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되어 보니 깨닫는 것"
시편 131:1-3
요즘 뉴스를 보면 걱정할 일이 산더미 같습니다.
강남 한복판에서의 납치 살해 사건,
대치동 학원가에서 마약이 든 음료수를
건강음료라고 속여서 마시게 한 사건,
그뿐입니까?
갈수록 경기는 어려운데 월급은 오르지 않는 현실,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화를 향해 나아가는데
노후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지 않는 삶,
이 모든 것들을 볼 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불안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가 불안하고, 가정이 불안하고,
학교 교육이 불안합니다.
정치가 불안하고, 세계정세가 불안합니다.
이런 불안의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 시편은 다윗이 쓴 시라고 합니다.
다윗이 평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겪었습니까?
그런 그가 지금 자기 영혼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2절을 읽겠습니다.
시편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다윗은 자기 영혼을 젖 뗀 아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젖을 뗀’ 아이입니다.
아직 젖을 먹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젖을 먹는 아이에게 그것만큼 달콤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젖을 먹기 위해 엄마 품에 안기는 거죠.
그러나 젖을 뗀 아이는 다릅니다.
더 이상 젖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도의 신앙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신자일 때는 젖을 먹어야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그것 때문에라도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성숙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달콤한 젖을 달라고
떼를 부리시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젖 뗀 아이입니까?
아니면 교회를 오래 다녀서 몸은 컸는데
입맛은 여전히 젖을 구하는 갓난아입니까?
오늘 저는 젖 뗀 아이가 얻는 평안,
그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젖 뗀 아이처럼 고요와 평온을 누릴 수 있을까요?
먼저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함께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시편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이 말은 ‘나는 아무것도 안 할래요.’가 아닙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대단한 업적을 이룬 인물 아닙니까?
그는 등장부터 남달랐습니다.
블레셋의 최강 장수 골리앗을 이긴 자가
바로 다윗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
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잠언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걸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을 경계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칭송할 때도
그걸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울이었다면
“그래 그래. 나도 알아. 옳지 잘한다.”
고 했을 겁니다.
교만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와가
사탄에게 꾀임을 당합니다.
선악과를 보고 있던 하와에게
사탄이 이렇게 말하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거야.“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건 절대적인 교만함입니다.
하와가 다시 선악과를 보니
이전과 다르게 보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에 빠집니다.
사탄은 인간에게만
이런 유혹을 하지 않았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찾아와
3번이나 시험을 합니다.
그때 3가지 시험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나에게 경배하고 뛰어내리고
돌을 떡이 되게 할 수 있잖아?
그거 하면 사람들이 너를 높여 줄 거야.
나도 너를 높여줄게.“
교만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걸 뿌리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찬수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커지면서 제가 유명해지려고
이것저것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저는 제 분수를 압니다.
저는 이 교회 하나만 목회하기에도 벅찹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달콤한 속삭임으로
우리를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 겸손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세요.
이와 연관하여 생각할 게 있습니다.
1절 하반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이 시를 쓴 다윗은 누구보다
가장 위대한 일들을 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는 나가는 전쟁마다 승리하였죠.
그러나 다윗은 더 큰 욕망을 가지고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을 이루고자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
이란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분에 넘치는 일을 시도하지 않았죠.
성전 건축을 하는 일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던 왕이었기에,
당연히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모든 물자를 다 준비해 놓고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 너는 안 돼.
전쟁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그 말씀을 듣고도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노"라고 하시자 그대로 멈췄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자꾸 내 인생의 계획을 내 틀에 맞추려고
노력하진 않습니까?
자신이 생각한 틀에 맞춰서 주변 사람들을
압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본인은 모르지만,
주변에서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만약 그 일이 잘되었을 땐
"거봐 내 말 들으니까 됐지?"
라며 본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만약 잘되지 않으면,
"그때 내가 이렇게 하자고 했잖아"라며
주변인들이 열심히 따라오지 않은 것처럼
책임전가를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압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섬겼으니
이번에 이 사업은 성공시켜 주세요.“
”하나님, 제가 이렇게 헌금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했는데,
이번 일엔 제 계획대로 진행해 주세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진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지금 하려는 것이 내 욕심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를
늘 묻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답해주십니다.
그때 주신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 됩니다.
야고보서는 분수를 넘어서는
욕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겸손히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는 언제나 감사의 대상이 있습니다.
스승의 날엔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어버이날엔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죠.
날마다 우리는 영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여러 차례
감사에 대한 강조를 합니다.
골로새서 2:7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는 우리 삶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다니엘은 총리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어도
감사했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위기가 찾아오는 상황 중에도
전에 하던 대로 감사했습니다.
비록 몸은 포로로 끌려왔지만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을 열어 놓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거죠.
매일 감사의 삶을 사는 다니엘에게
하늘의 지혜와 총명이 더 해졌습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나요?
그러면 오늘부터 당장 감사하십시오.
도저히 감사할 게 없다고 느껴지십니까?
담임목사님의 감사 묵상과 감사봉헌을
읽어보세요.
아주 작은 것에 감사하고 계시잖아요?
오늘 주보에 나온 글입니다.
”감사가 내 안에 들어오면
불평과 원망과 탄식이 황급히 달아납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참된 만족과 평안이 있습니다.
...(중략)
감사는 하나님이 자신의 전 영역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중략)
그리스도인의 믿음 나무는
감사의 거름을 먹고 무럭무럭 자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젖 뗀 아이처럼 평안을 누리려면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믿음의 표현이거든요.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걸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평안합니까?
그는 엄마 품이 가장 안전한 곳임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안에서 완전한 만족을 누리죠.
감사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몰라요.
주신 것이 100이어도
남들보다 없다고 느끼는 1 때문에 불평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때
우리 마음은 겸손해지고
평안이 임할 줄 믿습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 함께 본문 3절을 읽어볼까요?
시편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 구절을 다른 성경들에서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고 변역합니다.
지금부터 영원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이죠.
엄마 품에 있는 아이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필요를
엄마가 다 챙겨 줄 걸 알기 때문이죠.
때가 되면 밥 주고, 씻겨주고,
입혀주고, 놀아줍니다.
아프면 병원에도 데려다줘요.
아이는 전적으로 엄마를 의존합니다.
즉 소망을 주님께 둔다는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아빠가 된 후
깨달은 것이 떠올랐습니다.
아이가 어릴 땐 엄마 품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엄마가 화장실에 갈 때도
문을 부여잡고 울었어요.
집안 일을 할 때도 울고,
요리할 때도 그 옆에서 꼭 붙어 다녔어요.
그런데 아이가 크면서
점점 엄마를 찾지 않더라구요.
오늘 우리에게 이거 없어진 것 아닙니까?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믿었을 땐
주님 품만 찾았어요.
그거면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엄마 품 없이도 하려고 하진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엄마 품을 찾는
어린아이의 절대 의존이 있습니까?
저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이 약해졌어요.
처음 아이를 키울 땐 모든 게 새롭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었어요.
기도하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알아서 크니까 잘 묻지 않아요.
문제가 생겨도
제 감정에 따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구약에 보면 모세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80세가 된 모세를
시내산에서 만나주시죠.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왜 벗으라고 하셨나요?
이제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을 내어 버리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라.
너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 나 하나님이다.
이제 너는 종으로 살아야 한다.
이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벗었던 신을 다시 신고 있진 않나요?
가정과 회사, 직장, 교회, 자녀, 노후, 건강 문제를
내 신발 신고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요?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요셉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어느 집사님이 쓰신 감사 편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잠시 소개해 드릴게요.
얼마 전 직장에서 어떤 사람이 편법으로
업무 진행을 강요하는 바람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저는
너무 화가 났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자기는 크리스천’이라고 자랑하며 다니는 사람이라
더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근무를 마치고, 기도실로 달려가서
그날 있었던 모든 울분과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을
주님께 울며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30분 정도 울며 기도하고 나니,
마음 가운데 평온함이 밀려왔고
제 안에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성경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말씀은 시편 37편이었습니다.
첫 구절부터 주님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악인을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말씀으로 직접 가르쳐주셔서
아무 말도 못하고
”네, 주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기도 시간을 마무리했습니다.
그 기도 후,
신기하게도 같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화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나도 내 마음을 스스로 바꿀 수 없는데,
성령님의 도움으로 제 자신이 조절되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감사했습니다.
아빠가 되어서 아이들과 놀아줄 때가 많습니다.
어느 때는 이런 놀이도 합니다.
아이 손을 잡고 빙빙 도는 겁니다.
그러면 아이가 신이 나서 웃어요.
이때 아이는 원심력에 의해서 손을 놓으려고 해요.
그래도 아이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어요.
왜요?
제가 손을 꽉 붙잡고 있거든요.
우리 주님도 똑같으십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길에 어떤 위기를 만나도
우리 손을 꼭 붙잡고 계세요.
그분이 붙드시는 인생은 절대 망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둡시다!
이와 연결하여 우리는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함께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안에 무엇이 우릴 두렵게 합니까?
다시 주님 품으로 안기십시오.
우리 모두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충만하게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