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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극히 사소한 일에 울고불고 할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보는 관점, 주님이 보는 관점을 견지하면서... 울 일도 아닌데 울고 좋아라 할 일도 아닌데 좋아하고 수시로 변동하는 것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창세기38장 7절에서 11절,
7절,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절,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절,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절, 그 일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절,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다가 결혼해서 아들을 셋 낳았는데 첫째는 엘, 둘째는 오난, 셋째는 셀라, 극히 평범한 가정이 되겠죠. 그런데 7절에 보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아버지가 꿈에 받았던 언약과 관계된 언약을 받아 언약의 영향권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럼 이 가정을 통해서 무엇을 주목해야 하느냐 하면 언약을 앞장세워서 구체적으로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는 진짜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거기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뜻을 언약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겁니다. 진리를 접했다는 것은, 한번 얻은 진리로 인생이 확정된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를 유다의 가정을 통해서 접할 수가 있습니다. 7절에,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하나님은 책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언약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그러면 엘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우리는 이것을 먼저 생각하는데, 이것부터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고난을 실시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지신 분, 임의로 벌을 내리고 싶으면 벌을 내리는 권리를 행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책벌을 통해서 엘처럼 죽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요소를 발견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 덮고 사람들끼리 만나면 서로 살아가는 모습, 인간적인 생각만 있습니다.
축복이라는 것은 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에게 마감된다는 자기 인생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친히 관여하셔서 내 인생을 이끄신다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고 하나님이 따로 이끄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거면 됐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책임자라면 내 인생의 책임자가 내가 아니니까 그냥 죽으라면 죽으면 됩니다. 의미를 추구할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괜히 의미를 추구하다가는 하나님의 훼방자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처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오심으로 비로소 밝혀지는 오류, 곡해, 무지가 여과 없이 들추어집니다. 그 예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진짜 하나님은 그들의 손에 살해당하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유다가정에 찾아오셨다, 언약을 가지고 찾아오셨다, 언약의 하나님은 처벌의 하나님이다, 그 앞에 인간은 오류가 있고 곡해가 있고 무지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밝혀진다.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은 든든함입니다. 든든한 자의 보호본능 이것이 가정이라면, 가정에는 아버지가 있죠. 그래서 교회에 와서 가정의 아버지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면 얼마나 든든합니까? 나의 수호자를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신앙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죄 용서해주는 예수님, 성령님이 지켜주니, 큰 일이 없으면 하나님 믿는 일을 버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생채기를 낸다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유다는 당연히 여호와를 믿죠. 유다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자기 가정이 든든하다고 여기고, 자식이 잘 되고, 자식이 일찍 죽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그 맏이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그 보호막이 뭔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든든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빽으로 보기 싫은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내 것 내가 지키는데 있어서 어릴 때 부모 같은 하나님은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잖아요. 가정이 엉망진창이 됐잖아요. 유다입장,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큰아들, 둘째아들이 죽었다는 것만 왈칵 와 닿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세 번째 아들이 남았죠. 철딱서니 없고 어린 셋째 아들을 안 죽이기 위해서 유다가 나서서 하나님의 뜻과 대립되는, 상충되는 일을 해버립니다. 명분은 그 아들마저 죽게 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아들 셋을 줘놓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우기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 열 명이라면 그 열 명을, 왜 하나님은 다 죽일 수 없습니까? 유다에게는 셋 중에서 둘 죽였는데요? 그것은 바로 유다가 자기 것을 계속 사수하고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자기를 지켜주면 좋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진짜 하나님은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여기에 있고 내 것이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과 상충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부햐게 할 수도 있고 가난하게 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시형제결혼법이라 해서 혈통을 이을 수 없을 때, 맏이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서 시동생하고 형수가 다시 혼인을 해서 그 자식은 형에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25장 5절에서 6절에 나옵니다.
5절,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절,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스라엘은 전부가 맏이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이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맏이 덕분에 계속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출애굽기 13장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맏이가 될 때에 할례를 행해야 되고, 어린양의 피로 목숨을 대신해야 합니다. 맏이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 맏이의 목숨 안에는 하나님의 목숨이 삽입되어 들어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있다는 조건하에 영생에 들어가는 유일한 민족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맏이에게 생명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느냐, 시동생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이 형님의 아들로 올라갑니다. 그걸 어떻게 생명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올 때부터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있을 때에 독생자였는데, 땅에 와서는 하나밖에 없는 맏이가 되면서 거기에 따른 동생들을 완성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동생들이 맏이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것을 언약의 원칙에 담았습니다.
이건 신약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창세기 38장에 와서는 어떻게 되는가, ‘장차 될 일을, 기어이 성취될 일이 벌써 유다가정에 개시되었다.’라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장차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에 인간을 참여시켜서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서 생겨난 그 결과에 인간은 그저 동참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 들어오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가정은 하나님의 영생의 패밀리가 되는 겁니다.
유다가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막내아들을 조치하는 것은 내 가정이라고 붙드는 거예요. 유다가정에 진짜 하나님이 오셔서 첫째, 둘째 아들을 죽였을 때에, 유다의 그 근원적인 태도가 나오는데,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나겠다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 벌 받을 일이 되는 겁니다. “내 것 따로 챙길 권한이 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과 상충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인간은 불가능함을 봐야 합니다. 내 인생 속에 주께서 찾아오셔서 내 인생은 내 것입니다, 라고 발악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죄를 들추어내는, 내 것이 사라지지 않는 것, 나 좋아라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일반적인 하나님을 섬기라고 마귀가 우리 눈에 뒤집어씌운 거예요.
평소에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일을 하는데, 누가 시야를 흐리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앞장서서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를 걷어차는 것입니다. 내 뜻이 뭡니까? 내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내 것 사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뜻은 일체 안 들어주는 하나님이십니다.
10절에,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그 악한 행동이 뭔가를 언약의 가정인 유다 가정에서 구체화되어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윤리도덕, 지금 내가 똑바로 살게 되면 내일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원인과 결과의 그런 논리를 계속 붙들고 있다는 것, 가장 근원적인 것은 내게 손해나는 짓이라면 나는 하지 않겠다는 인간들의 원초적인 본심을 오난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총각이 자기 형의 아내, 형수하고 결혼해야 하는, 자기 자식은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삼촌이라고 불러야 되고, 둘째를 낳으면 친형제인데 사촌지간이 되고, 막 족보마저도 꼬이게 하는, 자기 인생에 대해 손을 놔야 하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오난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이고 소박한 가정마저도 무참하게 밟으시는 겁니까? 주님은 친히 새로운 가정의 원리와 원칙을 이미 시형제결혼법에서 줬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는가를 묻는, 천국의 가정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느냐고, 장차 오실 예수님이 가정의 원리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오늘도 주님의 은혜임을 잊고 살았다.
드라큐라를 물리치기 위해서 성경과 십자가를 들이대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책벌하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한 앞에 십자가를 들이댄다.
“저 예수님 피로 용서받았잖아요?”라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한다.
이제 용서받았으니, 십자가 알았으니, 내 뜻대로 해달라고 당당한 요구조건을 내세운다.
강도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짓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내 것을 붙잡고 놓지 않기 위해 십자가를 믿어준다.
십자가에서 누가 피를 흘렸는지 관심도 없다.
흘린 피가 누구의 피든지 간에 내 피만 안 흘렸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내 인생 내가 챙기기 위해 십자가를 끼어넣는 것이 우리의 주특기다.
"주님이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요? 열 명의 자식이 있다면 그 열 명을 다 죽이면 왜 안 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