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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탄생하면서부터 인류는 돌을 비롯한 석기를 이용하여 문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하면서 자신들의 도구를 개량해나갔다. 청동기 역시 그러하다. 보다 뛰어난 금속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구가 바로 청동기를 발견한게 아닐까?
청동기가 고대사회를 규정하는 중요한 유물로 간주되는 것은 청동 제품은 일반인이 함부로 만들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당시 최첨단 청동제품은 지배계급만이 가질 수 있었다.그 중 청동 단검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것은 무기이기도 하지만, 통치자의 위세를 보여주는 권력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는 개연성이 많다고 본다.
한국 역사의 시작점은 바로 청동기 시대이다. 그리고 그 청동기를 바탕으로 건국된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다. 강단학계에서는 고조선 지역과 관련있는 시베리아 카라수크 문화가 기원전 1200년경에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한국의 청동기 시대 시작 시점을 최대 상한선 기원전 12세기로 잡는다. 게다가 국사 교과서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비로소 국가가 성립한다고 규정짓고 있어, 단군의 고조선 건국(기원전 24세기)을 허황된 신화라 치부하고 있다. 과연 한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2세기에 시작되었고 기원전 24세기에 건국되었다는 고조선은 단순히 신화일 뿐일까?
1. 한국 청동기 문화의 시작은?
우리나라 고대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유물이 바로 이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은 몸체의 형태가 비파와 비슷하다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의 동주식과 달리 조립식으로 검코가 없다. 동검이 주로 툴토되는 무덤 양식도 다른데 바파형 동검이 대부분 석총에서 출토되는데 비해 동주식 동검은 목곽분, 토광묘에서 많이 출토된다. 이는 비파형 동검 문화가 중국 고대 문화나 오르도스식 동검을 사용한 북방계 문화와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그 지역의 민족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어 생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파형 동검과 함께 한국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세형 동검이 있다. 이 검은 비파형 동검보다 늦은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칼의 몸체가 날씬하고 우아하며, 그 선이 아름답다. 또한 날과 이 줄기 사이에 약간 도려낸 부분이 있다. 칼 몸체 외에 칼자루와 칼자루 장식을 별도로 제작하여 조합했으며 비파형 동검보다는 두께가 두껍다.
그런데 평안남도 성천군 백원리 9호 고인돌에서 세형동검과 팽이형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그 제작 연대는 그것을 측정한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무덤에서 발견된 사람의 뼈를 시료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3,368+522/-522년, 핵분열비적법으로 3,402+533/-533년 전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무덤의 축조연대가 기원전 1,4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세형동검 역시 당대에 제작되었다는 의미로, 세형 동검의 제작 연대가 최소한 기원전 14세기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 유적 16호 집터와 평양시 상원군 용곡리의 4 · 5호 고분에서 비파형 창끝이 발견되었고 용곡리 유적에서는 청동 단추도 나왔다. 비파형 창끝은 청동 무기의 하나로 형태가 고대 악기인 비파와 유사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용곡리 유물과 함께 발견된 사람의 뼈를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측정한 결과 절대 연대가 4,539+197/-197년 전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청동 유물의 연대가 기원전 2,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학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비파형 동검 문화가 기원전 3,000년경, 즉 5000년전에 발생했다고 추정하였다. 평양에서 발견된 청동 유적은 두 가지면에서 세계 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나는 중국이 내세우는 기원전 2,200년경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동 제품의 제작연대가 단군 시대로 인식되는 기원전 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2. 세계를 놀라게 한 청동 기술
우리의 청동 문화는 중국의 그것보다 우수하고 뛰어났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들을 다른 나라의 유물들과 비교해보면 훨씬 발전된 제작기법으로 제작된 것이 많다. 일례로 강상무덤 청동 그물 장식품은 0.25mm 밖에 안되는 가는 구리 실로 천을 짜듯 엮었는데, 이렇게 가는 구리실을 뽑아내 그물을 엮었다는 것은 고도의 섬세한 제련 기술이 있었음을 뜻한다.
우리나라 청동기술을 보면 한국 동검의 경우 구리, 주석, 납을 75 : 15 : 10의 비율을 섞어 만들며 그 함량비가 매우 일정했다. 기원전 2세기경의 청동기 합금 조직은 합금 서운 금속들의 결정 입자가 매우 정연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주조 기술이 우수했음을 알게 한다. 실제로 한국의 청동기를 분석한 미국의 한 금속연구실에서는 그 합금 기술의 우수성에 놀라 "고대 한국인의 청동 기술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나라 때 쓰여진 『주례』의 「고공기」에는 주나라 시대 청동 주조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구리와 주석만이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청동에는 구리, 주석 뿐만 아니라 아연이 상당량 포함되었다. 이는 고대 초기부터 우리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으로 개발했음을 뜻한다. 참고로 중국은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청동에 아연이 많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이 아연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기술 수준이 높았음을 증명한다. 아연은 녹는점이 섭씨 327.4더러 매우 낮고 점성이 적으므로 유동성이 좋아 주물에 용이하지만 끓는 점이 섭씨 907도로 기화하기 쉬운 단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런 기술적 난점을 해경하고 청동제품을 제작할 때 아연을 넣음으로써 청동의 색채를 아릅답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주조물의 성질도 월등히 향상시켰다.
아연을 청동기에 포함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획기적인 사건이다. 고고학계에서는 페르시아에서 처음으로 청동기에 아연을 포함했다고 추정하지만 세계 최초로 공인된 것은 기원전 20년경에 로마에서 만든 아연 청동 합금인 청동전(靑銅錢)으로 아연을 17.3%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아연을 함유한 청동기는 현존하는 유물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 현대인도 만들기 어려운 다뉴세문경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잔무늬거울)은 청동기 후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유행한 청동 거울로 다뉴 (多紐:끈으로 묶을 수 있는 고리)가 여러 개 달려 있다는 뜻인데, 거울 뒷면에 달려 있는 두 세개의 고리 덕분에 붙여진 이름이다. 세문(細紋)이란 글자 그대로 잔무늬를 뜻하는데 우리나라 청동 거울 은 거울 뒷면이 무수한 직선과 삼각 무늬를 조화시킨 기하학적 도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뒷면에 세겨진 세문 디자인을 보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동심원과 선, 삼각형, 사각형을 활용한 섬 세한 디자인은 기원전 4세기경에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는 뛰어난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기하학적 무늬의 정교한 배치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기발하면서도 최고의 섬세함을 보여준다.
다뉴세문경의 성분을 분석해보면 26.7%의 주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경도는 충분히 높이고 빛의 반사율을 좋게 하는 비율이다. 당시 사람들은 오랜 경험으로 첨가 원소의 역할에 대하여 충분히 이 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탁월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뉴세문경의 크기는 지름이 21.2센티미터에 불과한데 이 좁은 공간에 무려 13,000개가 넘는 정교한 선이 새겨져 있다.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은 0.3밀리미터, 선과 골의 굵기는 약 0.22밀리미터, 골의 깊 이는 0.07밀리미터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정밀성과 섬세함이라면 현대의 숙련된 제도사가 확대경 과 정밀한 제도 기구를 이용해 종이에 그린다고 해도 쉽지 않을 작업이다. 확대경이 없던 기원전 4 세기에 이런 정밀한 작업을 했다는 것은 불가사의에 남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조작업의 특성 상 다뉴세문경과 같이 정교한 선이 살아있는 주물 작품을 만드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뉴세문경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 심지어 한국과학기술원까지 그 복원작 업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것을 보면 기원전 4세기경에 다뉴세문경을 만들어낸 우리 선조들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뉴세문경은 청동기 제조 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당대에 다뉴세문경과 같이 뛰어난 수 준의 청동주조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뉴세문경은 우리 선조들이 이룬 청동기 문명이 어 느 정도 수준인지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4. 한국의 선진적인 금속 주조 기술
다뉴세문경을 만들어낸 선조들의 과학 기술은 그 이후에도 우리 문화에 흔적을 남겼다. 일본 NHK 방송국에서 세계적인 명종들의 종소리를 녹음하여 종소리 경연대회를 열었는데 우리의 에밀레종이 으뜸을 차지했다고 한다.
신라 시대 종이 탁월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종을 만든 청동 재료의 배합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청동 제품은 수리, 주석, 납을 섞어 만들지만, 한국의 청동은 아연을 포함한다. 앞에서 말한대로 아연은 섭씨 900도에서 끓기 때문에 아연이 든 청동 합금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한국의 청동이 기술적으로 중국이나 일본보다 앞섰다는 뜻이다.
명나라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는 신라 동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페르시아 동은 거울을 만들 때 좋고 신라 동은 종을 만드는데 좋다"
이 본초강목의 내용은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동 합금을 소개한 것으로, 신라의 아연이 함유된 청동이 최고라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중국에서 고려 동을 수입해 간 기록이 여럿 보인다. 자체적으로 청동기 만드는 기술을 보유한 중국이 고려의 청동을 수입해간 것은 단 하나, 바로 고려 동의 품질이 중국산보다 우수하고 뛰어났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우리민족은 청동으로 식기를 만들어 쓴 유일한 민족이다. 같은 문화권인 중국에서는 자 기를, 일본에서는 나무 제품을 사용했다. 신라의 유물 중에는 놋그릇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 놋그릇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든 청동기다. 식기의 재료로 청동을 사용한 것은 놋그릇을 만드는 기술 수준이 높아서가 아니라 자기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 정창원에 보관된 신라의 놋그릇을 보면 당시 신라에서 만든 놋그릇이 미학적, 기술적으로 뛰어났음을 알게 한다.
금속활자는 고려시대에 세계 최초로 발명되었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는 우리 청동기 기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금속활자가 발명되기 위해서는 금속 주조 기술이 발달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금속 주조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고려에서 금속 활자를 발명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금속 활자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이다. 고려에서 금속활자의 주조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 조상이 모래 거푸집을개발했기 때문이다. 모래 거푸집은 금속활자와 같은 작은 청동 주조물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앞선 기술이었다.
참고: 이덕일 외,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종호, 『한국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신토불이 우리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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