다. 고인이 된 소설가 최인호는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성체가 몹시 고프답니다.” 당시 최인호는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최인호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면서 우리의 몸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감실(龕室)’이 됩니다. 우리는 최초의 감실이었던 성모님처럼 순명과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하느님과 노아입니다. 표징의 형태는 하늘에 나타나는 무지개입니다. 언약의 성격은 홍수로 멸망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신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예수님과 모든 인류입니다. 연약의 형태는 빵과 포도주입니다. 연약의 성격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미사를 통해서 지속해서 이루어집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외적인 표징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내적인 은총의 표징입니다. 무지개는 인간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가 직접 받아 모시며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묵상하며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표징이라면,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언약을 우리 삶 속에서 실현하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실 때, 그것이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하느님의 은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맡긴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고난의 잔, 십자가, 나눔, 희생을 통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너의 신앙고백을 너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앙고백은 참된 신앙고백이 아니다.” 참된 신앙인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당신과 나 사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당신과 나
사이
한 사람 한 사람
비우고 비워
당신과 나
사이
아무도 없어
사이마저 사라지고
당신과 나
갈림 없이 함께
당신과 나
나누임 없이 하나
당신은
나의 당신이 되고
나는
당신의 내가 되니
나의 당신과
당신의 나
사이
비로소
모든 이가
곱게 깃듭니다
오늘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 마르토
성녀 히야친타 마르토
열 한 살의 프란치스코와 열 살의 히야친타는 교회의 역사에서 순교하지 않은 채 시성된 가장 어린 성인들이다.
이들 남매는 사촌 루시아 산토와 함께 포르투갈 파티마의 들녘에서 가족의 양떼를 돌보고 있다가 지금은 ‘파티마의 성모님’(Our Lady of Fatima)으로 알려진 성모 발현을 목격하게 되었다.
1917년 5월 13일에 발생한 첫 번째 발현에서 성모님은 이들 세 명의 어린이들에게 로사리오 기도를 바칠 것과 희생을 할 것, 그리고 죄인들을 회개시킬 것을 언급하였다.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서 이들 어린이들은 그렇게 하였고, 자주 기도하였고, 자신들의 점심을 걸인들에게 주었으며, 음식도 없이 외출하고는 하였다.
이들 어린이들은 십자가의 길을 암송했으며, 아무리 더워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1918년 10월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다는 스페인 독감으로 위독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여 그들을 곧 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첫 번째 영성체를 요구했다.
다음날인 1919년 4월 14일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떠났다.
히야친타 역시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결국 리스본의 병원으로 이송되어 가슴의 농양(膿瘍)을 수술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히야친타는 1920년 2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모님께서 파티마에 처음으로 발현하신 83주년이 되는 2000년 5월 13일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를 시복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7년 5월 13일 포르투갈 파티마를 방문한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 앞에서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히야친타 마르토를 가톨릭교회의 성인으로 선포함으로써, 어린이들이라 할지라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성 에우케리오 (Eucherius)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오를레앙(Orleans)
활동연도 : +743년
같은이름 : 에우체리오, 에우체리우스, 에우케리우스
성 에우케리우스(또는 에우케리오)는 어릴 때부터 거룩한 생활에 이끌렸다.
프랑스의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그는 709년에 주미에주(Jumieges)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7년을 생활하였다.
그의 아저씨이며 오를레앙의 주교이던 소바릭(Suavaric)이 서거했을 때, 시의회와 시민들은 궁중 관리인 카를마르텔(Karl Martell)에게 대표단을 파견하여 성 에우케리우스를 주교로 선임하겠다는 뜻을 통보하였다.
카를마르텔이 그에 동의하자 이 젊은 수도자는 수도원에서 나와 오를레앙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주교로 선임된 그는 스스로 모범적인 사목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한편 교구민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누구나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그는 카를마르텔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카를마르텔이 전쟁 비용이나 포로들의 석방금 등을 교회에 지나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공식적으로 이를 항의하자 카를마르텔은 그를 쾰른(Koln)으로 귀양을 보냈다.
여기서 성 에우케리우스가 더 큰 공경을 받게 되자 또다시 리에주(Liege)로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도 성 에우케리우스의 명성이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자 카를마르텔은 하는 수 없이 그를 마스트리흐트(Maastricht) 근교의 생트롱(Saint-Trond)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그는 이 수도원에서 기도와 관상을 즐기며 여생을 편안히 마치고 선종하였다.
성 레오 (Leo)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카타니아(Catania)
활동연도 : 703-787년
성 레오는 703년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에서 태어나서 787년 시칠리아(Sicilia) 섬의 카타니아에서 사망하였다.
성 레오는 카타니아의 주교로서 그의 높은 학식으로 인해 칭송을 받았고, 시칠리아에서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의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복자 베드로(Peter)
신분 : 신부, 수사
활동지역 : 트레야(Treja)
활동연도 : +1304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Petrus)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로부터 직접 수도복을 받았던 작은 형제회의 초기 회원이다. 이탈리아의 트레야 교외 몬테치오(Montecchio)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신심이 투철하여 일찍이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성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아주 열정적이었다.
한 번은 그가 안코나(Ancona) 수도원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에 탈혼에 빠졌고, 땅으로부터 들어 올려져 공중에 떠있는 광경을 수도원장이 지켜보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환시 중에 동정 성모 마리아(Maria), 성 요한(Joannes) 복음사가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를 보았다.
그는 특히 미카엘(Michael) 대천사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녔는데, 어느 해 사순절 마지막 날에는 그 천사가 발현하여 장시간 동안 그와 담화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오피다(Offida)의 콘라드(Conrad)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이 둘은 함께 설교했을 뿐만 아니라 높은 성덕을 쌓았다.
그는 이탈리아 피체노(Piceno)의 시롤로(Sirolo)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93년에 승인되었다.
복녀 아마타 (Amata)
신분 : 동정녀
활동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연도 : +1250년경
같은이름 : 아마따
아마타는 디아나(Diana, 6월 9일)와 체칠리아(Caecilia, 6월 9일)와 함께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의 성 아녜스(Agnes)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의 조카딸로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의 절친한 친구였다.
성녀 클라라는 아마타의 병을 치유해 줌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수도생활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녀는 1891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