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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란 · 칠보의 독보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탐구와 재현 1)
* 아얌 과 아얌댕기(드림)의 재현 , 노용숙 ;
그림 1)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새 문양과 은파란 박쥐, 쌍 희. 꽃판 무늬가 부착된 아얌 , 노용숙 재현
옥으로 조각한 한 마리의 새와 매화가 장식되어 있었던 아얌을 재현하면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새 문양을 은 칠보로 제작하여 부착함
아얌과 조바위는 추위를 막기 위해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으로서 일종의 방한모이다. 위는 트이고 귀는 덮이도록 생겼으며 귀부분에는 털이 달리게 되어 있었다. 뒤에는 아얌드림을 늘어트려 긴 댕기처럼 내려오게 되어 전해 온 것이다. 두 종류 모두 머리장식이지만 아얌의 경우에는 귀를 덮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조바위의 귀를 덮는 부분은 안으로 약간 오그라들게 하고 바람을 막도록 천을 덧대었다. 색에는 두 종류가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으나 조바위의 경우 안감과 겉단 색을 다르게 하였으며 겉에는 검정색이나 자주색을 쓰는 대신 안감은 남색이나 흑색, 자주색을 사용한 유물에 검은 공단을 직선으로 누빈 머리쓰개의 측면에는 옥으로 조각한 한 마리의 새와 매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본인은 제비와 비슷한 새가 꽃이 달린 줄기를 물고 날고 있는 모습이 상서로운 소식을 물어다 주는 새처럼 보여서 주목한 바 있었다. 이러한 모양새는 은 유선으로 표현하면 더 멋스러울 것을 확신하고 은판을 실톱질하고 잡물을 빼는 여러 가지 공정을 거치며 준비 하였다. 칠보유약을 여러 번 헹구어 은에서 구워 지면서 옥빛으로 발색이 잘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은선을 700℃ 정도의 가마에 넣고서 구워서 열 풀림 된 은선 두 줄을 핸드드릴에 끼우고 돌린 후 약간씩 잡아당기는듯하면서 끊어 놓은 잘 꼬아진 은 선을 마련하였다. 꼬이면서 다시 강해 진 꼬은 은선을 다시 한 번 열풀림, 사용할 길이를 잘 가늠하여 금속 가위로 잘라 놓았다. 새, 꽃, 잎 모양으로 한 판에 연결 되도록 준비된 은판 뒷면에 잡색유약을 올리고 평면이 되도록 잘 굽고 가마에서 꺼내 놓기 전에 가마주변을 청결하게 한 후 뜨거울 때 꺼내어 엎어 놓고 열판누름처리를 잘하였다. 다 식은 후 앞면에 유약을 올리면서 꼰 은 선을 바탕금속에 붙여가며 마무리하여 950도 가량의 열이 오른( 문을 열고 넣는 시간이 소요되어 온도가 낮아 질 것에 대비하는 것이다) 뜨거운 상태의 가마 위 가시발위에 잘 놓아둔다. 충분히 마르고 따듯하게 된 후 수평을 유지하면서 이동하여 가마에서 한 번에 구우면서 은 선이 잘 부착되도록 공구로 정면 위에서 한 번 눌러준 후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정리였다. 뒷 댕기에는 파란을 올려 구워 장식된 쌍희 박쥐, 국화 형 장식을 달아 품위 있는 조형성을 가미하였다 . 본인이 관찰한 유물들은 얇은 은으로 작업하여 유약이 떨어져 나가고 휘어 있는 것을 보아 왔기에 노리개를 만들 때처럼 은판을 양면으로 땜하고 측면에도 덧대어 세월이 흐르거나 착용자의 실수에도 훼손되지 않도록 대비하였다. 이러한 유물을 재현하려면 사용할 재료들에 관하여 충분히 연구하고 사용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 유물의 머리쓰개 둘레는 밍크를 대어 준 아주 고급품이었으므로 격에 맞는 작업자들과의 협동 작업은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다. 밍크를 자르고 모자가 되게 하려면 털의 방향이 같아야 하므로 마름질 과정에서 재료가 많이 필요했다. 이 아얌의 여러 가지 형태가 ‘ 책가도 ( 책걸이 병풍 ) ’ 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대부 집안의 소중한 장식품이리라 여겨진다.
* 모녀 조바위 ( 暖帽 ) 와 아기댕기
미혼여성도 사용하던 어른용 방한모로 모란문을 금사를 사용하여 징금수로 놓았고 앞과 뒤, 뒤 끝에 은칠보 박쥐로 장식 하였다. 어린이용은 길상문이 금박된 붉은 댕기를 달아 돌날이나 명절에 씌웠던 것인데 아주 작은 천도형의 본을 구하게 되어 칠보하고 세 곳을 바늘로 꿰매었다. 끝이 뾰족하게 생겼다고 이름하는 제비부리 댕기는 미혼여인들을 위한 것으로 주로 붉은 색 종류이며, 나이가 많거나 혼인한 사람은 자주색 댕기를, 과부는 검정색 댕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림 )어린이 굴레 댕기, 숙대박물관소장
* 은파란 애기 굴래 댕기 치렛감의 재현 , 노용숙
댕기는 여자의 수발(首髮)과 함께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옛 중국의 사서(史書) 북사열전(北史列傳)에는 ‘ 백제의 처녀는 머리를 뒤로 땋아 늘어뜨리고 부인은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에 얹었고. 신라에서는 부인들이 머리를 땋아 머리 위에 두르고 비단과 진주로 장식하였다 ’ 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끈으로 장식한 모습이 있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모두 댕기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유물은 상류층 집안의 여아들이 쓰던 모자의 한 종류인 애기 굴래 댕기로 수복강녕수(壽福康寧壽). 부귀다남자(富貴多男子), 태평(太平) 의 문자를 은으로 오려서 만들고 파란을 올려 다채롭게 덧씌운 것을 구워내어 색실로 댕기에 꿰매어 놓은 것과 다양한 색실로 국화 장식, 색실 타래를 만들어 붙인 것들이 모두 함께 아우러져 조형미가 돋보인다. 재 질 : 사직, 견직,
* 족두리와 도투락댕기 그리고 앞댕기 ; 혼례 때 활옷이나 원삼을 입고 착용하는 머리 장식이 족두리, 뒤 댕기, 앞 댕기이다. 머리 위 장식이 되는 족두리는 검은색 비단에 솜을 넣어 아주 단단하게 만들고 솜으로 인하여 폭신폭신하고 볼록해진 외면에 상면은 옥판 위에 진주, 산호, 공작석 구슬 등으로 장식되곤 하였으나 지방마다 다 다르다. 파란이 올려 진 장식 과 원석, 떨 로 장식 된 족두리는 떨잠과 같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떨림을 주변 사람들이 볼 수 있어서 파란의 색상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신부의 떨리는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던 머리장식이다. 이처럼 솜을 넣어 만든 족두리는 노론 가문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당쟁으로 인한 파벌이 심할 때 족두리형태로 노론과 소론을 구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석류문, 신선문과 봉황문, 글자문 등을 얇은 금속으로 투각한 후 금도금하여 옆면을 장식, 화려함을 더한 유물이다. 가로 15cm 세로 41.2cm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 은 파란족두리와 원석을 부착한 족두리 두 점의 재현 , 노용숙
은파란 장식 위주로 제작한 왼쪽 족두리 정면에는 쌍희 , 맨 위 머리 정수리에는 세 겹으로 작업한 국화를 놓았고 착색으로 정리 하였다. 오른 쪽 족두리에는 박쥐 형으로 조각한 호박원석 중심에 양옆에 파란나비, 옆에는 노랑나비, 뒤 역시 가운데는 수자 문 양옆에 대칭으로 파랑과 노랑유약을 올려 구운 나비, 이화형 비취 받침에 호박 , 비취 원석을 끼워 중앙에 배치하고 가장자리에 여섯 개의 떨( 떨철, 스프링 )로 조립 된 은 파란으로 작은 나비와 학이 올려 져 떨게 되어 있다. 재현한 후 금도금으로 마무리하였다. 족두리 중앙 정면에 진주 구슬로 장식하고 끝에는 실로 술을 만들고 끝을 모아 비단으로 잘 싸서 착용자의 이마에 내려와 장식되게 달아 놓아 혼례에 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 유물을 기본으로 재현한 것이다.
1918년 일본으로 갔던 영친왕이 귀국할 때 덕수궁 석조전을 나서는 궁녀들. 글 항아리 제공
규장각 교양총서 1차분 10권 ( 완간 ) 중에서
2004 한국의 집 , 전통혼례 전경 / 한옥 중정에서 커다란 조각보처럼 이어 만든 차일 아래서 모란도 병풍을 치고 살아있는 닭은 보자기 에 싸여 꼬무락대고... 신랑 색시는 예식 후 이웃어른 덕담을 경청하고 있다.
* 도투락댕기의 재현, 노용숙 :
혼례 시 뒤로는 큰비녀와 큰 댕기 또는 도투락댕기라고도 하는데 은파란 장식품과 함께 가운데 벌어지는 부분에는 석웅황을 달아 빨간색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여기에 붙이는 장식은 모두 색스런 헝겊을 배접하여 단단하게 받쳐준 상태에서 받침과 함께 실로 꿰매서 부착 시키거나 다채로운 색감의 색실을 타래로 꽃모양처럼 엮어 장식하기도 하였다 )를, 또한 귀밑으로 늘어뜨리는 앞 댕기로 치레하였다 .
* 도투락댕기 : 검은색 수자호로문사(壽字葫蘆文紗), 즉 원형의 수(壽)자 도안문과 호로(葫蘆, 조롱박 , 호리병박 )문양이 직조되어 있는 견직물 도투락댕기로, 꼭대기에 검은색 끈이 두 줄로 늘어져 있어 머리에 고정시킬 때 사용 하도록 되어 있다. 상단 중앙에서부터 원형의 은파란 장식에 자주색의 술이 좌우로 길게 늘어져 고정되어 있으며, 술 양쪽으로 각 다섯 개 씩의 사각 은파란 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장식은 빨강색의 바탕에 나비문(蝶紋)이 7점, 꽃문양(花紋)이 3점이다. 유물의 형태는 완전하나 파란장식의 붉은 구슬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댕기는 다른 수식과 같이 특정한 기술을 가진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인들이 직접 만들었고 만드는데 일정한 형식이 없었으므로 만드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또한 비단이 무척 귀했기 때문에 일정한 규격이나 색상에 맞추기 보다는 천이 구해지는 대로 형편대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은 조선시대의 도투락댕기로 검정색 바탕에 여러 가지 화려한 금박문을 시문한 후 석웅황 등으로 양쪽으로 갈라진 곳을 연결하였다. 그리고 좌우를 따라 각양각색의 파란장식을 붙여 최고의 장식효과를 얻고 있다 .
큰댕기는 머리의 뒤통수에 고정시키면 치마 길이보다 약간 짧을 정도로 길다. 흑색 또는 검자주색의 사 ( 紗, 갑사 ) 등으로 만든 것이 전해져 오는데 금박 위에 주옥·금패 등으로 장식한 것, 색실로 장식한 것 등이 있다. 투각 옥장식과 석웅황 네 점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크 기 : 가로28cm 세로88cm , 한양대학교박물관 소장
도투락댕기 Doturak-daenggi(Ornamental Ribbon)
19세기 길이 98.5㎝ 너비 30㎝
도투락댕기는 일정한 형태가 정해진 것이 아니고 다양하게 꾸밀 수 있는데, 주로 검정색 공단이나 갑사 바탕에 금박을 찍고 석웅황, 은칠보, 색실, 산호, 옥 등으로 장식한다. 이 유물은 검정색의 화문(花紋)이 있는 사(紗)에 은(銀) 파란 칠보(七寶)와 오색사(五色絲)로 장식한 반가(班家)용이다. 장식 34개를 부착한 독특한 형태이다.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소장
도투락댕기 (唐只)
Doturak-daenggi (Ornamental Ribbon)
조선 1800
크 기(cm)길이: 136.5
궁중이나 양반가의 신부가 사용하는 머리장식이다. 화관이나 족두리를 머리에 쓴 신부가 머리 위에 달아 뒤로 길게 늘어뜨려 장식한다. 이 도투락댕기는 흑색법단(黑色法緞)에 銀에 파란(七寶), 옥(玉), 석웅황(石雄黃), 금파(金波), 유리(琉璃), 오색견사(五色絹絲) 등으로 장식하였다. [
주 가발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조선 후기 이덕무는 ‘복식(服飾)’조에서 “변체()는 몽고(蒙古)의 유풍”이라고 말하고 있고, 『영조실록』 32년(1756) 1월 16일자도 ‘몽골 제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덕일 역사평론가가 쓴 『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중앙일보 ‘ 가발 ’ 에서는 『삼국사기』 신라 성덕왕 22년(723) 당나라에 우황·인삼 등과 함께 이미 아름다운 가발, 미체(美髮)를 보낸 기록이 있었다. 이덕무는 부잣집에서는 가발에 무려 7만~8만 전(錢)을 쓴다고 비판하면서 열세 살짜리 부잣집 며느리가 각종 장식으로 무거운 번체를 달았다가 시아버지가 들어오자 급히 일어서다가 가발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져 죽은 사례를 들면서 “사치가 사람을 죽였으니 오호라 비통하도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그래서 영조는 사대부가 부녀자들의 가체(가발,加髮)를 금하고 족두리(簇頭里)로 대신하게 한 데 이어 정조도 재위 12년(1788) 가체신금사목(加髮申禁事目)을 내려 가발을 금지시켰다.
* 도투락댕기 의 재현, 노용숙 ; 은파란 장식품을 유물대로 재현하되 조금 더 다양하게 개발 된 아름다운 색상의 현대 유약을 올려 구워서 치장하였다. 자주색 댕기의 위를 네모로 박은 천을 양쪽을 접어 넣어 세모 형으로 시작되며 양쪽으로 벌어지게 만들어 진 부분에는 석웅황을 달았던 우리 선조들의 조형성을 살려 보고자 풀꽃무늬를 찍은 은판 세장으로 약간 오목해지게 두드린 후 세모기둥을 세우고 양 끝에는 세모은판을 땜하되 가운데 구멍을 뚫어 꿰맬 수 있도록 준비했다가 투명빨간색의 칠보유약을 올려 구워내서 착용감을 살려 주었다. 칠보장식 받침으로 붙이는 장식은 모두 단색 비단을 4종류씩 배접하여 단단하게 받쳐준 상태에서 먼저 구멍을 뚫어 놓았다가 받침과 함께 실로 꿰매서 부착시켰다
* 앞댕기와 큰비녀로 치장하기 : 예장할 때 가르마 위에 첩지를 얹고 첩지의 좌우에 달려 있는 양쪽 머리를 제 머리와 함께 뒤로 틀어 쪽을 찌는데 ( 만드는데 ) 귀 뒤로 안보이게 묶고 나면 족두리를 움직이지 않게 잘 쓸 수가 있게 된다. 쪽진 머리가 다 가려지게 폭이 넓고 길이가 긴 도투락댕기를 핀 등으로 잘 꽂아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잘 드리는 것이 그 다음 이다. 앞 댕기는 양 쪽 끝이 얼굴 양옆 어깨로 걸쳐 지도록 앞 댕기를 큰비녀에 잘 돌려 한번 씩 감아서 걸어 늘어뜨리면 얼굴에 치장한 연지곤지와 잘 어울리면서 비로소 혼례의 갖춤에 어울리게 된다. 앞 댕기 양 쪽 끝에 대칭이 되도록 은파란 장식을 매미 , 나비로 갖추어 달아 주고 댕기 끝에는 진주와 산호를 실에 꿰어 잘 늘어지게 달아 주어 멋진 장식이 마무리 되게 하였기 때문에 족두리와 댕기 일습이 되었다.
큰비녀를 만들면서 큰비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잠이나 봉잠보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매화잠을 만들려고 생각 하였다. 당시 노용숙의 경복궁 전통공예관 칠보 공방에 오신 침선방의 정정완 (중요무형문화재 침선장 ) 선생님께서 매화대잠을 한 번 만들어 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오랜 고심 끝에 매화꽃잎을 다양하게 만들어 붙여가며 매화잠 큰 머리를 만들고 비녀 끝에는 비녀 머리와 연결되는 분위기가 되도록 잎사귀 모양의 문양과 색감을 칠보작업 하였다. 어렵게 만든 보람으로 아들 딸 혼례 때 딸과 며느리가 이 매화잠을 하고 전통혼례를 잘 치루었다. 자연광선이 내리 쬐는 한옥 중정에서 베로 만든 차일아래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절개와 인내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 조선조 여인들은 매화잠을 많이 꽂았으며 매죽잠을 즐겨 사용한 의미를 되새기는 의미에서라도 내 딸과 며느리에게 혼인에 앞선 마음가짐을 무언 중 가르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은파란 칠보로 장식한 족두리를 쓰고 도투락댕기와 은 칠보 매화잠으로 치장한 딸의 혼례모습
( 어른들께 폐백 드리기, 오리문양을 짠 화문석이 깔려 있는 정경과 조각보의 이미지를 헝겊으로 장식한 술병과 폐백음식이 놓인 상이 보인다 )
칠보제작 후 비단 받침 대고 꼬매기 위한 준비과정
북한의 폐백 사진 자료
* 은파란 떨나비 봉황 화관비녀의 재현, 노용숙
* 화관(花冠)비녀 ; 화관은 부녀자들이 예복에 갖추어 쓰는 관모인데 화관 제작 시 비녀가 들어갈 수 있도록 작은 원통형을 만들어 좌우측면 안쪽에 부착시킨 비녀꽂이에 작은 비녀 한 쌍을 끼워 머리에 잘 고정시키고 장식기능을 더하는 것이다.. 화관을 머리에 부착시키는 역할을 하는 비녀를 좌우측면 안쪽에 끼우는 것이기에 한 쌍을 똑같게 만든 것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 조형성에 반하게 되어 서로 대칭되어 있는 ‘봉황과 대나뭇잎, 학’ 등을 은으로 제작하고 파란을 올려 색상을 조화시키고 나비와 학, 떨을 달아 금도금으로 마무리하였다.
시대에 따라 기능과 형태에 변화가 있었던 조선시대의 비녀는 가체금지령을 계기로 더욱 화려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쪽진 머리가 장려되면서 머리모양이 단순해지자 가체를 부풀리는 데 치중하던 사치는 결발(結髮)의 필수품이자 수식품(首飾品)인 비녀를 화려하게 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쪽진 머리 비녀의 사용에는 이중구조가 존재했는데, 일상생활에서는 작은 쪽에 짧고 간소한 비녀를 하고 의례 때에는 낭자머리를 하고 길고 화려한 비녀를 꽂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비녀역시 신분사회에서 사용되었던 만큼 금제(禁制)가 있었으며 주로 금, 은, 옥, 진주 등의 재료와 용봉잠(龍鳳簪)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금제의 예외가 된 경우는 기생의 수식(首飾)과 신부의 예장(禮裝)이었다.
활옷은 주로 상류계급에서 착용하던 예복이나 나중에는 서민층에도 혼례 때만은 착용이 허용 되었는데, 이것은 다홍색 비단 바탕에 장수와 길복을 의미하는 물결, 바위, 불로초, 어미봉, 새끼봉, 호랑나비, 연꽃, 모란꽃, 동자 등의 수 외에 이성지합, 만복지원, 수여산, 부여해 등의 글씨를 수놓았고 수구에 한삼을 달았으며 대대를 띠었는데, 이를 노랑 삼회장 저고리와 다홍 대란치마 위에 입었으며, 수식으로는 용잠을 꽂고 뒷 댕기(큰댕기)를 드리웠으며 칠보화관을 썼다.
화관(花冠) 19세기 높이 12㎝
Hwagwan(Ornamental Coronet)
조선후기 화관은 왕실은 물론 일반에서도 대소의식에 사용하던 예관(禮冠)이다. 왕실에서는 주로 소례복인 당의에 착용하였고 민간에서는 혼례 시 착용토록 허용되었으며 기녀들의 궁중정재 (呈才 , 대궐 안 잔치 때에 벌이던 춤과 노래) 에도 착용되었다. 기본 형태는 유사하나 장식품의 재질과 장식에 차이를 보인다. 이 유물은 반가(班家)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겹의 종이를 배접하고 검은색과 홍색, 녹색의 비단으로 마무리 한 위에 금박지로 무늬를 새겨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좌․우변을 3층으로 하고 정상에 부분적으로 진주와 다홍실을 달아 주었다. 앞면 중앙에는 나비모양으로 조각한 비취, 금파 등을 장식하였고 그 아래로 오색 견사로 된 술과 진주로 된 드림 구슬을 달아주었다. 상판에는 옥판, 석웅황, 각색의 유리구슬과 떨철 위에 파란을 올린 나비장식을 달아주어 성장한 여인들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소장
* 은 칠보 매화 큰비녀와 댕기 , 뒤꽂이의 재현 , 노용숙 ; 서울시 무형문화재 전시 출품작으로 그동안의 재현작들을 모두 놓아 보았다. ( 러시아 모스크바 한국문화원 전시 )
* 은 파란 귀걸이의 재현 , 노용숙 : 네 개의 은 잎이 은으로 된 타원구를 감싸고 있으며, 아랫부분에는 구슬이 두 개 달린 꽃이 파란으로 장식된 귀걸이다. 한국 귀걸이의 양식은 낙랑(樂浪)의 ‘이당’(귓바퀴에 거는 귀걸이)에서 연유하여, 고구려에 들어와 한국화 되고, 신라에서 발전 완성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상층계급의 부녀자들이 의식이나 혼례 때 착용하는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생활양식을 추구하게 되었고 귀걸이를 다는 풍습은 오랑캐의 풍습이라 하여 귀걸이 사용을 강하게 비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사용을 금지하였기에 귀걸이를 다는 습속은 성행하지 못하였다.
* 은 파란 귀걸이의 재현, 노용숙 ;
귀걸이 , 숙대박물관소장
특히, 선조는 귀걸이를 즐기는 풍습이 전국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풍문을 접하고, 1572년 9월에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이를 부모로부터 받았으며, 감히 훼상하지 않음이 효의 시초라 하였다. 우리 대소 남아는 귀를 뚫고 환이(環珥)를 만들어 걸고 있어 중국의 나무람을 받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중외에 효유(曉諭,알아듣게 타이르다)하여 호습(胡習)을 통혁(痛革)하라.”는 내용의 전교를 내렸다. 이에 귀를 훼상시키지 않고 걸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개발한 것이 위의 파란 귀걸이였다.
이 선조의 유시 후 남자의 이식은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또한 여자에 있어서도 고리 아닌 걸이의 형태가 자연히 커져 불편해서인지 평상시에 귀걸이를 장식하는 습속은 사라지고, 혼례 등 의식 때에만 사용하게 되었다. 현존 유물에서 이를 보면 큰 걸이 밑에 나름대로의 장식물이 달려 있기는 하나 그 형태가 고대 유물에서와 같이 다양한 것이 못되고 대부분이 단조롭다. 다만, 장식물의 단조로움을 보완하기 위하여 장식물 밑에 오색의 술을 달기도 하였다. 1930년대 개성과 평양지방에서는 혼례식 때 신부가 화려한 오색 술이 달린 큰 귀걸이를 한 사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徐居正)의 ‘입춘(立春)’이란 시에 “대궐에서 내린 채번(彩幡)엔 채화가 따라오고 / 이웃에서 보낸 춘반(春盤)엔 오신채가 섞여 있네 (北闕賜幡隨彩勝/西隣送菜錯盤辛)”라는 구절이 있다. 입춘 때 임금이 백관(百官)에게 금(金)·은(銀)·비단으로 만든 머리 꾸리개를 내려주는 것이 채번이다. 입춘 날 이것을 달고 입조(入朝)해서 하례(賀禮)를 올리는데 화번(花幡)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복식의 특징 중 하나는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강조한 것인데, 머리 장식 중 댕기도 뒷모습을 아름답게 꾸며 주는 것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뒤꽂이라고 할 수 있다.
뒤꽂이는 끝이 뾰족하여 머리에 꽂기에 적당하며 위쪽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장식이 달려 있다. 조선시대의 장신구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뒤꽂이도 장식을 위한 것이지만, 실용적인 기능을 겸한 뒤꽂이도 애용되었다. 머리빗의 때를 제거하거나 가르마를 타기 위해 사용하는 빗치개 모양의 뒤꽂이나 귀이개 모양의 뒤꽂이는 실용적인 도구에 장식성을 가미한 대표적인 것이다. 머리를 장식하는 헤어핀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귀이개나 머리를 정리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를 머리 장식으로 만들어 사용한 예는 유일할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뒤꽂이에서 우리 조상들의 멋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나비ㆍ새ㆍ벌 등이 꽃에 날아드는 모습도 뒤꽂이에 많이 사용된 문양으로, 부부간의 화합과 자손의 번성을 희구하는 여인의 마음을 나타낸다. 뒤꽂이의 형태는 빗치개나 귀이개 모양 위에 음각(陰刻)으로 문양을 새기거나 파란을 올려 꾸민 것이 많으며 진주나 산호 구슬을 넣어 장식한 것도 있다.
* 은 파란 뒤꽂이와 화형 뒤꽂이 의 재현 노용숙 ;
대한민국 DDP개관일 노용숙촬영 , 서울시 무형문화재 매듭장 김은영 선생님의 뒤꽂이로 마무리한 머리모습, 분홍두루마기 착용.
은으로 만들고 파란으로 장식되어졌으며 귀이개 끝의 뾰족한 부분은 응급 상황에 침(鍼)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귀이개의 앞면에는 당초문을 조각하고 뒷면에는 박쥐문을 조각하여 파란을 올렸다. 당초(唐草)문양은 고대 이집트에서 발생하여 그리스에서 완성되었으며 북아프리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서아시아. 페르시아 등의 제국(諸國)과 인도, 중국과 한국, 일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하게 사용된 문양이다. 당초란 뜻은 당나라 풍의 덩굴 문양이라는 뜻이다. 길이 8.5cm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뒤꽂이
뒤꽂이는 은으로만 되어있거나 은으로 만들어서 파란을 올린 것이 대부분인데 4계절 항시 사용할 수 있고 궁궐에 들어갈 때가 아니지만 정장을 했을 경우 좀 더 화려하고 큰 것 여러 개를 함께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신분과 때와 장소에 따라 약간의 제약은 있었으나 쪽머리의 가운데에는 화접뒤꽂이 같이 주된 것을 꽂고 왼쪽에는 귀이개뒤꽂이를 오른쪽에는 빗치개뒤꽂이를 꽂았을 것으로 본다 ( 민속학자 예용해 ).
뒤꽂이에 칠보유약 올려놓은 모습, 노용숙 재현
은. 산호 , 크 기 : 세로 8cm 덕성여대박물관 소장
* 은파란화접뒤꽂이와 아우러지는 다양한 무늬 : 은파란뒤꽂이는 파란비녀와 함께 추동계절에 주로 하였다고 전해진다. 가장 많았던 국화형태는 그 생태적 속성과 관련하여 은군자(隱君子), 은일화(隱逸花), 옹초(翁草), 천대견초(千代見草) 등 고상함과 품위와 장수를 의미하는 별명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또한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의하여 신선의 초화로 일컬어졌다. 더우기 ‘포박자(抱朴子)’의 내편(內篇)에 기록 되기를 “ .... 감국식자무불로수(甘菊食者無不老壽) ”라 하였는데 감로수에는 국화의 물이 자액(滋液)이 되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국화에 장수설이 부여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파란으로 제작된 국화가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 뒤꽂이가 평면적으로 도식화 되었는데도 그 안에서 2단으로 은 유선을 올려주어 파란으로 치레되어 아름답다. 또한 뒤꽂이 양식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화접뒤꽂이의 기본양식은 매화와 국화를 좌우로 배치하고 나비 한 마리를 삼각구도로 붙인 것이 있다. 꽃모양으로 은유선을 땜하여 장식할 때는 같은 꽃 두 송이를 두는 경우와 매화와 국화를 각기 한 송이씩 놓는 경우가 있으며 파란치레를 마친 후에는 꽃의 중심에 산호나 계관석으로 장식을 더하였는데 모두 홍색인 경우가 많다. 은파란뒤꽂이의 양식에는 나비와 꽃 이외에 벌과 나비, 매화, 국화 등 네 가지로 구성된 것도 있고, 나비, 매화, 국화에 봉황이 있는 것, 같은 꽃끼리 혹은 서로 다른 꽃끼리 배치된 것도 있다.
매화문에 파란을 입히되 잎마다 다른 색을 올려 화려하고 앙그러진 멋을 느끼게 해주는 멋을 내기도 한 것이 많다. 매화꽃 위로 새 두 마리가 산호 구슬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부부간의 화합을 상징하는듯하며 이 새는 매화가 장식된 것에만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두견새로 보는 이도 있다. 매화는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시기에 핀다고 해서 보춘화(報春化)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른 봄에 홀로 피어 봄의 소식을 전하고 맑은 향기와 우아한 신선의 운치가 있어 순결과 절개의 상징으로도 널리 애호되었다. 또한 겨울이 되어 잎이 지고나면 일견 죽은 것 같으나 다음해 다시 꽃이 피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장수의 상징물, 용기를 지닌 것과 고결함으로도 여겼다.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와 짝을 이루는 국화는 장수와 인생의 청춘을 상징한다. 꽃 위에 날아드는 나비는 호랑나비로 다남(多男)을 상징한다. 만물이 회생하는 봄날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짝을 찾아 생을 구가하는 나비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비는 미호(美好), 행복의 상징으로 , 80세까지 장수하기를 염원하는 질수 (耋壽 ) 등의 의미로 많이 치레 되었다.
앞, 뒷면에 수(壽)자와 복(福)자를 조각한 머리에 파란치레, 불로초(不老草)문양 위에 산호 구슬을 물려 여인의 검고 윤나는 머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두 개의 잎이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 대칭하고 있으며 잎의 테두리 선각을 따라 파란을 올려 화사한 멋을 보여준다
* 은파란귀이개뒤꽂이 :
뒤꽂이는 아래쪽은 뾰족하고 위쪽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장식이 달려 있다. 조선시대의 장신구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귀이개 모양의 뒤꽂이는 실용적이 도구에 장식성을 가미한 대표적인 장신구이다. 이 귀이개뒤꽂이는 손잡이의 끝부분만 파란으로 장식하였고 꽃 중앙에 산호를 박아 명쾌하게 마무리하였다. 주로 대형 귀이개뒤꽂이의 앞면에 선각(線刻) 되어진 박쥐문에는 파란이 올려 유약을 잘 물고 있도록 하였고 두 날개를 활짝 펴서 공간을 구성하면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다.
* 은파란빗치개뒤꽂이 : 빗치개형 뒤꽂이로 중앙에 호박을 물리고 파란장식이 되어 있다. 이 뒤꽂이는 장식적인 기능 이외에 가르마를 타는 빗치개의 실용성을 더한 장신구이다. 조선시대의 장신구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뒤꽂이도 기본적으로는 장식을 위한 것이지만, 빗의 올치기를 할 수 있는 실용적인 기능을 충분히 다할 수 있도록 전형적인 빗치개 형식을 취하게 만들어 장식 중앙에 원을 땜하거나 조각하여 그 원에 알이 물려지면서 장식성이 가미된다. 그 밑으로는 당초문을 한 가닥 선각하고 파란을 올린 것이다. 당초문은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문양으로 궂은 일, 좋은 일을 감싸며 강인하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두툼한 은판을 형태를 잡아가며 오려 낼 때 실톱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다질정으로 수직으로 끊어내는 방법을 사용하면 약간의 경사가 나타나며 중후한 맛을 보여주게 된다. 앞뒤가 똑같다.
* 은 파란 빗치개 뒤꽂이의 재현 , 노용숙
중앙에 호박을 물린 장식과 파란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뒤꽂이는 장식적인 기능 이외에 가르마를 타는 빗치개의 실용성을 더한 장신구이다.
재 질 : 은. 호박(琥珀) 크 기 : 세로 8cm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 은파란화형뒤꽂이, 투명유약기법의 재현 , 노용숙
빗치게 뒤꽂이 보나장신구박물관소장
* 은 파란 화형뒤꽂이의 재현 , 노용숙
재 질 : 은. 산호. 호박 크 기 : 세로 9cm 덕성여대박물관 소장
연꽃봉오리를 표현한 뒤꽂이로 삼봉으로 되어있다. 연봉 밑의 매화 두 송이에는 산호를 올려 화려함을 더하였고 대나무 마디와 함께 파란을 입혔다.
* 은파란연봉(連峰)뒤꽂이 :
두 개의 연꽃 봉오리를 만들어 세우고 갈라진 부분에 매화문양을 만들어 땜하고 그 위에 정갈하게 파란으로 장식하였다. 불교에서는 연꽃을 청결과 순결의 상징물로 여기는데, 그것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오니(汚泥, 오염 물질을 포함한 진흙 )에 물들지 않는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연꽃의 이런 속성은 불교의 교리와 관련하여 초탈과 정화(淨化) 등을 상징한다. 조선조에 와서는 청향(淸香)을 내뿜는 군자(君子) 연(然)한 기품이 깃들어 있다하여 사대부 집안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뒤꽂이에는 활짝 핀 연화가 아니고 막 피어나려는 연봉만을 볼 수 있다. 이는 ‘쪽’에서 손쉽게 뽑아 쓸 수 있는 실용성에 덧붙여, 머리에 장식함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보다 아름답게 꾸몄던 것이다. 연봉뒤꽂이는 머리장식품 가운데 크기가 가장 작은 것으로도 특이하게 만들어 진 것을 볼 수도 있고 단봉으로 되어있는 것과 쌍봉, 삼봉이 있다. 거추장스럽지 않고 단아한 멋을 지닌 연봉(蓮峰)의 연결부분은 대나무 마디의 형상을 하도록 은을 다루어 선의 멋도 느끼게 하면서 머리에 꼽거나 뽑을 때 힘이 주어지는 부분을 고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앙에는 계관석(鷄冠石)이나 산호를 끼워 박은 매화로 꾸민 것도 있다.
크 기 : 세로 7.5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연봉뒤꽂이로 두 개의 연꽃 봉오리에 매화문양을 조각하고 그 위에 파란을 올려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은파란봉황뒤꽂이 , 노용숙 재현
* 은 파란 봉황뒤꽂이 한 쌍의 재현, 노용숙 : 디 아모레 뮤지엄 관람 시 많은 유물 가운데서 특별히 자태를 뽐내고 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수소문 끝에 대물림되고 있는 본을 수집하여 재현해 보기도 하였다. 봉황의 머리, 깃털, 등 꼬리와 그 밑에 산호를 다섯 개나 물려 놓은 것으로보아 궁중에서 사랑받았음직한 뒤꽂이로 여겨졌다.(디아모레뮤지엄 도록에는 ‘공작’ 이라고 표기되어 의문이다)
* 떨잠 : 떨잠은 떨 철판자라고도 하고 문헌에는 원잠(圓簪) ․ 나비잠[蝶簪]으로 되어 있다. 비빈(妃嬪)을 비롯한 내외명부(內外命婦)들이 예복을 입고 어여머리나 큰머리를 할 때 머리중심과 양편에 하나씩 꽂았는데, 이것은 최고의 수식품으로 각종 형태의 옥판에 칠보·진주·보석 등으로 장식을 한다. 머리 앞부분에 꽂는 것을 선봉잠이라 하고 좌우에 꽂는 것을 떨잠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의 선봉잠은 봉황의 형태이나 일반적으로는 나비형태이다. 가는 용수철 끝에 달린 새와 나비는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파르르 떨린다. 이것을 떨이라고 하며 이 떨이 있는 장식잠을 떨잠이라고 한다. 손바닥에 가득 차지도 않는 작은 크기이지만 작은 화원인양 오밀조밀 하게 꾸며서 머리 한 끝에 꽂는 떨잠은 모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런 아름다운 떨잠은 조선 여인의 미적 감각을 고스란히 담아 보여주는 소중한 장신구 유산이다. 떨잠에도 원형·각형·접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다.
떨잠 Tteoljam(Fluttering Hair Accessary)
19세기 상(上) 접형(蝶形)떨잠 길이 10.3㎝중(中) 원형(圓形)떨잠 길이 9㎝ / 12㎝하(下) 각형(角形)떨잠 길이 9.8㎝
떨잠은 여인의 머리에 필요한 장신구로 왕실이나 명부들이 사용하였다. 왕비나 세자빈이 법복인 적의(翟衣)에 적관(翟冠)으로 사용한 대수(大首)나 반가의 명부들이 어여머리나 큰머리를 할 때 장식한 수식품이다. 원형떨잠 2개, 접형떨잠 1개를 일습으로, 접형떨잠을 중심에 꽂으며, 원형떨잠을 양옆에 꽂는다. 그 외에 각형떨잠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단국대 석주선박물관 소장
* 떨철반자의 재현과 브로치로의 재 탄생작업에 심취한 노용숙 .
가운데 비어 있는 부분에는 원석을 끼우거나 은구슬 모양에 칠보작업 후 붙인다.
밑에 있는 칠보 판에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각종장식, 유약을 올린 후와 구운 후 모습
왼쪽 , 유약을 올린 모습과 사용한 유약 , 오른쪽은 가마에서 구워낸 모습
은 칠보 나비 판에 위에 각종 장식과 은 칠보 꽃 장식을 조립한 모습
각종 떨철과 머리에 끼울 부분을 조립한 모습
떨잠의 아름다운 조형을 재현하면서 브로치로 디자인해 본 작업, 떨의 장점을 살려서 은 선을 길게 만들어 때에 따라 길게 잡아 당겨 입체감이 돋보이게 장식할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떨철을 만들기 위하여 핸드드릴에 철사를 걸고 돌려서 만들어진 떨 철은 필요한 크기로 잘라 칠보 완성 된 것이나 원석을 접착제로 붙인다. 이렇게 해서 도금을 하여 마무리 하기도 하지만 착용자가 소홀하게 다루게 되면 탄력을 잃어 늘어진 상태로 전해져 오는 것들을 흔히 볼 수 있게되어 품위가 떨어지게 되므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노용숙의 아름다운 빛깔구이 떨잠 , ‘ 의미의 장식’ 전 출품 (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 )
* 각종 꾸미게 ( 단추, 목걸이, 귀걸이 , 브로치, 반지장식과 떨잠 전체크기 860 * 1850 mm )의 재현과 창작 , 노용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