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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의 시에 나타나는 시선의 특이성
황인찬의 시를 곰곰이 읽은 독자라면 그의 시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생경한 이미지나 낯선 분위기를 느끼게 되고, 의미 파악도 쉽지 않으며 어떤 명료한 사상이나 메시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즉 황인찬의 시는 문법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시를 대하는 태도로 그의 시를 접하면 당혹감과 어지러움과 현기증을 느낄 수도 있다. 황인찬의 문법을 해독하려면 그의 시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황인찬이 시를 대하고 사물을 대하고 시어를 선택하는 시선은 사뭇 다르다. 우리의 시선과도 다르고 일반 시인들의 시선과도 충돌한다. 시선이 엇갈린다. 다른 시선이 만나는 자리, 여기서 바로 엇갈림이 발생한다. 이를 경험하는 우리는 묘한 긴장감과 불편함을 지니게 되고, 그러한 부정성에서 어떤 ‘공백’ 같은 것이 발생한다. 아마 이 엇갈림의 경험을 깊이 경험할수록 그의 시를 제대로 읽게 되리라.
이 글에서는 황인찬의 시에 나타나는 그의 시선을 추적하고, 그 시선의 어긋남의 특성을 해부한다. 생경하고 정나미 들지 않는 그 엇갈림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사회 즉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나의 한국어 선생님
나는 한국말 잘 모릅니다 나는 쉬운 말 필요합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왜 이 인분의 어둠이 따라붙습니까
연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문법이 어렵다고 너는 말했습니다
이 인분의 어둠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너는 문장을 완성시켜 말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매일 나는 작문 연습합니다
ㅡ 나는 많은 말 필요합니다.
ㅡ 나는 김치 불고기 좋습니다.
ㅡ 나는 한국말 어렵습니다.
너는 붉은 색연필로 OX표시합니다 X표시투성이입니다 너 같은 애는 처음이다 너는 나를 질리게 만든다 너는 이제 끝이다 당장 사라져라 이것은 너가 한 말들입니다
한국말이란 무엇입니까 처음과 끝을 한꺼번에 말하는 말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마에 난 X표시가 가렵기만 합니다
나는 돌아오는 길을 이 인분의 어둠과 함께 걸어갑니다 이 인분의 어둠이 말없이 걷습니다
(출저 : 구관조 씻기기)
이 시는 얼핏 보아도 시 같지 않은 시 같다. 유치하기조차 하다. 화자는 아마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이주외국인처럼 보인다. 화자의 문법에 맞지 않는 오류투성이의 글이 시의 내용을 이룬다. 대개의 시들이 온갖 시적 방법론을 사용하여도 문법이나 띄어쓰기는 지킨다. 황인찬은 시 속의 화자를 통해 그러한 시의 상식과 기본을 파괴한다. 여기서부터 엇갈림이 시작된다. 이 시에서는 사회 혹은 관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특이한 시선이 잘 드러난다. 나와 한국어 선생님의 대화와 관계를 통해 어긋난 사회, 엇갈리는 소통, 통하지 않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온통 문법적 오류가 가득한 표현들이 반복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인분의 어둠’은 화자가 경험하는 세계, 한국어 문법의 세계이다. 시 속에서의 화자는 이 문법을 따라잡지 못하여 실수하고 아파하는 부적응자처럼 보인다. 한국어 선생님이 가르치고 훈육하는 교실은 시인이 화자를 통해 그려내는 사회 혹은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문법 세계에 대한 부정이 두드러진다. X 표시를 당하며 정죄 당하고, 이마에 낙인찍히고 거부당하는 당하는 화자는 루저 혹은 소수자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화자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연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나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동경한다. 그러므로 ‘나의 한국어 선생님’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지만 ‘나와 하나 될 수 없는 그 사람’이다. 이를 사랑의 관계로 읽으면 짝사랑일 것이다. 즉 화자가 경험하는 문법의 세계는 난해하고 엇갈리는 사랑의 세계, 사랑의 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를 단지 개인적인 사랑의 문법 이야기로 국한시키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시적 상징과 이미지가 폭넓게 열려 있는 것 같다. 이 시의 은유들의 다차원성을 소통의 문제, 사회성의 차원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각자의 문법과 편견이 굳어져서,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의 엇갈림은 우리들의 일상이나 남녀 관계에서 늘상 경험하는 일이다.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고 상대방의 문법을 알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거절하고, 냉정하게 X 표시를 해버리고 상대방을 판단해버리는 관계성의 비극을 이 시는 드러내고 있다. 뒤집어서 보면, 우리들 모두는 한국어 선생님과 같은 독재자요, 불통의 사람이요, 폭력적인 존재들이다. 자기 이데올로기의 문법으로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국어 선생이었고 타자의 이마에 X표시를 하는 권력이었을 수도 있다. 한국어 선생님은 미셸 푸코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서문에서 언급한 ‘내 안의 파시스트’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이 시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타자를 자기 문법으로 지배하는 파시스트 선생님의 세계인 것이다. 화자를 통해 황인찬이 세상과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불통과 부적응과 단절을 특성으로 하는 엇갈린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2. 삶에 대한 시선
혼자서 본 영화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그와 영화를 봤다
그건 일상의 슬픔과 고독에 대한 영화였고
가는 비가 내리는 장면이 너무 많았다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의 연기가 계속되었다 그건
내 인생을 베낀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배우의 눈썹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영화가 끝나자 스탭롤이 올라갔다 그는 죽어 가는
군인이 휘파람을 불 때 조금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없었고,
내가 말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서
비옷을 입은 아이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출저 : 구관조 씻기기)
이 시에는 삶을 바라보는 황인찬의 엇갈린 시선이 드러난다. 그가 그리고 있는 시 속의 풍경은 혼자서 영화를 보면서 목격한 영화 속의 장면과 영화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내용과 극장 안팎의 장면이다. 이 시에서는 다분히 상상과 착각이 연속되고 논리적 연관성이 전혀 결여된 경험들이 이어진다. 화자는 그와 함께 영화를 봤다고 말하지만 시의 제목은 ‘혼자서 본 영화’이다. 그리고 영화 속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베낀 각본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편집된 세계이다. 나와 대화하는 그는 누구일까? 독백이자 환청적 대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하는데 이는 독백이다. 하자는 분열된 주체이며, 그에게 영화와 현실과 환각과 환청이 마구 뒤섞여 구별되지 않는다.
특히 2연은 시인의 세계를 매우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일상과 슬픔과 고독에 대한 영화” 이것은 화자를 통해 그리는 시인의 삶에 대한 시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삶이란 일상과 슬픔과 고독에 대한 환영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특별한 경험과 희열과 소소한 기쁨과 만남과 소통으로 약동하는 축제의 삶과 거리가 멀다. 이 세계는 “가는 비가 자주 내리고 장면이 너무 많은” 세계이다. 이러한 영화 속 세계는 그가 경험하는 세계의 풍경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의 연기”는 타자의 행위를 보는 시인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영화 속의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고 그는 배우와 그의 연기를 본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들 배우이며, 그들의 행위는 다 연출이며 쇼이다. 이는 다분히 비극적인 시선처럼 보이지만 철학 혹은 정신분석학적 견지에서 보면 이는 삶의 진실이기도 한다. 놀랍게도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는 황인찬 자신이 아닐까?
이 시는 다분히 편집증적 스토리이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의 제4부에 4편의 시를 모아두었는데 ‘혼자서 본 영화’와 ‘히스테리아’, ‘세컨드 커밍’에서 전형적인 편집증적 전개가 드러난다. 편집증적 진술과 묘사가 하나의 시가 되고, 그것을 하나의 시의 문법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즉 편집증적 묘사를 시적 장치로 도입한 것이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화자를 편집증자 행세를 하도록 하였다. 일종의 비틀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황인찬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3. 사랑에 대한 시선
실존하는 기쁨
그는 자꾸 내 연인처럼 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아파트 단지의 밤
가정의 빛들이 켜지고 그것이 물가에 비치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검게 타들어 가는데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가 말했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보자고 했다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담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출처 : 희지의 세계)
이 시에서도 시인의 특이한 시선과 감정이 묻어난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언뜻 노출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특히 이 시에서는 사랑 즉 감정의 영역에서의 엇갈림 혹은 차이를 노출하고 있다. 이는 ‘내’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시의 서두에서 나와 그는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앉아있다.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연인 사이이다. 그러나 화자는 엇갈린 태도를 보인다. 그가 ‘마치 애인처럼 군다’고 말한다. 마치 냉정한 관찰자의 자리에 서서 별 느낌이 없다는 듯이 차갑게 반응하고 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을 보고서 못 본체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엇갈림이 드러난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이처럼 자신의 태도와 선택에 대해 그저 관조한다. 자기 자신의 태도조차 차갑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6연의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는 서두의 ‘내 연인처럼 군다’와 짝을 이룬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속내의 살짝 드러냄이다. ‘연인이다’ 또는 ‘연인이 아니다’가 아니다. 애인처럼 군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다. 내 연인 같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나의 생각일 뿐이다. 여기에 상호간의 사랑이 없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혹은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가 아니다. ‘애인 같다, 애인처럼 군다’이다. 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할까? 이것이 이 시의 화자를 통해 보여주는 시선이다.
마지막 연은 이러한 시선을 생생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담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대목에서 ‘어두운 물’은 미지의 사랑의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처럼 읽힌다. 그것은 금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손을 집어넣으면 굳어져 고체화시켜 버리는 마법의 물이다. 그 속을 알 수 없다. 어디까지 빠지게 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어둠의 심연이 곧 사랑의 세계이다. 그래서 손조차 담그지 못한다. 몸을 던져야할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단지 심리적인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아니다. 사랑의 세계 자체를 어떤 금속성 세계로 인식하는 태도에 기이한다. 나를 굳어지게 만들고 고정화시키고 속박하는 어둡고 출렁이는 세계, 그래서 뛰어들지 못하는 것이다.
황인찬이 그려내는 세계는 불확정성의 세계이다. 다음의 표현들에서 그러한 태도와 시선이 확연히 드러난다. “내 연인처럼 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담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삶, 특히 사랑에 대한 그의 시선은 더더욱 불투명하고 불확정적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이것이냐 - 저것이냐를 선택할 수 없는 어둡고도 철렁거리는 금속성의 세계이다.
4. 나가는 말
황인찬의 시선은 다른 눈이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이성의 눈이나 보이는 대로 인식하는 감각의 눈이 아닌 제3, 제4의 눈, 혹은 편집증적 눈이다. 시선의 어긋남은 주체의 어긋남 즉 분열을 일으킨다. 시적 주체의 분열은 시 라는 백지 위에 뒤틀리고 분열된 형상을 새긴다. 즉 시선의 어긋남은 경험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나아가 이 경험을 이야기하는 언어와 시적 구성과 이미지의 탈선을 초래한다. 즉 스토리의 해체가 일어난다. 이러한 분열은 그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 속에 균열을 남기며 어긋남의 경험을 초래하여 정서적 일치나 운율의 감동이나 명확한 메시지가 주는 통상의 시적 경험을 붕괴시킨다. 시인의 어긋남은 독자의 어긋남으로 이어지고, 독자는 시인에게 다가갈 수 없고 친밀감을 느낄 수도 없으며, 무한히 갈라선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그 갈라섬의 부정성의 경험이 바로 황인찬을 만나는 방식일 것이다.
황인찬은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메시지를 던지는 건 의미가 없어요. 아주 일시적이고, 심지어는 내가 무슨 메시지를 갖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몰라요. 그런 건 다 착각이에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말이, 오히려 그 말을 선택하는 순간 훼손돼요. 손상되고 아무것도 아닌 덜 떨어진 종류의 말로 메시지가 갈 수밖에 없어요.” (채널예스 인터뷰. 2016. 1. ‘시인 황인찬, 응시의 감각과 정직한 조율사’에서 인용). 그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비틀고 있다. 다른 시선으로 보고 사물을 엇갈리게 배치하고 모든 것을 생경하게 묘사하고 엉클어지게 하여 뒤틀린 세계를 보여준다. 황인찬의 둘째 시집 ‘희지의 세계’에 대한 작품해설을 한 시인 장이지는 황인찬의 세계를 ‘폐쇄회로의 시니시즘’이라는 제목으로 설명한 바가 있다. 황인찬의 시의 소재는 대개 일상과 관련된 것들이고 그 스토리들도 일상적이다. 그 일상은 매우 건조하고 차갑고 먼 거리에 있는 듯한 무대이자 특수한 렌즈에 포착되어 담아낸 비틀어진 세계처럼 보인다. 그 투사체와 장면을 바라보는 이들은 황인찬의 냉소적 시선에 포착되는 일상과 존재의 차가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황인찬의 시작법과 시세계는 어떤 진보성이나 공공적 이상을 지니고 있지 않고 매우 사적이며 단절적이며 게토처럼 보이는 측면이 다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황인찬에게서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고 해체를 시도하는 전복성을 보게 된다. 예술의 힘은 다름 아닌 전복에 있고, 전복적 힘을 끌어들이는 데에 있다. 낯선 말, 낯선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은 일종의 전복적 시도이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은 일종의 전복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전복은 탈주의 속성을 지니며,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낸다. 기존의 질서를 해체시키고 변방 그 어디에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내는 해체성을 지니고 있다면 황인찬을 시세계에서 탈주의 실험을 하는 노마드로 분류할 수 있는 여지는 있을 것이다. 시인 황인찬은 의도적으로 시의 문법을 해체하고 있다. 이는 단지 ‘삐딱하게 보기’ 습관이 아니라 일종의 전략이기도 하다. 좀 더 눈여겨보면 그는 모든 종속, 즉 시의 법칙과 문법과 대상과 독자로부터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완전한 상상력과 창의력의 자유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브르통이 말한 바처럼 “상상력의 힘은 절대로 지배될 수 없다.” 황인찬은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실험자이다.
황인찬은 백치처럼, 아이처럼, 편집증자처럼 자기의 별난 시선에 보이는 대로 혼잣말을 하며 중얼거리며 허공을 향하여 시어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되면 그의 시가 보이게 된다. 황인찬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이해해주거나 그러한 시선을 동일하게 가지기를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독자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려고 하거나 소통하려고 하는 최소한의 여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눈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며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도에서 그가 거부하는 문법의 세계와 다른 새로운 문법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황인찬이 만드는 새로운 영토에는 아무도,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휘어지고 비틀리고 생경한 다른 세계가 적요한 흑백 영화처럼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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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공백] 세미나 7월8일 첫모임 세미나 후기
첫모임에 대한 기대감과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는데, 기대감은 기쁨으로 긴장은 릴렉스함으로 모임을 잘 마쳤습니다. 어떤 분들이 오실까? 첫모임은 어떻게 진행될까? 게다가 간식도 준비하고 시소개도 해야 했습니다.
간식은 집어먹기 좋은 과일을 중심으로 했는데, 메뉴 선택은 통찰력이 깊으신 선우님의 제안에 따른 것입니다. 오전 모임에는 주로 빵이나 다과 등을 간식으로 하지만, 우리가 점심식사 직후에 모이는데다가 여성들이 다수이므로 정말 멋진 아이디어였습니다. 포식성을 지닌 저는 빵을 먹고 싶었지만 ~~ 꾹 참고 간식 구해서 세팅하고.
첫모임에 찾아오신 분들이 한분 한분 참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다들 시를 사랑하거나 시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인문학이나 철학적 사유를 추구하시는 분들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시인이 모두 세 분이나 되셔서 참 든든했습니다. 1980년대에 등단한 오라클님, 반장이자 리더로 수고하시는 희음님, 그리고 시인의 세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반디님 등의 내공으로 모임의 컨텐츠가 알차게 채워지고 시를 보는 눈이 좀 더 열리고 무언가 많이 배우게 될 것 같습니다. 동화를 쓰시는 분도 있고, 그림 그리는 분도 있고, 우리실험자에서 여러 다른 세미나에 참석하며 열공하는 분들도 있고.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분도 있고 ~~ 미래를 준비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2시 정시에 모임을 곧바로 시작하며 서로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하고, 이 모임에 오게 된 동기나 계기같은 것을 돌아가면서 이야기하고 곧바로 황인찬의 시를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시 읽기]
돌아가면서 시 한 편을 두 사람이 읽고 곧바로 대화를 하는 방식의 합독입니다. 누군가 읽고 또 들으면서 시맛을 느끼는 것이 포인트처럼 느껴졌습니다. 미리 읽어보고 오지 않으면 세미나 현장에서 나의 읽기가 서투르게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담부터는 집에서 미리 소리를 내어 읽어보고 가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나중에는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시 한편을 읽고 바쁘게 진행되었습니다. 아쉬웠지만. 여튼 매 세미나마다 모든 참여자들이 한번 이상은 공개적으로 시를 낭송하게 된다는 산술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시 6-9편 X 2 사람 읽기 = 12-18명, 참석자 평균 13명.
[황인찬 시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시를 읽은 후 먼저 당번인 제가 준비한 시소개를 간단히 읽으면서 설명하고 반장 희음님이 대화를 진행하였습니다. 시소개는 발제문은 아니고, 그냥 시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나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편하게 이야기하여 토론이나 대화에 도움이 되는 자료나 힌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소개를 타이핑해서 프린터를 하지 않고 그냥 충분히 읽고 와서 입으로 소개를 해도 된다고 하여서 모두의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아마도 시에 익숙하지 않는 분들도 있고, 당번이 되는 분들이 그리 부담감을 가지지 말라는 것으로 들려서 고마웠습니다. 저는 말주변도 없고 난해한 시로 소문난 황인찬 시인을 다루어 문자화하지 않을 수 없어서 긴 소개문을 만들었네요 ~~
자유로운 분위기로 대화하였고, 처음에는 다소 딱딱하게 대화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제가 시소개를 무겁게 해서이기도 하고, 황인찬의 시 자체가 별나고 난해한데다가, 첫날이라 어떤 레포같은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해서일 겁니다. ㅋ. 여튼 대화의 후반부로 가면서 보다 편하고 재미있고 자유로운 대화들이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아마 다음 모임에는 더 잼나고 풍성하겠지요.
함께 나눈 대화 중 인상적인 것을 나름대로 아래에 담아봅니다.
1. 구관조 씻기기
‘새’를 무엇으로 보느냐? 이에 대해 신선한 생각들을 나누었습니다.
1) 새 = ‘시’
황인찬 시인이 시를 이해하고 다루는 방식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은유가 아니라 환유의 방법으로 자신의 시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는 분도 있었고
2) 새=자기 자신
새는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다고 본다는 의견들도 있었습니다.
3) 새=사랑
새를 '사랑'으로 읽는 시선도 참신했습니다.
4) 이 ‘새’는 시도 될 수 있고, 자기 자신도 될 수 있고, 사랑, 인생, 타자 등도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 표헌이 이 시를 이해하는 키포인트로 느껴진다는 의견에 대체로 공감한 듯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새를 억지로 씻기려고 하지요.
아마도 이 시는 시인의 실재 경험 즉 도서관에 방문하여 책을 읽고 거기서 빛이 비추이는 장면이나 책읽기, 생각과 느낌 이후에 도서관을 빠져나오면서 경험한 서사를 그냥 담담하게 다룬 것 같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똑같은 시를 읽고서 느낌이나 해석이 제법 다른 것이 잘 드러난 좋은 이야기 나눔이었던 같습니다.
2. 유독
제목 ‘유독’이 무슨 뜻이냐?를 두고 흥미진진한 추리들이 이어졌습니다. ‘매우, 특히’로 이해할 경우 유독 너는 정말 예쁘구나 ~~에 포인트가 주어지는 듯 하고, ‘유독(有毒)으로 읽을 때 어떤 독성같은 것, 냄세 같은 것이 흐르는 뉘앙스도 담겨 있는데, 시인은 아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특이한 제목을 정한 것 같다는 열띤 대화들이 있었습니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의 대화와 어울림이 죽 이어지는 시인데, 매우 슬픈 느낌의 시로 다들 받아들였습니다.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이 표현이 트위트에 인용되는 듯 매우 인기있게 알려진 황인찬 시인의 표현이라고 하네요 ~~
3. 여름 이후
시 속에 등장하는 경미의 죽음과 다른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마치 일상적인 듯이 나열되고 있다는 시의 흐름을 모두가 보았습니다.
‘책상위의 국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연상하고 떠오리면 읽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비록 이 시가 세월호 사건 이전에 쓰여진 시이고 황인찬 시인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렇게 읽고 느낀다는 것은 참 의미있고 경이로운 경험이었던 같습니다.
“경미는 애들 마음 속에 살아있고 / 애들은 아직 살아있다” 이 싯구가 이 시에서 포인트라는데 다들 공감하는 것 같았습니다. 경미는 살아있고, 애들은 아직 살아있지만 죽음이 암시되거나 사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상위의 국화는 노란 국화였다” 이 표현을 두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1) 처음의 흰국화를 잘못 본 것이었다는 표현같지만, 지금 노란국화로 보인다는 의미로 다들 보았습니다. 2) ‘노란 국화’는 조화로 쓰이는 국화와 달리 생명, 희망, 살아있음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분들도 있고, 흰 국화가 시들어버려서 노랗게 색이 바래진 것 같은 느낌으로읽었다는 분도 여럿 있었습니다.
2연의 국화의 색깔과 교복이 체육복으로 바뀌는데서 시 전체의 흐름에서 전환이 일어나고 어떤 암시를 던지면서 미래를 위한 공백을 남겨두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4. 개종
‘개종’이라는 제목과 시의 내용이 직접 연결되지 않는 시여서, 시인이 제목을 왜 이렇게 잡았을까? 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누군가 말씀하기를, 황인찬 시인이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시를 쓰는 방법은 먼저 제목을 정해두고, 그 제목에서 가장 멀리있는 사물이나 사건이나 경험들 이것 저것 잡다한 것들을 끌어모아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명한 메타포로 탁 드러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별 연관성 없어보이고 낯선 것들을 묘사하고 나열하여 무언가를 말하는 방식이란 것입니다. 그의 시를 이해하는데 저에게는 소중한 정보였습니다. ^^
누군가 “예술이나 문학의 핵심이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는 멋진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렇네요 ~~ 시인은 낯설게 보고, 낯설게 표현하고, 독자들도 낯선 경험을 하니까요
이 시에서 문 안쪽과 문 바깥이 대조되고 있는데요, 문이라는 경계가 어떤 변화 혹은 개종과 밀접해보인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다들 공감 ~~
문의 안쪽이 ‘나와 기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기원은 누구일까? 무엇일까? 의견들을 나누었습니다. 사람? 사물? 시작(基源)?, 내 안에 있는 어떤 바램(祈願)? 등으로 다양하게 읽히는 뉘앙스가 다분한 ‘그’입니다.
여튼 이 시 속에서 나의 종교는 '기원'이라고 멋지게 파악/표현한 분도 있었습니다. 그를 바라보고, 그에게 뭐 잘못한 것이 없느냐고 묻고 그의 대답을 통해 무언가 확인하고 안도하는 모습이 다분합니다.
황인찬의 시에는 ‘여름’ 메타포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놈의 여름이란 것은 봄, 가을, 겨울과 비교해서 무언가 딱히 확 붙잡히는 의미가 선명하지 않은 계절이거든요.
“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이 어떤 변화의 서막같은 느낌을 주는데, 나는 문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시의 묘미같기도 하구요 ~~~
5. 번식
이 시를 읽으면서 황인찬이 자주 사용하는 ‘웃음’에 대해 함께 말했는데요, 다들 그의 웃음은 냉소이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웃음이다, 이 시 본문에서는 대답의 거절로서의 웃음이다, 등 그의 다르고 별난 웃음이 대해 우리들이 간파했습니다. 그의 무감정, 무인격성에 대해서는 저 역시 혀를 내둘렀지만은요 ~~~
황인찬의 시는 우리 시대와 젊은 세대들의 의식과 감정은 잘 드러낸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의미, 무감동, 무감정 ~~~ 신자유주의시대에서 설 자리를 잃은 청년세대의 그 무엇을. 황 시인이 젊은 시인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시인의 시는 그 세대와 시대를 드러낸다는 면에서 아주 잘 짚어낸 것이고 저는 느꼈습니다.
‘차가운 과일 통조림’이 마치 병원과 똑같아 보인다고 말한 분이 있었구요,
남자 간호사가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것을 보아, 면회가 극히 제한되는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어, 죽음이 임박한 상황을 느끼게 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죽지 않는 과일“이지만 사실은 죽은 과일이고, 다르게 읽으면 ‘이미 죽어버렸으므로 더 이상 죽지 않는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는 멋진 생각을 나눈 분이 있었습니다. 정말 그렇네요.
이 시 속에서 무엇이 번식하고 있는가? 저는 만남과 질문과 웃음(거절), 침묵으로 이어지는 침묵의 번식과, 죽은 것이 입안에 가득하게 되는 ‘죽음의 번식’이 보인다고 했는데, 사실 침묵의 번식 역시 죽음의 번식이지요.
작가는 그냥 작업을 하고 시를 쓰고 만들어내고 무언가를 가볍게 던지듯 이야기하는데, 독자가 너무 심각하게 시를 해부하고,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기보다 역시 가볍게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6. 나의 한국어 선생님
반장이 아홉 편의 시를 준비했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이 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이 시에서 소수자문제나 문법과 규율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을 읽어내었는데, 다른 분들은 무언가 다르고 깊고 신선한 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1) 나의 한국어 선생님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지만 ‘나와 하나될 수 없는 그 사람’을 그리고 있다는 희음님의 생각이 멋져보였습니다. 2연 “연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는 표현에서 이를 읽을 수 있네요. 짝사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읽으니 2연과 5연이 확 뚫리는 듯 했어요. 그럼 사랑의 문법이 어렵다로 읽히기도 하구요.
2) 소통의 문제를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법이 어렵고, 말이 통하지 않는 등. 우리들의 관계나 일상, 특히 남녀 관계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통하지 않고 상대의 문법을 알지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거절하고, X 표시를 하면서 상대를 판단/제단해버리는 ~~~
‘나는 누군가에게 한국어 선생님이었고, 누군가의 이마에 X 표시를 하였을 것이다’고 소회를 말하신 분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도 그런 자성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국어 선생님에게서 ‘안티 오이디푸스’ 세미나에서 공부하였던 '내 안의 파시스트'를 읽었습니다.
여튼 이 시에 대한 반응은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시 중에서 게중에 쉽고, 우리 가슴에 확 다가오는 주제이고, 관계나 연애나 소통이나 권위주의 사회에서 늘 경험하여온 일들이니까요 ~~~
마치고 나니, 헉 5시 20분이 넘었네요. 3시간 20분동안 잼나고 함께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는 자리가 참 좋았습니다.
P.S. [시평 및 소감]
아래에 제 개인적인 소감과 시평을 간단히 담습니다. 마구 쓴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소감에는 이런 것이 전혀 필요없구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1. 개인적 소감
황인찬의 시에는 ‘비(非)’나 ‘부(否)’, 혹은 ‘탈(脫)’의 범주가 두드러진다. 이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 언어이자 세계이다. 사실 우리 시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는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되는 측면이 다분하지만 황인찬의 시세계에서 그러한 경향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불연속성, 분절, 부재, 분열, 탈구심, 비결정성 등을 나타내는 부정적 수사의 출현과 거리두기, 차가움, 냉소, 무개입, 무감정, ‘슬프지 않음’ 등의 정서는 그의 시에 한결같이 흐르고 있다. 시나 노래라기보다 차가운 회화나 원근법이 가미된 흑백사진같은 그의 글에는 화려한 색체나 신명을 울리는 소리조차 배제되어 있다.
김기택의 시가 생각났다. 묘사가 아주 탁월한 그의 시에서 느껴진 것은 묘사나 표현의 정교함에 비례하여 건조하고 감정 없음의 공허였다. 황인찬의 차가움은 그러한 냉정한 묘사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사라짐, 무개입, 대상의 해체와 같은 공백같은 것에서 스며나오는 것 같다.
그의 시는 생경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친화적이지 않았다. 나는 열림이나 연대, 따스함이나 의미 따위를 말하며 사는 사람이다. 꼭 그렇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그렇다는 것이다. 황인찬의 시들을 읽으면서 나의 스타일과는 아주 달리 무언가 싸늘하고 무의미하고 재미도 슬픔도 없는 닫힌 세계를 접하는 듯하였다.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런 숨겨진 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그의 시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해보았다.
개인적 소감을 굳이 말한다면 그의 시를 읽으면서 세대적 거리나 가치적 괴리를 느낄 정도로 무의미성의 표류가 다소 불편하였다. 스타일이 다르다. 해석은 애써 해내겠지만 그의 공간은 들어가기 싫은 방처럼 느껴진다.
아무런 역동이 없다. 심장을 뛰게 하는 지점도 없다. 진선미의 표상이나 열정을 미화하는 나의 습관과 마찰하거나 충돌할 접촉점을 찾기 어려울만치 먼 거리가 존재하는 느낌으로 읽었다. 부재 혹은 해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시의 맛은 깊은 맛이 아니라 생소하고 이질적인 맛, 시인과의 조우는 정겨운 만남이라기보다 정이 들지 않는 어떤 회색 소묘를 보는 느낌이었다.
2. 평가들
2-1.
<구관조 씻기기>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박상수는 황인찬은 ‘신비의 전도사’(구관조, 106)이라고 칭한다. 또한 그는 황인찬의 시들이 감성적 도취나 문학적 향유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요성’(106)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시는 “격앙되는 법이 없고 크게 절망하여 한탄하는 일도 없다. 그저 너를 그대로 지켜보는 것으로 나의 할 일을 다하였다는 듯이 담담하게 대상을 바라볼 뿐이다. 불현듯 여기서 이상한 ‘공백’이 발생한다.”(106)
또한 박상수는 황인찬에게서 성(聖)-속(俗)의 구도를 발견한다. 즉 황인찬은 그저 지켜보는 자처럼 서있지만 ‘너무나 온화하면서도 관능적으로 신의 형상을 이 땅에 구현해”(110)내는 이로 파악된다. 즉 황인찬의 시에는 신성의 차원에 대한 지향이 고요히 드러나며, 따라서 그는 신성을 예민하게 그리고 ‘관능적으로 감각하는 존재’(111)라는 것이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 대한 해설을 통해 박상수는 신의 역동성, 성스러움, ‘초역사적이고 초자연적’이라는 수사로 그의 시 세계를 극찬한다(109-110). 하지만 빈 방에서 있는 백자에게서 어떤 신성이나 성스러움을 읽어내는 해설자의 해석은 흥미롭지만 사실 과함이 있어 보인다. 그의 시세계에서 신성의 차원, 혹은 성스러움의 빛깔이 어느 정도 깔려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의 시들에서 종종 등장하는 ‘교회당’ 메타포나 ‘노인’ ‘할머니’ 등의 상징, 개종 시리즈 등에서 그러한 요소를 읽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맥에서 성스러움이나 신성에 흡착하려는 몸짓보다 탈신성성 혹은 성스러움의 요소에 대한 냉소적 거부의 이미지가 더 강해보인다. 그들은 늙은 노인 혹은 할머니, 죽어 없어진 할머니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의 부재 혹은 신의 죽음에 더 끌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스러움의 차원은 그의 시 세계에서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초자연적’이라는 수식어로 황현찬의 특징이나 그의 시세계를 평하는 것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 굳이 백자에게서 읽혀지는 성스러움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고결함이나 초월성이나 독존이나 충만함이나 빛남과는 다른 의미의 성스러움일 것이다. 텅 빔 혹은 고독 그 자체!
특히 박상수는 황인찬에게서 무위적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차원을 발견한다.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무엇을 해야 할 순간에 무엇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키고 시야를 확장하며 대상을 보존한다.”(116). 정지의 차원이다. 모든 것이 중단되고 단절된다. 주체와 대상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한다.’(116) 박상수는 이러한 아무 것도 하지 않음, 무개입, 무위를 통해 ‘공백을 만들어 내는 순백의 사유이자 감각’을 황인찬에게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이라고 평한다.
박상수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황인찬이라는 시적 주체와 시적 세계를 어렴풋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황인찬은 자신을 스스로에게서도 격리시키고 타자에게세도 격리시킨다. 그의 시적 주체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비동시적 세계를 같이 살고 있는 자이기도 하다.”(120) “비극적이지만 우리는 황인찬을 이렇게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는 인간의 옷을 입은 채로 이 속세를 살아가는 몇 안되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수도자이자 마법사이자 백색의 기사이다.”(127)
신비, 전도사, 성스러움, 신성, 수도자 등의 현란한 용어로 찬미하는 박상수의 평가를 읽으면서 그가 과연 황인찬을 제대로 읽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황인찬의 고립과 고독과 거리두기에서 발생하는 공백의 측면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2-2.
그의 둘째 시집 <희지의 세계>에 대한 작품해설(평론)을 한 시인 장이지는 황인찬의 세계를 ‘폐쇄회로의 시니시즘’이라는 제목으로 그려낸다. Cynicism은 일종의 냉소주의로서, 현세를 부정하고 선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위선이라고 보는 시선을 가진다. 시니시즘이라는 단어로 황인찬의 모든 것을 축약하기를 곤란하지만 그의 시에는 그러한 정서가 다분하다. 시니시즘의 뿌리는 주전 4-5세기 그리스의 키니코스(Kinikos) 학파로서 견유학파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이들은 사회적 관습이나 사상, 이론적 학문, 예술에 대해서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스토아철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황인찬의 시의 대부분의 소재는 일상과 관련된 것들이고 그 스토리들도 일상적이다. 즉 그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소재를 발굴하거나 탈일상적 의미의 세계를 탐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상은 매우 건조하고 차갑고 먼 거리에 있는 듯한 무대이자 고요한 우주처럼 보인다. 그의 시를 읽은 사람은 관조적 혹은 냉소적 시선에 포착되는 일상과 존재의 차가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장이지는 황인찬이 불가지적인 것에 대해 집착한다고 본다(희지, 138). 세계의 불가지성에 대해 거듭 언급하는 그의 경향은 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장이지는 그 이면에 깔린 정서는 세계화 시대에 한국사회의 만연한 ‘불안, 자기 실현에 대한 혐오’(139)라고 파악한다. 장이지에 의하면 황인찬은 은둔형 외톨이이다. 이를 ‘히키코모리적 세계’(138)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황인찬의 실존과 심리적 구조를 상당히 드러내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시집을 읽으면 거듭 거듭 ‘나는 없다’, ‘나는 사라진다’, ‘아무도 없다’ 등의 표현이 반복된다. 나의 부재, 주체의 사라짐, 텅빈 공백, 냉혹한 거리두기는 그간 ‘자아’ 혹은 ‘나’, 그리고 ‘실체’와 ‘의미’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한 한국문학사와의 대결이자 이에 대한 경멸이기도 하다. 황인찬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폐쇄적 언어의 발화는 그의 폐쇄회로적 세계를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젊은 세대의 실존과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2-3. 채널예스 인터뷰(2016. 1. 14, ‘시인 황인찬, 응시의 감각과 정직한 조율사’ 인용)
문득 일전 김경주 시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젊은 시인들의 시를 쓰는 태도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이런 이야길 들려줬다. 요즘 젊은 시인들은 시를 하나의 유희 대상으로, 오타쿠적 취미의 아이템처럼 대한다는 것. 거기에 엄숙함이나 비장함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다고. 그의 말을 전적으로 황인찬 시인에게 적용시키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황인찬 시인에게도 ‘오타쿠적’인 어떤 정신의 태도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편집증(paranoia)의 세계다. 편집증이 시적 진술의 전략으로 채택될 때 그 진술에 균형과 질서를 도모하려는 외부의 욕망은 시적 자아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그것은 그가 두 번째 시집에 붙인 제목 ‘희지의 세계’가 그가 즐겨 읽었다는 만화 제목 ‘미지의 세계’의 착각에서 온 것임을 아무렇지 않게 자인하는 것처럼,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즉자적으로 정물화하는 과정에 확인된다. 그가 편견이나 억압 없이 즉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상은 아무런 의미 값이나 서열이 매겨지지 않는다.
황인찬은 비교적 최근에 행한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메시지를 던지는 건 의미가 없어요. 아주 일시적이고, 심지어는 내가 무슨 메시지를 갖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몰라요. 그런 건 다 착각이에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말이, 오히려 그 말을 선택하는 순간 훼손돼요. 손상되고 아무것도 아닌 덜 떨어진 종류의 말로 메시지가 갈 수밖에 없어요. 말하자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하고 짚어서 전달하는 게 아니고, 그물을 더 넓게 펼쳐서 던지는 거예요. 그러는 편이 원래 내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 생각, 진정성을 덜 훼손시켜요.”
메시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구조화하지 않고 더 넓게 펼쳐서 그대로 던지는 것, 그것은 마치 아이가 처음 배운 말을 혀를 움직여 공중에 던지는 것처럼 백치적으로 순결한 행위다. 그 순결한 행위에 풍속과 정직하게 호흡하는 즉자적 편집증이 입혀질 때, 황인찬의 새로운 문법이 탄생하는 것은 아닐는지.