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수필, 바른 수필
- <산림문학> 가을호를 읽고 -
권 대 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안으로 그림자를 인격화하고, 밖으로 시대 현실을 껴안아야 하는 건 문학가의 운명이다. 문학적 인간 행위 또한 수필가에게 부여된 임무다. 반영과 보수라는 측면에서 문학을 바라볼 때,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함께 아파하며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며, 돌파구를 찾도록 문학적인 노력을 다하는 것이 수필가의 올바른 자세다. 해결책이 눈에 보이는 데도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위정자에게는 해결책을 찾도록 언어적 질타를 가해야 할 것이다. 작가라면 '침묵하지 않는다'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침묵한다'는 것은 아예 어떤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 규명해 보려는 의욕도 의지도 그리고 신념도 없는 자의 비굴함이다. 좋은 수필 속에는 어딘가 숨어 있는 것에 대하여 기필코 찾아내어 밝히고자 하는 의지가 들어 있고, 눈앞의 현실을 항상 있는 그대로만 수용하지 않고, 살아온 삶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려는 작가의 태도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모든 문학이 다 그러하듯이 수필은 우리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존재한다. 특히 수필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가감 없이 구성적으로 비유하고 존재론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면서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비인간적인 삶이나 부조리한 삶, 모순되거나 가식적인 현실 등을 진솔하게 밝혀낸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각성과 시정을 촉구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코로나19는 물론 생태문제, 경제 문제 등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작가의 눈과 입은 열려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위기의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것은 참된 자기를 찾아가려 하는 노력이며,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려는 자세다. 수필가는 그림자를 인격화하면서 그것을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문학적인 인간 행위로 나아가야 독자들의 가슴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용이 수필적 양식과 문단 완결성에 힘입어 바르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II.
강인철의 <비전 퀘스트의 꿈>은 좋은 수필, 바른 수필에 해당한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시선이 '나'보다는 '우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도 좋았다. 문학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간과한 상태에서는 발아될 수 없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작가는 글 속에 시대의 울음을 담아야 한다. '우리'를 지향하는 시선은 응당 현실의 문제를 문학 속에 여과하게 된다. 수필은 시대적,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비평적 기능을 담당한다. 이러 숙명으로 볼 때 진실의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본질적 과제다. 이 작품은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묻는 수필로서 사회 비평적 성격을 띤다. 순수자연회귀운동에 동참하려는 작가의 정신은 아름답다. 지구를 살리는 길은 결국 숲을 지켜내는 것이다. 작가는 지난해 캐나다 밴쿠버에 잠시 머무는 동안 나나이모원주민 마을에 봉사활동을 가서 ‘원생지의식’이란 게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제재로 해서 유럽인들의 과학문명을 비판한다. 아메리칸인디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곧 생태적 합리성을 관통하는 일이다. 작가의 용기가 이 수필을 이끄는 힘이라면, 비판은 이 작품의 쾌미다.
인류가 경제 성장으로 잘 살게 됐다는 것은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좋은 자동차를 굴리며 맘껏 호사를 누리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을 향해 불어 닥치고 있는 폭풍 폭우 폭설 혹서 혹한 해일 가뭄 지진 화산 등 기상이변으로 인한 지국생태계에 심각한 적신호가 겨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해와 미세먼지에 산성비를 맞아야 하고 물조차도 함부로 마실 수 없는 환경에는 황색등이 깜빡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인디언들의 이야기 중에 “문명 앞엔 숲이 있고, 문명 뒤엔 사막이 남는다.”라는 알송달송한 말이 자꾸만 귀를 거스르게 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잘 산다는 것은 공해 없는 자연에서 삶의 질에 건강과 행복의 녹색등이 환하게 켜질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 강인철의 <비전 퀘스트의 꿈> 중에서 -
이 생태수필이 가지는 묘미는 비유와 대비에 있다. 인디언 이야기에 나오는 숲과 사막의 대비나, 적색과 녹색의 대비도 수필의 문학적 성취에 기여하는 언어적 장치다. 인용된 문단 바로 뒤에 나오는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의 상징이 왜 하필이면 녹색일까? 그것은 아마도 ‘숲이 녹색이기 때문에 자연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전달된 게 아닌가 싶다.” 는 표현은 외지인에게 원생지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 ‘비전 퀘스트’의 존재이유를 잘 뒷받침해 준다. 이 프로그램이 마감된 이유로 순수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무산되었지만, 작가는 내년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만다. 숲에서 번뇌를 씻고, 본연의 자아를 찾아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확고해서 좋다. 수필을 읽는 맛은 주로 마지막에 가서야 느낄 수 있다. 이 수필의 쾌미는 문명 비판을 통해 환경문제 해결과 갈등의 연소를 동시에 처리한 데서 나온다. 현대 문명의 과부하 문제를 갖가지 사회 병리현상으로부터 진단해내고 ‘숲’으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작가의 현실인식이 돋보인다. 숲을 녹색의 근원으로 치환하는 발상이 문학성을 더해주었다.
옥형길의 <밥 먹는 시계>는 소재의 인간화 작업으로 인해 감동이 창출된 좋은 수필이다. 대문집으로 불렸던 할아버지 댁 기둥에 걸려있던 기둥시계를 제재로 해서 한 시대의 밑그림을 잘 그려내었다. 수필을 읽는 진정한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을 읽어내는 데서 느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살아있는 순간의 일일 수밖에 없다. 시계에 밥을 준다는 고모의 말을 신기해하며 어떻게 밥을 주는가 확인하려고 할아버지 댁으로 가서 대문짝 틈으로 기둥기계에 눈길을 주고 기다렸던 적이 있는 작가의 순수한 모습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일 먼저 장만한 것이 손목시계였다는 진술은 당대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이 수필이 문학적 성취에 성공한 것은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제재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한 까닭이다. ‘수동의 시대’가 가고 ‘자동의 시대’가 와도 그 시계와의 인연을 생각하여 버리지 못하고, 멈춰선 시계에 직접 밥을 주어 시계를 살려내는 마무리는 멋졌다. 그러나 좋은 수필이지만, 바른 수필이란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문단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바른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문단의 완결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함께한 세월이 참 오래였구나 하는 마음으로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나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멈춰서는 안 돼. 멈춰서는 말아야 해. 나는 시계 상자 안에 넣어져 있던 나비처럼 두 날개가 달린 숟가락을 꺼내 시계에 밥을 퍼 먹였다. 목구멍이 막히기라도 하였는지 끼르륵 끼르륵 소리가 났다. 몇 숟갈을 받아먹더니 수십 년 멈춰 섰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시에 멈춰 셨던 시가가 땡 땡 땡 열두 번을 울리더니 째깍째깍 바늘을 돌리고 있다. 나는 내게 주문을 건다. 멈춰서면 안 돼. 움직여야 해. 쉼없이 움직여야 해.
종가 할아버지 맥의 막내 고모는 시계 밤 먹이는 일에 손을 놓고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 옥형길의 <밥 먹는 시계> 중에서 -
수필의 가장 큰 특질은 인간애의 향기다.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 ‘종가 할아버지 댁의 막내 고모는 시계 밥 먹이는 일을 손에 놓고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적고 있다. 이 작품은 고모와의 추억이 깃던 시계를 제재로 해서 ‘숨 쉬는 일을 멈추어버린’ 고모를 추모하고 있어 공감과 감동을 자아낸다. 작가는 삶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화려하게 치장하지도 윤색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다. 문학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가치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총체적인 내용을 묘사하고, 그 총체적인 내용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보내는 애정을 근간으로 한다. 때문에 수필의 가치는 인간성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작가는 이런 수필정신을 잘 알고 있으며, 이런 차원에서 자신의 삶에 윤기를 더하기 위해 아름다운 정신을 어떻게 창조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 방법으로 작가는 자기 고백과 성찰을 활용하고 있으며, 멈춤의 자리에 움직임의 동력을 불어넣어 시계의 심장에 신선하고 맑은 영혼이 채워지게 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고모가 세상과 이별한 것을 ‘시계 밥 먹이는 일에 손을 놓고’라 한 것은 이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홍만희의 <들뢰즈의 역설>이란 수필은 현대수필의 거장 들뢰즈 이름 때문에 평자의 눈길을 끌었다. 작가는 설악산 백담계곡을 자주 찾는다. 그는 계곡을 걸으며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본다. 작가에게 아버지는 소중한 존재이다. 이 작품은 자신과의 대면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려는 그림자의 인격화가 돋보이는 수필이다.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작가는 자신을 반성대 위에 세우고, 아버지의 위대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누구도 마주할 수 없는 거대하고 숭고한 아버지의 모습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는 작가의 말은 “삶의 진리는 언제나 역설로서만 다가온다.”는 들뢰즈의 금언으로 더욱 확장되고 있다. 이 수필은 가슴으로 쓴 수필이라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 자성의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일상에서 보지 못한 거대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부자지간에 잠복되어 있는 그 무엇을 원고지에 쏟아놓는 작가의 의도는 메말라가는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희구로 볼 수 있겠고,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이기도 하겠다.
아버지 삶의 여정은 어디일까.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한 담보된 여정일 수 있다. 험준한 삶을 거치면서 삶의 완성이라는 시점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혜안인 듯 앞날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우리가 모른 길을 걷고 있다. 그 혜안은 순간의 삶을 영원의 삶으로 완성하는 인생의 문법이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허송세월하던 인간이다. 아버지의 삶과 정반대로 삶을 정확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나 아닌 나의 삶을 살았고, 삶에서 도망치듯 아버지의 원에서 중심을 이탈한 젊은 날을 지냈다. 그러던 나날들, 지금에서야 비로소 멀리서먼 바라보던 아버지의 삶에서 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다.
- 홍만희의 <들뢰즈의 역설> 중에서 -
이 작품을 읽고 나니 대체 문학은 모든 것이 충족된 만족 속에서는 나오지 아니 하고,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무참하게 버려진 느낌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라는 느낌이 든다. 수필이 존재하고 그 효용적 가치가 증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소명을 전제로 한다. 상처야 말로 자기 정신의 시발점이다. 이 글에는 속되지 않은 아름다움이 스며있다. 어정쩡하나 처절한 자기반성과 성찰의 과정,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백담계곡을 찾아가는 과정에 잘 나타나 있다. 위중한 상태임에도 자식에게 한 점 내색하지 않는 아버지의 의연한 모습 묘사를 통해 작가는 ‘인생의 문법’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자 한다. 좌절된 삶 속에서 아픔을 인내하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담담함은 긍정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산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반성적 성찰을 통해 인간적인 성숙을 도모하고자 하는 작가의 바른 삶을 향한 노력이 공감을 자아낸다. 주제의식을 들뢰즈의 역설로 의미화한 까닭으로 좋은 작품이자 바른 작품이라 하겠다.
조철형의 <선재길 오색단풍>의 제재인 오대산은 작가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문예수련을 했던 곳이고, 단풍철에 승용차로 고향을 찾을 때면 들리는 코스다. 이 수필이 주는 맛은 참된 자신을 찾으려는 구도자적 정신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자기성찰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반성적 성찰의 문학적 수용은 보편적 공감을 위해 필수적이다.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며 돌파구를 찾도록 하는 숲의 역할과 기능을 설파하는 것은 산림문학회 소속 수필가의 당연한 자세다. 오대산 숲이 주는 자비가 구도자의 길을 걷게 한다는 점에서 이 글의 제재는 주제의식과 관련성을 갖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탈, 깨달음, 치유는 물론 물아일체의 순간도 주제를 뒷받침해주는 덕목이다.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의미화하는가는 수필 창작에서 생명적이다. 이 수필이 갖는 가치는 구도의 길을 자연에서 찾는 데 있다. 오대산 숲길에서 경험하게 되는 과정의 이야기가 낙엽귀근, 명경지수, 물아일체라는 어휘와 만나 맛을 낸다.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구도의 환희를 전해줌으로써 감동이 배가되는데, 선재길의 선경을 보면서 참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수필의 메시지다. 이 수필 역시 내용으로 보면 좋은 수필이나 문단이 19개나 되는 등 문단 완결성의 문제로 바른 수필이 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천을 벗어나 산길로 가다가 다시 내천으로 오면 단풍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한다. 내천과 헤어졌다 만났다를 인생 여정처럼 한다. 잔도를 설치하면 편한 길을 가며 물과 단풍을 가까이 대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웠지만, 짧은 생각일 분 구도자의 길을 외면할 수가 없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연꽃모양이고,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는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적멸보궁을 마음에 두고 선재길을 걷는다. 참된 나를 찾으려는 소망으로 선재길을 걸으면, 오색단풍을 보러 선재동자나 문수보살이 나타날 것만 같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차분하게 걷다보며 선재길이 선경의 은밀한 부분을 조금씩 열어주는 것 같다.
- 조철형의 <선재길 오색단풍> 중에서 -
작가의 숲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독자들마저 따뜻하게 감싸 안아 우리에게 선경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삶의 안도감을 준다. 수필은 소중한 경험의 산물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는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적멸보궁’이라는 것을 이 수필은 잘 말해준다. 작가는 구도주의 정신을 주제지향성으로 내세우고, 숲의 가치를 드높임으로써 숲사랑, 생명존중 녹색환경보호 정서녹화를 모토로 걸고 있는 산림문학회 소속 수필가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하겠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대상의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그 연결고리의 한 축에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이 존재한다. 이 수필에는 숲의 존재에 대한 가치가 물결치고 있다. 그래서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은 사회의식이라기보다 자연의 향내라 할 수 있다. 숲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21세기 수필가는 생태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수필은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이 수필은 숲이 참된 나를 찾을 수 있는 길임을 알려준다. 수필가의 정신적 건강함이 산림문학의 새로운 활로로 이어지길 바란다.
III.
수필의 멋과 묘미는 기발한 착상이나 절묘한 표현, 재치와 유머, 잔잔한 감동이나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 전혀 뜻밖의 상황 전개나 역설에 있다. 삶에 신선한 충격이나 활력을 불어넣는 묘사, 깊은 깨달음의 경지,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풍취가 풍겨오고, 삶의 진솔한 모습이 꾸밈새 없이 담겨 있으면 금상첨화다. 훌륭한 수필을 쓰는 데는 표현의 아름다움이나 기교도 중요하고, 작가의 가슴이 독자를 포용할 만한 넓은 공간과 부피를 갖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작가로서의 당위적 책무에 책임을 지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멋과 묘미를 네 편의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데서 안도한다. 이번 평은 수필을 독자와의 상호교섭 작용으로 이해하면서 현실의 문학적 수용과 문학적 인간 행위의 차원에서 긍정적인 관점을 취하고, 좋은 수필, 바른 수필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김은희의 <배앓이> 박용구의 <산길을 걸으며 생각을 하면서>, 백인수의 <관갑천잔도>, 윤경덕의 <명예사서>, 이문자의 <이 나무의 헌신>, 이용직의 <나부상의 전설 전등사>, 이정웅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하회마을 충효당 구상나무>, 이종삼의 <잊지 말자>, 조은경의 <까르마의 그림자> 등은 나름의 일상적 체험을 수필화하였으나, 심미적 취향을 가진 평론가나 독자들의 흥미를 끌 정도로 주제의식의 형상화나 의미화가 없었다. 수필은 호소력과 감동이 강한 문학이다. 좋은 수필가는 다양한 시각과 풍성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삶을 예리하게 살펴야 한다. 사건을 늘어놓는다고 모두 수필이 되지 않음도 알아야 하겠다. 제목이 제대로 되지 않고, 문단 형식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 수필은 독자를 쫓아낸다.. 독자들은 문학가의 작품을 하나의 ‘전범’으로 여기려 한다. 바른 수필을 써야 하는 이유다. 제목짓기와 문단나누기를 잘해야 바른 수필이 된다. 바른 수필은 좋은 수필로 통하는 관문이다. ‘바른 수필’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평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