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암소가 주는 교훈/삼상 6:1-12
세상에는 결코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함께 진행되고 결과를 이루시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로마서 11장 36절에서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항상 하나님 자신의 거룩과 영광과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법궤는 이스라엘이 광야 교회 생활에 있어서 절대 안전, 절대 보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활동이 막 출범하려고 하는 시기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4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전하자 그 이유를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가지 않은 연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패하여 보병이 3만 명이나 죽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법궤도 빼앗기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엘리 제사장의 가족들은 죽음을 맞게 되고 큰 자부가 해산하면서 죽게 되는 순간에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이가봇'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한편 블레셋은 이스라엘에서 빼앗아 온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의 다곤 신전 곁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아스돗 사람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신상을 다시 세웠으나 그 이튿날 아침에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모두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들은 여호와의 손이 그들과 그들의 신을 치니 그 궤를 자기들과 함께 있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하여 '가드'로 옮겼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로 옮겼으나 똑같은 독종으로 가드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블레셋 방백들이 다시 모여 여호와의 궤를 에그론으로 옮겨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에그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삼상5:10)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땅에 있은 지 일곱 달이 되었습니다.
곤경에 빠진 블레셋 방백들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것인가를 토의했습니다.
그들의 결정은 곧 새 수레를 만들고 그 수레에다가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들어 싣고, 멍에 메지 아니한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에 메우고,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고 궤를 빼앗아 간 죄에 대한 보상으로 드릴 속건제 금 보물을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이스라엘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궤가 벧세메스로 가면 이 재앙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알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으로 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악인들은 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피해 보려고 애쓰며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이 우연한 것이라고 얼마나 믿고 싶어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짐승까지 다스리시며 그 분의 뜻을 펼쳐 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도 멍에를 메어 보지 못한 소들이 수레를 이끌고 질서정연하게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과, 젖을 먹는 새끼 송아지를 둔 상태에서 울면서 길을 가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상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인이심을 보여주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하여 "두 암소가 주는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암소가 주는 교훈!
1. 선택과 사명을 깨닫게 합니다.
본문 7절에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라고 하였습니다.
'새 수레'는 한 번도 세속적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적이 없는 수레를 말합니다.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소'는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지 않은 짐승을 말합니다.
수많은 소들 중에서 오직 이 두 암소만이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두 마리의 암소는 하나님의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의 땅 벧세메스로 가야만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가봇'의 비운의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키 위한 사명으로 선택된 암소였습니다.
빼앗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옮기는 위대한 사명을 받은 소입니다.
두 암소는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짐승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촌의 55억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지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성도들은 저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명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바울의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
두 암소가 주는 교훈!
2. 인정도 초월할 것을 가르칩니다.
본문 10절에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라고 하였습니다.
두 암소는 사명 때문에 육정을 초월해야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성스러운 목적에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 암소는 본능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목적하심에 따라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
이 말씀은 가족을 등한히 하라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주의 일을 감당키 위해 인정을 초월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가정 일보다 우선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들을 스스로 진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얼마만큼 자기를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현주소입니다.
두 암소가 주는 교훈!
3. 눈물이 요구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라고 하였습니다.
두 암소는 본능적으로 새끼들을 생각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한 번도 메어 보지 못한 멍에를 메고, 생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길을 걷고 있습니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울면서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야 될 그 길을 가면서 울었습니다.
암소들이 새끼 송아지들에게 모성적(母性的) 본능에 이끌리면서도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될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시편 84편 6절에도 성도는 눈물 골짜기를 통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이 터져야 합니다. 또한 그 죄에 대한 사죄 때문에 북받치는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키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걷는 이 길은 눈물 없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렇게 우는 성도를 주님께서는 그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7:17).
예수님도 구속의 길을 걸으시면서 울고 가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두 암소가 주는 교훈!
4.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大路)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치우치다'는 '빗나가다', '기울다', '떠나가다'의 뜻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은 종종 성경 안에서 철저한 순종을 가르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벧세메스입니다. 벧세메스라는 말은 태양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지역적으로는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유다 지역의 땅입니다.
두 암소는 의견 충돌도 없이 협력하여 정해진 코스로만 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중도에서 꾀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제자리 걸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푯대를 향하여 묵묵히 순종의 걸음만을 걷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는 좌우로 치우치는 자가 많습니다.
십자가를 붙들지 못함으로 중심을 잃은 성도들이 많습니다.
좌우로 치우치는 일은 목표 설정이 뚜렷하지 못할 때 나타납니다.
바른 성경적 가치관이 없을 때, 바른 사명감이 없을 때, 바른 역사관, 바른 구원관이 없을 때 좌우로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눅9:62).
두 마음을 품고 갈팡질팡해서도 안됩니다(약1:5-8).
오직 십자가만을 붙잡고 저 천성의 항구에 다다를 때까지 힘있게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암소가 주는 교훈!
5.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정지 명령을 내린 사람도 없었지만, 아니 수레를 이끈 사람도 없었지만 여호수아의 밭, 큰 돌이 있는 곳에 섰습니다.
자기들의 할 일을 다한 두 암소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희생이 되어 번제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번제물은 반드시 수컷이어야 했는데도(레1:3-13) 여기서 암컷을 번제로 드린 것은 특별히 이 소들이 성물을 운반하여 다시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던 특별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눅19:10).
마침내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경을 보거나, 교회사를 보면 예수를 따르는 성도들의 최후가 다 이러했습니다.
한 평생을 십자가만 지고 마지막에는 제단 앞에 모든 것을 불태워 제물로 드리는 순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참된 성도들은 생명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실 때 기꺼이 드리기를 즐겨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암소가 주는 교훈!
이것은 곧 성도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와 같은 성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소망 교회에도 이러한 일군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를 향한 선교의 열정으로 자기를 불태울 성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몰아쳐 오는 수많은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위해 끝까지 충성을 다할 성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내가 영광을 얻지 못해도, 주님께 기꺼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성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붙잡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며, 마침내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충성과 헌신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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