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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므비보셋 / 사무엘하 19:24-30
말썽꾸러기 아들을 다루는 놀라운 엄마 이야기입니다. 남자 아이 하나가 밖에서 놀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가 옷이 엉망입니다. 얼마나 개구지게 놀았는지, 얼굴이며 전신이 흙투성이입니다. 이럴 때 아이를 보고 뭐라고 말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보통 2가지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대부분 부모들이 선택하는 방식은 “너 왜 그 모양이야!”하며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을 다루는 다른 방식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애가 그 꼴을 하고 들어와도 무작정 ‘너 잘 했다’ 하라는 것입니까? 이렇게 한 번 말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야, 너 오늘 굉장히 재미있게 놀다가 왔구나, 뭐 했냐?” 아이가 뭐라고 대답을 하면 “너 오늘 정말 신났겠구나! 나중엔 엄마하고도 그렇게 한번 놀아볼까?”
꽤 유명한 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 화가가 어릴 때, 하루는 집에서 놀다가 우유를 쏟았는데, 화가는 그 쏟은 우유로 방바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며 놀이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노는데, 엄마가 외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 엄마는 부엌, 거실이 우유가 범벅이 된 것을 보고는, “야, 오늘 너 재미있게 놀았구나!”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엄마하고 같이 그림 한 번 그려볼까?” 하고는 둘이서, 엎질러진 우유로, 방바닥에 토끼도 한 마리 그리고, 나무도 하나 그리고 하면서 놀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참 같이 놀고 나서야, “이제 됐지?”하면서 같이 청소를 했답니다. 그 화가는 자기 엄마와의 그 추억이 자기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가 커서 화가가 된 것도, 아마 어릴 때, 엄마의 그런 교육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이의 잘못을 보면서, 무조건 야단치기 보다는, 그렇게 아이와 놀면서 친밀한 관계를 더욱 깊이 쌓아 가면서, 아이 마음속에 자존감을 세워주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엄마였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대체로 세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는 채권자형(債權者型)입니다. 채권자, 곧 나는 하나님에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기에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받은 것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하고 감사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밤낮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무엇인가 달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나에게 잘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연히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니 고마울 것도 없고 기쁠 것도 없습니다. 늘 마음은 편치 못하고 불만스럽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채권자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독립형(獨立型)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받을 것도 없고 또 특별히 드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 간절히 기도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헌신할 것도 없습니다. 거저 내가 알아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사실상 하나님과 별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알고 보면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는 채무자(債務者)로서 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채무자, 하나님께 빚졌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많은데 드리는 것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받을만한 자격 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물론 필요한 것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고맙고 늘 송구스럽습니다. 은혜를 보답해야겠다는 것이 삶의 원리요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편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과연 어느 유형에 속해 있습니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연보다 조연이 더 강한 인상을 주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저 구석에 있는 인물, ‘그런 인물이 성경에 있던가?’ 하는 사람에게서 더 깊은 감동과 교훈을 받는 일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므비보셋이라는 인물도 그런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 므비보셋이 어떤 사람인지 압니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인데 다윗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지요.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다윗에게 알려주어 피하게 하고 아버지에게 다윗을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니까 사울에게는 장손이 됩니다. 므비보셋은 대단히 불우한 생애를 보낸 사람입니다. 므비보셋의 이야기는 사무엘상하를 잘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데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그가 다섯 살 때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크게 패합니다.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 할아버지 사울, 숙부인 아비나답, 말기수아가 길보아에서 모두 전사합니다. 이 패전의 소식이 들리자 유모가 어린 므비보셋을 안고 도망치다가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9:13절을 보면 두 발을 다 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중증 지체장애인으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으며 평생을 보냈습니다.
므비보셋에게 이스보셋이라는 숙부가 있었습니다. 이스보셋은 사울의 넷째 아들입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자 사울의 측근들은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해서 다윗과 싸웁니다. 그런데 이 숙부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다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의지할 곳이 없어 요단강 동편 마길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지냅니다. 므비보셋은 또 부하에게 배신당하고 모함을 당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 므비보셋을 찾아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하고 사울의 밭을 므비보셋에게 다 주고 왕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를 시켜 므비보셋의 재산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시바가 므비보셋 집안의 청지기, 또는 집사가 된 것입니다. 청지기, 또는 집사 잘못 두어서 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바는 대단히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난리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을 하는데 므비보셋도 나귀를 타고 함께 피난하려고 했습니다. 시바는 주인 므비보셋을 속여 예루살렘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도망치는 다윗을 쫓아가서 식량을 바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은 어디 있느냐?” 묻자 “므비보셋은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나라를 차지하려고 합니다”고 모함합니다. 다윗은 멋도 모르고 ‘므비보셋의 재산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합니다. 압살롬이 패하고 다윗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맞으러 나갑니다. 오늘 본문은 이 때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신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지 못함으로써, 항상 타인의 결점만을 크게 보며, 문제 삼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윗을 맞는, 시므이와 아비새를 예로 들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왕으로 세움 받고 돌아오는 다윗을, 시므이가 영접을 했을 때, 아비새는 예전에 다윗을 저주한 일을 두고, 그를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아비새 역시 다윗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죽였던 사람입니다. 곧 아비새는 자신의 현실은 보지 않고, 타인의 결점만을 크게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 타인의 결점만 크게 보이게 됨을 기억하고, 우리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자기 현실이 어떠한가를 파악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현실을 파악하지 못할 때, 타인의 결점만 크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불만과 원망이 있기 십상입니다. 곧 하나님이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시는 인생에 대해, 인상을 찌푸리거나 불만 가득한 마음으로, 억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인생,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 앞에 펼쳐질 인생은,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인생이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아름다움 그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곧 여러분이 기대하는 환상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인생에 대해 뭔가 억울하다는 마음은 들지 않습니까? ‘왜 나만 이런 일을 겪는가? 나보다 훨씬 더 악하게 사는 사람도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왜 날마다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지난 시간에 시므이를 살게 하는 것은 다윗의 자비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는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왕을 저주했으니 죽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그가 다윗으로부터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다윗의 자비가 죽어야 할 시므이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므이의 현실입니다. 시므이가 이런 자기 현실을 잊지 않고 산다면, 자신이 어떤 일을 겪든 살아있는 것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자기 현실이 어떠한가를 깨닫고 인생을 바라보며, 억울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도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므비보셋에 대해 생각해 보며, 성도의 현실은 무엇이고, 또한 성도로서 현재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24절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므비보셋은 다윗이 궁을 떠날 때, 다윗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로서 사울의 집이 망했을 때, 함께 망했어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를 왕자처럼 대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25절에서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라고 묻게 됩니다. 그러자 므비보셋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26-28절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곧 므비보셋은 자신이 고의로 다윗을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은 왕과 함께 가려 하였으나, 종 시바가 자신을 속여, 어쩔 수 없이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6장을 보면 시바가 나귀에 양식을 싣고, 도망을 치는 다윗을 맞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다윗이 시바에게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3절)라고 물었을 때, 시바는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3절)라는 거짓말을 합니다. 마치 므비보셋이 왕이 될 마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거짓 모함를 한 것입니다. 시바가 나귀에 양식을 싣고 다윗을 맞은 것을 보면, 므비보셋을 속이고 나귀를 끌고 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결국 므비보셋은 시바의 속임수로 인해서, 다윗과 함께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올 때까지, 발을 맵시 내지 않고, 수염을 깍지 않고, 옷을 빨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므비보셋의 다윗을 향한 마음이 어떠했는가는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므비보셋의 말을 들은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29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시바가 다윗을 영접하고 므비보셋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때, 다윗이 므비보셋의 재산을 모두 시바에게 줘버립니다. 그것을 다시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결정에 대해 므비보셋은 이렇게 말합니다. 30절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라는 것은, 시바에게 모든 재산을 주라는 것입니다. 과연 므비보셋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보면 다윗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시바와 밭을 나누라고 한 다윗의 말에 대한 불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시바에게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재산인데도 불구하고, 반을 나누라는 것에 대한 불만, 또는 억울한 마음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26-28절에서의 므비보셋의 말을 생각해 보면, 다윗의 결정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재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다만 다윗이 돌아온 것으로 족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실 다윗에 대한 마음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시바와 밭을 반 나누라고 한 것은, 므비보셋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므비보셋이 다윗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시바의 속임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바는 그로 인해서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바의 속임수와 거짓된 말을 다윗이 알았다면, 당연히 시바를 벌주고, 다시 시바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바를 벌주지도 않고, 그 밭을 반 나누라고 하는 것은, 분명 억울함으로 비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므비보셋이 재산에 연연하지 않고, 억울한 마음도 없이, 오히려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주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억울한 일을 겪으신 적이 없습니까? 아무 이유 없이 오해를 받고, 오해로 인해서 불이익을 당한 경우가 없습니까? 사람은 살면서 애매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잘못이 없는데도 손해를 입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러한 길로 밀어붙이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은 억울한 일을 겪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께 나와서 대성통곡하면서,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에게는 어떤 일이든, 억울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또한 그 현실과 처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므비보셋은,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므비보셋은 시바가 자신을 속인 일을 말한 후에, 시바를 벌해 달라고 요구하기보다는, 다윗에게 모든 처분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다윗 앞에서, 자기의 억울함을 말할 처지도, 또한 시바를 벌해 달라고 부르짖을 처지도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7-28절을 보면, 므비보셋은 자기 아버지의 온 집이, 다윗 앞에서 죽을 사람이었음을 말합니다. 곧 자신은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을 왕의 상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왕자처럼 대했는데, 자신이 무슨 옳음이 있어서, 왕께 날 위해 부르짖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살아 있는 것도 모두 다윗의 은혜인데, 자신이 또 무엇을 두고 왕께 부르짖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제대로 파악한 므비보셋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에게 중요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하는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함께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야 말로, 므비보셋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바의 속임수에 대해서도, 다윗이 밭을 시바와 반으로 나누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억울하다는 것이나 불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성도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관계에 있을 때, 부요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성도에게 억울한 일은 없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습니까? 우린 이미 하나님 앞에 죽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삶은 그저 베풀어진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도, 나의 노력과 힘으로 모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애당초 나의 것이 아니기에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무리 부당한 방법에 의해 타인에게 빼앗겼다 할지라도,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예수님보다 억울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시고, 예수님이 살리려고 하신 사람들에 의해 죽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부르시고 가르쳤던 제자들마저, 마지막 순간에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보다 억울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따라서 성도라면 억울하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의 억울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억울함이, 나의 마음에 생생하게 조각되어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억울한 일, 불만스러운 일들도, 결국 예수님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일을 두고 억울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삶에 머물러 있는 증거로 보여지기 마련이고, 그런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 다시금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사람이 자기 육신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을게 있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멸망의 자식으로 나서, 멸망에 파묻혀야 할 내가, 예수님이 피 흘리신 덕분으로 살고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에, ‘왜 나는 이것 밖에 안주는가?’라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디 지금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명확히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숨을 쉬며,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다고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과 재주와 능력으로 양식을 얻으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인간은 자기 몸 하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의 선택으로 세상으로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만물의 주관자의 다스림 아래 있으며, 은총 아래 있습니다. 은총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은혜를 떠나서는 해석도 이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여러분의 속에 살아 움직일 때, 재물은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편함도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관계 안에서, 억울함도 불만도 없이, 모든 필요가 채워진 넉넉함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은총에 살지 못했던 미련한 저희들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은총을 입은 후, 한 평생 그 은총에 감격하여 살아갔던 므비보셋을 보았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은총이, 므비보셋이 입은 은총과 비교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저희들도 은총을 알게 하시고, 잊지 않게 하시고, 그래서 그 은혜에 감격하여, 영원히 은총 안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