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18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청주] 심판의 기준은 사랑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레위 19, 1 - 2. 11 - 18
† 복음 : 마태 25, 31 - 46
★ 거룩한 삶은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 곧 도둑질,
사기, 거짓 맹세, 불의, 악담 등의 사악한 행위를 경계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신다.
그리하여 가장 작은 이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의 여부를 우리
삶에 대한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음의 예화를 통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어느 수도원의 수사들이 서로를 너무나 미워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고민하던 수도원장은 결국 그 나라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현인을 찾아갔습니다. 현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그 수도원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신 채 수도자의 겉모습으로
계셨습니다.”
무척 놀란 수도원장은 곧바로 수도원으로 돌아와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수사들은 이제 ‘누가 예수님일까?’ 하고 서로
관찰하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로 조심스럽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모시는 심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잘못한
부분들이 있으면 그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청하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한두 달 지속되자, 수도원은 형제애로 가득
찬 공동체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누가 예수님인
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수도원장이 다시 그 현인을
찾아가 물어보자, 현인이 대답합니다. “사실은 그 수도원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 거창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심판의 기준은 사랑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2월18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마태오 25,31-46
심판의 기준은 사랑
얼마 전 저녁이었습니다. 허름한 복장을 한 사람이
신부님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순간 구걸하러 온
사람이라 생각되어 보좌신부에게 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그랬습니다. 돈을 주어 보냈답니다. 누구인지
만나보지도 않고 선입견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사람도 있다고 하거늘
저는 구걸하는 사람을 돈을 쥐어 보낸 것으로 만족해
하였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속일지라도 나는 상대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도움을 청하는 이가 있다면 아무
선입견 없이 신속하고 민첩하게 도와줘야 합니다.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해도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물어야 합니다. 아마도 속을 뻔히 알면서도
베푸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2,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45-4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 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 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많이 많이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며칠 전, 한 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 형님과 무척이나 친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분이었지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병으로 오랫동안
앓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적인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주무시다가 운명하시게
되었던 것이지요.
장례식장에 찾아가서 조문을 하고 미사를 봉헌하는데
삶이 참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동안
사업을 꾸리면서 이 고생 저 고생 다하다가 이제 좀
괜찮아졌다 싶을 때 주님께서 데리고 가신 것이었지요.
유가족들이나 또 문상을 오신 분들 모두가 갑작스런
죽음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자신의 끝이 언제인지를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주님 곁으로 돌아갈 날이 언제인지를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많은
선조들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래 사셨다
해도 기껏 해봐야 100년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안에서 사는 100년의 삶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그 뒤에
오게 될 영원한 삶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이 세상 삶 뒤에 찾아오는 영원한 삶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세상 안에서 의롭게 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내용을 오늘 복음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까?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사랑의 실천을 행한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OECD 가입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벌써 8년째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차지했고, 지금도 26~28분에 한
명씩 자살을 시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하긴 전국
남녀 6,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사람
4명 중에 1명꼴인 25.3%가 약간의 우울증이라고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이렇게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들에게 해 주는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 가장 작은이들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들을 줄일 수 있는 비결이며, 우리가 주님 앞에
떳떳하게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꺼번에 다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이 순간에는 늘 한
가지만 있습니다. 그 한 가지를 해결하세요(바이런 케이티).
어제 미사와 특별강론을 했던 역곡 성당입니다.
어렵고 힘들어 하시는 분들에게...
어렵고 힘들어하며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남이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답부터
말하면, 남은 절대로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병아리를 떠올려 보십시오.
병아리가 알 속에서 점점 몸이 커집니다. 그리고 드디어
병아리의 얼굴이 알껍데기에 밀착될 정도로 몸집이
커져서 답답해질 때, 병아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알껍데기를 쪼아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몸이 커지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병아리를
빨리 보고 싶다고 알껍데기를 외부에서 깨 버리면
어떨까요? 당연히 너무 빨리 나온 병아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들고 어려운
이유를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그 결과 원망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 원망은 확산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원망하면 언젠가 그 누군가도 나를 원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자녀에게 원망조로 탓해보세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왜 그 모양이냐?” 그러면
자녀의 입에서도 좋은 말이 나올까요? 원망에 대한 응답은
오직 원망입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원망조로 말하면 남는
것은 없고 조만간 그 관계가 잿빛 색깔이 됩니다.
어렵고 힘듦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내 안에서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굳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어렵고 힘든 모든 상황을
잘 극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걱정되는 복음
2013년 다해 2월18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 마태25,31-4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걱정되는 복음>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심판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마다 떠오르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가 부제 때의 일입니다. 미사주례를 하시던 원장 신부님
옆에서 부제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 복음이 바로 오늘
‘양과 염소’ 복음이었습니다.
복음 낭독이 끝나고 신부님께서 강론을 하시는데, 온
성당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동시에 큰
제스처로 오른손을 펼치시며 “그 날이 오면, 선행을
많이 한 착한 사람들은 오른쪽에” 하는데, 제가 오른쪽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성씨가 ‘양’씨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살아생전 착한 일이라곤 손톱만큼도 안한
그 나쁜 **들은 왼쪽에!” 하고 왼편을 가리켰는데, 하필
그날따라 왼쪽에 우리 ‘염신부님’이 앉아계셨습니다.
더구나 그 ‘염신부님’은 얼굴도 까무잡잡한데다가,
수염까지 길러 둘도 없는 ‘염소’였습니다.
다른 일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흑염소가 몸에 좋다고 해서
수도원 뒷마당에서 길렀습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큰
개도 한 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둘이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개도 개지만 염소도 성격이 만만치 않더군요.
한번은 동물 담당 형제가 개밥을 주려다보니 개밥그릇이
너무 지저분해서, 허리를 굽혀 개밥그릇을 씻고 있었습니다.
바로 뒤쪽에 묶여있던 흑염소 녀석이 자기에게는 신경 안
써준다고 화가 엄청났습니다.
항의표시였는지 염소 특유의 모션, 상체를 한번 번쩍 들어
무게가 실리게 한 다음 날카로운 뿔로 우리 수사님 허리를
내리 찍었습니다. 얼마나 아팠던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쁜 녀석’의 비유 때 드실 정도로 염소는
상당히 공격적이고 충동적입니다.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를
함부로 표출합니다.
그 결과는 불타는 지옥입니다. 그 다음날 바로 그 흑염소는
흑염소탕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분노하고, 쉽게
흥분하고, 여차하면 공격하고, 틈만 나면 따져들고, 그러면
내면에 평화가 전혀 없습니다.
소화도 잘 안되고, 신진대사도 원활하지 않습니다. 쉽게
병에 노출됩니다. 마음고생, 몸고생이 끊이지 않습니다.
살아서 벌써 지옥을 겪는 것입니다.
반대로 양들을 보십시오. 웬만해서는 흥분하지 않습니다.
고분고분 순종적이고 차분합니다. 꽤 많은 숫자의 양들을
키우던 사람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염소 한 마리를
도축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길길이
뛰고 난리법석이랍니다.
반대로 양들은 칼이 목에 들어와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답니다. 좀 반항하고, 길길이 뛰고 그래야
도축하는 기분이 느껴지는데, 칼을 가까이 갖다 대도
가만히 있으니, 오히려 섬뜩하고 잡을 마음이 안
생기더랍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입장하는 사람들을 양 무리로
비유하셨는데, 다 그 까닭이 있습니다. 양처럼 온순하고,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고, 내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에,
최종적으로 하느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의 내면은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평온합니다.
마음이 늘 평화롭습니다. 관계도 편안합니다.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곧 천국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라는 주제의 오늘 복음은
꽤 두려움을 주는 복음입니다. 평소에 교정사목 봉사나
무료급식 봉사에 열심했던 분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계시겠지요.
상선벌악(賞善罰惡)! 천주교 4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상선벌악,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상선벌악의 의미는
이 세상의 삶을 우리가 마칠 때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시고 선하게 살았던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신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너무나 공평하신 처사,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요?
그러나 꼭 이 잣대만을 들이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은 전자계산기 같은 하느님, 엄격한 재판관으로서의
하느님만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별로 그런 봉사활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지금은 또 봉사 좀 하려고 해도 몸도 성치 않고, 어떻게
할 줄도 모르는데, 어떡하나, 나는 100% 불붙는 지옥인가?”
하며 두려워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히 자비하신 분, 우리를 향한 사랑이 지극하신
분,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 자체로 행복해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하느님 자비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나,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일이 꼬이고 잘 안 풀려 실패했지만 나름대로 그간 한번
잘 살아보겠노라고 ‘쌩고생’ 했던 지난 우리 나날을 기쁘게
생각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이해욱신부
<후속> 18. 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최고라고 떠드는가?
얼마 전, 신학교 추천서를 써 주었던 아들 신부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많이 있는데 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최고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저는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참으로
탁월한 영성이라고 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신부의
질문을 계기로 또 다른 분들이 그러한 질문을 해올 경우,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에 대해 누구에게나 간단히 잘
설명해 줄 수 있도록 정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왜, 내맡김의 영성이 가장 탁월한 영성인가? >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영성이
최고의 영성이라 생각하여 수도공동체를 세워 나름대로의
여러 수덕방법과 기도방법과 덕행방법을 내세우고
펼쳐왔는데…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왜, 하느님과
일치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에는,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접근 방법이 있는 것인데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만이 꼭 유일한 접근 방법이 아니지 않느냐?"하는
질문입니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내맡김의
영성"만이 하느님께 나아가고 그분과 일치하는 데에 꼭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우리
교회 역사상 참으로 훌륭한 많은 성인들께서 그분들의
삶으로 이미 우리에게 직접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순교로써, 어떤 분은 고행으로써, 어떤 분은
수덕생활로써, 어떤 분은 기도생활로써, 어떤 분은
자선사업으로써, 어떤 분은 교회학자로서 말입니다.
성인들께서는 저마다의 각기 다른 자신의 처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오직 모든 것을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심으로 하느님과의 진정한 일치를
증명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여튼, 성교회에서 성인들을 추대하여 후손들이 그분들의
삶을 본받도록 추앙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분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신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인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나 용기나 덕행이 아무리
뛰어났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가르침이나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지 않았다면 성인으로 추앙되지도, 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제 글의
다른 곳에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神仰)이란 "하느님을 앙모(공경과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는 최고, 최선의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4,17)
하느님께 나아가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길이 아무리 많고
다양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모두의 공통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바라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각자가 개인적으로 답을 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순교가? 고행이? 수덕생활이? 관상생활이? 자선사업이?
희생적 생활이? 저는 이러한 생활들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하느님께 나아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모든 길,
모든 방법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이라는
말을 정확히 표현하고자 한다면, "하느님과 일치하는 행위"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그것은 정말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
입니다.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특히 "당신의 모습으로
(창세 1,27)" 사람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참 좋아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꼭
드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늘 헤아려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 이것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창조목적"입니다.
훌륭한 성인들이 살아가셨던 저마다의 방법들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결과"들입니다. 성인들도 처음엔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 방법대로 살기 위해 무척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척 힘이 드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순리(順理)대로 살면 힘이 덜 드는 법입니다.
성인들도 순리대로 사시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힘들게 사셨던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했다면, 그리하여
하느님께 먼저 내맡기셨다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었기에 그렇게 힘들게 살지만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훌륭한 성인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몰랐었다고요?" 예,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성인들도 처음엔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르셨을 것"이라고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 내맡기면 순교를 하든, 고행을 하든, 수덕생활을
하든, 자선사업을 하든, 희생생활을 하든, 무엇이든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하려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살면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하느님께서
살아주시기 때문에 힘이 드는 일이지만, 힘이 드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힘이 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1요한 4,20),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順理)"입니다.
아마 잘 모르긴 해도 성인들도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분이 무척 많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뜨겁게 사랑하면, 힘든 일도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이 계셔서 일부러 큰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시겠지요. 그렇지만, 사랑은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은 때로는 힘들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사람은, 그 사랑을 닮은 "작은사랑"입니다.
하느님은 "큰사랑"이십니다.
작은사랑은 큰사랑을 본받아 점점 커져야 합니다.
작은사랑이 큰사랑이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큰사랑에 내맡기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서로의 사랑을 "믿고" 내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랑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샘솟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지 못하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며,그러한 사랑에는 "걱정과 두려움 더 나아가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참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참주인"이십니다.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 내맡기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 내맡기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희망"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둡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올 하느님께 다 내맡길 수 있습니다.
가끔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을 "구속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분도 계시는데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서로에게 구속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에게 묶이고 구속되는 것이 오히려 "자유로운
삶"입니다. 사랑으로 서로에게 묶이길 원하지 않는 사랑은
"거짓사랑"입니다. 거짓 사랑은 "무책임"합니다.
끝이 있습니다. 일시적 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내맡기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자유의 근원이신 당신의 "참사랑이라는 자유"에
묶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를 영원히 행복하게 책임져주십니다.
끝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 자기 뜻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압니다.
서로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인 것입니다.
"왜, 내맡김의 영성이 가장 탁월한 영성인가?"에 대한
답은 "사랑"에 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저에게 가르쳐 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정답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유능하고 특별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더 유리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면, 당신의 뜻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살아주십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
(통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라, 하지말고 하라! 하지마라, 네가 하지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시게 하라!
살라, 삶없이 살라! 살지마라, 네가 살지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사시게 하라!"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서울] 참 고마운 일 ‘인생 작동 시스템’
2013년 다해 2월18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31-46
◆ 참 고마운 일 ‘인생 작동 시스템’
왜 내가 남에게 신경 쓰냐며 따지는 잘못된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돕기는커녕 약자들의 급한 심리를 이용해 갈취하는
사기꾼들이 많습니다. 인생을 돈 되는 일로만 방향 잡는 사람,
악귀 같아도 좋다는 것 같더군요.
인생의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예수님은
알려주셨습니다. 이 두 계명은 조언 명언 그런 게 아닌
‘인생 작동 시스템’이라는 겁니다. 이 두 사랑은 결국
같다는 것까지 가르쳐주셔서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 25,40)”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묵상 글 -
◈ [대구]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
신학생 때 한 달 동안 피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날마다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던 저는
‘하느님이 과연 계시긴 한 걸까?’, ‘하느님이
계시다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 답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고 있는데, 오늘 복음을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뚜렷하게 제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는데, 40절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구절과 45절의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두 구절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뒤의 구절에는 ‘형제’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형제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40절에 의하면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해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잘못하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45절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가장 가까운 형제들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예수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나한테
하지 않은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형제’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에게 잘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에게
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까이 있는 형제들에게 해준 보잘것없는 것도 주님께 해주는
것이 되는 반면에, 가까이 있는 형제들에게는 그만큼 소홀하고
못할 수 있기에 형제들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해주지
않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다가 소홀하기 쉬운
가까운 형제들에게 무언가를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벌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얼마나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입니까! 이 말씀이 제 가슴을 파고들어 어떡해서든
우리를 더 사랑해 주시고 끝까지 구원하시려고 애쓰시는
주님의 모습이 떠올라 감격에 겨워 그 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존재와
당신의 사랑을 저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 곁에서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당신 말씀에 귀
기울이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성체가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그분의 몸이라면, 성경은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분의
음성이자 그분의 말씀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성경을 꾸준히 읽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주요한 신부(대구대교구 효성중학교 교목실장) -
◈ [기타] 허윤석 신부의 오늘 강론
제목 : 베풀고 살아야 한다.
2013년 다해 2월18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31-46
베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바로 우리가
마지막 날 미사때 듣는 복음입니다.
즉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장례미사때의 복음입니다.
토스트 예프스키의 작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두수선공 노인은 죽기전 예수님을 보려고 기도했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내일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 말씀에 잠을 설친 노인은 일찍부터 광장에 있는
구두수선가게의 문을 열었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광장을 보았습니다. 이른 아침 어는 거지
아이가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덜덜 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음 착한 그는 자신의 가게로 그아이를 데려다 따뜻한 물을
주고 신을 고쳐주었습니다. 거지 아이는 고마움을 표현한체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목빠지게 기다린
노인은 그만 화가 났습니다.
그날밤 예수님이 꿈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오늘 안오셨나구 말이죠!
예수님의 말씀! “어 오늘 갖다왔는데 ....... 내 신발도
고쳐주었잖아!”
얼마나 베풀고 사는냐가 행복의 척도고 얼마나 예수님을
만났는가의 회수입니다.
회복의 시간 Hora Recreationis
http://cafe.daum.net/credohur1004
- 허윤석 신부의 오늘 강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