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10,5-7.13-16; 마태 11,25-27
+ 찬미 예수님
제1독서에서 계속 이사야서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데 이어 남유다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야훼 하느님께서 아시리아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자신의 힘이 강해서 그런 줄 알고 우쭐거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 끌어 내렸다.”
신명기(32,8)에 따르면 민족들의 경계는 하느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리아는 그 경계선을 치워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거스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데려가는가 하면, 바빌론 사람을 비롯한 여러 이교인들을 사마리아에 거주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강제 이주 정책으로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시리아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여기서 도끼는 아시리아이고, 도끼질하는 사람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아시리아를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시리아는 어차피 야훼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나라인데, 이러한 경고에 겁먹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예언은 아시리아를 위한 경고가 아니라, 아시리아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위로라 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에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라는 고백을 본격적으로 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 하느님께서 온 세상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러한 믿음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아시리아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서 하신 당신의 복음 선포에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 것에 무척 상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왜 저 사람들이 이토록 저를 믿지 않습니까?”라고 기도하시지 않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당신에 대한 수많은 반대보다 당신을 받아들이는 소수의 믿음에 감사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습니다, 아버지!”라고 기도하시는데요, 직역하면 “예, 아버지!”입니다.
제가 2001년에 교구 성소 계발 담당 신부로 일하면서, 교구 예비신학생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요, 홈페이지 주소를 yesfather.or.kr로 만들고, 이메일 주소도 yesfather@한메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만든 것인데요, 예비신학생들이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예, 아버지!”하고 단순하게 응답하라는 의미로 그렇게 정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스스로 강하다고 자처한 아시리아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보면, 지금도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네가 세상을 이끌어가는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단순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제2대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다그 함마르셸드는 “지나간 모든 일에 thanks, 다가올 모든 일에 yes”라는 말을 했습니다. 신학생 때 저는 이 말을 무척 좋아했는데요, 점차 나이가 들다 보니, 지나간 모든 일에 감사하고 다가올 모든 일에 “예”라고 대답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물론, 그것이 과연 세상을 대하는 올바른 방식인가라는 의문도 듭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 말씀 “예, 아버지”를 묵상하며, 이 말을 다시 꺼내어 봅니다.
“예,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벤자민 웨스트(1738-1820), 그리스도와 어린이
출처: Christ Presenting a Little Child | Art 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