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함선의 최후는 무사히 함생을 마치고 퇴역한 다음 스크랩되거나 표적·실험함으로 사용되는게 대부분이고 아주 운이 좋거나 그녀가 현역 시절이 이름높은 전적을 날렸다면 기념함으로써 살아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해전중에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왔다가 자결(자침)하는 정도겠지요. 그러나 희귀하긴 하지만 저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괴이한 이력을 갖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로 아래와 같은 경우들이 바로 그런 예이지요.
1. 유틀란트의 주역 아이언 듀크
[잘나가던 시절의 아이언 듀크]
"유틀란트에서 살아남은 주력함"들이라고 하면 보통은 스카파플로에서 자침했거나 (독일의 경우) 운좋게 살아났어도 워싱턴 조약으로 인해 전부 다 스크랩됐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퀸·엘리자베스급과 R급을 제외하고도 2차대전 후까지 살아남았던 전함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젤리코 제독의 기함이었던 아이언 듀크였습니다.
유틀란트 해전후 아이언듀크는 지중해 함대로 전속되었다가 1919년에는 흑해로 이동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1922년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어 다수의 주력함들이 스크랩되어 사라졌지만 그녀는 다행히도 살아남았죠. 하지만 1930년에 런던조약이 체결되자 더 이상 현역으로 남아있을 수 없게되어 마침내 1931에는 퇴역하여 포격훈련함으로 전용되었고 2차대전 무렵에는 스카파 플로에서 오크니제도 해역 사령부 겸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하는군요.
[(좌) 1935년경의 모습 / (우) 포격훈련중]
[1946년 해체중인 모습]
1939년 10월 10일에는 (전함 로얄오크가 U-47에 의해 허무하게 격침당한지 2일 뒤) 독일 공군의 폭격기가 스카파 플로를 공습했습니다. 이때 본국함대의 다른 함선들은 U-47 기습의 전훈으로 모두 항만을 이탈한 상태였고 남아있는건 사령부 겸 창고로 쓰이던 아이언 듀크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500kg 폭탄 2발을 맞고 좌현으로 기울기 시작했으나 남아있던 승조원들이 배를 해안에 좌초시키는 바람에 간신히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죠. 참고로 이 당시 스카파 플로에 설치돼있던 방어 설비는 겨우 대공포 16문과 항만 출입구를 비추는 서치라이트 수 기 정도뿐이었다고 하며, 로얄오크 침몰 후에야 중대공포 80문, 경대공포 53문, 그리고 각종 서치라이트 108기가 보강되었다고 합니다. 아이언듀크는 그후 남은 전쟁기간동안을 계속해서 스카파 플로에서 보내다가 1946년에 최종적으로 스크랩처리 되었습니다.
2. 군함에서 방파제로 : 후유츠키
[잘나가던 시절의 후유츠키]
구축함 후유츠키는 아키츠키급 방공구축함의 8번함으로써 1944년 5월 말에 준공되었습니다. 준공 후에는 마리아나 해전이나 야마토의 마지막 항해 등 굵직한 전역에도 참가했고, 특히 야마토 최후의 항해 시에는 피탄한 로켓탄 2발이 모두 불발하고 5발의 어뢰가 모두 함저를 그냥 통과했다는 상당히 운좋은 사례가 있었죠. 종전 후에는 남방에 남아있는 일본군들의 귀국수송 등에 종사하기도 하고 공작함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난 후에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불안한 실정이었죠.
당시 일본 해군 함선들의 처분은, 대형함의 경우는 대개 스크랩 처리 (일부는 미국에 넘겨져 실험함으로 사용) 되었고 중·소형함의 경우는 소련이나 중국에 배상함으로 넘겨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다만 극소수의 함정은 전쟁으로 피폐한 일본 국내의 항만 복구를 위해 방파제로 사용한다는 방침이 세워져 있었죠. 후유츠키는 일본해군의 구축함 중에서는 비교적 신예함에 속했으므로 외국에 넘겨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종전 5일후 항만 내부에서 기뢰에 접촉하여 항행불능 상태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결국 국내 항만 복구에 사용하기로 결정됐죠.
[항내에 침저하여 방파제로 변모]
[군함방파제 : 좌로부터 1999년, 2000년, 2001년의 모습]
[보존공사 전후의 모습]
그리하여 후유츠키는 자매함 스즈츠키와 다른 구식 구축함 1척과 함께 사세보에서 상부구조물을 철거한 후, 큐슈 북단의 와카마쓰 항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해저에 가라앉아 방파제로써 남은 일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후 피폐한 일본의 경제사정 때문에 야간에 몰래 가스버너로 함체를 잘라다 고철로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파도로 인한 함체의 부식도 심해져서 결국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 함체 대부분은 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1년에 대대적인 항만 보수공사가 행해지면서 이들 군함방파제에도 콘크리트 타설로 보강이 이뤄졌고 오늘날 후유츠키와 스즈츠키 두 함은 방파제 안에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참고로 다른 1척의 구식 구축함은 아직 방파제 상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요즘은 나름대로 유명해져서 뒤늦게 보존공사도 하고 나름대로 관광명소화한 듯 하군요.
3. 모스볼 함대
미국은 1912년 이래로 많은 수의 퇴역 함정을 보존해왔습니다. 평시에는 더이상 필요없게 된 함선들이지만 만약 유사시에 함정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때는 새로 배를 건조하는 것보다 이들 퇴역함정들을 다시 현역으로 복귀시키는 쪽이 더 유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때문에 1차대전 종결 이래로 퇴역함중 성능과 상태가 양호한 일부의 함정들은 주요 장비를 제거한 다음 함 내부에 불활성 가스를 채워 산화를 방지한 후 항만 내부에서 다시 복귀할 날만을 기다리며 잠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조치를 통칭 "모스볼(좀약)"이라고 부르죠.
[모스볼 상태로 보존중인 구축함들]
이들 모스볼 함대들이 제 역할을 다한 것은 주로 2차대전이나 한국전쟁 같은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 때였습니다. 1940년 경에는 미국의 전시 무기대여법에 의해 모스볼 상태로 잠자고 있던 1차대전형 구축함들이 영국에 넘겨져 U보트 사냥에 한몫을 톡톡히 했고, 한국전쟁 때는 2차대전 종결 후 퇴역했던 구축함들중 대부분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죠. 그러나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모스볼 함대들은 대만이나 태국같은 중소 해군국들이 가끔 데리고 가지 않는 이상은 기약없이 항구 한쪽에서 잊혀진 채로 쓸쓸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순서대로 차례차례 스크랩되어 간다는 처지입니다. (현재는 평균적으로 1년에 15∼18척의 모스볼 함선들이 스크랩된다고 하더군요.)
[오늘날의 모스볼 함대들]
[겉보기에는 그럭저럭 양호해 보이지만..]
[실상은 이런 상태죠]
이들 대부분은 보존된지 20년 이상이 지났고 심지어는 50년 가까이 된 배도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10 여년 전부터는 모스볼 함대 주변에 바다새들이 늘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아예 모스볼 함대에 대규모 바닷새 거주지가 생겨서 해군 당국을 골치아프게 하고 있다고 하네요. 이쯤 되면 완전히 버려진 폐허에 가까운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톰클랜시의 소설에서처럼 태평양 함대의 항모기동부대 1∼2개가 일시에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는 이상은 이들 모스볼 함대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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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자료 출처]
- http://www.battleships-cruisers.co.uk/hms_iron_duke.htm
- http://www22.tok2.com/home2/maccha/gun2002.htm
- http://en.wikipedia.org/wiki/Pacific_Reserve_Fleet
출처 : 이사무의 소프트한 해군사
첫댓글 모스볼 별거 다 장착한 어선인줄 알았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