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부부> 37화. 숫자에 민감해지는 것
374화 <부부> 37화. 숫자에 민감해지는 것 260507
그녀는 숫자에 약하다. 그녀가 외고 있는 숫자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남편의 주민등록번호 정도. 늘 쓰는 은행 통장의 계좌번호도 외우지 못한다. 누군가 갑자기 입금시킨다고 통장번호를 물으면 늘 기다리게 한다. 사정이 이러니 잘 쓰지 않는 통장은 비밀번호를 까먹어 은행원 앞에서 망신을 당하기 일쑤다.
아이들 주민등록번호는 당연히 외우지 못한다. 학교에서 급히 전화하는 아이에게 잠시 기다리라며 찾아서 알려 주었더니 “엄마는 딸 주민등록번호도 모르냐며” 울고불고하던 초등학생 딸아이가 이제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직접 외우고 다닌다. 엄마에게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메일 ID를 만들어 놓고 비밀번호를 잊어 두세 차례 다시 만들어 겨우 쓰고 있지만, 한동안 안 쓰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녀도 장담 못 한다.
늘 타고 다니던 버스노선도 한동안 안 타면 몇 번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차비도 얼마인지 자주 잊고 산다. 버스 기사에게 차비가 얼마냐고 묻다가 면박을 당한 일도 있다.
자주 거는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도 늘 확인을 한 후에 전화를 한다. 친정집 전화번호는 알지만 동생 집 전화번호는 아직도 외우지 못한다.
맏며느리이기에 외워둬야 하는 숫자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집안의 제삿날과 식구들의 생일날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은 없다. 해가 바뀌면 새 달력에 집안의 대소사를 표기해 두고, 달력을 자주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잘 외우지 못하기에 수시로 달력으로 확인을 하는 것이다.
‘숫자를 왜 외워야 하는데? 복잡하게 말이야. 가뜩이나 세상살이도 힘든 데 하찮은 숫자에 자꾸 신경을 써야 하는 거야?’
그녀가 늘 위안으로 삼는 생각이다. 살아가는 방법만 체득하면, 그 원리대로 묻고 찾고 풀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자기 머릿속에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면 그 정보를 척척 빼내어 남의 도움 없이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론 “그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야.” 하는 소리도 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만에 빠지기 쉽고 타협할 줄 모르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그녀의 남편이 그렇다. 남편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를 지녔다. 모든 일이 분명해야 하고 원인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한다. 자신의 통장번호에 아이의 주민등록번호는 물론, 자동차 검사 날까지 머릿속에 입력해 놓고 있다. 납기를 놓쳐 벌금을 내는 일은 없다.
그녀가 “전화 고장 신고는 몇 번?”하고 물으면 남편의 입에서 정확한 정보가 튀어나온다. 마치 컴퓨터 자판의 엔터키를 치는 것과 같다.
그가 곁에 있는 한 그녀에게 불편은 거의 없다. 그는 자주 쓰는 것들조차 기억 못 하는 그녀에게 늘 “왜 그렇게 사느냐”며 면박을 준다. 그러면 그녀는 “컴퓨터를 데리고 사는 데 무슨 걱정이냐?”고 대꾸한다.
“내가 항상 곁에 있는 것도 아닌데, 없을 때는 어떻게 해?”
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는다.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찾으면 되지 바보 같이 뭐 하러 그 무거운 것들을 죄다 머릿속에 넣고 다니느냐며 오히려 놀려준다.
그녀가 맏며느리로서 큰 실수 없이 잘 지내는 것은, 그녀 자신의 꼼꼼한 관리 덕분이라는 것을, 남편 역시 부인하지 못한다. 숫자들을 외우지는 못하지만, 미리미리 달력에 체크를 하고 메모를 하면서 관리를 한다. 그녀는 숫자들을 잘 외우지는 못하지만, 숫자에 민감하고, 숫자들을 잘 관리한다.
결혼 생활은 끊임없는 숫자 관리의 연속입니다. 양쪽 식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리해야 할 숫자도 늘어납니다. 제사부터 생일, 결혼예정일 등등 이런 숫자들을 제대로 관리해야만 순탄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숫자 관리는 또한 가정의 경제에 있어서도 중요합니다. 예상 지출을 뽑아보고 미리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죠. 반드시 암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첩에 적어놓고 새 달력이 나올 때마다 체크해 두기만 하면 됩니다. |
<법정> 7. 해도 너무도 한다
사람이 살 만치 살다가 인연이 다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유일한 증거로서 차디찬 육신을 남긴다. 혼이 나가버린 육신을 가리켜 어감은 안 좋지만, 시체(屍體)라고 부른다. 육신을 흔히 영혼의 집이니 그림자이니, 그럴듯하게 표현하고들 있지만 평소에는 그걸 모른다. 막상 우리 곁에서 누군가 떨어져 나갔을 때 비로소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알맹이가 빠져버린 빈 껍데기는 그것이 부모·형제의 것이라 할지라도 거추장스러울 뿐, 죽음 앞에 슬퍼하면서도 지체없이 장례를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검은 의식 또한 세상에서는 각양각색. 그 비용조차 없어 슬픔이 가중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호화롭고 거창한 의식을 통해 부(富)와 권세를 마음껏 과시하려는 부류들도 있다.
불교의 수행승들은 마지막 남은 그 ‘증거’를 인멸시키는 데 비정하리만큼 철저하다. 화장하여 남은 유골마저 갈아서 흩어버린다. 살아서도 소홀히 하던 육신을 죽고 나서까지 홀대하고 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임을 그대로 구현하려는 것이다. 어떤 선사는 그의 임종게(臨終揭)에서 이렇게 당부한다.
‘시주의 땅에 묻지 말고 태워 없애버리게’가진 것이 없이 살았던 그가 죽은 뒤 혹시 남의 신세를 질세라, 재를 만들어 흩어버릴 것이지 남의 당을 차지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이다. 또 어떤 스님들은 도반들에게 폐를 끼치고 번거롭게 할까 봐, 깊숙한 산골에 손수 화장할 나무를 마련, 불을 놓고 그 위에 앉아서 가는 일도 있다. 몇 해 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어떤 노스님은 큰 돌을 안고 바다에 들어가 꺼풀을 벗어버리기도 했다. 이를 수장이라고 하는데, 남은 육신을 물고기들에게 보시(布施)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방법이 비단 출가 수행승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던 일본의 어떤 황후(皇后)는 자기가 죽거든 불에 태우지도 흙에 묻지도 말고 들 가에 버려서 한때나마 주린 짐승들의 요깃거리가 되게 해달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었다.
수행자라면 종파를 따질 것 없이, 그의 청빈(淸貧)을 본받지 않을 수 없는 아씨 시(市)의 성 프란치스코. 이 성인은 임종이 가까웠을 때 옷을 벗겨 알몸으로 땅바닥에 누워서 죽게 해달라고 그 원장에게 어린애처럼 졸랐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래지 않아 내 육신은 먼지와 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월간지에서 호화분묘(豪華墳墓)의 화보를 보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생시의 호화주택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호화 유택(幽宅)을 마련한 것인가. 냉방시설을 갖춘 묘지가 있는가 하면, 외국산 대리석을 들여와 치장했다는 것도 있다. 또 어떤 것은 풀장까지 갖추어 놓고, 석조물의 전시장처럼 보이는 묘지도 있었다. 그 안에서 고이 잠드시라 해놓았을 텐데, 양심이 있는 넋이라면 어찌 그런 데서 편히 잠들 수 있을까.
근래 흔히 알고 있는 성역화(聖域化)의 물결을 따라, 뒷사람들에게 수고와 폐를 끼칠 것 없이, 몸소 미리 해두자는 심사에서일까? 하기야 요즘은 중들까지 시류에 편승, 탑만으로는 모자라 일찍이 없었던 석상(石像)까지 해 세우는 판이니 남의 말을 할 처지는 못 되지만―.
해도 너무들 한다. 빈 껍데기를 가지고 너무들 한다.
<유정 생각>
호화찬란한 분묘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찌 되었든 고인과 남은 사람의 관계에서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깊은 사랑, 정(情), 인연, 존경 등의 사연을 간직하고 흠모하고 싶은 마음조차 파기, 깨부숴버리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더 이상 이야기하면 글쎄 빈축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법정 스님의 뜻은 알겠지만 사실 왈가왈부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