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기적이었어요. 1,300여년이나 지났는데도 녹이 슨 흔적도 없다뇨. 원래 청동제품도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스는데, 이 향로는 오랜 세월동안 물속에 잠겨 있어 부식을 피한 겁니다”
다음날 새벽 부리나케 현장으로 달려간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숨도 멎는 듯했다. 향로는 10일간의 철저한 긴급보존처리를 마친 뒤 22일 현장설명회를 통해 공개됐다.
◇살아숨쉬는 듯한 용과 봉황=향로의 이름은 정양모 관장이 지은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였다.
“향로의 받침엔 龍, 꼭대기엔 鳳이 장식됐잖아요. 또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蓬萊·方丈·瀛洲) 중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향로는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었다. 이를 세분하면 뚜껑장식인 꼭지와 뚜껑, 몸체와 받침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 꼭지는 봉황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나가는 구멍, 즉 배연공(排煙孔) 3개가 마련돼 있다. 뚜껑의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 동고(銅鼓), 종적(縱笛), 소(簫)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다.
또한 뚜껑 전체가 4~5단의 삼신산의 형태이다. 신선들만 살고 있다는 전설의 중국 봉래산을 연상케한다. 이는 첩첩산중의 심산유곡을 이룬 자연세계를 표현한 것.
그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즉 74개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현실세계의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물·동물상은 오른쪽~왼쪽으로 진행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몸체는 연꽃잎 8개씩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잎의 중앙과 연꽃잎 사이 사이에는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돼 있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는 물고기·신조(神鳥), 신수(神獸)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했다. 각 연판은 그 끝단이 살짝 반전돼 있는 게 얼마나 절묘한지.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다. 특히 승천하는 듯, 몸을 빳빳이 세운 격동적인 자세의 용은 백제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흥분한 한·일 언론=유물이 공개되자 12월23일자 주요 일간지는 향로기사로 도배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언론들도 이 사실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며 흥분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향로는 물론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체 높이 62.5㎝가 넘는 이 엄청난 대형 향로가 발견된 예는 없었다. 그러니 능산리 출토 향로는 분명 세계 최대의 금동향로였다. 향로는 인도·중국 등 동양 여러 나라에서 냄새를 제거하거나, 종교의식을 행하거나, 아니면 구도자의 수양정진을 위해 향을 피웠던 그릇. 중국에서는 훈로(薰爐) 또는 유로(鍮爐)라고도 한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백제의 이 금동향로는 중국의 박산 향로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해석한다. 박산(博山)은 중국 동쪽에 불로장생의 신선과 상서로운 동물들이 살고 있다는 상상의 이상향. 박산향로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박산, 즉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향로를 말한다.
향로는 중국 전국시대 말에서 한나라 초인 기원전 3세기대부터 만들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박산향로로 부르게 된 것은 남북조 시대인 6세기쯤부터였다. 그렇다면 이 향로는 언제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과연 백제가 만든 향로인가 등 갖가지 궁금증을 낳았다.
발굴단은 언론에 공개할 당시 6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고 밝혔고, 당시 아울러 일본의 모 학자는 5세기 말~6세기 초 설을 주장했다.
그후 백제의 불교예술전성기와 도교가 융성할 시기가 부여에 천도한 후 안정기를 맞은 7세기대 전반기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어 제작 역시 중국산이라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다만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볼 때 백제가 패망할 당시 긴급히 묻고 떠났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일치하고 있다.
◇중국향로 수준 뛰어넘는 세계 최대·최고의 걸작=1995년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은 금동대향로의 제작 연대를 추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 사리감 제작시기가 위덕왕 때(서기 567년)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리감은 목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심초석(心礎石)에서 발견됐다. 이로써 그때까지 공방으로 추정하던 건물터가 사실은 백제왕실의 명복을 비는 사찰 터였음을 밝혀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향로가 백제가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후의 백제왕들 내지는 최고의 귀족급 무덤들이 있는 능산리고분군과 접해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의 힘찬 기상과 용의 발톱이 5개라는 점은 백제왕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천자를 상징하는 용의 발톱이 5개, 우리나라 임금은 4개, 일본은 3개라는 설이 고건축 전문가들 사이에 그럴듯하게 퍼져 있다.
이제 조심스럽게 추론하자면 이 향로는 어디까지나 중국 박산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백제인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 오히려 중국의 수준을 뛰어넘은 작품임이 분명하다.
연대는 역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후반, 즉 위덕왕(재위 554~597년)때 만들어 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향로의 해외반출 절대불가’=금동대향로를 둘러싼 일화 한토막. 지난해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기념하는 ‘국보급 유물 교환 전시전’을 열 때 일본측은 일본에 전시할 우리측 보물 중 백제금동대향로를 첫손으로 꼽고 이 유물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해외전시를 위해선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
그런데 위원회에 참석, 한·일양국의 교환유물 목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안휘준 선생(서울대 교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안됩니다. 우리도 해외전시를 금지시킬 중요한 유물 한 두 점은 보유해야 합니다. 백제금동대향로와 임금님의 초상화인 영조어진은 안됩니다”. 이난영 선생(동아대 명예교수) 등도 ‘해외반출불가론’에 합류했다. 일본의 경우 이른바 천황의 초상화 등 천황 관련 유물은 해외전시를 불허한다. 전시 포스터 모델로 ‘백제금동대향로’ 사진을 놓고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치려던 일본측이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그만큼 일본도 백제금동대향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발굴 10년이 지났어도 아직 이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오는 11월 13~15일 대전과 부여에서 발굴 1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이번 기회에 베일에 싸인 백제금동대향로의 신비를 한꺼풀씩 벗겨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유전/고고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