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순 시집 {따뜻한 모서리} 출간
민정순 시인은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고, 2015년 월간 {한맥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디카 시집 {시어詩語 가게}와 {따뜻한 모서리}가 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밀양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탈현대를 지향하는 이성의 시대. 다시 서정으로 돌아가려는 시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민정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따뜻한 모서리}는 전위적인 시를 밀어내고 편안한 시세계를 지향한다. 시에서 절제되지 않는 감상주의나 친절한 화자 개입은 독자의 상상력을 침범하여 시의 탄력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녀의 시편들은 시적 일상의 진정성이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어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긴장감의 여백을 순순히 풀어낸다.
민정순의 시는 구석진 곳을 채우거나 흐린 곳을 밝히는 긍정의 힘을 배태하고 있다. 시인의 시선은 울퉁불퉁한 손마디에 세월을 입은 채 ‘손두부를 파는 할머니’나, 구석진 동네 어귀에 세워둔 트럭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생선장수 노인의 팔리지 않는 생선’ 또는 늘 그 자리에서 지워진 기억을 캐고 있는 ‘치매 걸린 할머니’를 향한다. 이처럼 ‘손수레’가 지나가도록 골목 끝에서 오래 “비켜설” 줄 「스쳐가는 길」아는 시인의 지향점은 아프거나 쓸쓸한 것들을 돌아보고 배려하는 근원으로 향한다. 다음의 시 「마타리꽃」에서는 공동체의 울타리에서 내미는 손길을 잡을 수 있다.
세월의 울타리 안에서/ 곱게 물들어가던/ 마타리꽃이 서럽다// 건너온 시간을 봉인한 채/ 비바람에 후드득 떨어진/ 꽃잎의 낱장// 가을녘 예고 없이 찾아온/ 공포의 덫에 걸려// 잃어버린 행간마다/ 캄캄한 파열음// 늘 거기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 늙은 마타리꽃이/ 지워진 기억을 캐고 있다
- 「마타리꽃」 전문
‘마타리’는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노란 마타리는 여름이면 산과 들로 번져가는 야생화로 생명력이 강해서 잘 자란다. 시인의 시선은 “늘” 같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지워진 기억”을 캐고 있는 할머니에게로 향하고 있다. “세월의 울타리 안에서 곱게 물들어가”던 늙은 마타리꽃은 점점 사위어가는 할머니를 대신해 서러운 생명체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할머니는 “예고없이 찾아온 공포의 덫” ‘치매’라는 세월의 “비바람”에 삶의 “낱장”마저 “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잃어버린 생의 행간마다 “캄캄한 파열음”으로 가득하다.
치매는 마음이 지워지는 정신적 추락을 의미하며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기 힘든 상태가 된다. 치매는 병을 앓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치명적인 고통을 주는 무서운 질병이다. 시인은 늘 같은 그 자리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캐내듯 호미질을 하고 있는 치매 할머니를 자주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늘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간을 뿌리내리는 마타리꽃을 떠올린다. 저 할머니에게서 가정을 이루며 자식을 키우고 강하게 한 세상을 지켜온 우리의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 아닐까? 야생으로 자라는 마타리꽃이 들판에서 꽃대를 뻗어가는 모습은 할머니가 “지워진 기억을 캐”기 위해 시간을 뻗어가는 모습과 대비된다.
이 시는 마타리꽃과 치매 할머니가 오버랩되는 이미지를 통해, ‘캄캄한 파열음’을 캐고 앉아 있는 마타리꽃이 될 수도 있을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 상념에 젖게 한다. 시인의 시선은 타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다음 시편들에서도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인의 성정과 깊은 시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민정순 시세계에서는 일상에서 발견하는 생명의 진리를 또 다른 일상에게로 옮겨간다. 아래의 시편들에서는 노점상에서 ‘손두부를 파는 할머니’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녀와 이웃인 ‘옥이 엄마’의 서사가 펼쳐진다.
밤새운 어둠을 하얗게 빚어/ 노점상에 진열해놓고// 조그마한 나무 조각에/ 할머니 미소 같은 문패// 두부 사가세요 손두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붙박이 삶을 꾸린 햇살 그늘/ 오래 말랑하다
-「할머니와 손두부」 부분
그녀는 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을까// <중략>//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녀/ 마을 공터 소문을 휘젓고 다닌다
- 「허공의 소문」 부분
오일장 한 모퉁이에/ 옥이 엄마도 푸성귀 몇 소쿠리/ 정갈하게 펼쳐 놓았다/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고/ 놀면 뭐 하노/ 심심해서 세상 구경 나왔다/ 환하게 웃으시는,
- 「오일장」 부분
시인은 손두부를 파는 할머니의 붙박이 자리에서 “두부 사가세요 손두부”라는 나무 문패를 본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손수 만든 손두부를 팔아 사각의 가계를 이끌어나갔을 울퉁불퉁한 손마디를 “꽃으로 피었”다는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이웃의 모습에도 시인은 손을 내밀어 그들의 배경이 되기를 자초한다. 시인의 심사는 “낮은 밀차를 끌고 대구역 근처로 푸성귀를 팔러가는 ‘청도댁 할머니’에게로 이어진다. 푸성귀를 담은 밀차와 기차에 오르는 ‘청도댁 할머니’를 뒤에서 앞에서 밀어주고 올려주는 마음이 담긴 ‘이응’ 속에는 타자와 약자를 편견 없이 포용하는 시인의 둥근 자세가 담겨 있다.
시인의 내면 깊숙이 흐르는 여린 성정은 다음 시 「오일장」에서도 이어진다. ‘옥이엄마’는 이웃이다. 시인은 장날 어느 “모퉁이”에서 옥이엄마를 만나게 된다. 옥이엄마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장성한 자식들을 독립시킨 후 “푸성귀 몇 소쿠리 펼쳐놓”고 장터에 앉아 있다.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은 정갈한 모습의 옥이엄마는 “심심해서 세상구경 나왔”노라며 시인을 반긴다. 시인은 “볕 한줌”씩 얹어놓은 옥이엄마의 소쿠리를 보며, 옥이엄마의 모습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허공의 소문」에서도 시인은 “한쪽 날개가 꺾”여 ‘불구가 된 비둘기’에 대한 소문으로 말문을 연다. 비둘기는 왜 한쪽 날개가 꺾인 걸까? “나무에서 떨어졌”거나 “태어나면서부”터 불구이거나, 먹이를 구하려다 “돌멩이에 맞았”다는 등 무성한 풍문이 떠돌아다닌다. 우리가 살아가는 “슬픈 생존의 바닥 도처”에는 예견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린다. 그래서 삶은 더욱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불현듯 덮쳐오는 공포스런 사건들 앞에 서면 연약한 인간의 실존에 대해 돌아볼 수밖에 없다.
비둘기 사건은 “그녀”에게로 전이된다. 시인은 “창문 밖으로” 투신한 그녀의 비보를 접한 후 착찹한 심경이 된다. 사실 시인은 ‘그녀’와 생면부지의 관계다. 풍문으로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녀’는 “인테리어”도 하고, “살림살이도 새 것으로 장만해놓”고 부부가 잘 살 일만 남은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갑작스럽게 몰아친 불행이 믿기지 않는다. 다만 “공사로 인한 소음으”로 이웃과의 갈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무슨 연유일지 시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녀’가 놓친 행복한 시간의 여운을 곱씹어본다. 그래서 시인은 “마을공터 허공을 휘젓고 다”니는 소문에 걸어둔 안타까운 시선을 거두지 못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이 바라보는 시선은 불구이거나 약하거나 여린 타자를 향한 포용과 배려의 시선으로 집약된다. 사람 냄새 물씬한 구배기의 정 넘치는 할머니와(「구배기에 가면」), 골목시장 참기름집 할머니를 통해 흔들리는 마음 자락들을 다잡아 빈 자리를 채워준다.(「골목시장」) 또한 시인은 좁은 골목에서 손수레를 밀고 오는 노인을 위해 한켠 자리를 비켜 기다려주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그들이 주고받는 고맙다는 인사가 골목길을 환하게 지펴줄 수 있는(「스쳐가는 길」) 이유는 시인이 한 걸음 뒤에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대자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한 온화한 시선을 일체유심조의 마음으로 지켜나가는 시인의 모습이 아름답다.
온기의 바깥을 살아낸/ 작은 새// 지친 하루를 접어/ 아득한 허공으로 앉았다// 가녀린 외줄 끝자락으로/ 환한 달이 따라간다// 낯선 줄타기는/ 외롭고 난해한 모서리를/ 견뎌내는 일// 먼 데서 나에게로 오시며/ 토닥토닥,//괜찮다 걱정하지 말라/
마음자리 닦아주시는,
---민정순 시집, {따뜻한 모서리},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