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찔한 잇꽃 좀 보소
박규리*
보따리 풀어놓고 어둔 방안에 앉은 당신을 보니 참말로 가슴이 무너져내리네 그동안...... 어찌...... 살았는가...... 다 접어둠세......새끼들 두고 도주한 자네 심정 생각하면 그 사연 소설 몇 권 안되겠나 피차 누굴 원망하겠는가 내 죄 더 큼세 저 꼼지락대는 것들 눈앞에 감감하여 농약병도 깊숙이 넣어둔 지 나도 꽤 오래네 자네 없이 살아보니 말이네만 내 속이 깊지 못했네 축사를 덮는 골판 지붕에도 왜 있잖은가 푹푹 골이 잘 져야 빗물이건 눈물이건 아래로 내려가지 않던가 제 몸의 골도 잘 파여야 하다못해 지나는 바람 한줄기 편히 흘러내리지 않던가 긴말 할 것 없네 몇 년 사이에 더 깊어진 이맛살을 보니 이녁 마음살도 터졌네...... 한잔 더 하려고 들고 온 술인데 잘 되었구만 쭉, 드소! 암말 말고 눈물바람도 치우고, 저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물 스미듯, 맺힌 맘 모진 세월 휘이휘이 가슴팍 아래로 흘러내리소 자, 자 이쪽 툇마루 쪽으로 좀 나와보소 아, 눈물에 부대낀 만큼 파이고 낮아지지 않는세월 봤는가...... 저기, 아찔한 분홍, 잇꽃 부푼 것 좀 보소
詩.박규리
集.이 환장할 봄날에 (2004)
*60.서울. 동국대 겸임교수
95.《민족예술》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