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잘 살아야 돼 / 조영안
쿵쾅! 쿵쾅! 이 소리에 잠 못 이루었다. 자다 깨다 뜬눈으로 지샌 거나 마찬가지다. 층간 소음이 이런 거구나 싶다. 여태껏 방을 내놓아도 이런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주인 행세를 해야 될 것 같다고 남편은 단단히 벼르고 있다. 얼마 전 2층 앞쪽 빈방에 세입자가 들어왔다. 3년이나 비어 있던 방이다. 막상 내놓으려니 손보느라 수리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차라리 계속 놔 둘까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집은 더 못쓰게 된다며 남편이 의견을 내놓았다.
방 두칸에다 거실 겸 주방이라 제법 넓은 편이다. 예전에는 인기가 있었다. 집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되다 보니 많은 인연들이 살다 갔다. 인근에 제철소가 들어와 유동인구도 많았다. 깨끗한 양옥집이라 신혼부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신혼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하나, 둘 낳고 더 넓은 집으로 옮겼다. 새집에 처음 들어온 식구는 소라네다. 가까운 곳에서 분식 가게를 했다. 남편도 점잖고, 아내도 아이 하나 낳은 새댁이었다. 집을 완공하기 전부터 미리 선금을 들이대면서 방을 원했다. 살면서 아들과 딸을 더 낳았다. 큰아이 소라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15년을 살았다. 살면서 눈쌀 한 번 찌뿌린 적도 없었다. 들어가는 대문이 별도로 있어 누가 드나드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했다. 성실한 남편과 부지런히 가게문을 연 아내 덕에 넓고 깨끗한 집으로 옮겼다. 주변에서 이구동성으로 축하하며 ‘재수가 좋은 집’이라고 했다.
뒤이어 오일장 입구에서 철물점을 크게 하는 집의 할머니가 들어왔다. 아들네 가게도 가까워 좋아라 했다. 혼자 사니까 우리 어머님과 친구로 가깝게 지냈다. 역시 3년 후 가까운 곳에 자그마한 단독 주택을 마련했다. 우리 집에 이사 오면 집 사서 나간다고 이층 방은 소문이 났다. 그리고 집 위치도 좋다. 집 앞에 바로 초등학교가 있고, 10분 거리에 병원, 은행, 터미날, 그리고 읍내 오일시장이 있다.
철물점 할머니가 나간 후 문제의 가족이 들어왔다. 엄마가 없는 세대였다. 평소에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남자 혼자서 초등생 두 아이를 키우면서, 적당한 방을 못 구해 이리저리 떠돌면서 살고 있었다. 마침 방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당장 계약할 돈이 없다면서 은행에서 전세 대출을 받아야 했기에 당연히 집주인이 보증인이 되어야 했다. 기초수급자라서 이자도 싸고 상환 기간도 길었다. 어차피 우리한테서 돈이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러라고 했다.
기구한 운명처럼 한지붕 아래에 사는 가족이 되었다. 그는 남매를 키우면서 먹는 거 하나는 똑 소리가 났다. 잘해 먹이고, 잘 입히고 가정주부 못지않는 살림꾼이었다. 그런데 술과 도박을 좋아했다. 가끔 저수지에 가서 물고기도 잡곤 했다. 저수지 근처가 본가라 어린시절부터 고기잡이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팔기도 하고 지인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며 인정도 있다. 그런데 성깔이 한 번 나면 끝장을 본다. 그 성격에 못 이겨 사고를 친 후 결국 교도소로 갔다. 남매는 연년생인데 중학생이었다. 큰아이가 누나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아이들 걱정이 태산이었다. 혹시나 싶어 2층을 오르내리며 돌봐 주었다. 동생은 말이 없는 은둔형이다. 컴퓨터만 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보다 못해 우리 아들이 다니는 합기도 학원에 등록해 주었지만 한 달도 못 채우고 그만두었다. 또 등교하지 않아 담임 교사가 직접 집으로 찾아왔다. 문을 열어 주지 않아 손잡이를 부수고 들어갔더니 책상 밑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나마 누나는 학교도 잘 다니면서 성적도 상워권이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그 사람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딸아이는 대학생이 되었고,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직업훈련소를 나와 제철소 협력 업체에 다녔다. 어느 날 결국 사달이 났다. 사귀던 여자가 야반도주를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녀가 보증을 서고 우리 어머님한테 돈을 꾸어 간 것이다. 그녀한테서 몰래 전화가 왔다. 그 사람이 갚지 않으면 본인이 책임진다고 했다. 그날부터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살더니 건강에 이상이 왔다. 그 후 병원에 입원하기를 반복하더니 사망 소식이 들렸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후 그의 남매와 조카가 찾아왔다. 그동안 살면서 많이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빚은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며칠 후 아들은 원룸을 얻어 나갔고 딸은 직장이 있는 부산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잘한 짐은 정리했지만 큰 짐은 그대로 있었다. 22년 동안 살다간 공간은 엉망이었다. 밀린 공과금과 시청 전세자금도 독촉이 왔다. 아들한테 문자를 보냈다. 그동안 먹고, 잠자고, 지냈던 공과금부터 달라고 했더니 바로 보내 주었다. 전세 자금 대출 중 일부를 가져간 것도 해결해 달라고 했더니 더 이상 못 주겠다고 했다. 이유는 아빠가 저지른 일이니 할머니 돈도, 전세자금 일부도 갚을 수 없다고 했다. 돈 액수도 그렇지만 이제 성인이 된 남매가 우리를 기만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문제였다. 어디서 방법을 알았는지 ‘상속포기각서’란 것을 법원에 제출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속담이 맞았다.
성인이 된 남매가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최소한의 성의 표시라도 있었더라면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2년 반 동안 짐도 치우지 않았으며 2층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올해 초 시청에서 전세 자금 반환 때문에 연락이 왔다. 결국 보증인인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이 없어 하는 내게 담당 팀장이 그 아들과 만나자고 했다. 보기도 싫었던 2층에 열쇠를 챙겨서 올라갔다. 그의 아들이 나타났다. 전화와 문자로 그렇게 당당했던 아들을 쳐다보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리고 시청에서 나온 팀장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친분을 쌓았던 분이었다. "이 분은 좋은 사람이야. 너네 가족을 도와준 것도 알고, 자네 아빠 때문에 마음 고생도 많이 했어." 그동안 품었던 미움과 억울함이 한순간 사라졌다. 눈물이 났다. 2년 반 동안 짐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그동안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은 것도 확인했다. 팀장이 따로 아들을 만나 이야기한 결과 있는 짐도 다 치워 주고, 전세 자금 일부도 변제하기로 했다.
며칠 후 아들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동안 미안했다면서 계좌번호를 부탁했다. 또 마음이 약해졌다. 방에 있는 짐 치우는 비용만 달라고 했다. 그다음날 생각지도 않은 꽤 많은 금액이 입금되었다. 놀라서 연락했더니 그동안 미안했다면서 방 도배하는 데 보태 쓰라고 했다. 그랬다.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래, 잘 살아야 돼. 장가갈 때 꼭 연락하구." 나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화해였다. 연이어 반가운 소식이 왔다. 빌려 갔던 어머니의 돈도 그 여자가 갚아 주겠노라고 했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면 역시 좋은 일도 생기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