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
얼마 전, 서울 신학교 동창 신부 한 명이 자신의 본당 교우들과 함께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 역시 그 동창 신부를 보면서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기억 중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 신부의 부정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은 ‘저 친구, 그때는 그렇게 철부지 같더니만, 지금은 너무 의젓하네. 저렇게도 변할 수 있는거야?’라는 것이지요.
하긴 제 동창들도 저를 보고는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너 그때는 그렇지 않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니?”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만남의 시작은 어쩌면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아니었나 싶네요. 즉,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떠올리다보니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다툼과 아픔과 시련이 함께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조금만 더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조금만 더 좋은 모습을 바라보려고 애쓴다면, 어쩌면 이 세상에 다툼이라는 것도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더 위에 있다는 이기심입니다. 즉,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낫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이기심 때문에 우리들은 그 사람의 부정적인 모습을 먼저 바라보고, 때로는 무시하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이기심이 내게 이익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을껄요?
오늘 복음을 잘 보면, 임금이 세 번이나 초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성서에서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잔치를 베풀기 전에 초대장이나 어떤 언질을 보냈겠지요. 그리고 복음에도 나오듯이 종들을 보내어서 정중히 초청 받은 사람들을 다시 부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잔칫상을 차려 놓고서 이들을 다시 부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떻게 하지요? 핑계를 대지요. 밭으로 가기 위해서, 또 장사를 하러 가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핑계 댈 것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종들을 붙잡아 때려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임금이 이렇게 세 번이나 초대했는데 이를 거부하는 것이 커다란 실례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거부하는 이유는 임금의 말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임금보다 더 낫다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서 감히 어떻게 임금님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도 이 종들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초대를 얼마나 많이 거부하고 있습니까? 특히 그 이유들이 얼마나 사소한가요? ‘시간이 없어서, 다른 큰 일이 있어서, 귀찮아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그 초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이웃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나의 이기적인 모습들이, 하느님께 보이는 이기적인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초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홀히 하시겠습니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당신 나라로 초대하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들은 얼마나 제대로 응답하고 있었는지요? 만약 계속해서 내 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응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대방은 나보다 무조건 낫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만납시다. 그분은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빠다킹 신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강영구신부-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그대에게
오늘 아침 시인 천상병의 ‘귀천(歸天)’이라는 시(詩)를 같이 읽고 싶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우리 인생은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한 방울의 이슬입니다.
한 방울의 이슬은 허무한 것 같지만 진주보다 더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서쪽 하늘에 노을 빛 물들 때까지
이승의 기슭에서 서로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다가
구름이 손짓하면
소풍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처럼 기뻐하며 하늘나라로 가면 됩니다.
거기 하느님께서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행복했더라고, 허망하지도 허무하지도 않았더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승의 아름다운 삶을 선물 주셨습니다.
그 삶이 끝나는 순간 저승에서의 혼인잔치에도 초대하십니다.
“예, 감사합니다.”하고 그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한 주님의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옷은 우리 마음의 징표
-최영균 신부-
인간은 때와 장소에 따라 옷을 선택해서 입지 아무렇게나 입는 경우는 없습니다.
의복이라는 것이 단순히 추위와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옷에는 그러한 물리적 기능 이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조문을
갈 때는 검은색 옷을 입고 결혼식에는 화려한 예복을 입습니다. 운동할 때는 편한
운동복을 고 격식 있는 자리에는 점잖은 옷을 입습니다. 굳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들 때와 장소에 맞추어 한결같이 입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장소나 모임의 성격에 맞추어 옷을 입지 않고 온 경우 스스로 어색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의복은 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그 사람이 앞으로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이 걸쳐야 하는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작은 행동들뿐 아니라 우리가 입고 있는 옷 하나하나가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줍니다. 사람들은 형식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하느님께 대한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지 외적인 것은 부수적인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의 결의와 마음은 대단한 깨우침을 통해 갑자기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것 하나하나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정성을 다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몸짓과 말, 심지어 옷 입고 걷는 것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닐는지요.
-이 안나마리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
말씀은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겠다. 2-7절의 왕의 아들 혼인잔치에 정식으로 초대된 사람들의 이야기, 8-10절 처음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지 않았으나 급하게 길에서 불려와 잔치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11-14절 왕이 결혼잔치 자리에서 결혼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내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하늘나라는 어떤 임금이 아들 혼인잔치를 베푼 것과 같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왕은 종들을 보내어 초대받은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오게 했다. 황소들과 살진 짐승들을 잡아 모든 것이 넉넉히 준비되어 있는 이 잔치에서 아들의 혼인을 기뻐하며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고 초대한 것이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왕의 잔치 초대에 비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다. 한 사람은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가게로 간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초대받은 이 잔치가 누구의 잔치인지, 또 누구의 초대인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밭에 가고 가게에 가는 매일의 일상을 계속하고 싶고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더구나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욕하고 죽였다는 사실을 보면 그들이 받은 이 초대가 명예롭고 감사로운 초대가 아니라 오히려 귀찮고 방어해야 할 어떤 의무 또는 요구로 들렸던 것 같다. 나아가 적대감마저 보인다.
그러자 왕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는 종들에게 말한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자격이 없구나.” 모든 것을 준비하고 초대한 왕의 호의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그들 스스로가 왕자의 혼인잔치에 함께 앉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확증한 셈이다.
상황은 무척이나 어려워지고 있다. 온 고을이 초토화되는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렇게 왕의 진노는 컸다. 그러면서 계속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더 보여주고자 하는 듯하다. “네거리로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잔치에 초대해라.” 길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데려오라는 말이다. 결국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가 혼인잔치에 초대되는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모든 이에게 열린 잔치 초대는 세리와 죄인 그리고 창녀들한테까지 열렸다. 이런 의미에서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할 자격은 이런저런 조건을 갖출 필요 없이 누구에게나 기우는 하느님의 마음에 달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열린 초대에 비하여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어진다.
네거리에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모아들인 손님들 중에서 임금은 혼인잔치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을 가려내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쫓아내라.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며 상당히 심한 꾸중을 하고 있다. 말씀은 설명을 더해 “그는 말문이 막혔습니다”라고 그 사람의 당혹스런 사정을 기술한다. 그가 벌을 받은 까닭은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받아 들어온 그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들어온 처지인데 결혼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았음을 추궁받고 있는 것이다.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풀고 초대하였던 임금의 넉넉한 품으로 보아 이렇게 극적인 처사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분은 아들의 잔치에 모든 것을 준비하고 모든 이에게 이 훌륭한 잔치 기회를 열어준 임금이다. 그런 임금이 결혼예복을 갖추어 입기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예복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가? 성서 여러 곳에 옷에 대한 표현이 있다. 새로 빤 옷(묵시 22,14), 흰옷(묵시 3,4-5.18). 빛나는 고운 모시옷(묵시 19,8)에 관하여 말하면서 하느님이 주시는 의로움의 옷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사용한다. 하느님은 구원하실 사람들을 구원의 혼인예복으로 갈아입히신다. 낡은 옷과 새 천 조각(마르 2,21), 방탕한 아들에게 새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하느님의 자비(루가 15,22)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의로움의 깨끗한 옷을 마련해 주신다. 홍수가 있기 전에, 잔치에서 손님들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지기 전에, 바로 오늘 회개의 옷을 준비하여 입기를 요구하고 계신다. 홍수는 예고 없이 닥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날을 마주하기 전에 미리 그 상황에 대비하여 회개의 옷을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온 마음으로 초대하시는 하늘나라의 잔칫상에 들어와 함께 있자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다지도 하늘 잔칫상에 우리와 함께 앉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것이다.
말씀을 읽어가는 동안 어느덧 내가 받은 초대를 생각하게 된다.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로 나를 초대하시고 더구나 당신의 자녀로 그 품격을 들어올려 주신 하느님이시다. 나의 삶 전반에 걸쳐 소리쳐 부르시는 초대다. 그러나 이러한 초대를 받았음에도 매일의 상황에서 내가 둘러대는 핑계 역시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핑계이고 하느님의 은혜롭고도 황공한 초대에 대해 불손하기만 한 나의 행동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손길을 진심으로 믿고 감사하며, 그분의 엄청난 사랑의 초대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회개의 옷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그분 잔칫상에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이 마련하신 행복의 잔칫상을 받고 누리는 우리의 행복일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로 세례받은 나의 신분을 다시 깊이 묵상하자. 일상에서 이 은총의 초대를 아랑곳하지 않음은 주신 분을 모독하는 처사임을 기억하자.
* 이 본문에 나오는 성서 구절은 200주년 기념 성서를 인용했음.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양승국신부-
<옷을 잘 입읍시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예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강한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앞으로 이런 자리 올 때는 신경 좀 쓰라’ ‘나가서 옷 좀 갈아입고 와라’는 정도의 훈계가 아니라 창피하게도 혼인잔치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옷에 대해서, 외모에 대해서 거의 신경 쓰지 않는 편입니다. 신경 쓸 겨를이 없을뿐더러, 써봐야 ‘그게 그거라서’ 그렇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등산을 갔었는데, 등산로 초입에서 꼬치어묵을 사먹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주인아저씨가 너무 바쁜 것 같아서, 제가 직접 국자를 들고 우리 아이들 먹을 것을 퍼주고 있을 때였습니다.
일단의 등산객들이 갑자가 우르르 몰려들더니 “야, 저거 맛있겠다!”하더니...저한테 그러는 겁니다.
“주인아저씨, 이거 하나에 얼마 씩이예요? 여기 화장실은 어디 있나요?”
내일부터 옷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장소에 맞는 옷을 적절하게 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특히 장례식이나 결혼식과도 같은 중대사에 참석할 때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예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합니다. 혼인은 인생의 여러 단계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무엇보다도 기쁨의 잔치입니다. 축복의 잔치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에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연히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평소 잘 안 입던 예복도 꺼내 손질해야 합니다. 헤어스타일도 한번 점검해봐야지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바지에 멜빵에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분명히 ‘몰상식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입니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이 동네 공원 산책 나온 사람처럼 트레이닝복을 입고 왔다면 분명 ‘약간 맛이 간’ 사람으로 눈총을 받을 것입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아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인 채 혼인잔치에 참석한다면 잔치 주인공의 기분이 ‘팍’ 상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를 위한 예복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입는 예복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가장 어울리는 예복은 바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란 예복입니다. ‘희생’이란 예복입니다. ‘겸손’, ‘자선’, ‘기도’란 예복입니다. ‘고통의 적극적인 수용’, ‘십자가를 기꺼이 수락함’이란 예복입니다. 또한 예복은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안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말씀하시길, 예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사람들이란 ‘거짓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임금으로부터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잔치에 올 때 예복을 제대로 입지 않고 온 사람은 한량없는 사랑을 베푼 임금에게 거짓 사랑으로 응답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예복 중에서도 가장 값진 예복, 예복 중에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이란 낡은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예복, 가장 값진 예복을 입었던 사람이 한 분 계신데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몸을 온통 오직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으로 치장한 분이었습니다. 예복 중에 가장 빛나는 예복, 구원의 빛나는 겉옷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온 생애를 단장한 왕후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천상잔치에 무상으로 초대하십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티켓 비용도 받지 않으시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은혜로운 초대, 도에 넘치는 과분한 초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죄가 많다하더라도, 아무리 형편없다하더라도 관대한 마음으로 우리를 당신 생명의 잔치로 초대하십니다.
이토록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 앞에 우리가 할 일은 기쁜 마음으로 잔치에 참석하는 일입니다. 정성껏 준비한 예복으로 갈아입는 일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속에 찌든 낡은 예복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랍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경규봉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고대 국가에서 임금은 나라의 주인이다. 나라 안의 모든 것은 임금의 것이며, 임금은 그 나라 안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한 임금에게 왕자의 탄생과 성장은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다. 왕자는 자신의 상속자이며 자신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자신의 가문을 계속하여 빛내줄 것이다. 그러한 왕자가 장성하여 혼인을 하게 되었으니 임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온 왕궁은 기쁨으로 가득하여 경사스러운 혼인 잔치를 준비하였다. 기쁨이 가득한 임금은 왕자의 혼인과 잔치에 정성을 다하며 친히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 드디어 왕자의 혼인날이 왔고, 임금은 혼인잔치를 시작하기 위하여 종들을 시켜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다. 대부분 부자들의 잔치는 날짜를 정하고 종들을 보내어 미리 손님을 청하지만 시각은 알리지 않고 준비가 마쳐지는 대로 그날에 종들을 다시 보내어 인도하여 오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더구나 왕자의 혼인은 나라의 대사이므로 이런 절차들이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왕궁의 행사에는 아무나 초청하겠는가! 아니다. 일반 백성을 초청하지 않는다. 적어도 초청받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백성을 대표하는 고관대작들이거나, 어느 정도의 지위가 있고, 품위와 덕망이 갖춰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초청받은 그들은 임금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려하지 않았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이 나라의 주인인데, 그 주인의 초청에도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란이나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조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임금에 대한 반역과 같다. 그런데 막상 혼인잔치가 임박하자 그들은 태도를 돌변하여 참석하기를 거절했다. 임금은 당연히 분통을 터뜨릴 만했다. 당장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의 죄를 묻고 그들을 처단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임금은 경사스런 잔치이기 때문에 꾹 참고, 잔치를 위해서 양질의 음식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정성껏 준비했다. 그리고 혼인잔치가 시작하기 직전에 종들을 다시 한 번 보내어 참석하도록 간청했다. 주인인 임금이 자신의 종과 같은 부하들에게 간청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임금의 초청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어떤 사람은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그러니 임금이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은 곧 임금에 대한 모욕을 넘어선 반역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왜 그들은 임금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왕이 자신들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를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임금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이 없거나 아까워서, 왕자의 혼인잔치에 빈손으로 갈 수 없어서 불참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의 초청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이다. 더욱이 자신의 소유 모두가 왕의 것이므로 가진 것을 아까워할 것이 없다. 그 정도의 수준이라면 초청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들은 임금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말씀하신다. 왕의 초청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초청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그들의 죄이다. 나라의 주인인 임금의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아예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은 묵과할 수 없는 죄이다. 더구나 그들이 한 일은 밭에 가거나 장사하러 가는 등의 일이었다. 병석에 누웠기 때문이거나 부모의 상을 당했기 때문이라면 납득할 만하다. 그런데 밭에 가거나 장사하는 일은 하루쯤 미루거나 쉬어도 될 일이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게 사는 일반 백성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백성들도 이웃의 혼인잔치가 있으면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참석하여 함께 기뻐해주고 장례가 있으면 함께 슬픔을 나눈다. 그것이 사람 사는 도리이다. 삶은 서로가 함께 하는 것이며, 서로 나누며 어울리는 것이다. 어울려 사는 것이 삶이다. 사람은 관계 안에 살아야만 사람이다. 가족, 친척, 친지, 동료, 직장 등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사람이며, 그러한 관계없이 산다면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임금이 자신을 초청했다면, 임금이 그만큼 자신을 생각하고 사랑한 것이다. 두 번씩이나 임금이 청할 정도로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다. 그렇다면 만사를 제치고 가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그런데도 나라의 주인인 임금의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지독한 교만에 사로잡힌 것이며, 자신의 자리를 모르는 무지의 탓이다. 그들은 임금으로부터 초청받거나 사랑받을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다. 수준이 문제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아무리 학벌이 좋고 미모가 출중하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에 합당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가진 것이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 가진 만큼의 지적, 도덕적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가진 만큼 덕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나라의 주인인 왕이 베푸는 사랑의 초청을 받고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수롭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나라의 주인까지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자까지도 때려주고 죽일 정도로 교만과 오만에 가득 차있는 자들이었다. 제 정신이 아닌 자들이다. 말이 되는가! 도대체 말도 안 된다. 그 정도로 그들은 안하무인, 무소불위 등의 수식어를 붙일만한 교만과 독선에 가득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만 그런 사람들인가? 오늘날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없는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인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 아닌가?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거짓을 일삼는 자들, 식품에 해로운 화학재료를 첨가하는 자들, 배운 자들이 더 한다고 비난받으면서까지 불의를 행하는 자들, 그들 모두가 그러한 부류에 속하지 않는가?
임금으로부터 초청받은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의를 저버리고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갔다. 그들은 물신숭배에 빠진 자들이다. 세상에 얽매인 자들이다. 인간은 결국 죽어야만 하는 존재이며, 이 세상을 떠나야 하고,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하는 존재임을 망각한 자들이다. 왕의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도 죄이지만, 이것 또한 죄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결국 격노한 임금은 군대를 풀어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동네까지도 불살라버렸다. 그들의 죄는 자신들에게만 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마을까지도 재앙을 가져온 것이다. 가지지 못한 사람이 끼치는 해는 크지 않다. 그러나 가진 사람이 가진 만큼의 덕을 쌓지 못하고 도덕적 수준을 갖추지 못했을 때 그가 끼치는 해악은 더욱 크다. 그들은 자신들만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자연에게까지도 커다란 해악을 끼친다.
이제 임금은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도록 종을 보낸다. 그래서 종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온다. 이들은 처음에 초청받은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루가복음(14,21)에는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이라고 씌어있다. 이들은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혐오하던 죄인의 무리다. 당시 관념으로는 절대적으로 초청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임금의 격노는 무자격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로 나타났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던 종교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을 호되게 질책하셨다.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족속”(마태 12,34), “회칠한 무덤”(마태 23,26)과 같은 위선자라고 비난하셨다. 그리고 세리와 창녀, 가난한 이들이나 병자들,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당시 관념으로 이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로 여겨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으시며, 겉을 보지 않으시고 속을 보신다. 하느님 나라에 초청받는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을 내세우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다. 비록 많은 죄를 졌을지라도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이제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고대 동방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을 한 벌씩 주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2열왕 10,22). 더욱이 궁중행사에 참여하거나 왕을 알현하려는 자에게는 그에 알맞은 예복이 주어지는 법이다. 사실 길거리에서 모아 온 사람들이 예복을 입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들에게 예복을 주는 것은 마땅하다. 그들에게는 선악이 문제되지 않았고, 왕은 그것을 따지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의 신분과 처지를 가리고 잔치에 합당하고 왕께 대한 예(禮)를 갖추는 예복이 문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궁에서 준 예복을 모두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입고 잔치에 참석했다. 그런데 궁에서 준 예복을 입지 않고 자신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궁에서 주는 예복을 왜 입지 않았을까? 예복이 몸에 맞지 않아서? 늦게 참석해서 예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복을 입을 시간이 없어서? 게을렀기 때문에? 자신이 입은 옷으로 참석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교만해서? 여하튼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왕이 베푼 호의를 거절한 사람이다. 그 잔치는 왕이 베푸는 잔치이며, 따라서 참석자들은 왕에게 합당한 차림을 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참석자가 기준이 아니라 왕이 기준이기 때문에 왕의 수준에 맞추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참석자들에게 예복을 나누어주도록 했고 그들은 어떻게라도 예복을 입어야 마땅했다. 왕이 베푼 호의를 거절한 사람은 쫓겨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바깥 어둔 데로 내쫓겨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게 되었다.
여기서 예복은 하느님께서 입혀주시는 “구원의 빛나는 옷”(이사 61,10)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선포하신 회개와 믿음이다(로마 10,9-10).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예복을 입은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구원은 곧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그 은총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된다. 그리고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며, 이를 위해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회개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며 회개의 삶을 사는 사람임을 가르쳐준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라고 이 비유에 덧붙여 말씀하신다. 임금이 처음에 손님들을 초청했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예복을 입은 극소수였다. 초청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절하여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까닭이 임금의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밭에 가고 장사하는 것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2)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6)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을 떠나야만 완전히 누릴 수 있는 나라이다. 세상에 얽매이고 자신에 얽매여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나라이며,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의 목숨까지 맡겨야만 누릴 수 있는 나라이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 나라에 참석하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버리고 주님의 초청에 응하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옷을 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서공석 신부-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세상에 일어난 일들 중 지극히 적은 부분을 알고 또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도 지극히 적은 일부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대상이 되어 남지만, 우리가 겪은 대부분의 일은 시간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산 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이야기에 담아서 다른 이들과 나눕니다. 그 이야기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그만큼, 그 이야기에는 인간 삶을 위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분은 참다운 스승이었다고 공감하고 감탄한다면, 그분은 스승의 진리를 실천한 인물입니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스승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그 이야기는 역사 안에 새로운 스승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에 사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이 세상에서 살아 보이셨다고 믿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 안에 과연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고, 그분의 삶에서 하느님의 일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신앙인이고 그들이 모여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 공동체들 중 몇 개는 그분에 대한 회상들을 담아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문서로 엮었습니다. 그 문서들 중에서 신약성서 안에 편집되어 우리에게 전달된 것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이 복음서들은 2000년 동안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존속시켰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고, 그것을 배워 실천하면서, 그들도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이 남기신 이야기하나를 들었습니다. 임금이 잔칫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의 뜻을 전하러 온 종들을 때려주기도 하고 더러는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노하여 그들을 벌하고 다른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임금의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고, 임금이 보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불손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한 그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유대 민족의 비극적 운명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임금이 진노하여 자기 군대들을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서가 집필되기 불과 10여 년 전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거슬려 전쟁을 일으켰다가 참패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많은 고을이 불타고 참담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바로 그 비극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고,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한 유대인들의 소행에 대한 하느님의 응징이었다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패전을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징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잔치에다 비유하신 것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잔치는 베푸는 사람이 있어야 열립니다. 초대된 사람들은 그 베풀어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기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잔치에 초대된 그리스도 교회라고 믿었던 것은 복음이 그들에게 베풀어졌고, 그것을 형제자매들과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집필한 공동체는 하느님이 베푸신 잔치라면, 우리에게는 그 잔치에 합당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에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온 사람이 쫓겨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초대에 합당하게 준비하여 참여해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그들의 믿음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인 것은 그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이 알려 주는 이야기들에서 하느님의 일을 이해하고 그것에 준한 삶을 살아서,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일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불행만 알아들으면, 우리 자신을 위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를 위한 새로운 실천을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 예수님 안에 일하신 하느님은 오늘 우리 안에도 일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은 그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권위를 가진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얻은 신분과 권위 때문에 살맛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동료 인간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짓밟으면서 자기들의 위대함을 과시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병든 사람이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용서의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일들 안에 선하신 하느님이 일하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고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주어졌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잔치입니다. 그 은혜로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재물이재물이나 권위에 집착하는 것은 초대된 잔치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혼자 욕심내고, 혼자 권한을 가졌다고 설치지 않습니다. 잔치는 모두에게 같은 양을 나누어주는 교도소의 급식이 아닙니다. 좀 더 많이 누리는 생명이 있고, 적게 누리는 삶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깊이 공감하는 바는 은혜로움입니다. 신앙인은 이웃과 함께 그 은혜로움을 나누면서 이웃도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합니다.
구원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김영수 신부-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응답하는 삶이라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은총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로운 초대에 응답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푸신 것에 비유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좋은 것들을 마련해 두시는지, 그리고 그 좋은 것을 누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왕은 혼인 잔치준비를 다 해놓고 종들을 시켜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어서 잔치에 오라’는 전갈을 보내었습니다.
귀중한 분이 베푸신 잔치에 초대를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고,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혼인잔치에 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오지 않은 것일까? 초청을 받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일하러 갔고, 어떤 사람은 사업을 위해 갔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심부름 온 종들을 잡아 때리기도하고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자기 밭으로 간 사람과 장사하러 간 사람은 하느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우선시 하여 신앙적인 일을 등한시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다른 부류는 자기 자신과 양심을 속이며 신앙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생활과 삶에 충실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일 때문에 영적인 일이 무시당하거나, ‘최선’이 아닌 ‘차선’이 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충실함 때문에 영적인 일을 등한히 하거나, 신앙이 내 삶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차선이 되어버린다면 신앙생활은 형식적인 차원에 머물거나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무슨 일이든 더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량없이 풍요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중 가장 거룩한 날은 주일입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하고 또 한 주간에 필요한 은총과 힘을 얻는 날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사람은 거룩한 한 주일을 보낼 수 있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우리네 인생길에서 주님께 마음을 열고 자신의 삶을 봉헌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행복한 삶은 나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을 감사할 줄 아는 삶이며 그 은총을 나눌 줄 아는 삶입니다. 일주일에 단 하루만이라도, 하루에 잠시만이라도 주님 안에서 내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롭게 깨닫고 감사할 때 행복한 삶의 길도 열립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바쁘고 일이 많다면 그 삶은 얼마 못가서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사실은 우리가 바빠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자신의 일에 바쁘고, 자신만을 위한 시간으로 소일하면서 단 하루도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에 감사할 시간이 없이 산다면 우리의 삶은 거룩해 질 수도 없고 진정한 영혼의 평화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복’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사랑의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인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는 삶, 하느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일,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따뜻한 마음은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갖춰야할 예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마련하신 구원의 잔치에 모든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이 넘쳐나고, 그 초대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이 흐르는 공동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구원의 잔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고 그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전교입니다. 전교의 달을 지내며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귀한 잔치에 더 많은 이들과 함께 기쁘게 참석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예복
-양승국 신부 -
언젠가 수백 명이나 되는 신부님들이 공동으로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문에 분명히 '영대 색깔은 백색'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썼지요. 그런데 정작 제가 준비해간 가방을 열어보니 자색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하다가 '나 말고도 나 같은 사람, 분명히 몇 사람 있을 거야'하며 입장했는데, 웬걸 그날따라 다들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저 혼자만 자색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보다 튀는 걸 죽어도 싫어했던 저였기에 '나만 혼자 자색'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미사 시간 내내 안절부절 못하며 보냈습니다. 자색 영대로 제가 받았던 스트레스는 참으로 컸습니다. 모든 사람들 시선이 온통 제게로만 쏠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장소에 맞는 옷을 적절하게 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게 됐습니다. 특히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중대사에 참석할 때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예절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체험입니다. 며칠 전 무작정 상경했다가 죽을 고생을 다했던 한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귀가조치'시키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싶어 아이를 승용차에 태워 가까운 국철역으로 향했습니다.
노숙생활을 한 지 꽤 됐던지 냄새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역까지 길어봐야 10분밖에 안 걸리는 시간이었음에도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너무 지독해서 차창을 있는 대로 다 열었습니다. 그래도 못 참아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방독면 생각이 간절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차에서 냄새가 빠져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방향제를 뿌린다, 향수를 뿌린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합니다. 혼인은 인생의 여러 단계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무엇보다도 기쁨의 잔치입니다. 축복의 잔치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에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연히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평소 잘 안 입던 예복도 꺼내 손질해야 합니다. 머리 모양새도 한번 점검해봐야지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바지에 멜빵에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분명히 '몰상식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입니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이 동네 공원 산책 나온 사람처럼 운동복을 입고 왔다면 분명 '약간 맛이 간' 사람으로 눈총을 받을 것입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아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인 채 혼인잔치에 참석한다면 잔치 주인공 기분이 '팍' 상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려면 반드시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를 위한 예복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입는 예복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가장 어울리는 예복은 바로 '이웃 사랑의 실천'이란 예복입니다. '희생'이란 예복입니다. '겸손', '자선', '기도'란 예복입니다. '고통의 적극적 수용', '십자가를 기꺼이 수락함'이란 예복입니다. 또한 예복은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 안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 믿음입니다.
그 모든 예복 중에서도 가장 값진 예복, 예복 중에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이란 낡은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예복, 가장 값진 예복을 입었던 사람이 한 분 계신데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몸을 온통 오직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으로 치장한 분이었습니다. 예복 중에 가장 빛나는 예복, 구원의 빛나는 겉옷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온 생애를 단장한 왕후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세속에 찌든 낡은 예복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손희송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들려 주시는 비유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임금님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들은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대의 소식을 전하러 온 종을 때려 주거나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식 밖의 행동에 대해 임금은 몹시 노하여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을 잡아죽입니다. 그리고 종들을 시켜서 거리에서 아무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마구 데려다가 잔치 자리를 채우게 하는데, 이 또한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임금은 마구잡이로 데려온 손님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야단을 치고서 바깥으로 내 쫓습니다. 분명 그 사람은 길 가다가 초대를 받고 와서 예복을 갖출 새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임금이 공연히 생트집 잡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비유는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듯이,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과의 친교에로 초대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게 되면, 하느님 친히 풍성한 잔치를 마련해 주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며 기쁨을 주십니다(제1독서). 그리고 이런 친교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한 분만을 공경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인간들 서로 형제 자매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참된 목자인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면서, 서로 간에 착취와 폭행을 저지르는 악행을 반복함으로써 하느님의 초대를 거듭 거절하여 왔습니다.
이제 선민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기에 부적절한 사람들로 판명되고, 그 대신에 업신여김을 받던 이방인들이 초대를 받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거리의 행인들이 가리지 않고 잔치에 초대를 받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자격이 없는데도 불림을 받았다고 해서 계속 자격 없이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단 잔치에 초대받아 잔칫상에 앉았으면 그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초대받아 그분과의 친교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합당한 자세, 즉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잔치에서 쫓겨난 사람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 세례를 받고 은총의 잔치인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잔치를 통해서 “한량없이 풍요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제2독서). 혹시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은총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잔치에 참석하더라도 그에 걸맞은 예복을 입고 있는지, 즉 오롯이 하느님만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지 자주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비유
-조욱현 신부-
혼인잔치의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5)의 신학적 주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복음에서는 스스로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하느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호소와 복음의 요구?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제1독서: 이사 25,6-10a: 주님께서 잔치를 차려주시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초대하시는 ‘잔치’를 베푸신다. 이 잔치는 기쁜 구원의 잔치이며 ‘메시아적’ 잔치에 대한 사상의 표현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이다. 첫째로 무엇보다 초대의 ‘보편성’이 인상적이다. 모든 민족들이 초대되어 시온산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6-10절). 이제 시온산은 모든 민족들이 와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중심지가 될 것이다(이사 2,2-6 참조). 바로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교회가 이사야에 의해 미리 시사되고 있다. 둘째로 그 잔치는 잔치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초대받은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인식과 우정을 지향하고 있다. “야훼께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7절).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은 하느님께 대한 무지 내지는 영적인 눈멀음이다. 이것을 잔치를 통하여 진정한 친교를 통하여 없앤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잔치는 ‘기쁨’과 생명력, 평온과 안정감을 고취시킨다. 즉 ‘죽음’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며 모든 ‘눈물’이 닦아질 것이다(8절). 이사야는 이 잔치의 개념으로 모든 민족에게 베푸실 종말론적 ‘구원’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분이 야훼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야훼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9절)라고 초대한다.
복음: 마태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해 오너라
예수께서도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하신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더 나아가 임금의 관대한 초대에 대한 초대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한다. 즉 임금의 초대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포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이 비유는 루가복음(14,16-24)에도 전해지나 차이점이 있다. 루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준비한 ‘잔치’에 대해서만 말하지만, 마태오복음은 ‘아들’의 혼인잔치를 마련하는 ‘임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루가에는 초대할 때 종들을 한 번만 보내고 있지만 마태오는 두 번 보낸다. 또한 마태오는 자기의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이 살고있던 ’동네‘를 파괴시키는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다면”(7절) 어떻게 “길거리에서”(8절) 한가로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문맥상으로는 혼란스럽지만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 ’동네‘의 불은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며, 그것은 임금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종들을 ’잡아 죽이거나‘ 학대를 가한(6절) 행위에 대한 벌로서 해석한다. 여기서의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파견하신 사도들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대되어 첫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자칭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세리와 창녀들”(마태 21,31)과 특히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초대를 받고 그 잔칫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의 집의 식탁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적’ 요구에도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12절)있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느낌을 의미한다. 여기서 ‘혼인예복’이란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한 답은 잔치의 식탁에 “나쁜 사람 좋은 사람”(10절) 모두 모였다는 데서 발견된다. 그는 나쁜 사람의 부류에 속할 것이며, 이는 좋은 씨앗 가운데서 가라지가 번성하는 교회의 신비를 알려준다. ‘초대받은 것’만으로는 ‘구원받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 이는 신앙에의 ‘불림’이 곧 ‘구원’을 결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시는”(1디모 2,4)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은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혼인예복’은 하느님 나라의 결실로 제시되었던 삶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적인 정의를 뜻하는 것이다.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꺾여져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결실’을 내야할 의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무거울 것이다. 즉 루가복음에서처럼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예복’까지도 요구하는 “아들의 혼인잔치”(2절)의 초대라는 하느님의 보다 큰 ‘사랑’에 관한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보여주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4,12-14.19-20: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이 베풀어준 경제적 도움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사도적 사명이 어떤 외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사도직의 결실은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여러분은 나와 고생을 같이 해주었습니다. 한량없이 풍요하신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12-14.19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신자들이 이루는 결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을 큰사랑으로 보살펴준다. 또 하나는 바오로 사도가 이루는 결실로 신자들의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되이 자신을 적응시켜 나감으로써 자신의 사도적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그 아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행동적인 결실을 맺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