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82)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0장 가는 사람 오는 사람 (4)
장의(張儀)는 마침내 진(秦)나라를 떠나 위(魏)나라로 들어갔다.
"저의 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진왕께서 몹시 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몸을 피해 위나라로 왔습니다."
장의(張儀)는 위양왕에게 이렇게 둘러대었다.
위양왕(魏襄王)은 장의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장의를 환영했다.
"하늘이 기도를 들어주어 선생을 나에게로 보내주셨구려.“
그러고는 장의(張儀)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장의는 틈나는 대로 위양왕에게 간(諫)했다.
"우리 위(魏)나라는 지형적으로 볼 때 몹시 불리합니다.
남으로는 초(楚)나라가 있고, 북으로는 조(趙)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으로는 제(齊)나라가 버티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한(韓)나라가 있습니다.
더욱이 위(魏)나라에는 험한 산도, 깊은 강도 있지 않습니다.
이런 평지로는 사방의 적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위나라가 믿고 의지할 것은 딱 한가지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모든 나라가 두려워하는 진(秦)나라의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왕께서 진나라와 가까이 지내시면 다른 나라들은 진나라가 두려워서라도 감히 위(魏)나라 땅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어찌 위나라를 보존하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위양왕(魏襄王)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합종을 깸으로써 다른 다섯 나라로부터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의(張儀)는 남몰래 편지를 써 진혜문왕에게 보냈다.
- 군대를 내어 위(魏)나라를 치십시오.
겁을 주어 위양왕으로 하여금 친진(親秦)정책을 펴게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장의의 비밀 통보를 받은 진혜문왕(秦惠文王)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로 쳐들어가 곡옥(曲沃) 땅을 점령했다.
그러나 장의(張儀)의 이 계책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었다.
"내가 망하면 망했지 결코 진(秦)나라는 섬기지 않으리라.“
이렇게 분노한 위양왕(魏襄王)은 사자를 초나라로 보내어 초회왕을 합종의 장(長)으로 추대했다.
장의(張儀)의 연횡책은 더욱 어려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장의가 반간지계(反間之計)로써 위나라로 거짓 망명하면서까지 합종책을 깨뜨리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소진(蘇秦)은 여전히 제나라에 머물면서 연(燕)나라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장의(張儀)와 소진(蘇秦).
두 사람은 귀곡 선생의 제자이자 형제보다 가까운 친구 사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둘 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간자(間者) 노릇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이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 사가(史家)는 이 일을 놓고 다음과 같이 개탄해 마지 않았다.
소진(蘇秦)은 제나라에 살면서 속으로는 연(燕)나라를 위해서 일했다.
장의(張儀)는 위나라 재상이면서 실제로는 진(秦)나라를 위해 정책을 내었다.
비록 이 두 사람이 하나는 합종(合縱)이요, 다른 하나는 연횡(連衡)을 꾀하며 천하 세력을 둘로 나눴지만,
결국 이들은 반복무상(反覆無常)한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었다.
제(齊)나라는 임금이 제선왕에서 제민왕으로 바뀌었지만, 소진의 지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자신의 최고 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세치 혀로 제민왕(齊湣王)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면 늘 자신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재상 전영(田嬰)뿐이었다.
그런 중에 전영이 죽었다.
당시 전영(田嬰)은 제위왕의 아들로서 왕족답게, 또한 설읍을 다스리는 설공(薛公)으로서 임금 다음 가는 권력과 부귀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전영이 죽었으니 소진으로서는 손뼉을 칠 정도로 좋아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는 거칠 것이 없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전영을 대신하는, 아니 전영을 능가하는 또 다른 인물이 출현할 줄이야.
그 사람의 이름은 전문(田文).
다름아닌 전영의 아들이었다.
좀더 알기 쉽게 말하면 맹상군(孟嘗君)이다.
후일에 신릉군, 평원군, 춘신군 등과 더불어 전국 사군(戰國 四君)이라 불리는 인물로,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평가받은 바로 그 인물이다.
맹상군(孟嘗君)은 출생과 성장 과정에 대해 재미난 일화를 가지고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설공 전영(田嬰)에게는 40여 명의 아들이 있었다.
맹상군도 그 많은 아들 중의 하나였다.
태어난 곳은 임치가 아니라 식읍인 설읍(薛邑)이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는 천첩(賤妾)이었다.
천첩이라면 천한 여자를 말함이다.
주방 일을 하거나 청소를 하는 여인 정도였을 것이다.
이어 <사기>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전문(田文), 5월 5일에 태어나다.
사마천(司馬遷)이 태어난 월일까지 소상히 적은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이날 태어난 것 때문에 맹상군(孟嘗君)은 태어나자마자 이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
당시의 민간 신앙에 의하면 5월 5일은 최악의 날이다.
5월은 악월(惡月)이요, 5일은 흉일(凶日)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보면 미신에 불과하겠지만 기원전 4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믿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왕족인 전영(田嬰)도 이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 없었다.
- 5월 5일에 태어났다고?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어 이제 막 해산한 천첩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 키우지 말라!
죽이라는 뜻이었다.
그날로 아이는 강변에 내버려졌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