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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강국 목사
오늘 본문이 담겨있는 “전도서(Ecclesiastes)”라는 책의 이름은 히브리어(Hebrew)로는 “코헬렛(Koheleth)”이라고 합니다. 이 “코헬렛”이란 말은 “모으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단어인데, 그 뜻은 “사람들이 모인 어떤 모임에서나, 아니면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전도서”라는 이 책에는 이 “코헬렛” 당사자라고 볼 수 있는 솔로몬의 체험이 들어 있고, 또한 인생의 회한이 들어 있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진 글로는 세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가서(Song of Solomon)”인데, 이는 솔로몬이 젊었을 때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아가서에는 젊음의 열정과 패기. 그리고 뜨거운 연애 감정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잠언서(Proverbs)”입니다. 이 잠언서는 솔로몬이 중년 시절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녀들이나 후배들에게 주는 인생의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잠언서는 주로 간접 체험에 근거한 교훈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전도서입니다. 이 전도서는 솔로몬의 노년 시절에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솔로몬이 인생을 회고하면서 쓴 것으로, 사뭇 도전적인 문체로 씌어 있습니다. 완숙하면서도 역설적인 내용의 글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그 깊은 의미를 음미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전도서의 주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0장까지의 주제는 “모든 것이 헛되다”(1:2)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장 이후의 주제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12:1)라는 내용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주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자신의 풍부한 지식과 체험을 통해 이 두 주제를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 “헛되다”라는 의미부터 생각해 보십시다.
전도서는 왜 이렇게 “인생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주제를 강조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을 추구해봤자 결국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말일까요? 왜 솔로몬은 이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생이 헛되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란 말은 모든 것을 부정할 때에 새로운 것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참으로 헛되지 않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헛되다고 느낄 때, 이것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새로운 것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헛됨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헛됨 자체에 의미를 두어 그 안에서 무엇인가 행하기보다는 그 헛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을 헛되다 하느냐?” 그것은 헛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헛되다, 완전히 헛되다”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신앙이란 인간의 사는 모습을 완전 부정해야 하나님을 완전 긍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찮은 지식이나 능력, 판단, 경험을 아직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참된 믿음을 수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를 먼저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지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헛됨을 넘어서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그 목마름을 전도서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참된 가치가 무엇이냐?” 하는 이 목마름을 먼저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목마름입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나 그 인생을 뒤바꾸게 된 원인도 바로 이 목마름이었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나와 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 신학생 시절에 성령 세례를 받고 싶어서 미국의 “토리(R. A. Torrey)” 목사가 쓴 “성령론(The Holy Spirit)”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한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고자 함에 있어서 목마름이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예”라 대답해야만 두 번째 단계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김지하 시인은 197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도 있습니다. 과거 일정 시대 때에는 해방과 독립을 갈망하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목마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영합하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지켜나갈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나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이런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부흥(The Revival)”이란 복음송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땅의 황무함을 보시옵소서.
부흥의 불길을 보내주시옵소서.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옵소서.
영혼을 살리고 교회가 일어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 부흥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영혼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존 낙스(John Knox)”는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아니면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기도할 정도로 영혼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일구는 기업이나 학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기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심겠다는 그런 목마름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되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학업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강력한 집단은 목마름이 있는 집단입니다. 교회건 조직이건 목마름이 없는 단체는 오합지졸입니다. 얼마 안 가서 다 무너질 사람들입니다. 누가 주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나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배가 부르다는 것입니다. 아쉬운 게 없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주님의 나의 왕이요, 나는 주님 없이 살 수 없다”고는 말하는데, 가슴에 와 닿질 않습니다. 입술로만 그 말을 하지, 가슴으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뭘 주님 없이는 못 살아? 난 돈도 있고, 배운 것도 있고, 경험도 있는데...”라고 한다면, 이는 신앙의 고백과 실제 삶에 큰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그런데 이러한 목마름은 “헛됨을 아는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헛됨을 아는 지혜가 없으면 그 목마름이 이 세상을 향한 목마름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노름을 하거나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일에 목말라 있습니다. 다른 일을 하라면 아마 그렇게 밤을 지새우지는 못할 것입니다만, 그 일에는 밤을 지새웁니다. 고스톱에서 돈을 따고, 잃는 일에 목말라 있습니다. 목마른 모습이라고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세상적으로 목마른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헛됨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창조적 목마름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실패나 부족함이 이러한 헛됨을 아는 지혜의 자리에 우리를 안내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다. 그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며 고기를 잡고자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육지로 돌아와서 허탈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마침 예수께서 이 베드로의 배에 앉아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후에 이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에 베드로는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여 멀리 깊은 곳으로 배를 끌고 갔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자기가 했던 모든 일에 대해 헛됨을 인정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헛됨의 의미를 알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새로운 삶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게 될 수 있었습니다. “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헛됨을 아는 지혜”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많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사실 이러한 실패자로, 죄인으로, 연약한 모습에서 “헛됨을 아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실패와 부족함과 낙담이 주어질 때, 이를 헛됨을 아는 지혜의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사람의 자세인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는 정통 이스라엘의 족속이었습니다. 또한 왕족인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옛날 말인 히브리어를 할 줄 아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또 지체가 높은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대교 신앙의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할 정도의 열심인 사람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자랑이 헛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모든 자랑스러운 모습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기고, 한 걸음 나아가서는 이러한 화려한 과거가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헛됨의 지혜를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자랑하고 자기의 인생의 목표로 삼은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히려 자기에게 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긴다고 상반된 삶의 가치를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한 모든 것의 결과는 헛되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헛됨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헛된 것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가치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우리의 일생의 수고가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에 나오는 것처럼 되지 않게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가 쓴 “시지프의 신화”란 이런 내용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신(神)이 내린 벌은, 커다란 돌멩이를 산꼭대기까지 죽을힘을 다해 밀어 올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서 그 돌을 산꼭대기까지 끌어 올립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 다다르게 되자마자, 그 돌을 다시 골짜기로 굴러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또 내려가서 힘을 다해 그 돌을 산꼭대기에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또 굴려 내립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인생의 무의미함을 깨달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런 모습으로 끝난다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맞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도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창조주 하나님을 깨달음으로 인생의 헛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나중에 가면 “젊은 시절에 너의 창조자, 너를 지으신 분을 알고 기억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생의 헛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헛됨을 알게 됨으로 창조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헛됨을 아는 지혜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의 최후의 작품인 이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시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헛됨의 지혜를 알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헛됨을 알고, 헛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세계로 향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느 자리에 와 있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헛됨의 지혜를 깨닫고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길로 나아가도록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道)를 알고자 하지만, 이 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고자 하지만, 이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명에 관심을 갖고 추구하지만, 이 생명의 본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던 사도 바울과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