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송님 페북에서)
시노드 교회 - 동행(同行)의 교회
1.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가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도록 강력히 권고하신다. 라틴어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의 기원은 그리스어 syn(함께)+hodos(길)의 합성어다. 처음에는 이 단어를 ‘공동합의성’으로 번역해서 사용했지만, 본래의 내용을 불충분하게 전할 뿐 아니라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그냥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변경했다. 고심 끝에 내려진 결정이겠지만, 아무래도 신자들에게는 이 말이 와닿지 않는다. 어렵더라도 적당한 우리말 단어를 찾아서 설명을 덧붙이면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스어 syn(함께)+hodos(길)의 합성어 기원을 둔 시노달리타스는 우리말로 ‘함께 길을 간다’는 뜻이라서 한자로 ‘동행’으로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동행이란 말이 너무 많이 쓰여서 진부한 듯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익숙한 표현이라는 장점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그 내용을 이 단어에 담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도 ‘왕’이라는 익숙한 칭호를 붙이지 않았던가? 다만 그 ‘왕’은 세상의 임금과는 달리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자신을 내어놓은 헌신’의 인물이다. 표현은 빌리지만 내용은 다른 것으로 채워 넣은 셈이다. ‘동행’이란 단어도 그렇게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2. 시노드 교회, 곧 동행의 교회는 주님이 동행하시는 공동체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을 동행하셨다. 또한 신약의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신다. 그분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동행을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실제로 실현되었다, 교회는 성경 말씀을 통해, 기도하고 찬양하는 공동체 안에서, 무엇보다도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의 현존을 매우 강렬하게 체험하고 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동행하셨듯이(루카 24,13-32), 제자 공동체인 교회도 동행하신다. 교회는 두 제자처럼 자신들을 동행하시는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시노드 교회, 동행의 교회는 구성원 모두 동등한 품위를 지닌다.
세례성사를 받아 교회에 속한 이들은 세상의 온갖 차별을 넘어서 모두 동등하게 하느님 자녀라는 품위를 선사 받는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7-28)
교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부여된 ‘동등한 품위’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동등한 품위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신보다는 하느님께 초점을 두고 서로 동등한 동반자로서 천국을 향한 순례 여정을 함께 걸어야 한다. 교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교회 구성원 모두는 그분의 백성이며 일꾼일 뿐이다. 교회의 주인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기에, 교회 안에서 누구 주인이냐고 다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시노드 교회, 동행의 교회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교회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동행하신다. 그 성령은 다양한 은사로써 교회에 생명과 활력을 주신다(1코린 12,8-10). 이렇게 성령은 여러 가지 은총의 선물을 선사하시면서 동시에 다양한 은사가 조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도와주신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교회를 인간의 몸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모든 신앙인은 성령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루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각기 고유한 사명을 지닌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다(1코린 12,12-27; 로마 12,4-8).
하나이면서 다양한 지체를 지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성체성사, 곧 미사다. 사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미사의 주례자가 되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각자의 고유한 몫, 곧 성경 봉독, 기도, 성가, 봉헌, 복사 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5. 시노드 교회, 동행의 교회에는 지도자가 있다.
교회에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성령은 그 은사가 조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인도하시는데, 성령의 이런 활동을 돕는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 곧 주교와 사제다. 이들은 동등한 품위를 지닌 하느님 백성이 각자 받은 은사를 교회의 공동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 조정하는 임무를 맡는다. 각자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알고 계발하도록 돕고, 그 은사가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이 임무는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의 지휘자와 비슷하다. 악보에 따라 연주하거나 소리를 내도록 하되 서로 조화되도록 해야 한다. 음이 너무 크면 줄여주고 너무 작으면 키워주며 또한 단원들이 다른 파트(part)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렇게 주교와 사제는 교회의 일치에 봉사하기 때문에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의 집전자가 된다.
지도의 임무를 맡은 이들을 ‘높은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제는 신자들보다 높고, 주교는 사제들보다 높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예수님도 ‘높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하지만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다.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른 민족들이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하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7).
교회 공동체에서 ‘높다’란 표현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지 순례단의 가이드는 순례자들이 순례를 잘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신경 쓰고 보살펴주듯이, 교회 안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악보를 정확하게 이해하듯이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단원들이 합심해야 좋은 음악이 나오듯이, 대화와 경청을 통해 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요약하면, 교회는 자신을 동행하시는 주님 덕분에 서로 동등한 품위를 지닌 이들이 서로 동반자가 되어 천국을 향해 함께 길을 가는 동행의 공동체다. 동등한 품위를 지닌 이들의 공동체에도 지도자는 필요하다. 구성원 각자가 지닌 다양한 은사가 일치와 화합을 이루도록 돕는 임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 교회, 곧 ‘동행의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강조된 ‘친교의 교회’와 내용상 크게 다르지 않다. 동행이란 단어를 친교로 대치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또한 시노드 교회는 시노달리타스의 정점이 성체성사라고 하는데, 친교의 교회도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삼는다. 우리말로 친교를 뜻하는 라틴어 communio는 동시에 영성체를 지칭한다.
아마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기존의 내용(친교)을 새로운 용어(시노달리타스)로 표현하여 주의를 환기시키시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하시는 것은 아닐까 싶다. (직접 여쭙고 싶은데, 이탈리아 말을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