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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우주
시편 제19장의 연구
대자연은 추동(秋冬)의 교(交)에 들어가서 가장 그 장엄미를 발휘한다. 사시(四時) 중에 가장 함축적(含蓄的)이요, 계시적인 것은 이 시기다. 창공은 높고 대기는 맑고, 낮에는 끝없는 청정(淸情)을 운도표묘(雲道漂渺)의 외에 구치(驅馳)할 수가 있고, 밤에는 성하찬란(星河燦爛)한 밑에 경탄(驚嘆)과 경외(敬畏)의 염에 사모하는 가슴을 가지고 무변무한(無邊無限)의 세계를 은하의 저쪽에 찾을 수 있다. 이때에 무한의 문은 우리 위에 열려서 그 전폭(全幅)의 광선을 내려 쏘고 영원히 볼 수 있는 형상을 가지고 우리 앞에 스스로 임한다. 우리는 이때에 산 우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의 가슴에 뛰는 영원의 맥박에 접촉할 수 있다.
우리는 「시편」제19장에 의하여 옛날의 시인이 이 산 우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노래하였나 보자.
그는 우선 눈을 들어 창공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천체와 이 땅 위에 있는 만물을 보고, 이것이 모두 전능의 신 여호와의 지으신 것을 생각하여 감격이 넘치었다.
1.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궁창은 그 손으로 지으신 것을 나타내어 보이도다.
시인은 오늘날 사람들같이 물질론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 우주가 우연적 존재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경편(輕編)이 있어서 지은 것이었다. 고로 그는 범신론자(汎神論者)도 아니었다. 대우주는 위대한 것이나 그는 그것으로 곧 신의 현현(顯現)이라고는 아니하였고 그 위대 중에 전능의 신의 영광을 읽어내었다. 시인은 1절에서 6절에 이르는 동안에 자연을 읊음에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명사(名辭)에 특히 창조주로서의 전능자를 의미하는 ‘엘’을 사용한 것이 주의할 만하다.
2. 이날이 저날에게 말씀을 전하고
이밤이 저밤에게 지식을 베푸는도다.
그는 이 우주를 하나님의 지은 것으로 보았으므로 그것이 산 것이었다. 단순한 기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관통(貫通)하여 생동하는 우주였다. 고로 날이 날에 계속하고 밤이 밤에 계속하여 천체의 운동이 규칙정연하게 되어감은 기계적 연속이 아니요 거기 생명의 전입(轉入)이 있었다. 한 날은 그 다음에 오는 날에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위대를 말하여준다. 한 밤은 그 다음에 오는 밤을 향하여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영원의 지식을 전하여준다. 그리하여 하루, 1년, 10년, 1000년, 하나님의 앞에 영원의 날이 계속된다.
나는 이 시를 어떤 성일(聖日) 아침 우리 기도의 처소인 제석장군암(帝釋將軍岩) 밑에서 읽었을 때에 이 구를 반복 구음(口吟)하였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여서 이런 위대한 사상이 인간의 입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고 놀랐다. 물론, 이는 인간의 입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구(句)다. 사람의 혼이 어떤 것에 어떤 위대한 것에 어떤 산 것에 접촉되는 때에 울려나오는 소리다. 나는 외면 욀수록 그 위대한 말씀 지식(로고스)이 내 귀에 장엄한 음향으로 울려옴을 깨달았다.
3. 방언도 없고 말씀도 없으니
그 소리도 듣지 못하는도다.
4.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날에서 날로 밤에서 밤으로 전하는 그 말씀은 물론 귀에 들리는 말씀은 아니었다. 소리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우주에 가득 찬 소리였다. 온 우주가 구석에서 구석까지 그 소리로 인하여 진동한다. 혼의 귀가 먹은 사람에게는 이는 한갓 상상이요 시인의 미사(美辭) 같으나, 그 귀가 열린 자에게는 전신(全身), 전천(全天), 전지(全地)가 그 소리로 울리고 있는 것이다. 몰을배라 오늘날 세상에 반짝이는 성하(星河)의 아래에 서서, 하늘의 이가에서 저가로 울리어 닫는 이 영원의 말씀을 듣는 자는 몇이나 되나.
주께서 그 사이에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다 차일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장사와 같이 그 길을 빨리 다니기를 즐거워하도다.
6. 나오기를 하늘 끝까지 하매
운행하기를 하늘 끝까지 하매
그 더운 기운을 입지 않은 것이 없도다.
시인은 아마 아침에 이 시를 읊은 듯하다. 창궁(蒼穹)을 보고 주야운행을 보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인 것과, 그로 인하여 우주에는 배일(湃溢)하는 생명의 흐름이 있는 것을 읊은 그는 이제 동편 하늘에 솟아오르는 아침 해에 시선을 향하였다. 그럴 때 그의 가슴에는 상쾌(爽快)와 희열(喜悅)의 감격이 솟구쳐 올라왔다. 해는 평화와 기쁨과 희망과 원기가 넘치는 얼굴로 기운차게 솟는다. 이를 보고 그는, 마침 장사가 종일 달음질로 인하여 저녁에는 피곤(疲困)하여 돌아가나 밤 동안 그의 장막에서 평안한 휴식으로 원기를 회복하여 가지고 나오는 것같이, 하나님 은혜를 위해 장막을 베풀어 새 생명의 원기를 부여하여 주어가지고 영원의 날을 닫게 하는 것이라고 노래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형용하여서 신랑이 아침에 그 차일을 헤치고 나오는 것 같고, 이제 방금 질주(疾走)하려는 장사가 씩씩한 기상으로 스타트를 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모든 것은 실로 축복과 희망과 조화의 상태에 있다. 모든 천체 중에 가장 우리에게 가깝고 관계 깊고 주인 되는 것은 태양이다. 고로 그는 거기다 하나님이 자연을 다스리는 모든 법칙과 힘을 대표시켜 그 더운 기운을 입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즉 태양계에서는 그의 광(光)과 열이 온갖 에네르기의 원천인 것같이 우주에서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모든 존재의 근본이라 함이다. 고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으로 인하여 우주는 산 것이다.
이상에서 시인은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였다. 그러나 경이(驚異)할만한 것은 자연계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 경탄할 것, 더 찬송할 것, 더 감격스러운 것이 있다. 이는 곧 도덕계, 영계(靈界)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이다. 고로 시인은 제1의 세계에 대한 감격으로 말미암아 제2의 세계에 들어갔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은 한층 더 나타나고 한층 더 우리에게 가깝다. 특히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 보호하고 기르는 하나님이다. 고로 여기에서는 시인은 그의 고유명사인 ‘여호와’의 칭호로써 불렀다. 그는 일곱 번씩 이 성호를 반복하였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온전하여 영혼을 소생하게 하며
여호와의 증거는 견실하여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시도다.
8. 여호와의 명령은 정직하여 맘을 기쁘게 하며
여호와의 계명은 정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깨끗하여 영원까지 이르며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고 지극히 의로우시도다.
10.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또한 꿀보다 더 달며 꿀송이보다 더 달도다.
‘율법’의 원어는 ‘토라’(torah)라는 말로써 지도, 교도, 교훈 등 어(語)로 번역할 수 있다. 이를 가리켜 모세 5경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으나 반드시 그렇게 협의로 해석하지 않음이 합당할 듯하다. 시인은 전단(前段)에서 하나님의 지으신 것 즉 외적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였고 지금은 하나님의 의지, 곧 내적 영적 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경륜을 찬송하는 것이므로, ‘율법’이란 말은 성의(聖意)를 표시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하는 것이 더 힘 있는 듯하다. ‘온전’이라 함은 흠 없고 결점 없고 완전한 선의란 의미다.
그리하여 그 율법은 영혼을 소성(蘇盛)케 한다고 한다. 밥이 주린 자를 소성케 하고, 샘이 시든 잎을 소성케 하듯이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 영혼의 피곤을 제거하고 그침 없이 새 원기를 회복시킨다고 한다. 자연계에는 태양이 있어서 에네르기를 공급하고 영계에는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뜻의 가르침이 있어서 생명을 대여준다. 고로 거길 떠날 때에 사람은 죽이은 거요, 거기 연접될 때 사람은 시냇물가에 섰는 나무같이 잎이 무성하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이하에 ‘증거’ ‘명령’ ‘계명’ ‘경외하는 도’ ‘규례’ 등 어(語)로 말한 것은 모두 율법과 동의이어(同意異語)로 볼 것이다. 기쁨에 넘치는 시인은 여호와의 성의에 대한 찬송을 연발함에 이렇듯 여러 가지 말로 한 것이다.
그것은 견실하다. 변함없다. 고로 어리석은 자 즉 소박한 자 단순한 자(그러나 선악에 대하여 확실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를 지혜롭게 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은 또한 정직하다. 진실의 신 여호와의 의지임으로써다. 고로 우리는 만족과 감사를 가지고 이를 좇는다.
그것은 또한 순결하다. 고로 이를 지켜서 우리 영혼은 정화, 성화함을 얻는다. 우리 어두웠던 영혼의 눈이 뜨여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깨끗하다. 이방의 사교(邪敎)와 같이 썩어질 정욕의 더러움이 없다. 그리하여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른다.
그리고 이는 모든 진리의 표준으로 볼 때 확실 불변, 영원불역(永遠不易),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이다.
시인은 이를 형용할 말이 없었다. 고로 금속 중에 가장 귀하고 순수하다는 금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표시할 수 없음에 많은 정금(正金)보다라고 거듭하였다. 꿀로도 그 닮을 형용할 수 없어서 꿀송이보다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을 사모하기를 정금보다 더 하고 꿀송이보다 더 하는 자는 과연 복이 있을지어다.
시인은 자연계의 찬미로써 영계의 찬미에 미쳤으나 그는 여기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심금의 진동은 이제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제 인생 일반에만 멈출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의 영혼의 사실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도를 지난 진동은 이제는 찬송에서 기도로 들어간다.
11. 또한 이것으로 주의 종이 경계함을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써 큰 상을 얻으리로다.
12. 누가 허물된 것을 깨달으리오
주여 나의 은밀한 허물을 벗기시옵소서
13. 또한 종으로 하여금 짐짓 범하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그 죄가 나를 주장치 않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신즉 내가 온전하여
큰 죄 지음을 면하겠나이다.
그는 지금 자기를 가리켜 종이라고 한다. 그는 겸손한 맘을 가지고 자기에게서 죄를 제하기를 구한다. 우리는 이것을 읽으며 「로마서」 제 6, 7장을 상기하게 된다. 즉 바울이 율법을 설명하여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도다” 하고 거기 말을 이어 “대개 우리가 율법이 거룩한 줄로 알거니와 오직 나는 육체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느니라” (로마서, 제7장 12절) 하여 마침내 ‘오호(嗚呼)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하고 절망적 부르짖음을 하던 것과 상사(相似)하다. 이 시인도 이제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으로부터 자기의 죄의 사실에 이르렀다. 크리스천으로서의 동일한 경험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시인의 말이 “누가 허물된 것을 깨달으리오”하였다.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본성이다. 허물을 깨닫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이다. (로마서, 제 7장 7절) 고로 기독신앙으로 인하여 첫째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죄에 대한 자각이다. 그리고 이는 죄의 제거에 이르는 길의 첫머리다. 세상의 허다한 사람들이 자기가 죄인으로 지적받음을 슬퍼하여 여호와의 율법 밑에 나오기를 싫어한다. (요한복음, 제3장 19〜21) 그리하여 언제까지든지 죄 중에 안거한다. “은밀한 죄”라 함은 숨은 죄, 자기로서 모르는 죄다. “짐짓 범하는 죄”는 바울의 말한바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 한 데 당할 것이다. 그러기에 죄가 나를 주장(主掌)치 않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한 것은 이 시인은 역시, 기다리던 이를 보지 못하고 간 사람답게 그 마지막이 바울같이 명료치 못하다. 바울이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한 대신, 이는 “내가 온전하여 큰 죄 지음을 면하겠나이다” 하였다. 그러나 양자가 다 신앙적 태도인 데서는 일반이다. 고로 14절을 바울의 저 유명한 로마서 제8장 찬송에 상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보면 재미있다.
14. 내 입의 말과 네 맘의 묵상을 주앞에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오니
여호와여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하는 주로소이다.
‘말’ 즉 드리는 기도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맘을 묵상, 즉, 자기의 전인격을 바침이다. 이것이 제단 위에 희생을 드리던 구약시대의 일임을 기억하고 보면 한층 더 이해되는 바가 있다. 최후에 시인은 반석이요 구속인 여호와를 불러서 외적 환난과 내적 죄악에서 구하기를 빌었다.
이렇듯이 시는 자연의 찬미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필(畢)하였다. 일견 기이한 듯하나 이야말로 경건한 영혼의 역사의 순서다. 자연이 자연만으로 지(止)하는대는 오히려 그 진(眞)의미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계시하는 깊은 실재에 도달한 후에 비로소 참으로 산 자연이 된다. 자연의 미려는 그 자신으로서의 미려가 아니요 참으로 미려한 것의 계시로서의 미려다. 자연 가운데서 장엄한 것을 감득함은 그 신체로서의 장엄이 아니요 참으로 위대한 것의 계시임으로서의 장엄이다. 고로 자연 가운데 실재를 읽지 못하는 자에게는 자연은 산 것이 아니요 죽은 것이다. 현재 20세기의 문명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자연은 감격의 대상도 경탄의 대상도 아니다. 단순한 정복의 대상이다. 고로 그들에게는 이는 음미할 것이 아니고 처분(處分)할 것이다. 생명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해(死骸)다. 그것이 어쨌는가 하고 현대인은 반문하나 사실은 이것이 이 문명 —— 이미 고귀한 혼의 소유자들에 의하여 불행한 선고를 당한——의 근본 병폐다. 시대의 첨단(尖端)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이 살거나 죽거나 유신(有信)이거나 무신(無神)이거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관계없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어찌 알랴,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기실은 인류의 아들들을 모조리 몰아 멸망의 가운데에 넣는 날이 올 줄을.
세인(世人)은 도의의 염의 쇠함을 탄하나 그 근원을 찾을 줄을 모른다. 교육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나 오늘날 청년의 가슴에서 진실성이 사라졌음이 사실이다. 그들 중에 인생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는 자를 보지 못한다. 생에 대한 일편 감격의 정을 품는 자를 보지 못한다. 숭고한 것에 대한 갈앙(渴仰)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장래는 여기 있다! 놀랄 일이 아닌가. 낙담할 일이 아닌가. 교육가는 이것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나 이는 한갓 방법의 개선, 이론의 수정으로 될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근본에서, 맘의 태도가 근본에서 갱신되지 않고는 절망이다. 그들의 맘을 죽은 우주에서 돌리어 산 우주로 향하게 하지 않고는 모든 노력과 수고는 도로(徒勞) 뿐이다. 물질의 밀실에서 질식한 그 육괴(肉塊)들을 대우주 동산의 산 기운 속에 놓지 않고는 소생할 길이 없다. 시편 제19장의 작자는 이와 달랐다. 그에게 이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에서 밤으로 낮에서 낮으로 영원에서 영원으로 전류(傳流)하는 생명의 말씀이 있었다. 그런 고로 그는 이 실재의 계시에서부터 직(直)히 실재 그 물건으로 나갔다. 시의 제2단은, 형상을 초절(超絕)하는 실재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성의를 ‘인생’이라는 표현 속에 읊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산 인생의 사실임으로 인하여 마침내 직접 자아의 양심에 혹은 영혼에까지 투입(透入)하지 않고는 마지않았다. 즉 시인의 사상은 산 우주관 산 인생관 산 신앙이라는 순서로 전개되어 왔다. 이것이 위에 말한바 경건한 영혼의 역사의 순서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현대의 문명은 분명한 퇴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세상은 비웃고 침 뱉고 매도(罵倒)할 줄을 아나 그러나 인생에 대한 반성과 역사의 음미와 문명에 대한 검찰에 의하여 이는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사물에는 방면이 있다. 현대의 문명도 물질의 방면에서 비상한 진보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를 얼마쯤 고상케 하는가, 얼마쯤 행복케 하는가, 인류 위에 얼마쯤 평화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과는 별물(別物)이다.
젊은 남녀가 흥미 100퍼센트의 모더니즘에 취(醉)하는 동안에, 유능한 학도들이 물질 만능의 마르크시즘에 열중하는 동안에 숭고한 정신은 인류에게서 사라지고 선의(good will)는 사람들 사이에서 없어져버리고 만다. 대철(大哲) 칸트는 “빛나는 성천(星天)은 내 위에, 도덕률은 내 안에!” 라고 부르짖었다. 산 우주이고서 산 양심이다. 우주에 대한 숭경(崇敬)의 염이 끊어진 이 세상에 도덕의 퇴패(頹敗)함 또한일 당연한 일이다. 이 시대가 만일 살고자 하거든 저희는 우선 산 우주 속에 자기를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성서조선 1930. 12월, 23호
저작집30; 20-43
전집20; 11-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