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 강릉(江陵)
<5> 허균의 누실명(陋室銘)
교산 허균(蛟山 許筠) / 교산시비 누실명(陋室銘) / 허씨 5문장 시비(竹枝詞/초당)
허균은 한시도 많이 남겼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에서 사천(沙川) 애일당(愛日堂) 외가집 터 비석에 새겨져 있는 허균의 한시 누실명(陋室銘)을 감상해 보자.
이 시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피난길에서 돌아와 보니 어린 시절, 자주 와서 외사촌 형들과 즐거운시간을 보내던 추억이 있는 곳인데 그 사천 외갓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자 서글픈 마음에서 그곳에 임시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지은 시라고 한다. 그 집터가 외할아버지의 호인 애일당이다.
시비(詩碑)에는 앞부분은 없고 酌茶半甌(작다반구)~~부터 뒷부분만 씌어있다.
왜 그랬을까? 조금 글씨를 작게, 비석을 옆으로 길게 하더라도 전문(全文)을 다 올렸으면 좋았을 것을....
누실명(陋室銘)<누추한 집에서> - 허균
房闊十笏南開二戶(방활십홀남개이호) 午日來烘旣明且照(오일내홍기명차조)
넓어야 10홀 방에 남으로 문짝 두 개 열렸네. / 한낮 해가 와서 쬐니 환하고도 따뜻하네.
家雖立壁書則四部(가수입벽서칙사부) 餘一犢鼻唯文君伍(여일독비유문군오)
벽만 세운 집이지만 사부서(四部書)를 갖추었네. / 쇠코잠벵이 한 사람만 탁문군(卓文君)의 짝이로세.
酌茶半甌燒香一炷(작다반구소향일주) 偃仰棲遲乾坤今古(언앙서지건곤금고)
차를 반쯤 따라놓고 향(香) 한심지 살라보네. / 눕고 엎드려 느릿느릿 건곤과 고금일세.
人謂陋室陋不可處(인위누실누불가처) 我財視之淸都玉府(아재시지청도옥부)
남들이야 누추해서 살 수 없다 말하지만 / 내 이를 볼진대는 청도와 옥부로다.
心安身便孰謂之陋(심안신편숙위지누) 吾所陋者身名竝朽(오소누자신명병후)
맘 편하고 몸 편하니 누추하다 뉘 말할까 / 내게 진정 누추한 건 죽음 뒤의 이름 썩음
憲也編蓬潛亦環堵(헌야편봉잠역환도) 君子居之何陋之有(군자거지하누지유)
원헌은 집이라야 쑥대 엮고, 도연명은 담만 둘렀지 / 군자가 산다하면 누추함이 어이 있으리
【시어(詩語) 해석】
<2連> 書則四部(서칙사부)는 경서(經書), 사서(四書), 제자(諸子), 시문집(詩文集)을 묶어 부르는 이름
餘一犢鼻(여일독비)를 쇠코잠벵이라 함은 독(犢)은 송아지, 비(鼻)는 코. 즉 송아지 코
唯文君伍(유문군오)의 卓文君(탁문군)은 서한(西漢)의 미모가 뛰어났던 여인으로 문재(文才)였다.
<3連> 酌茶半甌(작다반구)에서 구(甌)는 ‘사발 구’이니 半甌(반구)는 ‘반 사발’이라는 뜻
乾坤今古(건곤금고)에서 乾坤(건곤)은 하늘과 땅, 今古(금고)는 현재와 옛날이니 우주삼라만상
<4連>淸都玉府(청도옥부)의 淸都(청도)는 옥황상제가 사는 곳, 玉府(옥부)는 신선들이 사는 궁궐
<6連>憲也編蓬(헌야편봉)은 공자의 제자 원헌(原憲)이 쑥(蓬)으로 둘러친 오두막에서 살았다.
潛亦環堵(잠역환도)는 중국 송대(宋代)의 대시인이었던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이 잠(潛)이다.
<6> 난설헌의 죽지사(竹枝詞)
난설헌은 수많은 한시(漢詩)와 그림(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도 남겼는데 난설헌 기념관 뒤 솔밭 속에 있는 ‘허씨 5문장 시비(許氏五文章詩碑)’에 적혀있는 한시 ‘죽지사(竹枝詞)’를 감상해 본다.
난설헌의 죽지사 중 첫째 연 ‘空舲灘口(공령탄구)~~’와 둘째 연 ‘瀼東瀼西(양동양서)~~’는 중국 명대(明代) 여류시인 성씨(成氏)의 작품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3,4연 만 난설헌의 진짜 작품인 셈이다.
이 시를 두고 남의 시를 차용(借用)했다고 이러쿵저러쿵 말들도 조금 있는데 뭐 그럴 수도 있지... ㅎㅎ
‘초당 허씨 5문장 시비’에도 뒷부분인 3연과 4연만 적혀있다.
竹枝詞(죽지사)
空舲灘口雨初晴(공령탄구우초청) 巫峽蒼蒼煙靄平(무협창창연애평)
공령탄 여울목 어귀에 비가 막 개이니 / 무협 골짜기엔 안개구름이 깔려 있네.
長恨郞心似潮水(장한낭심사조수) 早時纔退暮時生(조시재퇴모시생)
오랜 한에 젖은 임의 마음 밀물과 같이 / 아침 시간에 잠깐 물러가고 저녁때에 오셨으면
瀼東瀼西春水長(양동양서춘수장) 郞舟去歲向瞿塘(낭주거세향구당)
양동과 양서에 봄 강물은 넘쳐나고 / 임을 실은 배는 구당협으로 떠났다오.
巴江峽裏猿啼苦(파강협리원제고) 不到三聲已斷腸(부도삼성이단장)
파강의 골짜기에 원숭이 울어대는데 / 세 마디도 못 들어 이내 간장 끊어지네.
家住江陵積石磯(가주강릉적석기) 門前流水浣羅衣(문전유수완라의)
나의 살던 곳은 강릉의 돌 쌓인 갯가여서 / 문 앞의 냇물에 비단 옷을 빨았지요.
朝來閑繫木蘭棹(조래한계목란도) 貪看鴛鴦相伴飛(탐간원앙상반비)
아침되면 한가로이 목란배를 매어 놓고 / 짝지어 나는 원앙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지요.
永安宮外是層灘(영안궁외시층탄) 灘上舟行多少難(탄상주행다소난)
영안궁 밖은 층층이 여울인데 / 여울로 배가 다니려니 어렵기도 했답니다.
潮信有期應自至(조신유기응자지) 郞舟一去幾時還(낭주일거기시환)
밀물은 기약이 있어 스스로 응하지만 / 한번 가버린 임의 배는 언제나 돌아올까.
【시어(詩語) 해석】
◆ 죽지사(竹枝詞)는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지방의 민속을 소재로 해서 칠언절구 형태의 시를 지은 것이 효시(嚆矢)인데 이후 지방의 민속을 소재로 칠언절구 형태의 시가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죽지사가 유행하여 많은 작품이 나왔는데 우리나라의 경치, 풍속, 인정 등을 노래한 죽지사가 나왔고, 이것을 모아 정선(精選)한 것이 조선시대 십이가사(十二歌詞)로, 민속악의 요성법(搖聲法)과 가성(假聲)을 사용하여 부르는 창법(唱法)으로 많이 불렸다.
◆ 조선(朝鮮) 12가사(十二歌詞)
가사체(歌詞體)인 3․4조나 4․4조를 기조(基調)로 하는 내용에 적당한 곡을 붙여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조선 12가사(歌詞)를 보면 수양산가(首陽山歌), 어부사(漁父詞), 춘면곡(春眠曲), 죽지사(竹枝詞), 권주가(勸酒歌), 황계사(黃鷄詞), 양양가(襄陽歌), 매화타령(梅花打令), 상사별곡(相思別曲), 처사가(處士歌), 백구사(白鷗詞), 행군악(行軍樂)이 그것인데 음계는 대개 계면조(界面調)로 이루어진 향제(鄕制)에 속하며 대부분 굿거리장단의 변형인 6/4박자의 도드리장단이다.
◆공령탄(空舲灘)은 중국 후난성(湖南省) 북쪽에 있는 여울이고 무협(巫峽)은 쓰촨성(四川省)과 후난성(湖南省) 사이에 있는 무산(巫山)의 골짜기이다.
◆파강(巴江)은 쓰촨성(四川省)에 있는 강으로 장강삼협(長江三峽)의 한 줄기인데 가슴 아픈 고사가 얽혀있다. 진(晉)나라 환온(桓溫公) 장군이 배를 타고 촉(蜀)으로 가다가 장강 중류의 삼협(三峽)을 지나게 되었는데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가면서 보니 원숭이 어미가 강안(江岸)에서 울며 백여 리를 뒤따라와 배 위에 뛰어오르자마자 혼절하고 말았다. 원숭이의 배를 가르고 보니, 창자가 모두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이것이 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지다.)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영안성(永安宮)은 중국 쓰촨성(四川省) 펑제현(奉節縣)에 있는 성(城)으로 유비가 임종을 맞은 백제성(白帝城)의 다른 이름이다. 성 아래로는 장강삼협(長江三峽) 중 천하절경(天下絶景)으로 꼽히는 구당협(瞿塘峽)이 흐른다. 이 구당협(瞿塘峽)이 중국 제일의 절경으로 중국지폐 10위안(元) 권(券) 인민폐 뒷면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내가 장강삼협 크루즈여행 할 때 백제성 앞에서 관광객들이 인민폐를 들고 실제 풍경과 맞추어보던 모습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