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간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유
절집에 남아 있는 한국 전통예법
中, 출입문 정해져 있지 않아
가운데 문 전각 주인이 출입
좌우 문 활용 우리만의 예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큰 절의 법당 가운데 문 앞에는 이곳으로는 출입하지 말라는 안내명판이 붙어 있으나 비교적 작은 절에는 별도의 안내문이 없게 마련이다. 그래서 처음 절을 찾은 이들이, 이왕 절에 왔으니 절이나 한 번 할까 하는 마음으로 무심코 가운데 문으로 법당에 들어서는 경우가 있다. 그때 그쪽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거나 돌아서 오라는 말씀을 듣고 당황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법당의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일까.
문은 출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데 가운데 문은 주지 스님, 또는 큰 스님만이 출입할 수 있는 연유는 무엇일까. 공손한 마음에 부처님께 인사를 한 번 하려다가 자칫하면 무안을 당하게 되는데, 오늘은 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요즈음은 세계여행이 보편화되어, 성지순례도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가르침을 펴신 인도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로 그 대상이 넓어졌다. 그래서 다양한 불교문화와 예절을 만날 수 있다. 미얀마 등의 파고다(불당, 법당)에는 사방에 출입문이 있고, 각 방면마다 현겁의 네 부처님이 자리하고 있는데 어느 문으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또 우리에게 불교를 전해준 중국의 경우 특별한 사찰을 제외하고는 출입문이 정해져 있지 않고, 우리가 불교를 전해준 일본불교의 동대사도 중앙의 문으로 출입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미얀마 등지에서 볼 수 있듯이 형태와 (본존불을 홀로 모시거나) 중앙에 주불을, 좌우에는 존자나 보살을 모시는 우리나라와 같은 형태는, 붓다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발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일불을 신앙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 동남서북이라는 공간에 각각의 교화의 구역을 갖고 계신 다양한 부처님을 신앙한다. 대승불교를 신앙하는 우리나라는 그 세계관에 따라 신앙의 형태가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일체의 존재들을 붓다 보살의 성인과 천신 인간 축생 지옥 등의 범부로 분류하고 아래의 범부들은 윗자리의 성인들에게 예경하고 참회하며 공양을 올린다.
예경하는 존재와 예경 받는 존재들은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평등하지만 현상계에서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같은 질서 인식은 상위의 성현이 계신 법당을 출입하는 문으로 나타나고 있다. 법당 출입문의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일체 존재는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유에 주로 기반하고 있다면, 예경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법당 중앙의 문(법당을 전이라고 하고 어간문이라고 함)으로 출입하는 것을 금하고 좌우측 문으로 출입하도록 하는 것은 일체 존재는 현실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위계질서의 예의관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예의라고 하면 유교적 질서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법계의 차서는 고정적이지는 않지만 대승불교에서는 52계위 등 차서적인 우주관을 가지고 있다.
본질에서는 평등하지만 현실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인식이 법당의 출입문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본질과 내용을 중시하면 그 출입을 제한하지 않지만 현실과 형식을 중시하면 예의를 다해 옆문으로 출입하는 것이다. 가운데 문은 전각의 주인이 출입하므로, 법당의 좌우 문을 활용하는 것은 한국의 예의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모습은 불교의 법당 출입에만 남아 있지 않다. 청와대도 그렇고, 궁전이나 서원 등 또는 대가(大家)는 중앙의 큰문과 좌우의 작은 문으로 건립돼 있고 보통은 좌우의 문으로 출입한다. 건춘문으로 들어가고 영추문으로 나오는 경복궁 출입법도 한 예이다. 이는 동양의 체용관이 스며있는 우리의 전통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법당을 출입할 때 왼쪽 문으로 들어가 인사 드리고 오른쪽 문으로 나가거나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뒷문으로 나가는 등은 절집에 남아 있는 한국의 전통예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신문30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