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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0일(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
요한일서 2:28-3:10
주님 만날 소망이 이끄는 깨끗한 삶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이번 달 「생명의 삶」에 타이타닉호 승객의 생존율에 관한 글이 실렸습니다.
타이타닉호가 바다에 침몰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체력 좋고 발 빠른 사람이 먼저 달려가서 구명보트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했을 겁니다. 그런데 통계를 보니, 대략 어린이의 생존율이 51%, 여성의 생존율이 74%였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남성의 생존율은 20%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배가 침몰하는 급박한 순간에,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Be British!(영국인다워라!)”
선장의 외침을 들었던 남성들이 어린이와 여성들을 먼저 구명보트에 태우고, 자신들은 차디찬 바다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Be Christian!(그리스도인다워라!)”
세상에서 비굴하고, 초라하고, 시시하게 살지 말고, 크리스천답게 살고, 행동하라는 음성을 이제는 우리가 들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찬수, 「복음으로 산다.」 (서울: 규장, 2018); 「생명의 삶」 (서울: 두란노, 2021년 1월호), p. 79에서 재인용.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다함께 3절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절).”
3절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가진 자마다 주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우리말 ‘소망’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엘피스’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엘피스’라는 단어가 요한서신에서 사용될 때에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다림입니다.
여러분은 ‘기다림’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 아버지의 유산으로 자신에게 나누어 줄 몫의 재산을 요구했습니다. 아버지가 어엿이 살아계신데, 이러한 둘째 아들의 요구는 너무나 무례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대로 각 살림을 각각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챙겨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며 지냈고, 결국 그 재산을 다 허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아들이 재산을 모두 탕진하자, 그 나라에 큰 흉년까지 찾아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둘째 아들은 어떤 사람에게 빌붙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사람은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들에서 돼지를 치던 둘째 아들은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그마저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 곤고한 시간에, 드디어 둘째 아들은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를 생각해 내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과 같이 다짐하였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공동번역, 눅 15:18-19).”
여러분은 이 이야기의 다음 장면이 무엇인지 이미 눈치채셨겠지요? 네, 그 다음 장면은 뜻밖에도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너무나 당황했던 둘째 아들이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읍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버지는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하인을 불러 제일 좋은 옷을 아들에게 꺼내 입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아들에게 입혀진 손과 가락지와 신발은 그의 옛 신분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품꾼도 아니고, 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버지에게 사랑받던 예전의 아들로 온전히 회복되었을 뿐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열었습니다.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며, 아버지는 그날 아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어떠한 사랑을 느끼십니까? 집 나갔던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던 아들마저 용서해 주는 사랑, 그리고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이 그려지십니까?
사도 요한이 이 사랑에 목이 메어 다음과 같이 소리치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을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기다리셨습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우리는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깨달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까요? 우리는 둘째 아들을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절).”
‘소망’은 헬라어로 ‘엘피스’입니다. 이 단어가 요한서신에서 사용될 때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다림이고, 둘째는 기대함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웃기면서 동시에 서글픈 이야기를 가리켜, 사람들이 ‘웃픈 이야기’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웃픈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분이 천국에 갔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렇게 인사를 하더랍니다. “예수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새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성경책 중에서 사람들 이름만 열심히 읽더랍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목사님이 이 모습을 보고 할머니께 물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왜 성경에서 사람들 이름만 외우세요?” 그랬더니 이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목사님, 내가 이 나이에 성경 내용 알아서 뭐하게요? 열심히 사람들 이름이라도 외워가야, 천국에서 만나면 잘 봐달라고 부탁할 수 있잖아요?” 여러분, 좀 웃프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장래에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저와 여러분은 장차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예수님을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그 날에는 우리가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둘째 아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품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은 마귀의 자녀도 아닙니다. 8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9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난 우리들도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이 세상에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함으로 인해 생활 속에서 짓게 되는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헬, 하마르티아)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씨’가 거합니다(9절). 여기서 ‘하나님의 씨’는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그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와 그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나 하나님의 씨, 즉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없는 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 권위에 복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없는 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헬, 아노미아)를 짓게 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게 됩니다(10절).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우리보다 더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존경받을만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깨끗한 삶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구지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우리가 가진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다시 만나고,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주님의 깨끗하심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둘째는 우리의 깨끗한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씨가 거합니다(9절).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십니다(요일 1:1). 생명은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1절에서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베풀어졌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베풀어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깨끗한 삶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깨끗하지 못하다면, 우리 안에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시기에, 소아시아 지역 비두니아 총독으로 있던 플리니가 당시 로마 황제였던 트라이얀에게 보낸 보고서 형식의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황제시여! 저는 부하 중 몇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위장해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부하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그리스도인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게 했습니다.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밤이든 낮이든 모일 때마다 그들의 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다고 합니다. 또 자주 빵을 나누어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제시여! 그들은 로마의 관리들과 황제 폐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공동체로 비쳐질 때, 주님이 영광 받으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지내던 카타콤의 어느 벽면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천국을 경험한다.” 어둡고 습기 찬 지하 동굴에서 그들은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처: 이승희, “사랑은 제자의 삶이다.” 「The 사랑」 (파주: 넥서스CROSS, 2012); 「생명의 삶」 (서울: 두란노, 2016년 7월호), p. 51에서 재인용.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실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선한 행실을 통해서 우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님을 다시 만날 소망이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은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을 다시 만날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품꾼도 아니고, 마귀의 자녀도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씨, 즉 하나님의 생명이 거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여러분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고백하고, 다시 깨끗함을 받으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서로 사랑함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기대하십시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