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당동성당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0년대에 이미 강릉군 내에 삼정평, 새울, 금광리 공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1921년 5월 양양 본당,
12월 금광리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금광리는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도 적어
1923년 말에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했습니다.
1929년 성당 화재 이후 잠시 금광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4년 발전 가능성이 더 높았던 강릉으로 다시 이전했습니다.
강릉으로 이전한 후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중 광복을 맞았고,
광복 후 본당의 내실화는 물론 사회복지와 교육사업 등을 통해
지역과 함께하는 본당 공동체를 구현했습니다.
1951년 대지를 매입한 뒤 1955년 10월 현재의 성당을 신축했고,
1974년 본당 명칭도 강릉 본당에서 임당동 본당으로 바꾸었습니다.
1981년으로 본당 설립 60주년을 맞아 교육관을 건립하였고,
1991년에는 성당 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청동 십자가, 제대, 14처, 유리화 등을 갖추고
1992년 11월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 화보집을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11월에 노후화된 사제관, 수녀원, 유치원을
신 · 증축하여 본당의 면모를 일신했습니다.
성당 앞 왼쪽에는 강릉 임영관지가 있습니다.
임영관의 칠사당과 객사문에서 병인박해 당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임당동 성당은 1950년대 강원도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외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부축벽을 이용한 입면구성 및
내부의 정교한 몰딩 구성 등 의장기법에서 보존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영동 지역 많은 본당의 모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어
2010년 2월 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금광리 공소
[한국의 성지 홈페이지에서 : 영동 지역에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
금광리 공소는 1887년에 개설되어 영동 지역의 천주교 모태로서
그동안 국내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잡초처럼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이다.
금광리 공소는 한때 영동 지역의 전교 거점 본당으로서
1921년에는 양양 본당과 함께 영동 지역 두 개의 본당 중 하나였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종 3년(1866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호 石坡, 1820~1898)에 의해서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개설된 시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교우들이 강릉에 이주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동 지역의 공소에 새로운 변화가 있게 된 것은 1900년이었다.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이 지역을 사목 방문하면서
박해 이후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베푼 것이다.
그 당시 금광리 공소와 속초시 상도문리의 싸리재 공소(도문 공소)는
단독 공소 건물을 갖추고 신자 수도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금광리 공소의 회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하고 있는 김중철 필립보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증조부모가 교우들과 함께 경주에서 금광리로 박해를 피해 왔다고 하며,
이영녀씨도 그의 시아버지인 조중서(趙仲署)씨가 소년 시절에
경기도 여주에서 금광리로 피난해 왔다고 한다.
공소 초기에는 원산의 백신부(Bret, 白類斯, 1858~1908, 알로이시오)가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하며, 그 후 안변과 원산 본당의 두 신부
(Tournier, 杜啓昌, 1879~1944, 빅토르 신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표 신부(Poyaud, 表光東, 1877~1960, 베다스토)도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한다.
현재 공소는 약 50년 전 본래 있던 공소터에서 길가 쪽으로 이전하였다.
예전에는 금광리 공소였으나 현재 지명은 어단리이기 때문에 어단리 공소라고도 한다.
금광리 공소는 한때 본당으로서 영동 지역의 전교 거점이었다.
실제로 강릉 이남의 공소들은 신자 수도 많았으며, 상도문(양양) 본당과의 거리도 멀어
1921년 가을 판공 때 금광리 신자들은 최문식(崔文植, 1881~1952, 베드로)
양양 본당 주임 신부에게 보좌 신부인 이철연(李喆淵, 1892~1980, 프란치스코) 신부를
금광리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최 신부는 보좌 이철연 신부를 그해 12월에 그곳으로 보내 금광리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영동 지역에는 1921년에 두 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발전 가능성이 적어 1923년 11월 23일 금광리를 떠나 주문진으로 이전하였으며,
금광리 공소는 주문진 본당의 전신이 되었다.
1929년 주문진 본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다시 금광리로 본당을 이전했고,
강릉 지역의 발전 가능성이 높아지자 1931년에 강릉 임당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1934년에 본당을 이전하였다.
강릉대도호부 관아
江陵大都護府官衙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댓글 [춘천교구] 금광리공소, 강릉대도호부관아, 임당동성당에 대한 영상과 설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